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문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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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건청문.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자금성]]의 건청문. 한자와 만주문자가 같이 병기되어 있다.]] | [[파일:건청문.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자금성]]의 건청문. 한자와 만주문자가 같이 병기되어 있다.]] | ||
− | 만주문자는 [[ | + | 만주문자는 [[청]]나라 [[만주족]]이 사용하던 언어로서 1599년 [[여진]] 부락을 통합하고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누르하치]]가 창제한 문자이다. 만주문자는 [[몽골 문자]]와 함께 위구르 문자, 소그드 문자, 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는 물론 더 멀리는 라틴 문자, 이집트문자 등과도 같은 계통의 문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만주족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 만주족이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중원에 들어가 패권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br> |
만주문자는 몽골문자를 본떠 만들어졌는데, 몽골어와 소리체계가 달라 표기 상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문자가 만들어 진지 30여 년 후 1632년, 다하이[達海]라는 학자가 초기 만주 문자를 개량하여 점(∙)과 동그라미(∘)를 더하여 만주어의 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된다.<br> | 만주문자는 몽골문자를 본떠 만들어졌는데, 몽골어와 소리체계가 달라 표기 상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문자가 만들어 진지 30여 년 후 1632년, 다하이[達海]라는 학자가 초기 만주 문자를 개량하여 점(∙)과 동그라미(∘)를 더하여 만주어의 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된다.<br> | ||
− |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은 오늘 날의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민족이다. 이 | + |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은 오늘 날의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민족이다. 이 만주지역에는 다양한 북방 민족들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을 크게 묶어 퉁구스족이라고 하고 이들 민족이 사용했던 언어를 만주퉁구스어파로 분류한다. 이 계통에 해당하는 어파는 11개로 크게 북부 퉁구스어군과 남부 만주어군으로 나뉘며, 전자는 어원어, 어웡키어, 솔론어, 네기달어가 포함되고 후자에는 나나이어, 월타어, 울치어, 우디허어, 오로치어, 만주어, 시버어가 포함된다. <ref>이선애 지음,『초급 만주어』, 박문사</ref><br> |
현존하는 만주문헌은 그 수량이 아주 방대하다. 북경 중국제1역사당안관에만 소장된 청대 만주어 문헌만 100만건이 넘는다. 이는 청대 약 300년시기의 국정과 대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으로 만주어를 전공하는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 현존하는 만주문헌은 그 수량이 아주 방대하다. 북경 중국제1역사당안관에만 소장된 청대 만주어 문헌만 100만건이 넘는다. 이는 청대 약 300년시기의 국정과 대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으로 만주어를 전공하는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 ||
==특징== | ==특징== | ||
− | + | 만주문자는 과거 한문이 그럤던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쓰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된다. 만주문자를 공부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같은 글자라도 단어에서 어디에 놓이느냐 따라(즉, 단독으로 쓰이느냐, 어두, 어중, 어말에 쓰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만주문자가 단순히 한자가 아니라 아랍문자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ref>이선애 지음,『초급 만주어』, 박문사p.10</ref> 때문에 표음문자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알파벳과 같은 완전한 형태의 음소 단위 문자가 아니라, 음절문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모음은 총 6개, 자음은 19개이다. 또한 일본의 가타카나처럼 외래어의 음을 표기하기 위해 특수문자 10개가 있다. 때문에 총 35개의 자모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br> | |
한글은 획이 추가됨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자질문자(資質文字)다. 만주문자 또한 한글의 자질문자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br> | 한글은 획이 추가됨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자질문자(資質文字)다. 만주문자 또한 한글의 자질문자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br> | ||
