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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일 (토) 23:10 판
목차
개요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에 위치한 마왕퇴(馬王堆) 3호묘에서 발굴된 백서(帛書). 연대는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백서란 겸백(鎌帛) 즉 비단에 쓰인 서책을 일컫는데, 비단은 종이가 발명되어 보급되기 전까지 나무로 만든 독(牘)이나 대나무를 깎은 죽편(竹片)과 함께 통상적인 문서나 서적의 소재로 이용되었다.[1]마왕퇴에서 출토된 대량의 백서 문헌은 철학, 역사, 군사, 의약, 천문, 역법(曆法), 역서(易書) 등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마왕퇴 백서는 당시의 사상과 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마왕퇴 유적
마왕퇴(馬王堆)란 ‘마왕(馬王)의 무덤(塚)’이라는 뜻으로, 10세기 중반 그곳을 다스렸던 마은(馬殷)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면서 붙은 이름이다.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 동쪽 교외에 위치하며, 총 3개의 묘로 구성되어 있다.
발굴 및 조사
1971년 말 인근에서 진행하던 병원 건설 공사가 무덤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을 계기로 호남성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1972년 1월부터 4월 1호묘 발굴을 시작으로 이듬해 1973년 11월부터 12월 사이에 1호묘 남쪽에 인접한 3호묘를, 1973년 12월부터 1974년 1월에는 서쪽 무덤에 해당하는 2호묘를 발굴 및 조사하였다. 발굴 결과 마왕퇴는 실제 10세기보다도 훨씬 오래전인 한대(漢代) 초기의 유적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마왕퇴 한묘(漢墓)라고도 한다. 무덤의 주인은 장사국(長沙國)의 승상이자, 대(軑)라는 땅에 영토를 받은 대후(軑候) 이창(利蒼) 일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의의
묘지가 발견된 장사(長沙)는 본래 초(楚)의 영토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형산(衡山)∙구강(九江)∙강남(江南)∙예장(豫章)∙장사는 초나라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왕퇴 한묘의 연대가 대략 기원전 186년에서 145년 사이이고, 초나라가 멸망한 시기인 기원전 223년이 이로부터 육십 년도 채 안 된다는 점에서 마왕퇴의 묘장(墓裝) 이나 각종 부장품, 다량의 백서는 초나라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왕퇴 유적은 초나라 문화와의 비교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2]
1호묘
1호 묘에서는 간독(簡牘), 직물, 칠기, 죽목기(竹木器), 도기, 악기 등 1000점이 넘는 부장품이 보존이 매우 잘 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0여년이 넘었음에도 전혀 부패하지 않고 보존 상태가 좋은 중년 여성의 미라가 4중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관에는 피장자의 혼이 무사히 승천하길 비는 그림이 그려진 T자형의 백화(帛畵)가 덮여 있었으며, ‘대후가(軑候家)’와 ‘대후가승(軑候家丞)’이라고 적힌 명문 및 봉니(封泥)가 함께 출토되었다. 피장자는 대후부인(軑候夫人) 신추(辛追)로 밝혀졌으며, 부장품의 특징에 의거하면 연대는 기원전 175년에서 145년 사이로 추정되며, 대후부인은 한 무제(武帝) 12년(기원전 145) 이후에 사망했을 것이다.
2호묘
2호 묘에서는 ‘대후지인(軑候之印)’, ‘장사승상(長沙丞相)’, ‘이창(利蒼)’이라는 3개의 인장(印章)이 출토되었다. 여기서 ‘대후지인’은 묘주의 작위(爵位)를 나타내는 인장이며, ‘이창’은 묘주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인장, ‘장사승상’은 묘주의 관직을 나타낸다. 2호묘의 주인인 이창은 전한(前漢) 시기의 인물로, 혜제(惠帝) 2년(기원전 193)에 대후로 봉해졌으며, 여후 2년(기원전 186)에 사망했다.[3] 도굴을 많이 당한 탓에 이외에는 별다른 중요한 출토품이 없다.
