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경제벨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참고목록) |
(→미국 싱크탱크의 관점) |
||
(사용자 4명의 중간 판 69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8번째 줄: | 8번째 줄: | ||
지정학은 지리적인 환경이 국가에 미치는 정치적인, 군사적인, 경제적인 영향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지정학은 정치지리학에 속하는 하나의 이론체계로서, 지리적 요인과 정치구조에 따라 형성되는 역내 또는 국제사회의 전략적 정세와 국가행위를 분석 및 예측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정학은 19세기에 탄생한 이후 2차 세계 대전까지 국가관계의 핵심이론으로서 정계·학계에서 활발히 연구되었으나, 독일의 지정학 이론이 나치의 전쟁과 침략을 정당화했다는 지정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미·소 간 대립으로 이념이 중시된 냉전이 시작된 이후 그 중요성이 폄하되고 무시되어 관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이후 ‘새로운 질서’가 강조되면서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국제관계 분석에서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더불어 ‘탈냉전 질서 이후의 새로운 질서’로 지정학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br> | 지정학은 지리적인 환경이 국가에 미치는 정치적인, 군사적인, 경제적인 영향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지정학은 정치지리학에 속하는 하나의 이론체계로서, 지리적 요인과 정치구조에 따라 형성되는 역내 또는 국제사회의 전략적 정세와 국가행위를 분석 및 예측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정학은 19세기에 탄생한 이후 2차 세계 대전까지 국가관계의 핵심이론으로서 정계·학계에서 활발히 연구되었으나, 독일의 지정학 이론이 나치의 전쟁과 침략을 정당화했다는 지정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미·소 간 대립으로 이념이 중시된 냉전이 시작된 이후 그 중요성이 폄하되고 무시되어 관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이후 ‘새로운 질서’가 강조되면서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국제관계 분석에서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더불어 ‘탈냉전 질서 이후의 새로운 질서’로 지정학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br> | ||
− | 일대일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지구적 지정학의 지도를 뒤집는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테두리 지역을 미국의 영향 아래 두어 심장부(heartland) 지역을 확보한 공산주의 세력이 뻗어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주변지대론(Rimland Theory)’이 보여주는 것처럼, 태평양은 냉전 이래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정학에서 보면 중국이 바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입구 곳곳에 미국이 포진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전략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세력권인 태평양 연해에서 미국과 경쟁하기보다, 아예 지정학의 중심을 유라시아로 옮겨오는 것이다.<br> | + | '일대일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지구적 지정학의 지도를 뒤집는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테두리 지역을 미국의 영향 아래 두어 심장부(heartland) 지역을 확보한 공산주의 세력이 뻗어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주변지대론(Rimland Theory)’이 보여주는 것처럼, 태평양은 냉전 이래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정학에서 보면 중국이 바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입구 곳곳에 미국이 포진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전략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세력권인 태평양 연해에서 미국과 경쟁하기보다, 아예 지정학의 중심을 유라시아로 옮겨오는 것이다.<br> |
앞서 말했듯이, 일대일로는 미국이 태평양 지대를 중심으로 패권을 유지하고 중국을 봉쇄하는 것에서 돌파하기 위한 중국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일대일로에서 실크로드 경제벨트’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목표가 지정학의 중심을 태평양에서(해양) 유라시아(대륙)로 옮기는 것이라면, 해상 실크로드보다는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해상 실크로드와는 달리 철도를 깔며 새로 길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과 그 파급력은 더욱 뛰어나다고 예상된다. <br> | 앞서 말했듯이, 일대일로는 미국이 태평양 지대를 중심으로 패권을 유지하고 중국을 봉쇄하는 것에서 돌파하기 위한 중국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일대일로에서 실크로드 경제벨트’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목표가 지정학의 중심을 태평양에서(해양) 유라시아(대륙)로 옮기는 것이라면, 해상 실크로드보다는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해상 실크로드와는 달리 철도를 깔며 새로 길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과 그 파급력은 더욱 뛰어나다고 예상된다. <br> | ||
73번째 줄: | 73번째 줄: | ||
2013년 9월 시진핑 주석은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브대학 강연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국가 모두의 공통된 전략목표는 경제의 장기적이고 안정된 발전이라 강조하고 실질적인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발전모델로서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구축 구상을 최초로 제안했다. 2013년 10월에는 시진핑 주석은 인도네시아 의회 연설에서 ‘중국·아세안(ASEAN) 공동운명체’와 ‘21세기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건설을 역설하였다. 그 뒤에, 2013년 12월 중공 중앙경제업무회의에서 중국지도부는 시 주석이 카자흐스탄과 인도네시아에서 각각 제의한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건설, 즉 ‘일대일로’를 2014년 6대 정부 주요과제 중의 하나로 채택하기로 하였다.<br> | 2013년 9월 시진핑 주석은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브대학 강연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국가 모두의 공통된 전략목표는 경제의 장기적이고 안정된 발전이라 강조하고 실질적인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발전모델로서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구축 구상을 최초로 제안했다. 2013년 10월에는 시진핑 주석은 인도네시아 의회 연설에서 ‘중국·아세안(ASEAN) 공동운명체’와 ‘21세기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건설을 역설하였다. 그 뒤에, 2013년 12월 중공 중앙경제업무회의에서 중국지도부는 시 주석이 카자흐스탄과 인도네시아에서 각각 제의한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건설, 즉 ‘일대일로’를 2014년 6대 정부 주요과제 중의 하나로 채택하기로 하였다.<br> | ||
+ | |||
2015년 3월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AIIB)의 흥행성공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한층 높아진 가운데 개최된 보아오(博鰲)포럼에서 일대일로에 관한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꺼내 놓으면서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2015년 4월 6일 중국은 ‘일대일로’프로젝트를 추진할 추진위원회(領導小組) 지도부를 확정하였다.<br> | 2015년 3월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AIIB)의 흥행성공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한층 높아진 가운데 개최된 보아오(博鰲)포럼에서 일대일로에 관한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꺼내 놓으면서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2015년 4월 6일 중국은 ‘일대일로’프로젝트를 추진할 추진위원회(領導小組) 지도부를 확정하였다.<br> | ||
+ | |||
2016년 5월 22일에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는 카자흐스탄 최대의 경제도시이자 온 중앙아시아의 금융·교육센터인 알마티(Almaty)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 제안한 일대일로 전략은 이미 34개의 국제조직 및 국가가 중국과 같이 ‘일대일로’ 공동건설을 한다는 내용의 각각 정부 간의 협정을 체결했으며 총 74 개의 국제조직 및 국가가 이 전략을 참여·지지했다고 밝혔다. | 2016년 5월 22일에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는 카자흐스탄 최대의 경제도시이자 온 중앙아시아의 금융·교육센터인 알마티(Almaty)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 제안한 일대일로 전략은 이미 34개의 국제조직 및 국가가 중국과 같이 ‘일대일로’ 공동건설을 한다는 내용의 각각 정부 간의 협정을 체결했으며 총 74 개의 국제조직 및 국가가 이 전략을 참여·지지했다고 밝혔다. | ||
96번째 줄: | 98번째 줄: | ||
|} | |} | ||
− | 이해를 돕고자 앞서 일본이 추진했던 경제회랑 사례를 살펴본다. 향후 일대일로 전략의 추진과정에서 이와 다른 형태가 전개될 수도 있으나 경제회랑 방식의 선례와 일대일로 전략에서 각 경제회랑이 갖는 특성을 적절히 결합할 경우 향후 일대일로 전략의 경제회랑 방식 추진과정에 대한 이해와 전망에 적지 않은 시사를 얻을 수 있을것이다. | + | 이해를 돕고자 앞서 일본이 추진했던 경제회랑 사례를 살펴본다. 향후 일대일로 전략의 추진과정에서 이와 다른 형태가 전개될 수도 있으나 경제회랑 방식의 선례와 일대일로 전략에서 각 경제회랑이 갖는 특성을 적절히 결합할 경우 향후 일대일로 전략의 경제회랑 방식 추진과정에 대한 이해와 전망에 적지 않은 시사를 얻을 수 있을것이다. <br> |
+ | |||
+ | ==5대 중점 추진방향== | ||
+ | 중국은 관련국가와의 공동개발을 통한 시장 확대라는 일대일로 전략의 목적성을 반영한 5대 중점 추진방향을 제시하였다.<br> | ||
+ | 첫째, 인프라 상호 연결(교통 인프라, 에너지 인프라, 통신 인프라) 인데, 중점 추진방향 중 핵심 현안과제에 해당하며,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갖는 투자 프로젝트 분야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전략의 공간적 범위를 구성하는 엄청난 거리를 연결하기 위해 당사국들의 동의와 협조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중국은 적극적인 투자 노력을 경주할 것으로 예상된다.<br> | ||
+ | 둘째, 투자 및 무역 원활화(투자와 무역 장벽 제거)인데, 관련 노선 의 인프라 및 기간시설 확충에 기반하여 동 노선을 활용한 실물 투자 및 상품무역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인프라 연결과는 달리 중국과 관련국 간 산업적 보완성 제고가 현실적으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br> | ||
+ | 셋째, 자금조달 원활화(AIIB 설립, 역내 국가간 화폐교환)인데, 인 프라 연결과 투자·무역 활성화를 위해서는 중국과 관련국 모두 엄 청난 규모의 투자 소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금융지원 플랫폼 구축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금융지원 플 랫폼과 관련국 간 금융협력을 통해 위안화 국제화의 새로운 추진동 력으로 작용할 여지가 적지 않다. <br> | ||
+ | 넷째, 정책 교류(정부 간 협력 강화)인데, 일대일로 공동 건설을 위 해 관련국 간 정책 협력 강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정책 교류의 주된 영역은 지역개발계획의 공동 추진, 양자·다자 간 대형 프로젝트의 입안 및 추진 등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지역경제 통합이 진전될 경 우 거시정책 협력단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br> | ||
+ | 다섯째, 문화적·인적 교류(관광, 학술, 문화, 매체 등)인데, 일대일로 공동 건설이 관련 국가 및 지역 간 실질적인 경제교류 증진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적·문화적 상호 이해 및 교류 증진이 뒷받침 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중국과 연선국 간 인적·문화적 교 류 프로젝트들을 지속적으로 발굴,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 ||
+ | [[파일:일대일로 전략의 5대 추진방향.jpg|400픽셀|가운데|일대일로 전략의 5대 추진방향]] | ||
+ | ] | ||
====3개 회랑==== | ====3개 회랑==== | ||
'일대일로' 전략의 육상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3개 노선이고, 21세기 해상 | '일대일로' 전략의 육상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3개 노선이고, 21세기 해상 | ||
113번째 줄: | 125번째 줄: | ||
