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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혁명가이자 민주주의자로, 1911년 신해혁명시기 | + | 중국의 혁명가이자 민주주의자로, 1911년 신해혁명시기 임시 대총통에 추대되었으나 이후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넘기고 물러난다. 이후 1917년 광동군정부를 만들어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8년 상해에서 중국 국민당을 만들어 1924년 북벌군을 일으켰으나 다음해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공화제의 창시자로, 국민정부시기에는 국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
==생애== | ==생애== | ||
− | + | 1866년 광둥에서 태어난 그는 홍콩과 하와이에서 서양의학 등의 신식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치료해야할 민족의 병을 본 그는 1894년 북경으로 올라가 정치혁신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그는 흥중회라는 단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후 중국과 해외에서는 각종의 혁명단체가 생기는데, 광저우 혁명의 실패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혁명활동을 계속해나가던 쑨원은 혁명운동의 구심점이 될만한 조직을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동경에서 중국동맹회를 조직하였고 조직의 대표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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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동맹회의 기관지로 민보를 발간하였는데 민보의 창간호에서 쑨원이 혁명의 기본사상으로 삼민주의를 제시하였다. 삼민주의란 민족주의, 민권주의 그리고 민생주의를 통틀어 나타내는 개념이다. 반외세적 성격과 중국의 자주주권확립, 전체정치 즉 왕권을 혁파하고 국민대표의 운영에 의한 정치체제인 공화정의 수립, 그리고 평균지권과 자본절제를 축으로 경제적 평등 추구, 이 세가지를 목표로 삼았다. 당시 혁명당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가 무창에서 신군 내부로 침투하여 군사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고, 봉기 준비과정에서 계획이 발각되어 예정보다 빠르게 1911년 10월 10일 우창봉기를 일으켰다. 그 여파는 곧 전국으로 파급되어 절대적일 것만 같았던 청조의 권위를 흔들었으며 신해혁명의 성공과 최초 공화제의 수립, 쑨원의 임시대총통 즉위라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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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혁명의 길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존재하는 청조를 타도하기 위해 그는 당시 청조의 군사를 이끌던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의 자리를 위임할 것을 가지고 협상을 하였고, 그 결과 청조의 몰락 이후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총통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취지와는 달리 위안스카이의 제정복권 시도는 중국의 앞길을 막는 듯 했다. 이에 따라 쑨원은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하였고 1919년에는 기존의 중화혁명당을 개편하여 중국 국민당을 창설하였다. 이후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혁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간암으로 투병하다가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하게 되고 이후에도 완전한 통합을 이루진 못했다. 쑨원은 마지막 순간에도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지들 분발하라."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실로 일생을 혁명가의 인생으로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현재도 그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으며, 중국의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 | ||
==주요 업적== | ==주요 업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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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 |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 | ||
+ |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는 1905년 8월 20일, 쑨원(孫文)이 일본 도쿄에서 조직한 저항운동 비밀결사단체이다. 동맹회는 한족(漢族)의 애국지사, 공화주의자,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공동의 목표로 함께 뭉쳐, 이제까지 있던 비슷한 반청(反淸), 반외세 단체들인 흥중회(興中會), 화흥회(華興會) 등의 단체를 동맹회로 합쳐 조직했다. 이 단체의 초대 회장으로 쑨원이 추대되었고, 황흥(黃興), 쑹자오런(宋敎仁), 왕징웨이(汪精衛, 왕조명) 등의 인물들이 중국동맹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1911년 청조(淸朝)가 타도되고 중화민국이 설립되자 중국혁명동맹회는 이듬해 8월 중국 국민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국내외에 설치된 9개의 지부와 그 지부들이 여러개의 성들을 관리하는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驅除韃虜(만주족 축출), 恢復中華(중화 회복), 創立民國(공화국 창립), 平均地權(토지 소유의 균등)이라는 4가지 강령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신해혁명 이전에는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활동을 진행해왔으며, 이후 베이징에서의 국민당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조직이다. | ||
===임시대총통 취임=== | ===임시대총통 취임=== | ||
