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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인해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완전히 끊겼고, 이후 양국은 몇몇 제한적인 무역을 제외하고는 문화적인 교류나 정치적인 왕래가 전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중일 관계 악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간헐적으로 있던 무역관계도 완전히 중지된다. 50년대 일본인이 중국에 온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는데 일본의 '일중우호협회'와 중국의 '중일우호협회'의 극소수 인원들만이 왕래를 하였고 그것 조차도 홍콩을 우회하여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왕래가 힘드니 일본인들은 중국의 소식을 쉽게 들을 수 없었고 당연하겠지만 중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해 또한 미약했다. 그렇게 당시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오늘날에야 굳이 일본에 가지 않더라도 주위에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우리들에게 일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지만 50년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니 50년대 중국과 일본 서로간의 이해는 지금보다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인해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완전히 끊겼고, 이후 양국은 몇몇 제한적인 무역을 제외하고는 문화적인 교류나 정치적인 왕래가 전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중일 관계 악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간헐적으로 있던 무역관계도 완전히 중지된다. 50년대 일본인이 중국에 온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는데 일본의 '일중우호협회'와 중국의 '중일우호협회'의 극소수 인원들만이 왕래를 하였고 그것 조차도 홍콩을 우회하여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왕래가 힘드니 일본인들은 중국의 소식을 쉽게 들을 수 없었고 당연하겠지만 중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해 또한 미약했다. 그렇게 당시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오늘날에야 굳이 일본에 가지 않더라도 주위에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우리들에게 일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지만 50년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니 50년대 중국과 일본 서로간의 이해는 지금보다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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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역사의 역설인게, 오늘날 일본의 매스컴 속 중국에 대한 생각과 50년대의 일본을 비교해 본다면,중국에 대한 현대 일본인들의 거리감은 50년대보다 오히려 멀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은 인터넷이 극도로 발달하여 정보가 풍족하다 못해 범람하는 세상이 아닌가. 어느 누구라도 각종 방법을 통해 손쉽게 중국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일본 매스컴들의 보도는 매우 제한적이며 그 서술 또한 매우 협소한 시각에 입각해 있다. 중국에 대한 정형화된 서술로 인해 앞부분을 조금만 들어도 뒤에 무슨 말이 나올 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적어도 50년대에 일본은 갓 건국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고 있는 혼돈 속 중국에 대해 내재화를 통한 주체성있는 서술을 하였으며 그 심리적 거리감 또한 멀지 않았다. 나는 일찍이 이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2018년 8월 30일 (목) 20:15 기준 최신판

孙歌:中国经验与日本战后思想建设
쑨꺼 : 중국의 경험과 일본 전후 사상의 건설

오늘 나는 일본의 전후 1945년부터 1960년대 초기까지의 사회변화 속 지식계가 관심을 가지던 근본 문제를 가져와 우리 스스로에 대한 과제 인식을 돌이켜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민주주체성의 상실과 저항--2차대전 이후의 일본 사회의 변화

1945년 일본은 일본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잊을 수 없는 비참한 패배를 겪으며 미국에 의해 점령된다. 이 단계에서 발생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천황이 '상징적인' 존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실권을 잃어버렸지만 존재하는 천황제도가 완전히 쓸모 없어 진 것은 아니었는데, "상징물"로서 천황이 존재하고 남아있게 함으로써 일본의 기층 민중들이 자신들의 사회가 완전히 부서진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도록 하였다. 이를 두고 국제정치의 관점에서 왕왕 제기되는 해석은 천황제가 사라진 일본이 적화가 되어 사회주의 국가로 변해버릴 가능성을 걱정한 미국이 천황제를 남겨두고 일본이 사회주의 국가로 변하지 못하도록 미국이라는 전차위에 일본을 안전하게 묶어두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천황이 남아 있었기에 민중들이 전쟁전과 전시의 상황가 다를 바 없는 사회 재편을 신속히 이룰 수 있었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패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미군정에 의한 통치되던 일본 정부도 동시에 사실을 교묘히 조작하였다.

미국의 점령이 가져온 변화 중 하나는 언론 및 출판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선거의 자유로 상징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속한 도입이다. 이러한 권리들은 당시의 일본 국민들에게 있어 이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성한 충격을 주었다. 일본의 좌익들은 자유주의자들이건 마르크스 주의자들이건 모두 이 시기를 해방의 시기로 생각했고 미국의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다. 맥아더가 미국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1950년 이전 당시의 미국은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고 생산에 비교적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일본 공산당 지도부는 미국식 민주주의는 실질적인 민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들도 미국처럼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47년, 일본 현대사에서의 유일무이한 총파업 사건이 일어난다.