북부 회랑은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벨트(一帶)’, 러시아의 ‘유라시아 대통로’, 몽골의 ‘초원의 길’ 프로젝트 간 연계를 통한 통관 및 운송 편리화 실현을 목표로 하며, 핵심 거점 국가는 몽골과 러시아이다.<br> | 북부 회랑은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벨트(一帶)’, 러시아의 ‘유라시아 대통로’, 몽골의 ‘초원의 길’ 프로젝트 간 연계를 통한 통관 및 운송 편리화 실현을 목표로 하며, 핵심 거점 국가는 몽골과 러시아이다.<br> | ||
중점 협력분야는 러시아 서부 시베리아와 중국 신장자치구 간 천 연가스 수송로 확보와 3국 간 육상 물류 개발이라 할 수 있다. 동 회랑은 관련국 모두 유사한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력 여건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몽골은 종합 국가 발전전략인 밀레니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마련하고 몽골이 아시아와 유럽 연결의 교량이 되어 에너지 수출 및 지역 운송 서비스를 연결하는 중심지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몽골 정부의 철도 운송 시스템 개발의 목적은 중국과 러시아에 새로운 철도 노선을 구축하여 광산제품 수출시장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도 ‘철도 운송 2030 전략’을 추진해왔다. 이는 극동지역과 | 중점 협력분야는 러시아 서부 시베리아와 중국 신장자치구 간 천 연가스 수송로 확보와 3국 간 육상 물류 개발이라 할 수 있다. 동 회랑은 관련국 모두 유사한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력 여건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몽골은 종합 국가 발전전략인 밀레니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마련하고 몽골이 아시아와 유럽 연결의 교량이 되어 에너지 수출 및 지역 운송 서비스를 연결하는 중심지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몽골 정부의 철도 운송 시스템 개발의 목적은 중국과 러시아에 새로운 철도 노선을 구축하여 광산제품 수출시장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도 ‘철도 운송 2030 전략’을 추진해왔다. 이는 극동지역과 | ||
− | 자바이칼(Zabaykalye)지역의 천연자원 이용, 몽골과 중국, 북한, 일본으로의 운송 증대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국내 자원 수출을 확대하여 유럽 경제 제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아시아지역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반면, 시장 성장성 측면에서는 중장기적으로 중국과 러시아 간 | + | 자바이칼(Zabaykalye)지역의 천연자원 이용, 몽골과 중국, 북한, 일본으로의 운송 증대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국내 자원 수출을 확대하여 유럽 경제 제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아시아지역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반면, 시장 성장성 측면에서는 중장기적으로 중국과 러시아 간 무역 증대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산업 측면의 파급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
======주요 국가====== | ======주요 국가====== | ||
217번째 줄: | 229번째 줄: | ||
또한, 카-중 국경지역인 호르고스에 Khorgos Eastgate 내륙항 구축, 연운항 카자흐 전용 부두 건립, 카스피해 악타우항 확장 및 쿠릭항 건설 등 카자흐스탄의 다양한 인프라 프로젝트 추진에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호르고스 내륙항과 연운항 카자흐 전용 부두는 카·중 양국이 공동투자한 것으로, 호르고스 카측 51%, 중국 49%, 연운항 카측 49%, 중국 51%) | 또한, 카-중 국경지역인 호르고스에 Khorgos Eastgate 내륙항 구축, 연운항 카자흐 전용 부두 건립, 카스피해 악타우항 확장 및 쿠릭항 건설 등 카자흐스탄의 다양한 인프라 프로젝트 추진에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호르고스 내륙항과 연운항 카자흐 전용 부두는 카·중 양국이 공동투자한 것으로, 호르고스 카측 51%, 중국 49%, 연운항 카측 49%, 중국 51%) | ||
− | [[파일:카자흐스탄 서유럽-서중국 고속도로.jpg| | + | [[파일:카자흐스탄 서유럽-서중국 고속도로.jpg|400픽셀|가운데|카자흐스탄-서유럽 중국 고속도로]] |
‘누를리졸’과 ‘일대일로’의 협력 | ‘누를리졸’과 ‘일대일로’의 협력 | ||
297번째 줄: | 309번째 줄: | ||
'''말레이시아'''<br> | '''말레이시아'''<br> | ||
− | + | [[파일:말레이시아 사업.png|600픽셀|섬네일|가운데|말레이시아]] | |
중국은 말레이시아에 산업단지 조성 등을 통한 협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일대일로 사업을 진행했다. 2011년 4월, 중국의 원자바오(溫家保) 당시 국무원 총리가 말레이시아 방문 시 말레이시아 나집(Najib) 총리와 양국이 공동으로 중국 광시장족 자치구 친저우(欽州) 시에 산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합의하였으며, 2012년 4월 업무 개시했다. 중국-말레이시아의 사업은 아세안(ASEAN)국가에 대한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간편한 입주절차 등을 바탕으로 2017년 7월까지 모두 150여개의 기업 및 총 400억 위안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였다. | 중국은 말레이시아에 산업단지 조성 등을 통한 협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일대일로 사업을 진행했다. 2011년 4월, 중국의 원자바오(溫家保) 당시 국무원 총리가 말레이시아 방문 시 말레이시아 나집(Najib) 총리와 양국이 공동으로 중국 광시장족 자치구 친저우(欽州) 시에 산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합의하였으며, 2012년 4월 업무 개시했다. 중국-말레이시아의 사업은 아세안(ASEAN)국가에 대한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간편한 입주절차 등을 바탕으로 2017년 7월까지 모두 150여개의 기업 및 총 400억 위안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였다. | ||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재정건전성 강화 조치에 따른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마하티르 신임 총리는 만성적인 재정적자 개선을 위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 중단했으며 재정건전성 강화 조치를 취했다. 마하티르 행정부는 말레이시아의 대외부채를 약 2,500억 달러(GDP의 80%)로 추정하여 통계자료보다 심각한 수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대규모 프로젝트 진행 중단 및 연기 등을 통해 재정건전성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18년 8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기존에 진행하던 3개 프로젝트(말레이시아 본섬 및 보르네오 섬에서 추진되던 석유·가스관 프로젝트(2개, 총 20억 달러), 말라카와 페트로나스 정유소를 잇는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8억 달러)) 의 취소를 통보했다. 동부해안 철도 건설사업(ECRL,(동북부의 태국과의 접경지역인 코타바루(Kota Baru)에서 수도인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를 거쳐 말라카 해협의 클랑(Klang)까지 총 688km에 이르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과도한 사업비책정 및 사업조건 변경 등을 사유로 추가 연기 또는 취소할 예정이다. 한편,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8년 9월 대외채무 관리 및 재정안정화를 위해 쿠알라룸푸르-싱가포르 고속철도(HSR) 프로젝트 시행을 2020년 5월 말로 연기하기로 싱가포르 정부와 합의했다. |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재정건전성 강화 조치에 따른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마하티르 신임 총리는 만성적인 재정적자 개선을 위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 중단했으며 재정건전성 강화 조치를 취했다. 마하티르 행정부는 말레이시아의 대외부채를 약 2,500억 달러(GDP의 80%)로 추정하여 통계자료보다 심각한 수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대규모 프로젝트 진행 중단 및 연기 등을 통해 재정건전성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18년 8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기존에 진행하던 3개 프로젝트(말레이시아 본섬 및 보르네오 섬에서 추진되던 석유·가스관 프로젝트(2개, 총 20억 달러), 말라카와 페트로나스 정유소를 잇는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8억 달러)) 의 취소를 통보했다. 동부해안 철도 건설사업(ECRL,(동북부의 태국과의 접경지역인 코타바루(Kota Baru)에서 수도인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를 거쳐 말라카 해협의 클랑(Klang)까지 총 688km에 이르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과도한 사업비책정 및 사업조건 변경 등을 사유로 추가 연기 또는 취소할 예정이다. 한편,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8년 9월 대외채무 관리 및 재정안정화를 위해 쿠알라룸푸르-싱가포르 고속철도(HSR) 프로젝트 시행을 2020년 5월 말로 연기하기로 싱가포르 정부와 합의했다. | ||
'''인도네시아'''<br> | '''인도네시아'''<br> | ||
− | + | [[파일:인도네시아 사업.png|600픽셀|섬네일|가운데|인도네시아]] | |
중국과 인도네시아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중국 고속철 굴기가 연계하여 현재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도로, 항만, 전력 등의 인프라가 부족해서 일대일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중국은 고속철 굴기를 추진하여 2008년 이후 10여 년간 중국 내 철도 인프라를 구축하는 한편 102개국 앞1,430억 달러 규모의 고속철 및 부품 수출을 통해 2018년 3월 말 기준으로 세계 고속철 시장의 66%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 철도사업이 시행되면 자카르타-반둥 간 이동시간을 단축하게 된다.(기존 3시간→40분) 또한 철도 건설로 파생되는 현지 건설 소재 산업 성장, 현지인력 채용 및 육성 등의 기대효과도 얻을 수 있다. | 중국과 인도네시아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중국 고속철 굴기가 연계하여 현재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도로, 항만, 전력 등의 인프라가 부족해서 일대일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중국은 고속철 굴기를 추진하여 2008년 이후 10여 년간 중국 내 철도 인프라를 구축하는 한편 102개국 앞1,430억 달러 규모의 고속철 및 부품 수출을 통해 2018년 3월 말 기준으로 세계 고속철 시장의 66%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 철도사업이 시행되면 자카르타-반둥 간 이동시간을 단축하게 된다.(기존 3시간→40분) 또한 철도 건설로 파생되는 현지 건설 소재 산업 성장, 현지인력 채용 및 육성 등의 기대효과도 얻을 수 있다. | ||
2018년 8월 말 중국 광저우에서 개최된 투자유치 설명회에서 인도네시아 투자조정청은 90개 중국 기업 앞 민자발전사업, 고속도로 건설 사업 등 약 132억 달러 규모의 인프라 건설 사업을 제안했다. | 2018년 8월 말 중국 광저우에서 개최된 투자유치 설명회에서 인도네시아 투자조정청은 90개 중국 기업 앞 민자발전사업, 고속도로 건설 사업 등 약 132억 달러 규모의 인프라 건설 사업을 제안했다. | ||
308번째 줄: | 320번째 줄: | ||
'''인도'''<br> | '''인도'''<br> | ||
− | + | [[파일:인도 사업.png|600픽셀|섬네일|가운데|인도]] | |
인도는 중국과 함께 세계 양대 개발도상국으로, 오랜 기간 국경분쟁의 상대국이었던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주변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에 대해 견제 심리가 존재했다. | 인도는 중국과 함께 세계 양대 개발도상국으로, 오랜 기간 국경분쟁의 상대국이었던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주변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에 대해 견제 심리가 존재했다. | ||
중국은 인도의 세계 최대 교역국이며, 인도는 중국의 세계 6위 교역국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동진정책인 ‘Act East‘ 전략, 경제 몬순정책 등을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응하는 양상을 보였다. | 중국은 인도의 세계 최대 교역국이며, 인도는 중국의 세계 6위 교역국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동진정책인 ‘Act East‘ 전략, 경제 몬순정책 등을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응하는 양상을 보였다. | ||
315번째 줄: | 327번째 줄: | ||
'''파키스탄'''<br> | '''파키스탄'''<br> | ||
− | + | [[파일:파키스탄 사업.png|600픽셀|섬네일|가운데|파키스탄]] | |
중국과 파키스탄은 ‘중-파 경제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CPEC)’ 조성했다. ‘중-파 경제회랑’은 6대 경제회랑 중 유일하게 단일 국가와 추진한 경제회랑이다. 중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기반하여, 파키스탄은 중국과 유일하게 ‘전천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다. 중-파 경제회랑에서는 중국은 약 620억 달러 규모 투자를 계획 중이며, 이를 통해 파키스탄의 과다르 지역에서 중국 서부의 신장 지역(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이르는 구간을 개발해 연결할 예정이다. | 중국과 파키스탄은 ‘중-파 경제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CPEC)’ 조성했다. ‘중-파 경제회랑’은 6대 경제회랑 중 유일하게 단일 국가와 추진한 경제회랑이다. 중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기반하여, 파키스탄은 중국과 유일하게 ‘전천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다. 중-파 경제회랑에서는 중국은 약 620억 달러 규모 투자를 계획 중이며, 이를 통해 파키스탄의 과다르 지역에서 중국 서부의 신장 지역(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이르는 구간을 개발해 연결할 예정이다. | ||