신해혁명이 있었던 1911년 12월 29일 난징에서 진행된 각성대표회의를 통해, 쑨원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다음해 1월 1일 상하이로부터 난징으로 간 쑨원은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함으로써 임시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지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시아최초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 신해혁명이 있었던 1911년 12월 29일 난징에서 진행된 각성대표회의를 통해, 쑨원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다음해 1월 1일 상하이로부터 난징으로 간 쑨원은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함으로써 임시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지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시아최초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 ||
− | 하지만 쑨원의 초기 목적은 아직 미완성 단계에 그쳐있었다. 비록 공화정을 통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쑨원이 타도하려고 했던 청왕조는 아직 그 세력을 유지하고 여전히 그자리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조를 무너뜨리기에는 부족했던 임시정부 세력을 이끌던 쑨원은 결국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 + | 하지만 쑨원의 초기 목적은 아직 미완성 단계에 그쳐있었다. 비록 공화정을 통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쑨원이 타도하려고 했던 청왕조는 아직 그 세력을 유지하고 여전히 그자리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조를 무너뜨리기에는 부족했던 임시정부 세력을 이끌던 쑨원은 결국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와의 협상과 연합이라는 선택을 하게된다. |
− | 쑨원은 | + |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그들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대총통의 지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위안 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로 하여금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191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
− | 혁명정부는 청조와 | + | 혁명정부는 청조와 위안스카이 사이에 퇴위협약이 진행되는 동안 위안 스카이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3월, 대통령중심제였던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수정하여 내각 중심제를 기본 틀로 한 '임시약법'을 제정 및 발표하였다. 그리고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스카이에게 1912년 4월에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다. |
===중국 국민당=== | ===중국 국민당=== | ||
+ | 1912년 7월에서 8월 사이, 중국동맹회가 국민당으로 개편된다. 이 때 쑨원은 국민당 이사장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다음 해에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대리 이사장이었던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민당과 의회를 해산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쑨원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비밀결사인 중화혁명당을 조직하게 된다. 그 후 중화혁명당은 1919년 중국 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고, 중국 국민당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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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년 중국 국민당은 광저우에서 열린 1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쑨원의 삼민주의를 포함한 정치 이념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한다. 당시 중국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공산당계 인물들도 포함하는 연합정국의 형세였다. 곧 이 전국 대표회의는 제 1차 국공합작의 시발점이 된다. 하지만 1925년에 쑨원이 사망하게 되고, 뒤이어 장제스가 중국 국민당을 이끌어가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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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벌을 주장한 장제스는 북진 도중에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반공 숙청을 감행한다. 이 때문에 제 1차 국공합작은 끝나게 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시작된다. 이 후 중일전쟁 때문에 다시 제2차 국공합작을 하게 되지만, 제2차 국공합작 이후 다시 시작된 내전에서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패하게 된다. 그 후 중국국민당은 타이베이 시로 옮겨졌고, 일부는 본토에 남아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결성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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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균지권(혹은 지권평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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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균지권이란 공산주의개념을 기초로 쑨원이 내세운 토지정책이다. 국가의 발전과 동시에 지가의 변동은 불로소득으로 인한 빈부격차 등 사회에 여러 폐단을 야기하였다. 민생주의의 목적은 국민들에게 균등한 자본의 환경 제공하는 것이므로 대지주가 없는 현재 중국의 토지 제도의 기반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평균지권에 의하면 땅의 소유자가 시가를 지정하여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는 보고된 가격에 대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다. 또한 이후 토지의 가격 상승분에 대해서는 공유화 시키는 것이다. 가격 상승분은 정부에서 소유하며 그로 인해 벌어들인 소득을 인민의 전기, 수도비용 혹은 관료의 급여, 도시개발 산업 등에 사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외 인공적으로 개량된 땅이나 건축물 등에 대해서는 평균지권의 개념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 ||