밑에 자모음 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a'의 경우, 점이 하나 추가되면 'e'가 되고 'o'또한 점이 추가되면 'u'가 된다. 't'는 점이 추가됨에 따라 'd'가 되고, 'k'는 점 하나가 추가되면 'g'가 되고, 속이 빈 동그라미 '。'가 추가되면 'h'가 된다. | 밑에 자모음 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a'의 경우, 점이 하나 추가되면 'e'가 되고 'o'또한 점이 추가되면 'u'가 된다. 't'는 점이 추가됨에 따라 'd'가 되고, 'k'는 점 하나가 추가되면 'g'가 되고, 속이 빈 동그라미 '。'가 추가되면 'h'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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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제배경== | ==창제배경== | ||
창제 배경은 한글의 창제배경과 유사하다. [[누르하치]]는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존의 몽골문자를 따라 쓰던 방식에서 벗어나 여진어에 맞게 개량된 문자를 원했다. 처음 누르하치가 박시(만주발음으로 박시로 博士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르더니에게 만주문자를 만들라고 했을 때, 이들은 예로부터 써오던 몽골문자를 어떻게 바꾸냐고 반대하였다. | 창제 배경은 한글의 창제배경과 유사하다. [[누르하치]]는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존의 몽골문자를 따라 쓰던 방식에서 벗어나 여진어에 맞게 개량된 문자를 원했다. 처음 누르하치가 박시(만주발음으로 박시로 博士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르더니에게 만주문자를 만들라고 했을 때, 이들은 예로부터 써오던 몽골문자를 어떻게 바꾸냐고 반대하였다. | ||
− | 그러자 누르하치는 "한인 나라의 글을 읽으면 한문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몽고국의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글을 모르는 사람도 모두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의 글을 몽고어로 써서 읽으면 우리나라의 글을 모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리나라의 말로 쓰는 것은 어렵고 다른 몽고국의 말은 어찌 쉬운가!"하며 질책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만주문자의 창제 원리는 가르쳤다. "'아'라는 문자를 쓴 뒤, 아래에 마를 놓으면 아버지라는 뜻의 '아마'가 된다. '어'라고 쓴 뒤, 아래에'머'를 넣으면 '어머(어머니)'가 된다. 너희는 써보아라. 될 것이다."하였다.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의 상황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 + | 그러자 누르하치는 "한인 나라의 글을 읽으면 한문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몽고국의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글을 모르는 사람도 모두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의 글을 몽고어로 써서 읽으면 우리나라의 글을 모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리나라의 말로 쓰는 것은 어렵고 다른 몽고국의 말은 어찌 쉬운가!"하며 질책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만주문자의 창제 원리는 가르쳤다. "'아'라는 문자를 쓴 뒤, 아래에 마를 놓으면 아버지라는 뜻의 '아마'가 된다. '어'라고 쓴 뒤, 아래에'머'를 넣으면 '어머(어머니)'가 된다. 너희는 써보아라. 될 것이다."하였다.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의 상황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ref>이선애 지음,『초급 만주어』, 박문사, pp.8~9</ref> |
− | == | + | ==발전과 쇠퇴== |
− | 1644년 만주족은 [[산해관]]을 넘어(入關) 중원을 차지한다. 만주족은 이전의 [[정복왕조]]들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만주족은 소수였고 한족의 수는 굉장히 많았다. 만주족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만주족 관원들에게 만주어와 만문을 익히게 하였고 공식 문서에 만주문자를 우선적으로 사용하여 만주어와 만주문자를 지켜나가고자 하였다. | + | 1644년 만주족은 [[산해관]]을 넘어(入關) 중원을 차지한다. 만주족은 이전의 [[정복왕조]]들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만주족은 소수였고 한족의 수는 굉장히 많았다. 만주족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만주족 관원들에게 만주어와 만문을 익히게 하였고 공식 문서에 만주문자를 우선적으로 사용하여 만주어와 만주문자를 지켜나가고자 하였다.<br> |