하지만 파키스탄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참여로 거시경제 안정성 저하 및 외화유동성 위기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중-파 경제회랑(CPEC) 사업 추진 및 고유가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심화 등을 감안, IMF 추정 기준 2018년 외화금융수요가 215억 달러로 예상되나 ’2018년 8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이 99억 달러(1.7개월 수입분)까지 축소되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 누적과 통화가치 평가절하*로 ’18.6월 말 정부 및 정부보증 채무가 GDP의 76%까지 증가하였으며, 국내 공공채무의 60%가 만기 1년 미만으로 만기구조도 취약하다. 특히, 중국에 대한 총 공공외채는 ’18.9월 현재 GDP의 24%(IMF 추정) 수준이나, 프로젝트 소요자금은 중국으로부터의 장기 양허성 차관 외 FDI, 민간 부문 차입분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파키스탄 재무장관은 2018년 10월 11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에서 IMF 총재와의 면담을 통해 IMF의 금융지원을 공식 요청하였으며, IMF 총재는 가까운 시일 내에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조사단을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 IMF에서는 파키스탄 내 중국 일대일로 사업과 관련해 비공개된 정보의 투명화를 요구할 것으로 예측되며, 미국 폼페이오 장관이 파키스탄에 대한 IMF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에 대해 중국 견제의 필요성을 감안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등 IMF 구제금융 승인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 하지만 파키스탄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참여로 거시경제 안정성 저하 및 외화유동성 위기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중-파 경제회랑(CPEC) 사업 추진 및 고유가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심화 등을 감안, IMF 추정 기준 2018년 외화금융수요가 215억 달러로 예상되나 ’2018년 8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이 99억 달러(1.7개월 수입분)까지 축소되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 누적과 통화가치 평가절하*로 ’18.6월 말 정부 및 정부보증 채무가 GDP의 76%까지 증가하였으며, 국내 공공채무의 60%가 만기 1년 미만으로 만기구조도 취약하다. 특히, 중국에 대한 총 공공외채는 ’18.9월 현재 GDP의 24%(IMF 추정) 수준이나, 프로젝트 소요자금은 중국으로부터의 장기 양허성 차관 외 FDI, 민간 부문 차입분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파키스탄 재무장관은 2018년 10월 11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에서 IMF 총재와의 면담을 통해 IMF의 금융지원을 공식 요청하였으며, IMF 총재는 가까운 시일 내에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조사단을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 IMF에서는 파키스탄 내 중국 일대일로 사업과 관련해 비공개된 정보의 투명화를 요구할 것으로 예측되며, 미국 폼페이오 장관이 파키스탄에 대한 IMF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에 대해 중국 견제의 필요성을 감안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등 IMF 구제금융 승인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 ||
324번째 줄: | 336번째 줄: | ||
====국내 주요 거점==== | ====국내 주요 거점==== | ||
− | '일대일로' 전략의 대내적인 목적은 지역 불균형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대일로' 관련 주요 거점지역의 개발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내 '일대일로' 거점지역은 2개 핵심지역, 2개 국제 거점, 18개 성, 7개 고지(高地), 16개 항구를 포함한다. 2개 핵심지역은 신장과 푸젠이며, 2개 국제 거점은 상하이와 광저우이다. 18개 | + | '일대일로' 전략의 대내적인 목적은 지역 불균형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대일로' 관련 주요 거점지역의 개발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내 '일대일로' 거점지역은 2개 핵심지역, 2개 국제 거점, 18개 성, 7개 고지(高地), 16개 항구를 포함한다. 2개 핵심지역은 신장과 푸젠이며, 2개 국제 거점은 상하이와 광저우이다. 18개 성(산시성, 간쑤성, 칭하이성, 닝샤자치구, 신장자치구, 내몽골자치구, 충칭시, 윈난성, 시장자치구, 광시자치구, 랴오닝성, 지린성, 헤룡강성, 상하이시,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해남성)은 서북 6성, 동북 3성, 서남 3성, 연해 5성, 내륙의 충칭이고 7개 고지(高地)는 청두, 창사, 시닝, 우한, 정저우, 난창, 허베이이며, 16개 항구는 대련, 광저우, 샤문, 상하이, 칭다오, 닝보, 푸저우, 산야 등을 의미하는데. 그 구체적인 지역은 다음 그림이다. |
<br> | <br> | ||
[[File:일대일로 거점.jpg|500픽셀]] | [[File:일대일로 거점.jpg|500픽셀]] | ||
+ | |||
+ | ‘육상실크로드’ 거점도시는 시안, 난저우, 시닝, 우루무치 등 4개 거점도시를 선정하였다. ‘육상실크로드’는 중국 동북 3성, 서북 5성, 서남 4성을 거친다. | ||
=====동북지역===== | =====동북지역===== | ||
=====서북지역===== | =====서북지역===== | ||
+ | =====화북지역===== | ||
====에너지 사업==== | ====에너지 사업==== | ||
337번째 줄: | 352번째 줄: | ||
안보의 개념은 크게 2가지 의미가 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안보는 생존, 환경, 치안 등의 개념을 포함하는 안보이다. 에너지 외교와 정치 관점에서의 안보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에너지 수송로와 에너지 자체를 확보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번에 차용할 안보의 개념은 후자이다. | 안보의 개념은 크게 2가지 의미가 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안보는 생존, 환경, 치안 등의 개념을 포함하는 안보이다. 에너지 외교와 정치 관점에서의 안보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에너지 수송로와 에너지 자체를 확보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번에 차용할 안보의 개념은 후자이다. | ||
− | Yergin은 과거의 에너지 안보의 핵심요소와 대책은 석유 공급량의 안정적 확보와 이를 위한 공급원 다변화가 주요 내용이었지만, 이제는 더 넓은 차원으로 확대되어 모든 에너지의 생산, 수송, 유통 체계 및 인프라의 보호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대된다고 얘기한다. 1980년 중반 이후에서 현재까지 제시된 에너지 안보의 | + | Yergin은 과거의 에너지 안보의 핵심요소와 대책은 석유 공급량의 안정적 확보와 이를 위한 공급원 다변화가 주요 내용이었지만, 이제는 더 넓은 차원으로 확대되어 모든 에너지의 생산, 수송, 유통 체계 및 인프라의 보호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대된다고 얘기한다. 1980년 중반 이후에서 현재까지 제시된 에너지 안보의 개념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고 한다. 공급량의 “적정성”, “안정성/신뢰성”, 그리고 가격의 “합리성”이다. 이 요소들은 정책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너지 안보 정책은 에너지 공급이 어떠한 방해나 위협 없이 원활히 가능하며, 석유 가격의 폭등 등의 문제를 저지해서 적절한 에너지 가격을 유지하고, 큰 위기상황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해결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
− | |||
안드리스 피에발그스(유럽연합 에너지 집행위원)은 공급 안보의 문제라는 게 예전에는 매우 전문적인 공학자나 시스템 운영자가 담당하는 기술적인 문제였지만, 이제는 에너지 안보 문제를 유럽 전역의 에너지 장관들뿐 아니라 외교, 재무, 산업 장관들이 검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에너지 안보는 과학적 발전 방향뿐만 아니라 경제적, 외교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려면 에너지를 국가 내에서 생산해 자급자족이나 단일통로만 공급받는 것으로 한계가 있다. 다양한 새로운 에너지 통로를 구축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에너지 안보 정책은 국가차원에서 외교적, 경제적, 지정학적 고려를 통해 시행되어야 한다. | 안드리스 피에발그스(유럽연합 에너지 집행위원)은 공급 안보의 문제라는 게 예전에는 매우 전문적인 공학자나 시스템 운영자가 담당하는 기술적인 문제였지만, 이제는 에너지 안보 문제를 유럽 전역의 에너지 장관들뿐 아니라 외교, 재무, 산업 장관들이 검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에너지 안보는 과학적 발전 방향뿐만 아니라 경제적, 외교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려면 에너지를 국가 내에서 생산해 자급자족이나 단일통로만 공급받는 것으로 한계가 있다. 다양한 새로운 에너지 통로를 구축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에너지 안보 정책은 국가차원에서 외교적, 경제적, 지정학적 고려를 통해 시행되어야 한다. | ||
− | '''중국의 에너지 안보'''<br> | + | '''중국의 에너지 안보'''<br> |
+ | |||
+ | 중국 우한대학의 양쩌웨이 교수는 중국의 에너지 안보를 3단계로 설명했다. 1단계는 1949년에서 1992년까지의 시기이다. 중국은 이 당시에는 에너지를 자급자족하였다. 2단계는 1993년에서 2002년까지의 시기이다. 중국은 에너지 공급 안보에 주의하던 시기였다. 중국은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에너지 수입국으로 전환되면서 에너지 안보에 집중했다. 3단계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중국은 에너지 개척과 효율적인 물류노선에 집중하고 있다. | ||
− | 중국은 | + | 중국은 현재 3단계 에너지 안보정책을 시행하고 있다.중국의 에너지 안보정책은 에너지 공급원 및 수입경로의 다변화, 해외 자원개발 확대, 석유 및 가스저장 능력 강화, 국내 생산능력 제고, 에너지 효율 제고로 구분된다. 기본적인 방침은 국내와 해외에서 에너지 공급력을 확보하는 것에 주력하며, 더 세부적으로는 수송상의 안정 확보와 안정적 에너지 수급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중국은 1993년부터 원유 순수입국으로 전환되면서 원유 해외수입 의존도가 높아졌다. 수입 의존도의 확대는 에너지 안보정책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
에너지 공급원 및 수입경로의 다변화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은 다양한 국가와 에너지 계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석유 공급의 60%로는 중동에 의존하고 80%를 말래카해협을 통과하는 통로에 의존하여 수입 경로가 한정적이었다.그래서 에너지 공급 국가들과 에너지 계약과 수송로 건설 계약을 맺었다. 석유의 경우, 2013년 6월에 러시아 국영석유사 Rosneft와 원유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하였고 9월에 카자흐스탄의 카스피해 카샤간 유전 지분의 8.4%를 매입했다. 천연가스의 경우, 중국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잇는 25bcm이르는 가스관을 추가 건설해서 이전에 있던 가스관을 더 확장하는 계약을 합의했다. 2013년 7월에 미얀마-중국가스관을 건설해 가동하기도 했다. 2014년 5월에는 러시아 국영천연가스회사 가스프롬과 장기 가스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는 석유, 가스 공급원 모두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 동부지역에 진출하고, 중국CPNC(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는 아프리카의 정제공장과 파이프라인에 투자하고 있다. 중국은 중동지역 단일화 통로에서 벗어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리카 등의 지역의 다양한 수송로를 확보하는 정책을 시행중이다. | 에너지 공급원 및 수입경로의 다변화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은 다양한 국가와 에너지 계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석유 공급의 60%로는 중동에 의존하고 80%를 말래카해협을 통과하는 통로에 의존하여 수입 경로가 한정적이었다.그래서 에너지 공급 국가들과 에너지 계약과 수송로 건설 계약을 맺었다. 석유의 경우, 2013년 6월에 러시아 국영석유사 Rosneft와 원유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하였고 9월에 카자흐스탄의 카스피해 카샤간 유전 지분의 8.4%를 매입했다. 천연가스의 경우, 중국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잇는 25bcm이르는 가스관을 추가 건설해서 이전에 있던 가스관을 더 확장하는 계약을 합의했다. 2013년 7월에 미얀마-중국가스관을 건설해 가동하기도 했다. 2014년 5월에는 러시아 국영천연가스회사 가스프롬과 장기 가스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는 석유, 가스 공급원 모두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 동부지역에 진출하고, 중국CPNC(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는 아프리카의 정제공장과 파이프라인에 투자하고 있다. 중국은 중동지역 단일화 통로에서 벗어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리카 등의 지역의 다양한 수송로를 확보하는 정책을 시행중이다. | ||