3호묘
3호묘의 발굴은 마왕퇴의 세 개 무덤 중 학계에서 가장 이목을 끌었다. 1호묘에 필적하는 1000점 이상의 귀중한 부장품이 발굴되었는데 38건의 병기, 5건의 악기, 316건의 칠기, 104건의 나무인형, 50개의 대나무 상자, 사직품(絲織品), 백화(帛畵)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나무조각에 쓴 글인 목독(木牘)도 발굴되었는데, 410쪽의 유책(遺策, 묘지 속의 물품 수량을 죽간에 기록한 장부)과 200쪽의 의서(醫書)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전국 말기에서 한 초기에 이르는 시기의 천문, 의술, 점서, 신앙, 복식, 칠기공예, 신앙, 회화 등을 이해하는 데 실로 중요한 자료이다.[4]목독(木牘)에 적힌 글귀 중 ‘12년 2월 을사 초하루 무진날(十二年二月乙巳朔戊辰)’은 묘장 연도로 추정되며, 피장자는 한 문제(文帝) 12년(기원전 186)에 사망했을 것이다.[5]3호묘의 주인은 이창의 아들로 2대 대후인 이희(利豨), 혹은 그의 형제의 것이라고도 한다.[6]
백서의 발견
백서는 3호묘 관 동쪽에 놓인 세로 60cm, 가로 30cm, 높이 20cm의 장방형 옻칠 상자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수량은 2천 점에 이른다.[7]상자 내부는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그중 한 구획에 백서가 접힌 상태로 담겨 있었다. 또 다른 구획에 담긴 두 개의 두루마리 목간 밑에서도 길고 가는 목편에 감긴 상태로 백서가 발견되었다. 장방형으로 개어 접힌 백서의 너비는 48cm 정도의 가장자리 부분이 찢어져 파손되었고, 나무에 감긴 백서는 세로 길이 24cm 정도로 접착 때문에 꽤 파손된 상태였다.[8]복원과 정리 및 해독 작업을 거친 결과, 28종류의 문헌이 들어있었으며, 그중 거의 대부분은 종래에는 전혀 존재를 알 수 없었던 문헌이었다. 조각이 나 있는 것이 많아 알려지지 않은 문헌은 책 이름을 모르는 것도 많으며, 현재는 적혀 있는 내용에 따라 가서명(假書名)을 붙여놓았다.[9]
마왕퇴 백서 문헌 목록[10]
1. 육예류六藝類
유가 경전과 관련된 문헌
(1) 『주역周易』(『육십사괘六十四卦』, 『계사繫辭』, 『요要』, 『무화繆和』, 『소력昭力』, 『이삼자二三子』, 『역지의易之義』)
(2) 『춘추사어春秋事語』
(3) 『전국종횡가서戰國縱橫家書』
(4) 『상복도喪服圖』
2. 제자류諸子類
제자백가와 관련된 문헌
(5) 『노자老子』(갑본), 권후고일서사종卷後古佚書四種(『오행五行』, 『구주九主』, 『명군名君』, 『덕성德星』)
(6) 『구주도九主圖』
(7) 『노자老子』(을본), 권전고일서사종卷前古佚書四種(『경법經法』, 『십육경十六經』, 『칭稱』, 『도원道原』)
3 병서류兵書類, 군사와 관련된 문헌
(8) 『형덕刑德』(갑편·을편)
(9) 『형덕刑』 (병편)
4. 수술류數術類
점술과 관련된 문헌
(10) 『오성점五星占』
(11) 『천문기상잡점天文氣像雜占』
(12) 『식법式法』(옛 이름 『전서음양오행篆書陰陽五行』)
(13) 『예서음양오행隸書陰陽五行』
(14) 『목인점木人占』
(15) 『부정符淨』
(16) 『신도神圖』
(17) 『축성도築城圖』
(18) 『원침도園寢圖』
(19) 『상마경相馬』
5. 방술류方術類
의술과 관련된 문헌
(20)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 권전고일서사종卷前古佚書四種(『족비십일맥구경足臂十一脈灸經』, 『음양십일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갑본), 『맥법脈法』, 『음양맥사후陰陽脈死侯』)
(21) 『태산서胎產書』
(22) 『양생방養生方』
(23) 『잡요방雜療方』
(24) 『도인도導引圖』, 권전고일서이종卷前古佚書二種(『각곡식기편却穀氣篇』, 『음양십일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을본))
6. 지도
(25) 『장사국남부도長沙國南部圖』
(26) 『주군도駐軍圖』
백서의 연대
백서가 쓰여진 연대는 황제의 실명에 사용된 한자를 피해 다른 글자를 쓰는 피휘(避諱)와 그 한자의 끝획을 생략하는 결필(缺筆)이라는 중국의 독자적인 습관을 근거로 추정해볼 수 있다[11]예를 들어, 『노자』 갑본과 『천문기상잡점』에는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의 실명 ‘邦’이 그대로 적혀 있으므로 고조가 황제가 되기 전인 진(秦)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노자』 을본과 『전국종횡가서』에는 ‘邦’은 피했으나 다음의 혜제(惠帝: 劉盈)와 문제(文帝: 劉恒)의 실명 ‘盈’과 ‘恒’이 그대로 적혀 있으므로 고조 재위 중에 쓰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전한(前漢) 시기의 것이다. 또한 서체를 봤을 때 앞의 것이 소전과 예서의 중간 글씨체로 적혔고, 뒤의 것이 예서로 쓰여진 사실 또한 각 백서가 쓰여진 시기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문헌 및 의의
백서 『노자』
백서 『노자老子』는 갑본(甲本)과 을본(乙本) 2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갑본은 노자 뒤에 알려지지 않은 문헌 1종이 붙어 있으며, 글자 수는 모두 464행에 1만 3000자 정도이며, 소전(小篆)에서 예서(隸書)로 옮아가는 과도기의 서체가 사용되고 있다. 이를 학자에 따라 초전(草篆) 즉 ‘흘린 전서’라 부르기도 한다. 을본의 경우 ‘황제사경(黃帝四經)’이라 이르는 문헌의 뒤에 적혀 있으며, 글자 수는 모두 152행에 1만 6000자 남짓이고, 예서로 쓰였다.