− | 초창기 만주문자는 몽골문자의 모양과 음을 차용하여 함께 표기하였기에 몽골문자와 매우 흡사하였다. 하지만 만주어와 몽골어는 서로 다른 언어인지라 일정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만주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여러 문제점들이 노출되게 되었고, 1632년 [[홍타이지]]는 다하이에게 만주문자를 다시 제정하도록 한다. 이때 제정된 것을 신만문新满文이라 한다. 만문이 청조의 국어가 되고 만문 자체도 큰 발전을 하게 된다. 만문의 규칙이 생기고, 표현 또한 더욱 섬세해지고 정확해졌다.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져 어휘가 풍성해진다. 특히 강희47년(1708년)에 편찬된 <어제청문감御制淸文鑑>은 만주문자로 만주문자를 해설한 사전으로 당대 만주문자의 흥성함을 보여준다.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청나라는 주도적으로 만주문자를 확산시켜나가는데, 중국의 경전과 역사, 문학 관련 문헌들을 만주어로 번역한다. 청나라가 강성하던 시기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효경>, <소학>, <손자병법>, <삼국지>, <서상기>, <금병매>, <요재지이> 등 많은 경전, 역사책 등이 만주어로 번역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만주족들도 중국어에 익숙해졌다. 이는 청나라 시기 공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순치, 강희, 옹정제 시기는 중요 문서들은 물론 일반적인 공문서들 또한 모두 만주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건륭, 가경, 함풍제 시기의 공문서는 만한 병용문서로 변한다. 함풍제와 동치제 이후의 공문서는 만주문자의 사용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ref>정광,『알타이 제민족의 문자 제정과 사용』,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제30회 국제학술대회, p.149</ref> | + | 초창기 만주문자는 몽골문자의 모양과 음을 차용하여 함께 표기하였기에 몽골문자와 매우 흡사하였다. 하지만 만주어와 몽골어는 서로 다른 언어인지라 일정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만주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여러 문제점들이 노출되게 되었고, 1632년 [[홍타이지]]는 다하이에게 만주문자를 다시 제정하도록 한다. 이때 제정된 것을 신만문新满文이라 한다. <br> |
− | <br>만주어는 17-18세기 서구에서온 유럽학자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주목 받을 적이 있었다. 표의문자가 익숙하지 않은 선교사들에게 한자는 아주 난해한 문자로 다가왔다. 그들에게는 그나마 표음문자의 특성을 지닌 만주어가 더 쉬웠다. 이미 중국의 중요한 고문 등은 만주어로 번역이 된 상태였기에 선교사들은 만주어 번역서들을 통해 중국문화에 접근하고 이해하여 했다. <ref> | + | 만문이 청조의 국어가 되고 만문 자체도 큰 발전을 하게 된다. 만문의 규칙이 생기고, 표현 또한 더욱 섬세해지고 정확해졌다.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져 어휘가 풍성해진다. 특히 강희47년(1708년)에 편찬된 <어제청문감御制淸文鑑>은 만주문자로 만주문자를 해설한 사전으로 당대 만주문자의 흥성함을 보여준다. <br> |
− | 하지만 19세기 무렵, [[ | + |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청나라는 주도적으로 만주문자를 확산시켜나가는데, 중국의 경전과 역사, 문학 관련 문헌들을 만주어로 번역한다. 청나라가 강성하던 시기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효경>, <소학>, <손자병법>, <삼국지>, <서상기>, <금병매>, <요재지이> 등 많은 경전, 역사책 등이 만주어로 번역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만주족들도 중국어에 익숙해졌다. 이는 청나라 시기 공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순치, 강희, 옹정제 시기는 중요 문서들은 물론 일반적인 공문서들 또한 모두 만주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건륭, 가경, 함풍제 시기의 공문서는 만한 병용문서로 변한다. 함풍제와 동치제 이후의 공문서는 만주문자의 사용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ref>정광,『알타이 제민족의 문자 제정과 사용』,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제30회 국제학술대회, p.149</ref><br> |
+ | 만주어는 17-18세기 서구에서온 유럽학자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주목 받을 적이 있었다. 표의문자가 익숙하지 않은 선교사들에게 한자는 아주 난해한 문자로 다가왔다. 그들에게는 그나마 표음문자의 특성을 지닌 만주어가 더 쉬웠다. 이미 중국의 중요한 고문 등은 만주어로 번역이 된 상태였기에 선교사들은 만주어 번역서들을 통해 중국문화에 접근하고 이해하여 했다. <ref> [http://munja.yonsei.ac.kr/archives/archives_02_1_14.php 연세대학교 문자의 사회문화적 연구]</ref><br> | ||
+ | 하지만 19세기 무렵, [[청]]나라는 국력이 약화되고 1902년 [[서태후]]는 만문 폐지령을 내린다. 이 지령으로 관청의 공문서, 교육시설에서는 더이상 만주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911년,[[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지 100여년이 흘렀다. 이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거친 만주어는 죽어가는 언어dying language로 규정되어 있다. <br> | ||