해외 자원 개발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은 정부와 정책은행은 국유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해외 에너지 수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중국 정부가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한 에너지,금속 관련분야 투자 비율을 보면 해외직접투자의 70%에 해당한다. 중국의 국영 정유회사인 CNPC, CNOOC,Sinopec은 해외유전매입에 고액을 투자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해외자원개발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 지역에 원조를 강화해왔다. | 해외 자원 개발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은 정부와 정책은행은 국유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해외 에너지 수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중국 정부가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한 에너지,금속 관련분야 투자 비율을 보면 해외직접투자의 70%에 해당한다. 중국의 국영 정유회사인 CNPC, CNOOC,Sinopec은 해외유전매입에 고액을 투자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해외자원개발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 지역에 원조를 강화해왔다. | ||
351번째 줄: | 367번째 줄: | ||
'''중국의 에너지 수입의 필요성'''<br> | '''중국의 에너지 수입의 필요성'''<br> | ||
− | + | [[파일:IEA 시나리오.jpg|600픽셀|섬네일|가운데|IEA 시나리오]] | |
+ | [[파일:ET 시나리오.jpg|600픽셀|섬네일|가운데|ET 시나리오]] | ||
중국의 에너지 수요는 총체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중국에서 주요하게 사용하는 에너지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이 있다. 이들의 수요 비율은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약 석유는 17%, 석탄은 72%, 천연가스는 2%~5%를 차지하고 있다. 수력, 원전, 풍력 등의 신재생 에너지원의 비율은 2015년에 11.2%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이 데이터를 통해, 석유, 석탄, 천연가스가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중국 에너지 소비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중국의 에너지 수요는 총체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중국에서 주요하게 사용하는 에너지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이 있다. 이들의 수요 비율은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약 석유는 17%, 석탄은 72%, 천연가스는 2%~5%를 차지하고 있다. 수력, 원전, 풍력 등의 신재생 에너지원의 비율은 2015년에 11.2%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이 데이터를 통해, 석유, 석탄, 천연가스가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중국 에너지 소비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
+ | |||
+ | 주요한 3가지 에너지에 집중하여 살펴보면, 석유는 2007년에서 2015년까지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 것에 비해 소비량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중국의 석유소비량과 경제성장률은 정비례한다. 중국은 석유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였지만 개혁개방 이후 석유소비량이 증가했다. 1993년부터 석유 소비량(1만 4950억톤)이 국내 생산량(1억 4400만톤)을 증가하면서 석유수입국으로 전환했다. 중국 내 최대 유전으로 알려진 다칭유전(大庆油田)의 석유생산량은 2020년까지 연평균 130만 톤을 감산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들은 중국의 석유소비가 심각하게 해외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국제에너지기구(IEA)와 중국내 관련 예측 치에 따르면 2025년에 중국의 석유 수입의존도는 82%에 도달하며, 2030년쯤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2030년 이후 전기자동차 보급이 확대되고 중국정부가 차량 소유 증가 제한, 수송부분 전력화 추친 등의 정책을 시행한다는 가정 하에 석유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 ||
+ | |||
+ | 석탄은 2007년에서 2014년까지 생산량과 소비량이 둘 다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고 2015년에는 소비량은 증가한 데 비해 생산량은 약간 감소했다. 석탄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총 에너지의 3분의 2를 담당하는 소비량의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중국은 석탄의 수요가 높은 만큼 많은 양의 석탄을 수입한다. 예를 들면, 중국은 2013년도 기준으로 약 327만 톤의 석탄을 수입했다. 국가별로 비중을 보면 인도네시아(39%), 호주(26%)에서 65%를 수입했고, 러시아에서 8%를 감안하면, 이들 3개국에서 전체의 73%를 수입했다. 중국의 석탄 수입은 202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증가하다가 노후된 발전설비 교체, 저열량탄 사용의 축소 등의 이유로 이후에 완만하게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035년에도 중국의 석탄 수입은 2012년의 2배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ET시나리오에 따르면 2020년대에 이르면 수요성장 둔화와 저탄소 연료로의 전환에 의해 에너지소비에 의한 중국의 탄소배출량이 최대치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이후부터 석탄소비가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 ||
+ | |||
+ | 천연가스는 2007년에서 2015년까지 생산량은 2008년부터 국내 수급 불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에 비해 소비량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나 중국내 관련 예측 치에 따르면 천연가스 수요는 5,000억 ㎥에 도달하여 40% 정도의 수입의존도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IEA에 따르면 천연가스 수요는 청정에너지원 보급 차원에서 산업 부문, 발전 부문 및 건물 부문에서 더욱 확대될 예정이다. 중국 천연가스 수요는 2040년까지 세계 천연가스 소비량의 4분의 1에 도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천연가스 생산량은 소비량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 ||
+ | 중국의 석유, 석탄, 천연가스는 전체적으로 수요량이 증가하는 것에 비해 생산량은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중국의 에너지 수요 비율과 현황은 중국의 에너지 수입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 ||
주요한 3가지 에너지에 집중하여 살펴보면, 석유는 2007년에서 2015년까지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 것에 비해 소비량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중국 내 최대 유전으로 알려진 다칭유전(大庆油田)의 석유생산량은 2020년까지 연평균 130만 톤을 감산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들은 중국의 석유소비가 심각하게 해외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국제에너지기구(IEA)나 중국내 관련 예측 치에 따르면 2025년에 중국의 석유 수입의존도는 82%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 주요한 3가지 에너지에 집중하여 살펴보면, 석유는 2007년에서 2015년까지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 것에 비해 소비량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중국 내 최대 유전으로 알려진 다칭유전(大庆油田)의 석유생산량은 2020년까지 연평균 130만 톤을 감산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들은 중국의 석유소비가 심각하게 해외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국제에너지기구(IEA)나 중국내 관련 예측 치에 따르면 2025년에 중국의 석유 수입의존도는 82%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 ||
398번째 줄: | 422번째 줄: | ||
==역사== | ==역사== | ||
+ | ===실크로드 개요=== | ||
+ |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를 범칭한다. 사실 '실크로드'라는 말의 출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독일의 지리학자인인 리히트 호펜(F. von. Richthofen)이 19세기 후반 중국 각지를 답사하면서 처음 명명하였다. 그는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서북 인도로 수출된 주요 물품이 비단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세(Seidenstrabe)"라고 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동양학자들은 지속된 연구를 통해 정의된 실크로드로는 동서 교류의 3대 통로, 즉 북방의 초원로와 중간의 오아시스로, 해로이다. 우리가 보통 실크로드라고 하면 낙타를 타고 사막에서 비단을 운반하는 상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리히트호펜이 처음 오아시스로를 실크로드라고 지칭하였기 때문이다. | ||
+ | |||
+ | 실크로드는 비단이 통한 길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실 비단을 제외한 수많은 물품들이 오갔다. 지금에 와서는 그 개념이 확대된 결과 하나의 상징으로서 쓰인다. 실크로드는 광의로서의 실크로드와 협의로서의 실크로드로 나눠볼 수 있다. 광의의 실크로드는 이 교역이 선사시대에 개통된 이후에 지금까지 기능하고 있다는 의미의 실크로드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인류의 대이동에 의해 유리시아에 몇 개의 길이 열렸는데 이것이 실크로드의 개통이며 지금에 와서도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협의로서의 실크로드는 교류의 흔적이 유물뿐만 아니라 문헌에 의해서도 입증된 7~8세기 초원로나 해로를 통한 실크로드로 18세기까지 기능했다는 의미의 실크로드이다. 근대적인 교통수단의 발명되었지만 근대 민족국가들이 출현으로 자유로운 이동이 제약되었기에 18세기를 실크로드의 종말로 본다. 오늘날의 실크로드는 대게 협의로서의 실크로드를 의미한다. | ||
+ | |||
+ | 실크로드의 변화과정은 크게 개척기와 번영기, 쇠퇴기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개척기는 기원전 8~7세기 스키타이가 초원로를 개척한 시기부터 장건의 서역로 개척으로 인해 동서간의 통교가 이루어진 시기를 말한다. 번영기는 중국의 비단이 다량으로 서역에 전파된 때부터 중국 당제국과 이슬람 제국에 의한 활발한 동서교류와 몽골제국의 형성에 의해 17세기 대륙 간 교역이 진행되던 시기를 말한다. 쇠퇴기는 18세기 이후 초원로와 오아시스로의 이용이 점차 퇴조, 마비된 시기이다. | ||
===초원로의 역사=== | ===초원로의 역사=== | ||
+ | 실크로드의 3대 교역로 중 가장 오래된 길은 '초원로'이다. 초원로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동서교류 통로를 지칭한다. 초원은 연평균 강수량이 250~500mm로 수목이 자라는데 적합하지 않고, 건기에는 볼모지이지만 우기에는 풀이 무성해지는 지대의 기후를 말한다. 유라시아는 총 4개의 긴 기후대가 형성되어 있다. 가장 북쪽에는 동토대(冻土带-흙이 어는 지대), 다음은 침엽수립 지대, 초원대, 가장 남쪽에 사막대이다. | ||
+ | |||
+ | 초원로의 특징은 길의 이용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 길은 지형이나 기후의 제약이 크게 없이 수시로 이용이 가능하며 길의 너비과 길이도 제약이 없다. 때문에 오아시스로나 해로에 비해 노선이 분명치 않다. 또한 이 길은 기마유목민족 전용의 길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교류 및 이동통로로 기능해왔다. | ||
+ | |||
+ | 기원전 8세기, 스키타이 문화는 초원로를 따라 동전하여 몽골고원을 지나 중국 화북지방의 오르도스 일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몽골 고원에서 일어난 흉노는 스키타이 문화를 비롯한 북방 기마 유목민족 문화와 한漢문화를 흡수, 융합하여 호한문화라는 흉노 특유의 기마유목문화를 창출하였다. 흉노에 이어 초원로를 누비며 동서교류의 주역을 담당한 민족은 돌궐족이다. 기원전 4세기 부터 몽골고원 곳곳에 산재한 유목민 일족인 돌궐은 기원후 552년에 유연 등 여러 미녹을 정복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6세기말, 소그디아나에 건국된 서돌궐은 동로마제국과 수차례에 걸쳐 사절을 교환하고 교역도 진행하여 초원로는 동서교류의 한 간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 ||
+ | |||
+ | 657년 서돌궐이 당에 의해 멸망한 뒤,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초원로는 당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8세기 아랍-이슬람군이 이 지역에서 당을 축출함으로서 당의 서진을 막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진다. (탈라스 전투) 이후, 이 지대는 아랍-이슬람 세력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3세기 몽골제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 ||
