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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출생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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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관련 활동 = 외교 |
+ | |주요 업적 = 6국의 재상 | ||
+ | |관련 고사성어 = 추자고(錐刺股), 두현량(頭懸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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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 ===말년=== | ||
− | 소진은 오명을 안고 죽었다. 소진은 연나라에서 연역왕의 어머니와 사통했다고 한다. 그런데 역왕은 이를 알면서도 소진을 우대했다고 한다. 물론 소진의 이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종도 실패한 마당에 소진을 헐뜯는 이들은 넘쳤다. 소진은 연나라에서 스스로 지위가 불안하다고 느껴 제나라로 가서 연을 위해 일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소진은 일부러 연에 죄를 지은 것처럼 꾸며서 제로 가니 선왕은 그를 객경으로 맞았다고 한다. 마침 선왕이 죽자 소진은 민왕에게 장례를 성대히 치르라하고 궁을 높이도록 부추기는 등 제나라의 힘을 뺐다고 한다. 이는 연을 위한 행동이었다. 물론 제나라에서는 소진을 시기하는 대부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소진은 자객의 칼에 맞고 말았다. 중상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는데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소진은 죽기 전에 제민왕에게 요청하길, "신이 죽으면 거열형에 처하여 시장에 조리 돌리고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소진이 연을 위해 제나라에서 난리를 획책했다.' 이리하면 저를 찌른 자를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소진이 죽자 거열형에 처하니 소진을 찌른 자가 나왔고, 그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 + | 소진은 오명을 안고 죽었다. 소진은 연나라에서 연역왕의 어머니와 사통했다고 한다. 그런데 역왕은 이를 알면서도 소진을 우대했다고 한다. 물론 소진의 이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종도 실패한 마당에 소진을 헐뜯는 이들은 넘쳤다. 소진은 연나라에서 스스로 지위가 불안하다고 느껴 제나라로 가서 연을 위해 일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소진은 일부러 연에 죄를 지은 것처럼 꾸며서 제로 가니 선왕은 그를 객경으로 맞았다고 한다. 마침 선왕이 죽자 소진은 민왕에게 장례를 성대히 치르라하고 궁을 높이도록 부추기는 등 제나라의 힘을 뺐다고 한다. 이는 연을 위한 행동이었다. 물론 제나라에서는 소진을 시기하는 대부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소진은 자객의 칼에 맞고 말았다. 중상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는데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소진은 죽기 전에 제민왕에게 요청하길, "신이 죽으면 거열형에 처하여 시장에 조리 돌리고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소진이 연을 위해 제나라에서 난리를 획책했다.' 이리하면 저를 찌른 자를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소진이 죽자 거열형에 처하니 소진을 찌른 자가 나왔고, 그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
==관련일화== | ==관련일화== | ||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 ||
소진은 합종맹약의 우두머리가 되어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된 이후, 조나라 왕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러 가는 길에 낙양을 지나게 되었다. 기마와 짐을 실은 수레를 비롯하여 제후들마다 소진을 모실 사자를 보내 주어 전송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주나라 현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두려워 소진이 지나가는 길을 쓸도록 하고 교외까지 사람을 보내 위로하게 하였다. 소진의 형제와 아내와 형수가 곁눈으로 볼 뿐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식사를 하였다. 소진이 웃으면서 그의 형수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전에는 오만하더니 지금은 공손합니까?" 형수는 몸을 굽혀 기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사죄하며 말했다. "계자(소진)의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매우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 소진은 합종맹약의 우두머리가 되어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된 이후, 조나라 왕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러 가는 길에 낙양을 지나게 되었다. 기마와 짐을 실은 수레를 비롯하여 제후들마다 소진을 모실 사자를 보내 주어 전송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주나라 현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두려워 소진이 지나가는 길을 쓸도록 하고 교외까지 사람을 보내 위로하게 하였다. 소진의 형제와 아내와 형수가 곁눈으로 볼 뿐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식사를 하였다. 소진이 웃으면서 그의 형수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전에는 오만하더니 지금은 공손합니까?" 형수는 몸을 굽혀 기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사죄하며 말했다. "계자(소진)의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매우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 ||