1947년 1월 1일, 일본의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신년 축사 때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사회발전을 불안하게 하고, 생산력 발전을 방해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현 상황에서 저는 국민 여러분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서 반동을 일으키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멈출 수 있길 바랍니다." 요시다 시게루의 축사를 있고난 뒤, 이 축사를 겨냥하여 1월 9일, 일본 전국민 총노동자회는 "모든 관리, 정부 부처의 노동자 조합과 공동 투쟁 확대 위원회"를 발족하고 총파업을 준비한다. 이어 전국노총은 국가 철도국의 이이 야시로伊井弥四郎를 "모든 관리, 정부 부처의 노동자 공동 투쟁 위원회"의 임시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그의 지도 하에 노총은 전국적으로 노동자 조직의 파업을 계속해서 선전하고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의 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교섭을 정부와 시도한다. 하지만 몇 번에 이은 교섭 시도에도 불구하고 요시다 시게루는 이들을 상대 하지 않는다.

이때 맥아더 휘하의 군관들이 등장해 교섭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파업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다.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경선 중이던 맥아더는 미국 노동자들의 원성을 살까 두려워 파업에 반대하는 어떠한 (자신의 서명이 담긴) 공식 문서도 남기지 않았고 모든 것은 말로 전달하였다. 파업의 핵심 지도부들은 마침 맥아더의 어떠한 파업 반대 서면 문건도 없는 바, 이를 빌미로 그가 파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파업 계획을 계속적으로 밀고나간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니 정부가 노총 측에서 제기한 각 요구들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2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킬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맥아더는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고 파업 위원회 핵심 지도부들에게 파업의 중지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1월 31일 오후 9시, 노동조합의 지도자 이이 야시로는 NHK로 끌려와 전국 노동자들에게 파업의 중지를 요청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야시로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맥아더 연합국 군 최고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방송을 통해 전국에 있는 관리(국가기구에서 종사하는 사람) 공이公吏(공공기구에 종하하는 사람), 교원들에게 전달합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파업을 중단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 일은 참담함을 느끼게 합니다만 여러분들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전쟁 이후 우리 일본은 UN으로부터
많은 물자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노동자 중 한 명으로서 저는 매우 감사합니다. 지금 이 담화를 말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은 정말로 유감입니다만 우리는 파업을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

여러분들이 보게에 이 상황이 참 웃기지 않은가? 노동 운동의 지도자가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하지만 어쨌든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1947년 2월, 일본 민중 저항 정부를 대표하는 민중 조직은 '요시다 시게루에게는 반대할 수 있지만 UN군 신분으로 들어와 있는 미국에게는 반대할 수 없구나.' 라는 사실을 통감할 수 있었다. 이 감정은 일본 노동 운동 뿐만 아니라 일본 공산당에게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현실과 미국의 정책에 무조건 적인 신뢰를 보내고 고마워하던 그들에게 미국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총파업이 실패한 이후, 일본은 1948년 7월 21일 정부명령 201호 법령을 공표한다. 이 법은 지금까지도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는 법으로 공무원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 어떠한 사회 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있다. 처음에는 항의 시위를 하던 공무원들도 이 법이 실행되는 순간부터 거리에 나오면 합법적으로 체포 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48년 이후, 미군정이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다는 점과 일본 정부와 한패라는 미군정의 본모습이 드러나면서 일본 민중들(특히 우익사회)는 자신들의 인식 및 사상에 대한 조정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다음으로는 일본 공산당이 차후에 채택한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본 공산당은 1940년대 말기까지 줄곧 미국 점령군이 일본 우익 정부를 견제하는 것에 효과가 있는 "해방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입장은 당시 일본 공산당 정보국으로부터 호되게 비판받았다. 일본 공산당은 1951년에 제4차전국협의회(줄여서 4전협)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향촌공작조를 농촌으로 파견해서 군중 행동을 통해, 도시를 포위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쟁취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철저하게 실패했는데, 일본 농민들은 산촌의 공작조를 결코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5년에 일본공산당은 "6전협"을 소집하여서, 자신들이 맹목적이고 좌경적인 잘못을 저질렀으며, 앞으로는 합법적인 의회 투쟁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지금 우리는 이런 큰 역사에 대해서 부담없이 홀가분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번 상상해 보시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렇게나 장렬하게 운동에 임했는데, 최후에 잘못된 조직의 노선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귀중한 시간을 쏟았는데도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면? 그런 일을 겪는다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말이다. 어떤 젊은이들은 산촌공작조에 참여했기 때문에 나중에 의기소침하게 변했고, 당이 틀린 것이지 자신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계속 미뤄나가서 나중에 신좌파의 급진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일종의 테러리스트적 특징을 지닌 사람으로 변모하여 테러조직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것이 역사 외부의 다른 한 측면이다.