+ | |||
+ | 13세기 초, 아시아 전역과 유럽, 러시아지역은 몽골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기마유목민족인 몽골의 대규모 서방 정복은 초원로를 따라 진행된다. 몽골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부진한 상황에 처한 초우너로는 16세기 후반에 와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로 인해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다. 1581년 러시아는 탐험대를 파견하였으며 우랄산맥 동쪽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시베리아 라고 칭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의 초원로를 따라 계속 동진하였고 1638년에는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여으며 이후 남진하여 청나라의 국경지역 까지 세를 확장하였다.(네르친스크 조약). 우랄산맥 동쪽으로부터 남러시아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지나 부분적으로 북방 침엽수림대를 관통하여 흑룡강 일때까지 이어지는 길을 시베리아 초원로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길의 서쪽 부분은 전통적인 초원로의 일부분이나, 동쪽 길은 새로 개척된 초원로이다. 초원로는 다른 두 로드(오아시스로, 해로)보다 일찍 개통되었으며 상당히 오랫동안 동서 교류의 중요한 통로로 기능해왔다. 기록으로만 본다면 기원전 8~3세기의 스키타이의 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개척기에 이은 번영기는 흉노가 흥기한 기원전 3세기부터 몽골제국이 멸망한 14세기까지 볼 수 있다. (1700여년간 지속)몽골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부진하던 초원로는 16세기 후반, 시베리아 초원로(모피로)가 개척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초원로는 왕래가 줄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 ||
+ | |||
===오아시스로의 역사=== | ===오아시스로의 역사=== | ||
+ | 오아시스로는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건조지대(사막)에 존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동서교류의 통로를 지칭한다. 오아시스는 누구나 알다시피 사막의 건조지개 군데군데에 물이 괴어 있어 초목이 자라고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오아시스는 사막인들 생활의 보금자리일 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로서 문물이 집중되고 교통이 발달하여 도시도 형성되었다. 유라시아대륙에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고비사막-타클라마칸 사막 - 키질쿰 사막 - 카라쿰 사막 - 루트 사막 - 카비르 사막 - 시리아 사막으로 이어져 지중해 동안에 이른다. 이러한 사막대带에는 곳곳에 오아시스가 산재해 있다. 이것들이 이어져 이룬 길이 오아시스로이다. | ||
+ | |||
+ | 오아시스로는 실크로드의 여러 지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길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용도나 이용에서 여러 차례 기복을 겪은 초원로나 해로와는 달리 고대부터 근대까지 큰 변동 없이 줄곧 이용되어 왔다. 수많은 왕조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으며 오아시스로는 동서 교통로에서 문자 그대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때문에 리히트호펜 또한 이 오아시스로만을 실크로드로 간주하였다. 협의에서 오아시스로를 실크로드로 지칭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 ||
+ | |||
+ | 이 오아시스로는 처음부터 동서 구간이 일시에 개통된 것이 아니다. 파미르 고원의 횡단로가 뚫리면서 서로 연결되어 동서 관통로가 생긴 것이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에는 이미 정비된 교통이 존재하였는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가 광대한 교통로를 연결해 놓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서아시아 일대에는 발달된 교통로가 줄줄이 뻗어 있었다. | ||
+ | |||
+ | 파미르 고원의 동쪽은 서아시아 일대보다 그 기록이 늦는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의 명으로 서역을 개척한 장건이 이 지역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겼다. 전한 시기, 한나라에서 서역으로 가는 오아시스로는 남도南道와 북도北道 두 길이 있었다. 남도는 돈황 남쪽의 양관陽關을 지나 타림 분지의 우기于闐 등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나며 두 달래 길로 나뉜다. 한 길은 파르티아에 이르며, 다른 한 길은 시리아에 이른다. 북도는 투르판을 지나 천산 산맥의 기슭을 따라 가는 길이다. 이 길 역시 대완(페르가나)에서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한 길은 아랄해 북단 까지 이어지고, 또 다른 길은 안식(파르티아)에 이른다.기원전 60년, 한인들은 파미르 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제국까지 이어지는 오아시스로 남도와 북도를 알고 있었으며 이 길을 통해 서역제국과 사절을 교환하고 교역도 진행하였다. | ||
+ | |||
+ | 기원후 25~220, 후한 시기에 와서 서역과의 관계가 확대되며 오아시스로의 이용이 빈번해졌다. 7-8세기 수당대에는 서역과의 교역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해짐에 따라 동서교류의 주통로인 오아시스로의 역할이 한층 더 커지고 노선이 고착되기에 이른다. 일반적인 노선은 큰 변화가 없었으나 특히 당대에 와서는 당조가 지배권을 확립하고 파미르 고원 서쪽에 22개의 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서역에 대한 경영을 본격화한다. 이전에는 강종 교류가 오아시스로의 구간별로 간접적이고 단절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전노선에 걸쳐서 직접적이고 관통적인 방식으로 추진된다. 서역의 지역적 개념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와 이란, 아랍과 로마까지 확대되었다. | ||
+ | 오아시스로가 중국 당대에 고정된 이후에는 이 길을 따라 중세의 여러 역사적 변화가 전개되었다. 13세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대한 몽골의 정복과 정복 이후 일 칸국을 비롯한 서역의 속령에 대한 몽골의 경영은 오아시스로의 서단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몽골제국을 계승했다는 티무르 제국은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이 길의 서단을 종횡무진하며 전무후무한 중앙아시아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 ||
+ | 정리하자면,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 까지 1000년간 파미르 고원을 사이에 두고 서단과 동단이 각기 길을 개척, 정비하다가 기원전 2세기 장건에 의해 동서 양단이 연결, 소통하게 되었다. 기원 후 6세기 까지 주변 정세에 따라 노선이 가변적이었으나 당나라 시기 이후 노선이 고착화 되고 그 길을 따라 동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 ||
==전망== | ==전망== | ||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의의=== |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의의=== | ||
+ | ====중국 소프트파워의 제고==== | ||
+ | |||
====경제적 가치==== | ====경제적 가치==== | ||
====지정학 패권의 전환==== | ====지정학 패권의 전환==== | ||
=====미국중심의 패권===== | =====미국중심의 패권===== | ||
− | + | ||
− | |||
===실크로드 건설에의 난제=== | ===실크로드 건설에의 난제=== | ||
415번째 줄: | 467번째 줄: | ||
====민족문제==== | ====민족문제==== | ||
− | + | ||
=====신장 분리주의 운동===== | =====신장 분리주의 운동===== | ||
+ | 최근 중국은 중앙아시아를 유럽으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한다는 | ||
+ | 계획 하에서 2012년 9월 중국과 중앙아시아 인구 30 억 명을 하나로 묶는 | ||
+ | 경제공동체(실크로드 경제벨트) 구상을 발표했다. 중동지역에 50% 이상 석유를 의존하고 있는 중국은 엄청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함께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에너지 로드(Energy Road)’로 만들 계획에 있다. 최근 중국은 투르크메니스탄에 가스수송관 2개를 추가 건설하고 천연가스 수입량을 늘리기로 하고 카자흐스탄에 1100여㎞에 이르는 가스수송관 | ||
+ | 공동개발 협약을 맺었다. 또한 이러한 구상 하에서 현대적 인프라 구축을 | ||
+ | 위해 2012년 11월에는 시안에서 출발하는 3개 노선으로 구성된 ‘시안-중앙아시아 장안호(長安號) 국제화물열차’가 개통되었다. <br><br> | ||
+ | 중국은 중앙아시아에 광범위한 투자와 원조를 시행하고 있다. 공개된 자료로만 봐도 2010년 현재까지 중앙아시아 제 국가들에게 무려 약 9,500 만 | ||
+ | 위안 정도의 무상원조가 제공되었으며, 같은 시기 약 1.2억 달러에 이르는 | ||
+ | 무이자 차관을 제공하였다. 일반 대외 원조 차관도 약 2억 달러가 제공되었으며, 우대신용 차관도 약 150 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중국의 대 중앙아시아 | ||
+ | 투자도 급격히 증가해 왔는데 직접투자액의 경우 2008년에 19억 4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경제기술투자액 역시 동 년도에 20억 달러를 초과해 2000년도에 불과 4천 3백만 달러에 비해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br><br> | ||
+ | 이렇듯 중앙아시아와 중국은 단순한 교역량 증대를 넘어 급격하게 경제적 통합성이 강화되고 있다. 이렇게 급격하게 증대된 교역과 통합의 중간 | ||
+ | 매개 지역이 바로 신장 지역이다. 그러나 신장 지역은 기회의 땅이자, 동시에 불안정성이 극대화된 지역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와의 통합성 증대는 | ||
+ | 중국 내부의 통합성 약화로도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위구르 문제는 급격한 | ||
+ |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양대 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중국에게 있어서 | ||
+ | 약한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br><br> | ||
+ | ‘서부 대개발’정책을 비롯한 중국 정부의 서부 지역 개발 정책은 신장을 | ||
+ | 비롯한 서부 국경지대 소수민족들의 경제적 번영을 목표로 한 것이었지만, | ||
+ | 개발로 인해 증대된 부의 분배 정책의 미비 혹은 실패로 인하여 성장의 혜택은 한족 이주민들에게만 집중되어 민족 간 불평등이 증대되어 역내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1990년대 가장 규모가 컸던 일련의 위구르인 폭동이 일어난 지역은 우루무치를 제외하면 주로 서부와 남부 신장 지역이었는데, 이들 지역은 높은 실업율과 그 외의 여러 경제적 문제들이 심각한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br><br> | ||
+ |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적 원칙 하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아 온 시스템은 이제 사라졌고, 그 대신 일부에게는 성공과 번영의 기회가 주어진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한층 더 노동 시장에서의 불안정성이나 차별이 확대되면서 갈등은 더욱 확대되어 왔다. 특히 오랜 기간 동안 중국정부가 실행해왔던 소수민족에 대한 일부 영역에서의 우대 정책들은 ‘경쟁력 있는’ 시장 | ||
+ | 체제 건설 논리에 밀려서 축소되어 왔고, 이러한 장치가 약화되면서 민족차별 현상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br><br> 옛 소련 지역의 중앙아시아 국가, 투르크계 민족들과 중국 신장, 위구르인 사이에는 깊은 역사적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 간의 통합성 증대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중국 양자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동쪽과 남쪽으로의 | ||
+ | 영향력 확대가 여의치 않은 중국 정부는 경제적 측면 외에도 중앙아시아와의 교류와 교역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있고, | ||
+ | 그에 따라 ‘신 실크로드’구상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
+ | 그러나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방치한 채, 공정한 분배 시스템과 | ||
+ | 사회복지의 확충 없는 신장의 경제 발전과 중앙아시아와의 통합성 증대 노력은 오히려 위구르 민족분리운동에 자양분을 심어 주고, 초국적화된 이슬람 운동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중국 정부의 다양한 전략으로 위구르 문제는 적절히 통제되고 있지만, 향후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의 성공과 실패 여부에 따라 상황은 급변할 수 있다. | ||
+ | <br><br> 오늘날 중국 정부는 신장위구르족들의 저항이데올로기를 크게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들이 이슬람교를 믿는 것을 존중하고, 위구르어 사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신장위구르족 자신들의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는 용인하지 않는다. <br><br> | ||