− | + | {{인용문|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고 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뭇사람들임에랴!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 |
또한, 당시 소진은 천 금을 풀어 일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에 소진은 연나라로 갈 때 다른 사람에게 백 전을 빌려 노자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부귀해지자 백 금으로 갚았으며, 전날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보답하였다. 그 하인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 보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소진 앞으로 나와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니 소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 또한, 당시 소진은 천 금을 풀어 일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에 소진은 연나라로 갈 때 다른 사람에게 백 전을 빌려 노자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부귀해지자 백 금으로 갚았으며, 전날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보답하였다. 그 하인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 보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소진 앞으로 나와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니 소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 ||
− | + | {{인용문|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았다. 너는 나를 따라 연나라로 갔을 때 역수가에서 여러 차례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였다. 그때 나는 매우 곤란한 처지라서 너를 깊이 원망했다. 그래서 너에 대한 보답을 맨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너에게도 이제 보답하겠다.}} | |
===소진과 장의=== | ===소진과 장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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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책, 『사기 명문장 100구』, 눌민(2015) | *공손책, 『사기 명문장 100구』, 눌민(2015) | ||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8-합종연횡』, 역사의아침(2015) |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8-합종연횡』, 역사의아침(2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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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인물]] |
2017년 6월 27일 (화) 20:39 기준 최신판
소진[蘇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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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소진(蘇秦)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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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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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활동 | 외교 |
목차
개요
소진(蘇秦, ? ~ ?) 동주 낙양 출신의 외교 전략가이다. 자는 계자(季子)다. 연나라를 시작으로 6국을 연합하고 진나라를 고립시켜 세력을 키우자는 합종책을 주장, 성공시켜 진秦나라 병사가 15년 동안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한다. 기원전 318년 6군 연합군을 이끌고 진의 함곡관을 공격하지만 패하자, 처음에 출사한 연으로 돌아가 연-제 관계를 담당한다. 연횡책을 펼친 장의와 함께 거론되며 주로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334년부터 기원전 32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소씨 형제는 다섯 명으로, 소진, 소대蘇代, 소려蘇厲, 소벽, 소곡이다.
생애
초기
소진은 낙양 사람으로 일찍이 제나라에 가서 귀곡 선생에게 공부하며 유세술을 배웠다. 그 후 몇 년 동안이나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뜻을 펴고자 했지만, 그를 기용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이리저리 떠도는 삶을 살았다. 몸은 마르고 얼굴은 그을러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아내는 본체만체였으며 형수는 밥상 차려 줄 생각도 하지 않았고 부모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소진은 크게 탄식하였다. "아내는 남편으로 알지 않고 형수는 시동생으로 보지 않으며 부모도 나를 모르는 체하는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지위와 재산을 우습게 생각할 일이 아니구나! 학문을 해도 입신양명을 하지 못한다면, 어찌 대장부라고 말할 수 있으리오." 그 후 소진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하기 위하여 자기가 갖고 있는 책을 모두 꺼내 보다가 강태공이 쓴 병법서인 『음부경陰符經』이라는 책을 찾아내고, 그 책을 완전히 독파하기로 마음먹었다. 필사적으로 공부한 끝에 그는 1년 만에 췌마술(독심술의 일종)을 통달하게 되었다. 이 비법으로 군주들을 설득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 소진은 여정을 떠난다.