물론 1950년대 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던 단체는 일본 공산당의 산촌 공작대만은 아니었다. 노동 운동 조직, 시민운동 조직 등, 일본 공산당을 제외한 여러 단체들도 주체성을 가진 민주 사회를 세우는 일에 목소리를 내왔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시도한다. 특히, 1952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해 도쿄에서 열린 집회의 중심이 공무원이 아니라 학생과 여러 청년단체라는 것을 보면 일본 공산당 만이 새로운 사회 만들기의 유일한 개척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5월 1일 운동의 끝은 좋지 않았다. "5.1 유혈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집회 참가자들의 사망이라는 큰 대가를 치렀고 일본 사회에 대한 민주 메커니즘의 충격과 진정한 의미의 사회 건설을 형성하였다. 한 사회의 민주 메커니즘은 어떻게 해야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을까. 일본의 개개 일반 대중들은 이렇듯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민주 메커니즘에 대한 문제들에 맞닥뜨렸다고 볼 수 있다.

2. 전후국제체제의 탄압 아래 사회주의 경험의 지각

지금까지 내가 소개한 내용은 50년대 일본의 국내적인 상황이었으니 국외적인 상황도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1952년 4월 말, 미국 점령군은 점령의 종료를 선언하고, 5월부터 일본정부는 표면적으로나마 합법적 주권을 회복하였다. 물론 당연히 공짜는 없었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국에 할양하는 대가로 독립을 얻었다. 때문에 많은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의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자신들과 맞바꿔 얻은 독립이라며 항의하였다. 50년대에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한국전쟁이었다. 이 한국전쟁은 일본의 전후 경제 회복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기회로 대량의 군수 물자들이 일본에서 생산되었으며 일본이 경제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UN군을 같은 편에 둔 한국과, 중국과 소련을 배후에 둔 북한이 싸운 전쟁이다. 양쪽은 1953년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한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평화조약'이라는 말과는 사실 거리가 좀 멀었다. 일본의 국내 정세는 한국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한국 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된 후, 일본은 냉전체제를 형성하는 두 축 가운데 어느 곳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다. 1952년부터 효력이 발생한 이 조약은 전쟁 중인 1951년에 승인되었다.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중국 대륙과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타이완과도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영국 집권당이었던 좌익 노동당은 중국 대륙과의 화해를 선택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타이완과의 화해를 선택한다. 일본과 대륙 중국의 화해는 20년이나 미루어진 1972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인해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완전히 끊겼고, 이후 양국은 몇몇 제한적인 무역을 제외하고는 문화적인 교류나 정치적인 왕래가 전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중일 관계 악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간헐적으로 있던 무역관계도 완전히 중지된다. 50년대 일본인이 중국에 온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는데 일본의 '일중우호협회'와 중국의 '중일우호협회'의 극소수 인원들만이 왕래를 하였고 그것 조차도 홍콩을 우회하여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왕래가 힘드니 일본인들은 중국의 소식을 쉽게 들을 수 없었고 당연하겠지만 중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해 또한 미약했다. 그렇게 당시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오늘날에야 굳이 일본에 가지 않더라도 주위에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우리들에게 일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지만 50년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니 50년대 중국과 일본 서로간의 이해는 지금보다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참 역사의 역설인게, 오늘날 일본의 매스컴 속 중국에 대한 생각과 50년대의 일본을 비교해 본다면,중국에 대한 현대 일본인들의 거리감은 50년대보다 오히려 멀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은 인터넷이 극도로 발달하여 정보가 풍족하다 못해 범람하는 세상이 아닌가. 어느 누구라도 각종 방법을 통해 손쉽게 중국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일본 매스컴들의 보도는 매우 제한적이며 그 서술 또한 매우 협소한 시각에 입각해 있다. 중국에 대한 정형화된 서술로 인해 앞부분을 조금만 들어도 뒤에 무슨 말이 나올 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적어도 50년대에 일본은 갓 건국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고 있는 혼돈 속 중국에 대해 내재화를 통한 주체성있는 서술을 하였으며 그 심리적 거리감 또한 멀지 않았다. 나는 일찍이 이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