+ |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는 19세기 말에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입으로 쇠퇴하던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아랍세계의 투르크족과 이슬람교도들의 자발적 근대화 운동이다.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근대화 사상으로서 모든 투르크족의 단결을 주장한 투르크주의와 이슬람교 신자들의 단결을 주장하는 종교사상인 이슬람주의는 계급대립이 격화되면서 그 계급적 본질이 드러나 결국 무너졌다며, 한족과 소수민족의 단결을 통한 통일된 중국이 위구르족들에게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br><br> 신장위구르족의 저항운동은 미국과 같은 서방 제국주의의 선동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근본적인 쟁점인 것도 아니다. 전자는 위구르족 저항 세력 중 일부가 반미 테러리스트 조직과 연관되어 있고 미국도 이들을 테러조직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는 같은 이슬람을 믿는 민족인 회족들은 중국 정부의 편에 서 있는 반면 일부 위구르족 저항 세력들은 불교에 기반을 둔 티베트 저항운동, 내몽골 저항운동과 협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물론 위구르족 저항 세력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장위구르족 저항운동의 성격을 한 가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중국 정부의 민족문화에 대한 억압과 ‘통합된 중국’ 정책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적 언사와 다양한 노선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민족해방운동적 성격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
+ | ======신장 분리주의 운동의 역사====== | ||
+ | 19세기 중반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압력이 거세졌다.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태평천국 운동과 샨시(陝西)성과 간쑤성에서 일어난 통간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통간들은 1864년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청군이 상대적으로 적게 배치되었던 카슈가르 지역에서 처음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회족뿐만 아니라 오늘날 신장의 주 소수민족인 위구르족 등 기타 무슬림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반란은 | ||
+ | 신장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코칸드 칸국 출신 군인 [[야쿱 벡]](Yaqub Bek)은 러시아가 점령한 이리 지역을 제외한 신장 모든 지역의 반청 반란군을 제압했다. | ||
+ | 그리고는 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영국과 협상하고 오스만 튀르크의 제후국임을 선포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청은 신장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청은 “신장을 잃을 경우, 러시아에 의해 수도 북경에서 가까운 몽골까지 빼앗길 수 있다”며 신장 재정복을 주장한 좌종당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 ||
+ | 야쿱 벡 정권을 무너뜨렸다. <br><br> 10여 년간의 반청 저항은 신장 무슬림 주민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과거 종교적 권위를 갖던 이슬람 성직자들의 권위는 약해졌다. 이슬람권의 쇠퇴를 각성하며 새로운 교육과 의식을 강조하는 ‘신문화 운동(Jadidism)’의 | ||
+ | 물결이 러시아가 점령한 중앙아시아에서 신장으로 전파되었다. 청이 재정복 이후 신장에 성(省)을 세우고 중국어 교육 등을 펼치면서 무슬림 주민들을 ‘한족화’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신장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 신문화운동을 수용했다. 이들은 훗날 신장에서의 동투르키스탄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 ||
+ | 그들은 신장 무슬림 주민들이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갖지 않고, 자신들을 ‘무슬림’이라고 부르거나 자신이 사는 지역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br><br> 이런 점에서 1864∼1877년의 신장 무슬림들의 반청 저항은 신장(동투르키스탄)의 역사가 근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신장 무슬림들도 민족국가 실현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 점에서 위구르족의 기원인 무슬림들의 반청저항은 위구르족 민족형성에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
+ | |||
+ | ======1933년 제1차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 운동====== | ||
+ | 제1차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은 1933년 11월에 위구르족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인 카슈가르에서 근대화운동을 통해 계몽된 위구르족 상인과 지식인들과 키르기즈족 등 다른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비록 이 신생 | ||
+ | 공화국은 발전할 기회를 충분히 갖추기 전에 마중잉의 회족 세력에 의해 멸망했지만, 위구르족들의 독립 열망이 최초로 표현된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
+ | |||
+ | ======1944년 제2차 동투르키스탄 인민공화국 운동====== | ||
+ | 제2차 동투르키스탄 인민공화국은 1944년 이리에서 ‘3구 정부’가 설립하였다. 중국인 학자들은 이 공화국을 ‘3구 혁명’이라고 부른다. 중국인 학자들은 | ||
+ | 이 정부를 주도한 세력이 이슬람 성직자였기 때문에 이들이 이끈 ‘3구 혁명’이 | ||
+ | 초기에는 종교적 성격이 있었지만, 이후에 소련의 지지와 중국 공산당의 영향 | ||
+ | 으로 위구르족 등 신장 내 여러 민족이 한족 군벌 성스차이와 국민당에 맞선 | ||
+ | 민족해방운동으로 규정짓는다. 한편에서는 스탈린이 장제스에게 ‘중소우호동 | ||
+ | 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이닝 주재 소련 영사관에 선동에 의해 | ||
+ | 만들어진 운동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카자흐족 이슬람 성직자였던 오스만 | ||
+ | 은 동투르키스탄 인민공화국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벌이 | ||
+ | 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 ‘3구 정부’는 국민당정부와 협상을 통해 신장성정부와 연합정 | ||
+ | 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해산되었다. 하지만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여 | ||
+ | 전히 자체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9년까지 존재했다. <br>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주요 인사들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한 | ||
+ | 이후인 1949년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에 통합되는 것을 거부했다. 정부 | ||
+ | 요인 5명은 자신들의 입장을 중국 정부에 전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 | ||
+ | 들을 태운 비행기가 중국 수도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추락해서 탑승자 전원 | ||
+ | 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결과, 위구르족, 전체 동투르키스탄 저항운 | ||
+ | 동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남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지도자가 중국 정부에 뜻 | ||
+ | 에 따르겠다고 전함으로써 마오쩌둥의 신장 지역 병합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 ||
+ | 이루어졌다. | ||
− | ====== | + | ======1949년 이후 신장 분리주의 운동====== |
− | + | 중국의 신장 점령 초기에 일부 신장위구르족 지식인들은 중국 정부에 대해 | |
− | + | 소극적으로 기대를 했었다. 왜냐하면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들이 공산당에 충성한다는 전제하에 이슬람교를 인정하고 위구르족들의 민족문화를 발전시킬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1949년 이전까지 신장을 지배해온 한족 군벌들과 국민당 군사지도자들의 통치와 대조를 이뤘다. 물론 일부 위구르족과 오스만을 중심으로 한 카자흐족 등 일부 소수민족 종교지도자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 정부에 대한 저항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압되었다. <br><br> 1945년 12월 중국 정부는 신장을 ‘신장성민족민주연합정부’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신장에 어떤 정부를 만들지에 대해서 신장 소수민족 지도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1951년 3월 신장의 소수민족 공산당원들은 중국 공산당의 ‘민족구역자치시행조례초안에 관하여’와 ‘의견조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br><br> | |
+ | 이때 위구르족 공산당원들은 여전히 신장지역을 자치공화국으로 하는 연방제 국가를 원하였다. 소련이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처럼 중앙아시아의 각 민족들이 다수인 지역에 그 민족의 이름의 자치공화국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오홍엽, 2009: 102). 당시 일부 당원들은 ‘신장위구르스탄자치공화국’, ‘위구르스탄자치공화국’의 설립을 주장했으며, 일부는 소련으로 편입되기를 원했다. <br><br> | ||
+ | 하지만 중국 정부는 ‘독립 염원’과 ‘친소 성향’을 가진 위구르족 공산당원들을 탄압했다. 우선 1951년 5월 신장성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1944년 제2차 동투르키스탄 인민 공화국의 주요 지도자들이었던 전 신장성정부위원 아이니압둘라(艾尼·阿不都拉)와 전 궁하현 현장 파티흐 무슬리모프(Fatih Muslimov)의 직위를 박탈하고 이들을 감시대상으로 지정했다. 이들이 봉건세력을 옹호하고 혁명에 대항했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런데 탄압이 과도하다는 지적이 있어서 1952년과 1953년 10월 사이에 이미 체포한 위구르족 548명에 대해 다시 심사했다. 결국 1955년 10월 1일에 ‘신장위구르자치구’가 세워졌다. 자치구의 대표인 주석 1명은 위구르족이 맡고 부주석은 각각 한족, 위구르족, 카자흐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5개 민족자치구 중에 ‘족’자가 들어가지 않은 민족자치구는 신장위구르자치구와 내몽골자치구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위구르족들은 이를 ‘중국 정부의 견제’로 규정짓고 불만을 가졌다. <br><br> | ||
+ |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억압하고 신장의 경제발전을 위해 본토의 | ||
+ | 한족들을 대량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본토에서 신장의 경제개발을 위해 자원한 한족들과 신장이 점령당한 이후에 남은 국민당 패잔병들로 [[신장농업생산건설병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신장 각지에 대학과 공장을 세우고,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등이 소련으로 이주하고 빈 땅의 농업생산을 담당했다. 동시에 병단은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탄압하는 역할을 했다. | ||
+ | ======1950~1970년대 신장 분리주의 운동====== | ||
+ | 이러한 중국 공산당 정부의 정책에 따라 위구르족들은 다시금 새로운 중국공산당 정부에 맞선 저항을 시작했다. 전직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총리였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Isa Yusuf Alptekin)의 아들 앨킨 알프테킨(Erkin Alptekin)에 의하면 1945~1951, 1954~1958, 1959~1963, 1965~1968년에 대규모 반란이 58차례나 일어났다고 한다. 1950년대 위구르족 저항운동은 크게 세 가지 세력이 주도하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1930년대, 1940년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운동을 주도했던 종교 지도자와 소수민족 군인들이고, 세 번째는 종교군대이다. <br><br> 중국 정부는 이에 지역주민들을 동원하여 저항세력들을 진압하는 인민운동을 대대적으로 조직했다. 그리고 1952년 2월 2일에 저항세력들을 공개심판하는 대회를 열었다. 3월 6일 하루 동안에만 258명의 저항세력이 체포되었다. <br><br> 한편, 소련은 1960년대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이용했다. 그 결과, 중국 정부에 따르면, 이닝 주재 소련 영사관의 ‘선동’으로 이리지역과 타청지역의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5~6만 명이 가축과 중국 정부문서를 훔치고, 소련으로 집단 월경하는 ‘이타 사건’과 이닝주민 2,000여 명이 참가한 정치적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소련을 지지한 위구르족들은 ‘동투르키스탄인민혁명당’을 창당하고 신장 전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를 진압하면서 한동안 위구르족 저항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 ||
+ | ======1980년대 신장 분리주의 운동====== | ||