+ | ===자본절제=== | ||
+ | 부유하고 산업 부문에서 과잉생산 상태의 외국과 비교하여 당시 중국은 빈곤하고 산업조차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쑨원은 국가의 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세 가지 산업분야의 발전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교통산업 혹은 철도나 운하 등의 대규모 건설을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하며 이어서 두 번째로는 중국에 매장되어 있는 풍부한 광산들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공업의 개발로, 노동자 인구는 많지만 서양의 기계 위주 산업방식과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에 공업을 진흥시켜 생산을 기계화 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산업개발은 개인이나 기업이 아닌 국가의 힘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는 개인자본의 발달로 인한 계급간의 불평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
==평가== | ==평가== | ||
+ | 개인적 부귀나 영화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중국 민족의 안위와 국가의 번영을 위해 평생을 중국 근대화 혁명에 몸 바쳐 살아온 인물로 중국혁명의 아버지이자 국부로 평가 받는다. | ||
+ | 쑨원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신해혁명에서 과장된 그의 역할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계획한 혁명마다 성공하지 못하는 '실패한 혁명가'라는 평가도 있다. | ||
+ | 더불어 지식인으로서의 이상은 출중하였으나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다양한 비판점 그리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책략을 지닌 인물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 ||
− | == 인물 관련 | + | == 인물 관련 장소 == |
===중산기념당=== | ===중산기념당=== | ||
− | === === | + | 중국 광저우시에 있는 건축물로, 쑨원의 서거 이후 1929년 착공을 시작하여 1931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쑨원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 건물은 현재 광저우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으로 꼽히고 있으며, 광저우 시의 공연이나 대규모 집회 등이 열리는 장소이다. 형태는 8각 형태의 궁전양식으로 현재는 중국 공산당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
+ | |||
+ | ===중산대학(中山大学)=== | ||
+ | 쑨원이 1924년에 설립한 광저우에 있는 중국 교육부 산하 대학이다. 설립당시 이름은 국립광둥대학이였으나 1926년 쑨원이 사망한 이후 쑨원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중산대학으로 개명하였다. | ||
+ | 중산대학은 예로부터 중국 화남지역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며 중국 전국대학랭킹 10위의 대학이다. (2016년 기준) | ||
+ | 광저우 북부, 광저우 남부, 광저우 동부와 주하이 등 4개의 캠퍼스를 운영 중이며, 문과, 이과, 의과, 공과, 법과, 농과, 교육과 등 모두 7개 학부가 있으며 학생 수는 약 5만 명이다. | ||
+ | |||
+ | ==참고자료== | ||
+ | 1) 펄벅 저, 은하랑 옮김,『청년쑨원』, 길산, 2011 | ||
+ | |||
+ | 2) 위키피디아 한국, 쑨원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91%A8%EC%9B%90 | ||
+ | |||
+ | 3) 쑨원 저, 김승일 역, 2000, 「삼민주의」, 범우사 |
2018년 6월 14일 (목) 00:11 기준 최신판
쑨원[ 孫文 ] | |
---|---|
출생 |
1866.11.12 광둥 성 중산 |
사망 |
1925.3.12 중화민국 베이징 |
민족 | 한족(漢族) |
관련 활동 | 혁명가, 운동가 |
목차
개요
중국의 혁명가이자 민주주의자로, 1911년 신해혁명시기 임시 대총통에 추대되었으나 이후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넘기고 물러난다. 이후 1917년 광동군정부를 만들어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8년 상해에서 중국 국민당을 만들어 1924년 북벌군을 일으켰으나 다음해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공화제의 창시자로, 국민정부시기에는 국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생애
1866년 광둥에서 태어난 그는 홍콩과 하와이에서 서양의학 등의 신식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치료해야할 민족의 병을 본 그는 1894년 북경으로 올라가 정치혁신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그는 흥중회라는 단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후 중국과 해외에서는 각종의 혁명단체가 생기는데, 광저우 혁명의 실패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혁명활동을 계속해나가던 쑨원은 혁명운동의 구심점이 될만한 조직을 결성하기로 마음먹고 동경에서 중국동맹회를 조직하였고 조직의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동맹회의 기관지로 민보를 발간하였는데 민보의 창간호에서 쑨원이 혁명의 기본사상으로 삼민주의를 제시하였다. 삼민주의란 민족주의, 민권주의 그리고 민생주의를 통틀어 나타내는 개념이다. 반외세적 성격과 중국의 자주주권확립, 전체정치 즉 왕권을 혁파하고 국민대표의 운영에 의한 정치체제인 공화정의 수립, 그리고 평균지권과 자본절제를 축으로 경제적 평등 추구, 이 세가지를 목표로 삼았다. 당시 혁명당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가 무창에서 신군 내부로 침투하여 군사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고, 봉기 준비과정에서 계획이 발각되어 예정보다 빠르게 1911년 10월 10일 우창봉기를 일으켰다. 그 여파는 곧 전국으로 파급되어 절대적일 것만 같았던 청조의 권위를 흔들었으며 신해혁명의 성공과 최초 공화제의 수립, 쑨원의 임시대총통 즉위라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혁명의 길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존재하는 청조를 타도하기 위해 그는 당시 청조의 군사를 이끌던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의 자리를 위임할 것을 가지고 협상을 하였고, 그 결과 청조의 몰락 이후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총통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취지와는 달리 위안스카이의 제정복권 시도는 중국의 앞길을 막는 듯 했다. 