+ | 현대중국의 소수민족인 만주족의 인구는 1000만명 가까이 되지만 이 중 만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흑룡강성]에 삼가자촌三家子村에 거주하고 있는 고령의 노인들만이 완벽한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고, 신강新疆 찹차르 [[시버족]] 자치현의 일부 시버족은 만주어의 방언이라는 시버어를 구사할 수 있다. 시버어는 방언이기에 음운이나 발음, 단어 면에서 만주어와 다른 점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의 사어死語를 '죽어가는 언어'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언어이다. 중국 정부는 만주어 보존을 위해 2011년 중국의 헤이룽장 대학에 만주어 관련 학과를 설립하여 만주어를 교육하며 가르치고 있다. 이는 수십년이 지났음에서 대부분이 조선어를 구사할 수 있는 [[조선족]]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 ||
− | == | + | ==문자의 구성== |
− | + | ===모음=== | |
− | ==모음== | ||
만주어의 모음은 총 6개로, a, e, i, o, u, ū로 구성되어 있다. | 만주어의 모음은 총 6개로, a, e, i, o, u, ū로 구성되어 있다. | ||
− | [[파일:만주어모음.jpg| | + | [[파일:만주어모음.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사진출처 :『초급 만주어』, 박문사]] |
− | + | '''a'''<br> | |
− | + | 모음 a는 한국어의 '아'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20<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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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br> | ||
+ | 모음 e는 한국어의 '어'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5D<br> | ||
+ | '''i'''<br> | ||
+ | 모음 i는 한국어의 '이'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73<br> | ||
+ | '''o'''<br> | ||
+ | 모음 o는 한국어의 '오'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23<br> | ||
+ | '''u'''<br> | ||
+ | 모음 u는 한국어의 '우'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60<br> | ||
+ | '''ū'''<br> | ||
+ | 모은 ū의 정확한 발음은 추측될 뿐이다. 대부분 자음 g, k, h의 뒤에 나타난다. 유니코드는 1861<br> | ||
+ | ===자음=== | ||
+ | [[파일:만주어자음1.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사진출처 : 『초급 만주어』, 박문사]] | ||
+ | [[파일:만주어자음2.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사진출처 : 『초급 만주어』, 박문사]] | ||
+ | '''n'''<br> | ||
+ | 자음 n은 한국어의 'ㄴ'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28<br> | ||
+ | '''k'''<br> | ||
+ | 자음 k는 한국어의 'ㅋ'과 유사하다. 단어 안에서 음절 끝에 쓰이는 k는 한국어의 받침'ㄱ'과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74<br> | ||
+ | '''g'''<br> | ||
+ | 자음 g는 한국어의 'ㄱ'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4<br> | ||
+ | '''h'''<br> | ||
+ | 자음 h는 한국어의 'ㅎ'과 유사하다. 유일하게 동그라미가 있는 글자이다. 유니코드는 1865<br> | ||
+ | '''b'''<br> | ||
+ | 자음 b은 한국어의 'ㅂ'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2A<br> | ||
+ | '''p'''<br> | ||
+ | 자음 p는 한국어의 'ㅍ'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6<br> | ||
+ | '''s'''<br> | ||
+ | 자음 s는 한국어의 'ㅅ'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7<br> | ||
+ | '''š'''<br> | ||
+ | 자음 š는 발음기호 ʃ 의 발음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7<br> | ||
+ | '''t'''<br> | ||
+ | 자음 t는 한국어의 'ㅌ'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8<br> | ||
+ | '''d'''<br> | ||
+ | 자음 d는 한국어의 'ㄷ'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9<br> | ||
+ | '''l'''<br> | ||
+ | 자음 l는 한국어의 'ㄹ'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2F<br> | ||
+ | '''m'''<br> | ||
+ | 자음 m는 한국어의 'ㅁ'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2E<br> | ||
+ | '''c'''<br> | ||
+ | 자음 c는 한국어의 'ㅊ'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34<br> | ||
+ | '''j'''<br> | ||
+ | 자음 j는 한국어의 'ㅈ'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35<br> | ||