+ |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가 된 덩샤오핑이 마오쩌둥 시기에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투옥된 위구르족 인사들을 석방시키고 종교 완화정책을 시행했다. 석방된 위구르족 인사들은 소수민족 정책이 완화된 틈을 타서 저항운동을 만들었다. 한편,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신장위구르족과 한족 간의 경제적 불평등이 가속화되면서 위구르족의 역사를 되찾으려는 위구르족들의 민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 <br><br> 1980년대 신장 분리주의 운동은 대중들의 참여가 많았는데, 특히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들의 구호는 1950∼1960년대 위구르족 저항운동 구호와 유사했다. 즉 신장에서 한족을 몰아내고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1980년대 신장 분리주의 운동은 소련붕괴 이후 1990년대 위구르족의 저항운동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br><br> 대학만이 아니다. 어떤 교사들은 강의 시간에 이슬람교를 지지하고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일부 교사들과 학생들은 아예 퇴직, 퇴학하여 저항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위구르족 학생운동은 한족 학생운동과 함께 1989년 텐안먼 항쟁에도 적극 참가했었다. 물론 텐안먼 항쟁은 위구르족들의 독립을 지지한 시위가 아니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이행하지 못한 ‘민주화’를 요구하고 경제적 빈부 격차 심화에 항의하는 시위였다는 점에서 위구르족의 저항운동이 아니다. <br><br> | ||
+ | 하지만 위구르족들이 한족들과 함께 이 시위에 참가함으로서 중국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을 보여줬다. 이때 외르케슈 될레트(Örkesh Dölet)라는 위구르족 학생이 텐안먼 항쟁의 주요 학생지도부였다. 또한, 이슬람교를 비하하는 내용의 『성풍속』이라는 책에 대해 소수민족 엘리트 양성 대학인 중앙민족대학의 학생들이 단식 투쟁과 시위를 하면서 항의한 결과, 중국 정부는 이 책에 대한 유통을 중단시켰다. <br><br> 또한, 신장 개발을 위해 본토에서 | ||
+ | 파견된 악수의 한족 청년들이 고향으로 귀환을 요구하면서 한 달간 악수 정부청사를 점령했을 때, 위구르족 주민들이 한족 청년들의 시위에 연대했었다. 이 시위는 결국 정부에 의해 진압 당했지만, 중국 정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한족 청년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중국 정부가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 벌인 종교, 민족 억압 정책 때문에 위구르족들의 한족들에 대한 반감이 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텐안먼 항쟁과 한족 청년들의 악수 청사 | ||
+ | 점거 투쟁에서 보여준 한족과 위구르족의 연대는 소수민족과 한족 민중운동이 중국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
+ | ======1990년대 이후 신장 분리주의 운동====== | ||
+ | 1990년대 이후 신장 분리주의 운동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바로 소련의 해체와 주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이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이후 신장 분리주의 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독립론이고, 다른 하나는 자치론이다. <br><br> '''①독립론'''<br>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자신들의 이웃민족들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위구르족들의 저항운동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중국 공안부는 2003년 12월 북경에서 처음으로 ‘[[3대 세력]]’으로 지목되는 [[4개 ‘동투르키스탄’ 저항조직]]과 11명의 ‘동투르키스탄’ 저항세력 지도자 명단을 발표했다. 중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1990년에서 2001년까지 신강지역에서 위구르족 저항세력에 의한 200건 이상의 테러행위가 발생해서 162명의 사망자와 44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로 해서 발생한 테러로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2009년 7월 우루무치와 카슈가르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15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저항세력들의 테러활동은 시간이 갈수록 조직화, 무장화되고 있으며 테러대상도 다양화되어 당정간부, 공안간부 등으로 확대되고, 테러목표물도 공안시설, 호텔, 상점, 버스 등에서 주요군사기지, 통신시설, 발전소 등 중요국가시설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2013년에는 텐안먼 차량 폭탄테러사건이 있었고, 2014년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도검류로 공격한 춘졔(한국으로 따지면 음력 설: 구정) 쿤밍역 테러 사건, 신장의 지역정부청사 습격 사건, 베트남 국경에서 ISIS에 가담하려던 위구르족과 중국 국경수비대가 충돌한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서기 장춘셴은 위구르족들 중에 ISIS 가담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br><br> 독립을 지지하는 위구르족 저항운동가 중에는 본래 중국 정부를 지지했던 위구르족들도 있다. 레비야 카다르(Rebiya Kadeer)가 대표적이다. 그는 신장에서 성공한 사업가이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그가 미국에 망명한 그의 남편에게 중국소식을 다룬 신문을 편지로 보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가 탄압한 것을 계기로 미국으로 망명하고 현재 세계위구르족회의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키스탄군의 테러조직 소탕과정에서 사살당한 하산 마숨(Hasan Masum)이란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 지도자는 원래 중국 군인이었다. 하지만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위해 국외로 탈출했다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대신 오사마 빈 라덴의 지원을 받았다. <br><br> | ||
+ | 그러나 모든 위구르족 저항운동조직을 ‘테러조직’ 혹은 이슬람주의 조직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 정부가 ‘테러조직’으로 지정한 위구르족 저항운동 조직 중에는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는 조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 정부가 자신들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한 것에 대해 반박하기도 한다.<br><br>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위구르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위구르 저항세력 단체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안와르 서프 투라니(Anwar Yusuf Turani, 1962)가 수반으로 있는 동투르키스탄 국립 자유센터(East Turkistan National Freedom Center,ETNFC)는 순수한 비폭력 분리 독립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br><br> | ||
+ | 중국 정부의 탄압이 강하다 보니, 위구르족들의 독립운동은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기 쉽지 않다. 게다가 달라이 라마라는 상징적 지도자가 존재하는 티베트족과 달리 상징적인 지도자 없이 수많은 저항운동 조직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위구르족들의 저항운동이 중국 정부에 맞서 단결하기 어려워 보인다. 위구르족 저항운동 단체들이 서로를 ‘이교도’라고 규정짓는가 하면, 2013년 텐안먼 차량폭탄테러사건에 대해서도 세계위구르족대회는 중국 | ||
+ | 정부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타이완에 소재한 ‘위구르의 친구들’이란 | ||
+ | 조직은 위구르족이 저지른 테러가 맞다고 주장하는 등, 엇갈린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br><br> '''②자치론''' <br> 일부 위구르족들은 중국 정부가 건국 이래 주장하고 있는 소수민족 정책인 민족자치론을 완전히 실현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중국 체제 내에서의 위구르족 권리 신장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자치론자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정부의 통제가 강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위구르족 다수는 민족자치론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br><br> 자치론자는 1930년대 동투르키스탄(East Turkistan) 공화국 내에도 존재할 정 | ||
+ | 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맺고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맞설 때, 중국 무슬림들도 중국회교구국협회, 하더청(哈德成)이 상하이에서 조직한 중국회교학회, 바이셔우이(白寿彝) 등 무슬림 학자들이 구이린(桂林)에서 조직한 중국회교문화학회 등을 만들었다. <br><br> 중국 정부의 신장지배가 시작된 1950년대에는 부르한 세시디(Burhan Shehidi), 양징런(楊靜仁), 다푸성(达蒲生), 마젠(马坚), 팡스첸(厐士谦) 등 각 민족의 무슬림 인사들이 발기하여 만들어진 [[중국이슬람교협회]]가 중국 정부를 지지하는 대표적 단체이다. 중국이슬람교협회가 만든 중국이슬람교경학원은 협회가 주관하는 전국 최고의 이슬람교 학부로서, 1955년에 창립되어 이슬람교 전문인력을 양성한다. 협회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중국 정부에 얼마나 충성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심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래서 위구르족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슬람 성직자들은 이 심사에서 떨어진다. 따라서 중국이슬람교협회와 ‘독립’을 지지하는 위구르족 저항세력 사이에 긴장관계가 존재하는데, 위구르족 민족지도자이자 종교지도자인 신장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 1996년 5월에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위구르족 저항세력들에게 피습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중에는 중국 정부의 이슬람교 통제에 대해 분노하면서 저항에 나설 수도 있다. 설령 그 저항이 중국 정부의 민족자치론을 완전히 실행하라는 요구일 지라도 말이다. 실제로 1980년대 위구르족 저항세력들이 우루무치에서 조직한 시위에 이슬람경학원 학생들도 참가했었다. 또한 교사와 대학교수들 중에도 민족자치론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중국 정부의 틀에서 위구르족들이 발전할 수 있음을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민족자치론자로서 중국 정부가 위구르족 저항운동가로 의심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중앙민족대학 전직 위구르어 강사 일함 토티(Ilham Tohti)를 들 수 있다. 일함 토티는 위구르족의 저항운동에 우호적인 학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위구르족은 중국에 연방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독립론자와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출국 금지 및 구금 처분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14년 1월에 ‘국가 분열’ 혐의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고, 9월 23일에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烏魯木齊) 중급인민법원에 의해 국가분열 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정치적 권리 박탈 및 개인 재산 몰수 판결을 받았다. <br><br> 자치론은 위구르족 독립을 주장하기에 너무나 강력한 중국 정부의 현실을 인정하고, 체제 내의 위구르족들의 지위 향상을 주장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정부도 민족자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일함 토티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 독립론자들이 민족자치론자로 행세하면서 활동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갖고 이들에 대해서도 강한 탄압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자치론이 현재 독립론보다 현실적인 안으로서 신장위구르족 내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효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만약 중국 정부가 일함 토티의 사례와 같이 자치론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면 신장위구르족이 오히려 독립론으로 기울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 ||
− | ====== | + | ======최근 중국의 유혈사태 및 테러 관련 사건 발생 현황====== |
− | == | + | {| class="wikitable" |
− | + | |- | |
+ | ! 년 월 일 !! 사례 | ||
+ | |- | ||
+ | | 2008. 8. 4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에서 경찰관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여 17명 사망 15명 부상 | ||
+ | |- | ||
+ | | 2008. 8. 27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 인근 수색 경관이 괴한의 습격으로 2명 사망, 5명 부상 | ||
+ | |- | ||
+ | | 2008. 8. 29 || 중국 공안이 카스 지역에서 이슬람분리독립주의자 6명 사살, 3명 체포 | ||
+ | |- | ||