이에 따라 쑨원은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하였고 1919년에는 기존의 중화혁명당을 개편하여 중국 국민당을 창설하였다. 이후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혁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간암으로 투병하다가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하게 되고 이후에도 완전한 통합을 이루진 못했다. 쑨원은 마지막 순간에도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지들 분발하라."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실로 일생을 혁명가의 인생으로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현재도 그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으며, 중국의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
주요 업적
흥중회(興中會)
1894년 이홍장에게 쓴 개혁적 성격을 띤 편지에 반응이 없자 쑨원은 같은 해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한다. 청나라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등의 계속해서 무능함을 보였고 이에 쑨원을 중심으로 한 흥증회는 '오직 혁명만이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 아래 1895년 10월 광저우 무장봉기를 계획한다. 그러나 봉기는 내부자의 밀고로 허무하게 무산되게 되었고, 쑨원은 신변보호를 위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생겨난 국민당의 전신이기도 하다.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는 1905년 8월 20일, 쑨원(孫文)이 일본 도쿄에서 조직한 저항운동 비밀결사단체이다. 동맹회는 한족(漢族)의 애국지사, 공화주의자,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공동의 목표로 함께 뭉쳐, 이제까지 있던 비슷한 반청(反淸), 반외세 단체들인 흥중회(興中會), 화흥회(華興會) 등의 단체를 동맹회로 합쳐 조직했다. 이 단체의 초대 회장으로 쑨원이 추대되었고, 황흥(黃興), 쑹자오런(宋敎仁), 왕징웨이(汪精衛, 왕조명) 등의 인물들이 중국동맹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1911년 청조(淸朝)가 타도되고 중화민국이 설립되자 중국혁명동맹회는 이듬해 8월 중국 국민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국내외에 설치된 9개의 지부와 그 지부들이 여러개의 성들을 관리하는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驅除韃虜(만주족 축출), 恢復中華(중화 회복), 創立民國(공화국 창립), 平均地權(토지 소유의 균등)이라는 4가지 강령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신해혁명 이전에는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활동을 진행해왔으며, 이후 베이징에서의 국민당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조직이다.
임시대총통 취임
신해혁명이 있었던 1911년 12월 29일 난징에서 진행된 각성대표회의를 통해, 쑨원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다음해 1월 1일 상하이로부터 난징으로 간 쑨원은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함으로써 임시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지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시아최초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쑨원의 초기 목적은 아직 미완성 단계에 그쳐있었다. 비록 공화정을 통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쑨원이 타도하려고 했던 청왕조는 아직 그 세력을 유지하고 여전히 그자리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조를 무너뜨리기에는 부족했던 임시정부 세력을 이끌던 쑨원은 결국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와의 협상과 연합이라는 선택을 하게된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그들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대총통의 지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위안 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로 하여금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191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명정부는 청조와 위안스카이 사이에 퇴위협약이 진행되는 동안 위안 스카이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3월, 대통령중심제였던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수정하여 내각 중심제를 기본 틀로 한 '임시약법'을 제정 및 발표하였다. 그리고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스카이에게 1912년 4월에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다.
중국 국민당
1912년 7월에서 8월 사이, 중국동맹회가 국민당으로 개편된다. 이 때 쑨원은 국민당 이사장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다음 해에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대리 이사장이었던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민당과 의회를 해산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쑨원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비밀결사인 중화혁명당을 조직하게 된다. 그 후 중화혁명당은 1919년 중국 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고, 중국 국민당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1924년 중국 국민당은 광저우에서 열린 1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쑨원의 삼민주의를 포함한 정치 이념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한다. 당시 중국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공산당계 인물들도 포함하는 연합정국의 형세였다. 곧 이 전국 대표회의는 제 1차 국공합작의 시발점이 된다. 하지만 1925년에 쑨원이 사망하게 되고, 뒤이어 장제스가 중국 국민당을 이끌어가게 된다.