한 초기는 진말의 동란이 수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혼란하고 모든 것에 소극적인 경향이 강한 시기였다. 사람과 지식을 움직여 갖가지를 하는 만큼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고 마침내 파멸에 이르므로 역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대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시대상과 맞물려 당시 지배 계급 사이에서는 ‘무위로써 다스린다’라는 노자의 사상이 널리 유행했다. 백서본 『노자』도 이런 분위기에서 쓰이고 소장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노자』는 상편인 도경(道經), 하편인 덕경(德經) 2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마왕퇴에서 나온 백서 『노자』 역시 상하 2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반대로 상편이 덕경, 하편이 도경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책과는 구성이 다르다. 또한 상하 각 편 속에도 장의 순서가 현재의 책과 다른 곳이 있으며 일부 문장에도 차이가 있다. 현재의 『노자』는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정리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백서 『노자』는 그보다 수백년을 앞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그만큼 원형에 가까워 『노자』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는 의의가 있다.
백서 『전국종횡가서』
『전국종횡가서戰國縱橫家書』는 전국시대 말기 유세가(遊說家)로서 활약한 소진(蘇秦)의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소진이 제자백가 가운데 종횡가(縱橫家)로 불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백서 『전국종횡가서』는 총 2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씨체는 소전과 예서의 과도기 형태이면서, 백서 『노자』 갑본의 글씨체보다는 좀 더 예서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한편, 백서 『전국종횡가서』의 27장 중 8장은 사마천 『사기』, 10장은 전한(前漢) 말기에 유향(劉向)이 군웅할거 시대의 이야기를 정리해 편집한 『전국책戰國策』에서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장도 거의 같다. 이 때문에 백서 『전국종횡가서』를 『마왕퇴본 전국책』이라고도 한다. 『사기』와 『전국책』 모두 백서 『전국종횡가서』와 일부 내용이 겹치고 마왕퇴의 연대인 기원전 145년 이후의 저작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마천과 유향은 저술 당시 백서 『전국종횡가서』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백서 『전국종횡가서』는 『사기』나 『전국책』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거, 즉 현재에 전해지는 역사서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서 『주역』
백서 『주역周易』 은 발견 당시 조각나있는 상태였으며, 글자수는 모두 2만 천자 정도이다. 백서 『주역』에는 팔괘를 어우르는 64가지 형식을 해설한 부분인 「괘사卦辭」, 역(易)의 기본 이념을 적은 「계사전繫辭傳」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괘사는 주역의 중심 부분인데, 백서본 「괘사」의 문장을 보면 현재의 주역에서 보이는 것과는 꽤 다르다. 지금의 주역에서는 「괘사」 속에 들어 있는 「십익十翼」[12] 중 「상전象傳」이나 「문언전文言傳」 등의 내용이 백서본에는 없으며, 「계사전」의 경우 현재의 문장과 일부 다른 부분이 있거나 현재의 책에는 없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듯 마왕퇴의 백서 『주역』은 기존에 알려진 주역과 다른 부분이 많은데, 현재의 주역이 성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유학사상사나 문헌학 연구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13]
『천문기상잡점』
천문(天文) 점복서(占卜書)로 점치기 책의 일종이다. 『천문기상잡점天文氣像雜占』은 천문현상이나 기상현상으로 길흉을 점치는 법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갑골점이나 역(易)(혹은 주역(周易), 주(周)에서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음과 양을 나타내는 표시를 어울어 길흉을 판단하던 점치기 방식)과는 그 종류가 다른 것이다. 세로 48cm, 가로 150cm의 백서로 전체 6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은 모두 350조로 되어있다. 각 조에는 먹 또는 붉은먹[朱]으로 구름, 대기, 빛무리, 무지개 등의 기상현상과 달, 별, 꼬리별 등의 천문 현상이 그려져 있으며, 아래쪽에는 그 이름과 풀이와 함께 점괘가 적혀 있다. 『천문기상잡점』에 실린 구름의 형태나 별자리의 이름은 반수 가까이 종래의 문헌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림 또한 많이 그려져 있어 당시의 천문 혹은 기상학 등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글씨체는 백서 『노자』 갑본과 마찬가지로 전서와 예서의 중간 형태를 하고 있다.