+ | '''y'''<br> | ||
+ | 자음 y는 모음 a, e, o, u, ū와 결합한다. 영어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36<br> | ||
+ | '''r'''<br> | ||
+ | 자음 r은 영어의 'r'과 유사하다. 어두의 형태망 있을 뿐, 실제로 어두에 오지 않는다. 유니코드는 1875<br> | ||
+ | '''f'''<br> | ||
+ | 자음 f는 영어의 'f'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76<br> | ||
+ | '''w'''<br> | ||
+ | 자음 w는 모음 a,e와 결합한다. 유니코드는 1838<br> | ||
+ | '''ng'''<br> | ||
+ | 자음 ng는 어두형태가 없으며 따라서 어두에 위치하지 않는다. 유니코드는 1829 | ||
+ | ===특수문자=== | ||
+ | 만주문자에서 특수문자는 만주어 고유 발음에는 없는 외래어, 당시로는 한어나 몽골어 인명과 지명 등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일본어의 가타카나와 비슷한 듯 하다) | ||
+ | [[파일:만주어특수.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사진출처 : 『초급 만주어』, 박문사]] | ||
+ | ==조선과 만주어== | ||
+ | 조선시대 외교관을 양성하는 사역원에서는 한학漢學, 몽학蒙學, 왜학倭學, 청학淸學을 설치하여 중국어, 몽골어, 일본어, 만주어를 교육하였다. 본래는 여진학이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여진학을 청학으로 바꾸고 만주어를 교육하였다.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2018년 12월 17일 (월) 15:57 기준 최신판
개요
만주문자는 청나라 만주족이 사용하던 언어로서 1599년 여진 부락을 통합하고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누르하치가 창제한 문자이다. 만주문자는 몽골 문자와 함께 위구르 문자, 소그드 문자, 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는 물론 더 멀리는 라틴 문자, 이집트문자 등과도 같은 계통의 문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만주족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 만주족이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중원에 들어가 패권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만주문자는 몽골문자를 본떠 만들어졌는데, 몽골어와 소리체계가 달라 표기 상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문자가 만들어 진지 30여 년 후 1632년, 다하이[達海]라는 학자가 초기 만주 문자를 개량하여 점(∙)과 동그라미(∘)를 더하여 만주어의 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된다.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은 오늘 날의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민족이다. 이 만주지역에는 다양한 북방 민족들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을 크게 묶어 퉁구스족이라고 하고 이들 민족이 사용했던 언어를 만주퉁구스어파로 분류한다. 이 계통에 해당하는 어파는 11개로 크게 북부 퉁구스어군과 남부 만주어군으로 나뉘며, 전자는 어원어, 어웡키어, 솔론어, 네기달어가 포함되고 후자에는 나나이어, 월타어, 울치어, 우디허어, 오로치어, 만주어, 시버어가 포함된다. [1]
현존하는 만주문헌은 그 수량이 아주 방대하다. 북경 중국제1역사당안관에만 소장된 청대 만주어 문헌만 100만건이 넘는다. 이는 청대 약 300년시기의 국정과 대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으로 만주어를 전공하는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징
만주문자는 과거 한문이 그럤던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쓰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된다. 만주문자를 공부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같은 글자라도 단어에서 어디에 놓이느냐 따라(즉, 단독으로 쓰이느냐, 어두, 어중, 어말에 쓰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만주문자가 단순히 한자가 아니라 아랍문자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2] 때문에 표음문자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알파벳과 같은 완전한 형태의 음소 단위 문자가 아니라, 음절문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모음은 총 6개, 자음은 19개이다. 또한 일본의 가타카나처럼 외래어의 음을 표기하기 위해 특수문자 10개가 있다. 때문에 총 35개의 자모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글은 획이 추가됨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자질문자(資質文字)다. 만주문자 또한 한글의 자질문자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밑에 자모음 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a'의 경우, 점이 하나 추가되면 'e'가 되고 'o'또한 점이 추가되면 'u'가 된다. 't'는 점이 추가됨에 따라 'd'가 되고, 'k'는 점 하나가 추가되면 'g'가 되고, 속이 빈 동그라미 '。'가 추가되면 'h'가 된다.