북벌을 주장한 장제스는 북진 도중에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반공 숙청을 감행한다. 이 때문에 제 1차 국공합작은 끝나게 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시작된다. 이 후 중일전쟁 때문에 다시 제2차 국공합작을 하게 되지만, 제2차 국공합작 이후 다시 시작된 내전에서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패하게 된다. 그 후 중국국민당은 타이베이 시로 옮겨졌고, 일부는 본토에 남아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결성한다.
평균지권(혹은 지권평균)
평균지권이란 공산주의개념을 기초로 쑨원이 내세운 토지정책이다. 국가의 발전과 동시에 지가의 변동은 불로소득으로 인한 빈부격차 등 사회에 여러 폐단을 야기하였다. 민생주의의 목적은 국민들에게 균등한 자본의 환경 제공하는 것이므로 대지주가 없는 현재 중국의 토지 제도의 기반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평균지권에 의하면 땅의 소유자가 시가를 지정하여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는 보고된 가격에 대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다. 또한 이후 토지의 가격 상승분에 대해서는 공유화 시키는 것이다. 가격 상승분은 정부에서 소유하며 그로 인해 벌어들인 소득을 인민의 전기, 수도비용 혹은 관료의 급여, 도시개발 산업 등에 사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외 인공적으로 개량된 땅이나 건축물 등에 대해서는 평균지권의 개념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자본절제
부유하고 산업 부문에서 과잉생산 상태의 외국과 비교하여 당시 중국은 빈곤하고 산업조차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쑨원은 국가의 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세 가지 산업분야의 발전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교통산업 혹은 철도나 운하 등의 대규모 건설을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하며 이어서 두 번째로는 중국에 매장되어 있는 풍부한 광산들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공업의 개발로, 노동자 인구는 많지만 서양의 기계 위주 산업방식과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에 공업을 진흥시켜 생산을 기계화 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산업개발은 개인이나 기업이 아닌 국가의 힘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는 개인자본의 발달로 인한 계급간의 불평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평가
개인적 부귀나 영화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중국 민족의 안위와 국가의 번영을 위해 평생을 중국 근대화 혁명에 몸 바쳐 살아온 인물로 중국혁명의 아버지이자 국부로 평가 받는다.
쑨원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신해혁명에서 과장된 그의 역할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계획한 혁명마다 성공하지 못하는 '실패한 혁명가'라는 평가도 있다. 더불어 지식인으로서의 이상은 출중하였으나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다양한 비판점 그리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책략을 지닌 인물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인물 관련 장소
중산기념당
중국 광저우시에 있는 건축물로, 쑨원의 서거 이후 1929년 착공을 시작하여 1931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쑨원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 건물은 현재 광저우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으로 꼽히고 있으며, 광저우 시의 공연이나 대규모 집회 등이 열리는 장소이다. 형태는 8각 형태의 궁전양식으로 현재는 중국 공산당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중산대학(中山大学)
쑨원이 1924년에 설립한 광저우에 있는 중국 교육부 산하 대학이다. 설립당시 이름은 국립광둥대학이였으나 1926년 쑨원이 사망한 이후 쑨원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중산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중산대학은 예로부터 중국 화남지역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며 중국 전국대학랭킹 10위의 대학이다. (2016년 기준) 광저우 북부, 광저우 남부, 광저우 동부와 주하이 등 4개의 캠퍼스를 운영 중이며, 문과, 이과, 의과, 공과, 법과, 농과, 교육과 등 모두 7개 학부가 있으며 학생 수는 약 5만 명이다.
참고자료
1) 펄벅 저, 은하랑 옮김,『청년쑨원』, 길산, 2011
2) 위키피디아 한국, 쑨원 https://ko.wikipedia.org/wiki/%EC%91%A8%EC%9B%90
3) 쑨원 저, 김승일 역, 2000, 「삼민주의」, 범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