백서 고지도
마왕퇴 3호묘에서 발견된 백서 문헌 중 2장의 고지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의 호남성 남부의 소수(瀟水) 유역을 그린 『장사국남부지형도(長沙國南部地形圖)』와 『주군도(駐軍圖)』라 불리는 군용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주군도는 군대 배치도로 지형도의 남동부를 거의 두 배로 확대한 것이며, 현재의 호남성 강화(江華)의 타강(拖江) 유역의 산맥과 물 흐름, 총 9개 부대의 군대배치와 수비영역을 표시하고 있다. 당시 장사국 남쪽에 활거하던 남월국(南越國)과의 전쟁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본다.
다른 백서와 마찬가지로 함께 무덤에 매장되었을 때에는 접힌 채로 옷상자 속에 들어 있었으나, 발견 당시에는 조각으로 되어 있었다. 복원한 결과 지형도가 그려진 비단은 본래 사방 9cm의 정방형, 주군도는 길이 98cm, 너비 78cm인 비단에 그려진 것을 확인했다.
지도는 현재의 방위법과는 거꾸로 남쪽을 위로 하고 있다. 산맥은 검은 줄, 물 흐름은 푸른 줄로 표시했으며, 중요한 산과 강에는 그 이름이 적혀 있는데, 글자를 적은 방향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지도를 둘러싼 주위의 각 방향에서 검토하기 편리하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형도이며, 게다가 마치 측량한 것처럼 지형지세를 정확하게 묘사한 정교한 지도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료적 의의
마왕퇴 백서는 한대(漢代) 이전의 다양한 사상을 담고 있으므로 중국의 고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진말(秦末)에서 전한(前漢) 시기 사용되던 한자의 자형 및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어 문자학 연구의 사료로서도 의의가 있다.한편 마왕퇴 백서 연구와 관련해 『노자』와 같은 철학 및 사상서에 관한 것들이 유명하지만, 실제 백서 문헌 전체 중 반 이상은 점술과 의술에 관한 것이다. 이는 후대의 천문학과 역학, 의학, 약학 등 중국 모든 과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마왕퇴 백서는 사상사뿐만 아니라 과학사 면에서도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는 발견인 것이다.그외 지금까지 그 존재를 전혀 알 수 없었던 서책이 많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은 ‘고일서(古佚書)’ 뿐만 아니라, 한대(漢代)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궁중 도서관 등의 장서 목록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아 이전에는 책 이름조차도 알 수 없었던 서책이 대부분이다. 이에 관한 논의 및 연구는 앞으로 더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지만, 동시에 고대 중국 연구의 지평을 넓혀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아츠지 데츠지, 김언종·박재양 역, 『漢字의 역사』, 학민사, 1999.
후쿠타 데쓰유키 저, 김경호·하영미 역,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김경수, 『출토문헌을 통해서 본 중국 고대 사상』, 심산출판사, 2008.
전자자료
지도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마왕퇴 출토 장사국남부지도
각주
- ↑ 아츠지 데츠지, 김언종·박재양 역, 『漢字의 역사』, 학민사, 1999, p.129
- ↑ 김경수, 『출토문헌을 통해서 본 중국 고대 사상』, 심산출판사, 2008, p.29-30
- ↑ 위의 책, p.28-29.
- ↑ 위의 책 p.21.
- ↑ 위의 책 p.29.
- ↑ 후쿠타 데쓰유키 저, 김경호·하영미 역,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p.140
- ↑ 의학서로 추정되는 죽간(竹簡) 2권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 ↑ 위의 책, p.141
- ↑ 아츠지 데츠지, 김언종·박재양 역, 『漢字의 역사』, 학민사, 1999, p.130
- ↑ 해당 목록은 1979년 6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개최된 ‘마왕퇴 백서 공작회의’에 제출된 이학근의 분류에 따른 것이다. (후쿠타 데쓰유키 저, 김경호·하영미 역,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p.142~145.)
- ↑ 위의 책, p.134-135
- ↑ 「계사전」등을 포함한 보충 문장 10편, 공자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분서갱유 이후 『주역』에 유교적인 색깔을 강화하기 위해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츠지 데츠지, 김언종·박재양 역, 『漢字의 역사』, 학민사, 1999, p.281)
- ↑ 위의 책, p.280-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