합종책
합종책은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한·위·조·초·연·제 6국이 정치·군사동맹을 맺는 외교 전략을 말한다. 소진이 합종을 성사시키기 위해 시행한 유세 전략은 대략 이러하다. 각 나라의 실정에 따라 현 상황을 정리해 밝힌 뒤, 군주를 자극해 진秦에 대항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합종책 문서에 정리되어있으므로, 사기에 근거해 소진의 유명한 웅변과 관련 문구를 살펴보고자 한다.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항문은 되지 마라
소진은 합종책을 펼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유세하다가 한에 도착했다. 한은 전국 7웅 가운데 비교적 약소국이면서도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어 늘 주변국들의 침략에 시달렸다. 한선왕은 강한 진과 손을 잡아 전쟁을 피하려 했다. 소진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선왕을 설득했다. "제가 듣기로 속담에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항문은 되지 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서쪽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진을 섬기는 것이 소의 항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진나라를 섬기게 된다면 진의 요구는 끝이 없어 국한된 땅을 가지고 있는 형세에 화만 초래할 뿐입니다. 이래서는 싸움도 못 해보고 땅만 남의 것이 되니, 현명하신 대왕께서 용감한 군사를 갖고 계신데도 소의 항문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을, 신은 대왕을 위해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한왕은 분개하며 결국 합종에 찬성했다.
소매를 들면 천막이 되고, 땀을 털면 비가 내린다
소진이 동쪽으로 가서 제나라의 선왕에게 유세하기를, "임치의 도로는 변잡하여 지나가는 수레들의 바퀴통이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치며, 옷깃이 이어지면 장막이 되고 소매를 들면 천막이 되며, 땀을 털면 비가 내립니다. 집집마다 번창하고 모든 이가 풍족하여 뜻이 매우 높습니다. 대왕의 현명하심과 제나라의 강대함은 천하에 대항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려 하시니, 신은 대왕을 위해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제나라는 동쪽의 강국으로 관중 이래로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가 많았다. 소진은 수비에 유리한 제나라의 험난한 지형을 언급한 뒤 정예 병사와 풍족한 물자를 거론하며 수도 임치의 번화한 거리를 이와 같이 묘사한 것이다. 계속해서 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여 끝내 제왕의 설득을 얻어낸다.
잠자리에 들어도 편치 않고,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한다
합종을 완수하기 위해 소진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초나라였다. 초나라는 남방의 강국이었으나 초나라의 위왕은 진나라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초왕이 말하길, "과인이 홀로 생각해보니 초나라가 진나라에 대항한다 해도 승산이 없소. 안으로 뭇 신하와 계책을 논의해보았자 믿을 만한 것이 없소. 과인은 잠자리에 들어도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없고, 밥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르며,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깃발처럼 도무지 편하게 붙어 있을 곳이 없소." 이에 소진은 위왕을 설득하기 위해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라와 같이 사납고 믿을 수 없는 나라이다, 초나라가 강해지면 진나라는 약해지고, 진나라가 강해지면 초나라는 약해지니 둘은 양립할 수 없다"와 같은 논리로 위왕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말년
소진은 오명을 안고 죽었다. 소진은 연나라에서 연역왕의 어머니와 사통했다고 한다. 그런데 역왕은 이를 알면서도 소진을 우대했다고 한다. 물론 소진의 이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종도 실패한 마당에 소진을 헐뜯는 이들은 넘쳤다. 소진은 연나라에서 스스로 지위가 불안하다고 느껴 제나라로 가서 연을 위해 일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소진은 일부러 연에 죄를 지은 것처럼 꾸며서 제로 가니 선왕은 그를 객경으로 맞았다고 한다. 마침 선왕이 죽자 소진은 민왕에게 장례를 성대히 치르라하고 궁을 높이도록 부추기는 등 제나라의 힘을 뺐다고 한다. 이는 연을 위한 행동이었다. 물론 제나라에서는 소진을 시기하는 대부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소진은 자객의 칼에 맞고 말았다. 중상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았는데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소진은 죽기 전에 제민왕에게 요청하길, "신이 죽으면 거열형에 처하여 시장에 조리 돌리고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소진이 연을 위해 제나라에서 난리를 획책했다.' 이리하면 저를 찌른 자를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소진이 죽자 거열형에 처하니 소진을 찌른 자가 나왔고, 그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관련일화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소진은 합종맹약의 우두머리가 되어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된 이후, 조나라 왕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러 가는 길에 낙양을 지나게 되었다. 