창제배경
창제 배경은 한글의 창제배경과 유사하다. 누르하치는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존의 몽골문자를 따라 쓰던 방식에서 벗어나 여진어에 맞게 개량된 문자를 원했다. 처음 누르하치가 박시(만주발음으로 박시로 博士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르더니에게 만주문자를 만들라고 했을 때, 이들은 예로부터 써오던 몽골문자를 어떻게 바꾸냐고 반대하였다. 그러자 누르하치는 "한인 나라의 글을 읽으면 한문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몽고국의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글을 모르는 사람도 모두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의 글을 몽고어로 써서 읽으면 우리나라의 글을 모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리나라의 말로 쓰는 것은 어렵고 다른 몽고국의 말은 어찌 쉬운가!"하며 질책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만주문자의 창제 원리는 가르쳤다. "'아'라는 문자를 쓴 뒤, 아래에 마를 놓으면 아버지라는 뜻의 '아마'가 된다. '어'라고 쓴 뒤, 아래에'머'를 넣으면 '어머(어머니)'가 된다. 너희는 써보아라. 될 것이다."하였다.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의 상황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3]
발전과 쇠퇴
1644년 만주족은 산해관을 넘어(入關) 중원을 차지한다. 만주족은 이전의 정복왕조들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만주족은 소수였고 한족의 수는 굉장히 많았다. 만주족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만주족 관원들에게 만주어와 만문을 익히게 하였고 공식 문서에 만주문자를 우선적으로 사용하여 만주어와 만주문자를 지켜나가고자 하였다.
초창기 만주문자는 몽골문자의 모양과 음을 차용하여 함께 표기하였기에 몽골문자와 매우 흡사하였다. 하지만 만주어와 몽골어는 서로 다른 언어인지라 일정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만주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여러 문제점들이 노출되게 되었고, 1632년 홍타이지는 다하이에게 만주문자를 다시 제정하도록 한다. 이때 제정된 것을 신만문新满文이라 한다.
만문이 청조의 국어가 되고 만문 자체도 큰 발전을 하게 된다. 만문의 규칙이 생기고, 표현 또한 더욱 섬세해지고 정확해졌다.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져 어휘가 풍성해진다. 특히 강희47년(1708년)에 편찬된 <어제청문감御制淸文鑑>은 만주문자로 만주문자를 해설한 사전으로 당대 만주문자의 흥성함을 보여준다.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청나라는 주도적으로 만주문자를 확산시켜나가는데, 중국의 경전과 역사, 문학 관련 문헌들을 만주어로 번역한다. 청나라가 강성하던 시기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효경>, <소학>, <손자병법>, <삼국지>, <서상기>, <금병매>, <요재지이> 등 많은 경전, 역사책 등이 만주어로 번역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만주족들도 중국어에 익숙해졌다. 이는 청나라 시기 공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순치, 강희, 옹정제 시기는 중요 문서들은 물론 일반적인 공문서들 또한 모두 만주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건륭, 가경, 함풍제 시기의 공문서는 만한 병용문서로 변한다. 함풍제와 동치제 이후의 공문서는 만주문자의 사용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4]
만주어는 17-18세기 서구에서온 유럽학자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주목 받을 적이 있었다. 표의문자가 익숙하지 않은 선교사들에게 한자는 아주 난해한 문자로 다가왔다. 그들에게는 그나마 표음문자의 특성을 지닌 만주어가 더 쉬웠다. 이미 중국의 중요한 고문 등은 만주어로 번역이 된 상태였기에 선교사들은 만주어 번역서들을 통해 중국문화에 접근하고 이해하여 했다. [5]
하지만 19세기 무렵, 청나라는 국력이 약화되고 1902년 서태후는 만문 폐지령을 내린다. 이 지령으로 관청의 공문서, 교육시설에서는 더이상 만주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911년,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지 100여년이 흘렀다. 이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거친 만주어는 죽어가는 언어dying language로 규정되어 있다.
현대중국의 소수민족인 만주족의 인구는 1000만명 가까이 되지만 이 중 만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흑룡강성]에 삼가자촌三家子村에 거주하고 있는 고령의 노인들만이 완벽한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고, 신강新疆 찹차르 시버족 자치현의 일부 시버족은 만주어의 방언이라는 시버어를 구사할 수 있다. 시버어는 방언이기에 음운이나 발음, 단어 면에서 만주어와 다른 점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의 사어死語를 '죽어가는 언어'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언어이다. 중국 정부는 만주어 보존을 위해 2011년 중국의 헤이룽장 대학에 만주어 관련 학과를 설립하여 만주어를 교육하며 가르치고 있다. 이는 수십년이 지났음에서 대부분이 조선어를 구사할 수 있는 조선족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문자의 구성
모음
만주어의 모음은 총 6개로, a, e, i, o, u, ū로 구성되어 있다.
a
모음 a는 한국어의 '아'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20
e
모음 e는 한국어의 '어'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5D
i
모음 i는 한국어의 '이'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73
o
모음 o는 한국어의 '오'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23
u
모음 u는 한국어의 '우'와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60
ū
모은 ū의 정확한 발음은 추측될 뿐이다. 대부분 자음 g, k, h의 뒤에 나타난다. 유니코드는 1861
자음
n
자음 n은 한국어의 'ㄴ'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28
k
자음 k는 한국어의 'ㅋ'과 유사하다. 단어 안에서 음절 끝에 쓰이는 k는 한국어의 받침'ㄱ'과 비슷하다. 유니코드는 1874
g
자음 g는 한국어의 'ㄱ'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4
h
자음 h는 한국어의 'ㅎ'과 유사하다. 유일하게 동그라미가 있는 글자이다. 유니코드는 1865
b
자음 b은 한국어의 'ㅂ'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2A
p
자음 p는 한국어의 'ㅍ'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6
s
자음 s는 한국어의 'ㅅ'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7
š
자음 š는 발음기호 ʃ 의 발음과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7
t
자음 t는 한국어의 'ㅌ'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8
d
자음 d는 한국어의 'ㄷ'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69
l
자음 l는 한국어의 'ㄹ'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2F
m
자음 m는 한국어의 'ㅁ'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2E
c
자음 c는 한국어의 'ㅊ'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34
j
자음 j는 한국어의 'ㅈ'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35
y
자음 y는 모음 a, e, o, u, ū와 결합한다. 영어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36
r
자음 r은 영어의 'r'과 유사하다. 어두의 형태망 있을 뿐, 실제로 어두에 오지 않는다. 유니코드는 1875
f
자음 f는 영어의 'f'와 유사하다. 유니코드는 1876
w
자음 w는 모음 a,e와 결합한다. 유니코드는 1838
ng
자음 ng는 어두형태가 없으며 따라서 어두에 위치하지 않는다. 유니코드는 1829
특수문자
만주문자에서 특수문자는 만주어 고유 발음에는 없는 외래어, 당시로는 한어나 몽골어 인명과 지명 등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일본어의 가타카나와 비슷한 듯 하다)
조선과 만주어
조선시대 외교관을 양성하는 사역원에서는 한학漢學, 몽학蒙學, 왜학倭學, 청학淸學을 설치하여 중국어, 몽골어, 일본어, 만주어를 교육하였다. 본래는 여진학이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여진학을 청학으로 바꾸고 만주어를 교육하였다.
참고자료
연세대학교 문자의 사회문화적 연구, http://munja.yonsei.ac.kr/archives/archives_02_1_14.php
이선애 지음,『초급 만주어』, 박문사
정광,『알타이 제민족의 문자 제정과 사용』,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제30회 국제학술대회
쟝챠오, 『만주문자의 발전과 청대의 만주어문헌』, 중국 사회과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