기마와 짐을 실은 수레를 비롯하여 제후들마다 소진을 모실 사자를 보내 주어 전송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주나라 현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두려워 소진이 지나가는 길을 쓸도록 하고 교외까지 사람을 보내 위로하게 하였다. 소진의 형제와 아내와 형수가 곁눈으로 볼 뿐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식사를 하였다. 소진이 웃으면서 그의 형수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전에는 오만하더니 지금은 공손합니까?" 형수는 몸을 굽혀 기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사죄하며 말했다. "계자(소진)의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매우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고 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뭇사람들임에랴!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
또한, 당시 소진은 천 금을 풀어 일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에 소진은 연나라로 갈 때 다른 사람에게 백 전을 빌려 노자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부귀해지자 백 금으로 갚았으며, 전날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보답하였다. 그 하인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 보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소진 앞으로 나와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니 소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았다. 너는 나를 따라 연나라로 갔을 때 역수가에서 여러 차례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였다. 그때 나는 매우 곤란한 처지라서 너를 깊이 원망했다. 그래서 너에 대한 보답을 맨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너에게도 이제 보답하겠다.
”
소진과 장의
전국시대의 웅변가를 꼽으라면 소진과 함께 거론되는 장의張儀는 연횡책을 내세웠다. 소진과 장의는 귀곡자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였다. 소진은 늘 자신이 장의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소진이 성곡한 뒤에 장의는 소진을 찾아갔으나 소진은 장의가 작은 성공에 안주할 것을 염려해 일부러 그를 냉담하게 대했다. 소진의 태도에 분노한 장의는 소진의 합종책을 깨기 위해 진秦으로 갔다. 소진은 장의가 떠날 때 일부러 사람을 붙여 장의가 진에서 중용될 때까지 뒤를 봐주었다. 이후 장의는 진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중용되었다. 장의의 뒤를 봐주던 사람은 그제야 장의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었고, 친구의 깊은 뜻을 깨달은 장의는 소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합종책을 깨지 않았다.
인물평가
- 사기에 기록되길, 소진의 형제 세 사람은 모두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이름을 드날렸으며, 그들의 술수는 권모와 변화에 뛰어난 것이었다. 소진이 제나라에서 반간의 혐의를 받고 죽으니 천하 사람은 모두 그를 비웃고 그 술수 배우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세상에 퍼진 소진의 사적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많은데, 그것은 시대를 달리하는 사적을 모두 소진에게 끌어다 덧붙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진이 보통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 여섯 나라를 연합시켜 합종을 맺게 한 것은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시대 순서에 따라 그의 경력과 사적을 서술하여 유독 그만이 나쁜 평가를 듣지 않도록 하였다.
-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오나라 인사들과 조정에서 설전을 벌일 때 오나라 인사 보즐步騭이 제갈량諸葛亮에게 묻길, “공명, 그대는 소진과 장의의 세 치 혀를 본받아 우리 오를 설득하려 온 게 아니오?” 이에 제갈량이 대답하길, “보 선생께서는 소진과 장의를 변사로 여기시지만, 그들이 호걸인 것을 모르시는구려. 소진은 여섯 나라의 인수를 찼고 장의는 진에서 두 번이나 재상을 지냈소. 이들은 모두 나라를 바로잡고 지탱할 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지, 강한 자를 두려워하고 약한 자를 능멸하거나 칼을 무서워하고 검을 피하는 사람들과 비할 이가 아니었소.” 라고 말한다. 제갈량의 말처럼 소진은 업적을 남긴 인재였다. 약체인 연을 포함한 6국은 소진의 덕을 입어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사마천,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2007)
- 공손책, 『사기 명문장 100구』, 눌민(2015)
-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8-합종연횡』, 역사의아침(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