+ | | 2009. 2. 25 || 위구르족 남녀가 베이징 도심에서 아들과 함께 분신자살을 시도 했으나 실패 | ||
+ | |- | ||
+ | | 2009. 7. 5~ 7. 6 ||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3천명 이상의 대규모 유혈시위가 발생하여 140명 사망, 828명 부상, 300명 체포 | ||
+ | |- | ||
+ | | 2009. 7. 7~ 7. 8 || 유혈시위로 156명 사망, 1080명 부상, 1434명 체포.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최악의 유혈사태 | ||
+ | |- | ||
+ | | 2010. 1. 6 || 광동성 선반 시 식당에서 한족 손님에게 위구르족 종업원이 흉기를 사용하여 사망 | ||
+ | |- | ||
+ | | 2010. 8. 19 || 신장위구르자치구 아커쑤 시 교외에서 폭발성물질을 탑재한 삼륜차가 인파로 돌진하여 21명 사상 | ||
+ | |- | ||
+ | | 2011. 6. 6 || 중국공안과 신장위구르자치구 허톈 시 미등록 이슬람 코란학교관계자가 충돌하여 어린이 12명 포함 17명 부상 | ||
+ | |- | ||
+ | | 2011. 7 .18 || 신장위구르자치구 허톈 시 경찰서 습격으로 14명 사살, 4명 체포 | ||
+ | |- | ||
+ | | 2013. 6. 26 ||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루판 지구 루커친잔 관공서 습격으로 35명 사망 | ||
+ | |- | ||
+ | | 2013. 10. 28 || 베이징 시 톈안먼 광장에서 위구르인 일가족 차량으로 돌진하여 5명 사망 | ||
+ | |- | ||
+ | | 2014. 1. 24 || 신장위구르자치구 아커쑤 지구 신허현에서 경찰을 공격하여 12명 사망 | ||
+ | |- | ||
+ | |} | ||
+ | |||
+ | {| class="wikitable" | ||
+ | |- | ||
+ | ! 년 월 일 !! 사례 | ||
+ | |- | ||
+ | | 2007. 1. 5 || 중국 파미르고원 산악지대에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 테러리즘 훈련 기지를 급습하여 18명 사살, 17명 체포 | ||
+ | |- | ||
+ | | 2008. 1. 27 || 중국 공안,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에서 테러범 2명 사살, 15명 체포 | ||
+ | |- | ||
+ | | 2008. 3. 7 || 위구르족 10대 여성이 우루무치발 베이징행 남방항공 여객기 테러리즘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 ||
+ | |- | ||
+ | | 2008. 5. 5 || 중국 상하이 버스폭탄테러리즘 발생 | ||
+ | |- | ||
+ | | 2008. 7. 22 || 윈난성 쿤밍 지역에서 사제폭발물에 의한 버스폭탄테러리즘 발생 | ||
+ | |- | ||
+ | | 2008. 8. 10 || 신장위구르자치구 쿠처 현에서 연쇄폭탄테러리즘이 발생하여 테러범과 경찰관 등 10여명 사망 | ||
+ | |- | ||
+ | | 2010. 8. 19 ||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중국공안을 대상으로 한 자살폭탄테러리즘 발생으로 7명 사망, 14명 사상 | ||
+ | |- | ||
+ | | 2011. 2. 29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 시 예청 현에서 흉기 테러리즘이 발생하여 10명 사망 | ||
+ | |- | ||
+ | | 2011. 3. 8 || 중국공안, 폭탄 제조의심 농가를 급습하여 용의자 21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테러 용의자 4명 사살 | ||
+ | |- | ||
+ | | 2011. 6 .29 || 신장위구르자치구 허톈 공항에서 항공기 납치테러리즘 시도 | ||
+ | |- | ||
+ | | 2011. 8. 31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 시에서 연쇄 흉기테러리즘 발생하여 19명 사망 | ||
+ | |- | ||
+ | | 2012. 2. 28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 시 예청 현에서 흉기테러리즘 발생하여 민간인 13명 사망, 용의자 7명 사살 | ||
+ | |- | ||
+ | | 2012. 6. 29 || 위구르인 6명이 항공기를 납치하여 자살폭탄테러리즘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 ||
+ | |- | ||
+ | | 2014. 3. 1 || 윈난성 쿤밍 시 쿤밍철도역에서 흉기테러리즘이 발생하여 170여명 사상 | ||
+ | |- | ||
+ | | 2015. 9. 18 || 신장의 악수에 있는 탄광에서 위구르족들이 한족 공격, 경찰 5명 등 50명 사망 | ||
+ | |- | ||
+ | | 2016. 8. 30 ||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 조직원이 중국 대사관 자폭테러. 대사관 직원 3명 사망, 범인 5명 체포, 용의자 4명 수배 | ||
+ | |- | ||
+ | | 2016. 9. 10 || 허톈 피산현, 공안, 폭탄 제조 거점 수색 중 용의자가 터트린 폭탄에 의해 공안 부국장 1명 사망, 여러 명 중경상 | ||
+ | |- | ||
+ | | 2017. 1. 10 || 신장에서 테러 용의자 3명이 체포 과정 중 사살당함 | ||
+ | |- | ||
+ | | 2017. 3. 2 || IS, 중국을 무슬림 소수민족 탄압 국가로 지목, 공개적 선전포고. | ||
+ | |- | ||
+ | | 2018. 11. 28 || 중국 노동자 출신 저명한 사진작가 뤼광,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실종. 공안에 의한 억류로 추정 | ||
+ | |- | ||
+ | | 2019. 2. 12 || 위구르계 호주인 17명, 친척을 보러 갔다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억류 | ||
+ | |} | ||
==한국과 일대일로== | ==한국과 일대일로== | ||
===긍적적 전망=== | ===긍적적 전망=== | ||
===부정적 전망=== | ===부정적 전망=== | ||
+ | |||
+ | ==미국과 일대일로== | ||
+ | ===미국 언론의 관점=== | ||
+ | |||
+ | 1) 미국매체의 관점 : CNN/ 워싱턴 포스트 / 뉴욕타임즈/ 로스엔젤러스 타임즈 중심 | ||
+ | |||
+ | 1. 새로운 세계질서 수립 | ||
+ | |||
+ | 미국언론은 중국이 미국을 대변해 세계의 새로운 리더가 되려고 한다는 인식이 주류이다. 미국 언론이 본 일대일로의 목적은 새로운 세계질서 수립, 소프트파워 수출을 통한 외교범위 확장, 연선국가 정치 간섭, 세계무역 주도 등으로 볼 수 있다. | ||
+ | |||
+ | 중국이 일대일로를 주장한 뒤에 나온 미국 기사들이 그 신빙성을 더해준다. 미국언론은 일대일로가 중국이 외부투자를 통해 신형대국관계를 형성하고 미국을 대신해 세계의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2013년 10월 기사에서 중국이 자국의 실크로드를 통해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피스는 정치면에 중국이 일대일로 제창을 통해 아시아에서의 존재를 공고히 하고, 아시아의 주요 대국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CNN은 중국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를 원한다고 발표했으며 그 새로운 질서에는 중국,러시아 그리고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나라들만을 지칭한다고 얘기했다. 시진핑-푸틴의 정상회의 연설은 미국을 의식하고 한 것으로 보았다. | ||
+ | |||
+ | |||
+ | 2. 에너지 안보 차원의 고려 | ||
+ | |||
+ | 미국언론 보도에서 에너지 안보차원에서 접근한 기사는 다른 관점에 비해 적었다. 하지만 몇몇 기자들은 에너지 안보차원의 일대일로 목적성을 언급했다. 뉴욕타임즈는 2013년 9월 중국의 에너지 소비는 중동 지역의 석유 의존도가 증가하며, 베이징은 중국의 에너지 수입원을 다변화하고 싶어한다고 발표했다. 순회기자 Pepe Escobar는 일대일로는 에너지 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
+ | |||
+ | |||
+ | 3. 국내 과잉생산 해결 | ||
+ | |||
+ | 많은 미국 언론은 중국이 중국의 경제문제의 관점에서 일대일로를 해석했다. | ||
+ | 제임스 그리피즈는 CNN에서 일대일로는 아시아, 유럽, 태평양에 무역과 인프라를 설립하는 프로젝트이며 진행중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국내의 과잉생산 능력을 전가해서 다른 나라를 지원해 부유하게 하여 중국 제품의 판매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란 존슨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전문적으로 보도했다. 그는 일대일로가 중국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국내 과잉생산 능력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중국의 역할 위상을 높여줄 것이라고 보았다. | ||
+ | |||
+ | ===미국 싱크탱크의 관점=== | ||
+ | |||
+ | 1. 새로운 세계 질서 수립 | ||
+ | |||
+ | 많은 학자들은 중국이 아시아 및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 ||
+ | 케말 크리히와 필리푸러콜은 중국이 국제질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아시아의 국제관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에 발전과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이 세계은행, 아시아발전은행과의 협력을 바라고 있으며 이것은 세계를 향해 경제력을 과시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 ||
+ | 존,에켄베리는 이미 고착화된 국제질서를 뒤집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중국은 아예 독자적인 세계질서를 형성하려고 한다고 보았다. 중국이 주도해 만든 AIIB은행은 중국의 상업상 이익 확대하고 지역적 영향력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부상하는 대국이 현존하는 매커니즘에 대항해 새롭게 형성한 국제 매커니즘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 ||
+ | 황육천은 중국의 외교정책 차원에서 일대일로를 분석했다. 그는 시진핑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주장하면서 국제적인 일과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국제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중국몽’을 실현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 ||
+ | 파르는 미국이 이전과 같은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경쟁적인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트럼프 정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국제체제를 형성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해야 하며, 필리핀과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통해 중국이 남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
+ | 멜처는 일대일로 이니셔티브가 중국과 아시아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대일로 중, 하선 지역의 경제 연계는 전략적 의미가 상당하다. 예를 들어, 중국에게 파키스탄 과달항은 중국의 세력이 인도양 깊숙이 영향력을 미치게 하여 중국 해군에게 길을 제공했다. 그는 일대일로의 이니셔티브는 중국이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점진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 ||
+ | |||
+ | |||
+ | |||
+ | 2. 국내 과잉생산능력 해결 | ||
+ | |||
+ | 데이비드 도랄은 중국 내 중공업, 부동산 및 인프라를 건설 과잉으로 국내 투자를 늘릴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국정부가 일대일로를 제안해, 중국 기업의 해외투자를 규제하고 국내 기업들이 자금을 연선에 투자하도록 장려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중국의 일대일로와 AIIB 설립의 이니셔티브는 모두 국내경제라고 평가했다. 국내 경제 개혁에 문제가 생기면서, 중국정부는 해외로 발전기회를 돌려 국내기업들이 해외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 ||
+ | |||
+ | 조슈아,P,멜책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가 중국의 국내 공업 생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분석했다. 연선에서 인프라가 구축되면 외부 수요가 촉진되고 중국의 수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미국이 TPP를 탈퇴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으며, TPP탈퇴는 단지 트럼프가 ‘미국 우선’ 정책 구호를 실현시키기 위한 개인의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TPP탈퇴 이후,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가 받는 저항은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 ||
+ | |||
+ | 3. 일대일로에 대한 미국의 대응 | ||
+ | |||
+ | 오바마 시절 ‘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트럼프 취임하고 TPP 탈퇴한 뒤, 미국 내에서는 중국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와 일대일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싱크탱크 학자들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항하는 관점들이 많지만, 일부 싱크탱그 학자들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을 인정하며 미국이 일대일로에 가담해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
+ | |||
+ | Douglas.H.paal은 중국이 국제적인 변화에 대응해 일대일로를 재창했고, 미국은 포스트TPP시대에 대응해 중국 및 아태지역에 대응할 새로운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직 중국이 아직 규칙을 수용하는 위치이지 규칙을 만드는 위치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중국은 다른 국가들 간의 무역의 규칙을 완전히 뒤엎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새로운 시기의 외교정책을 이용해 중국에 맞는 경제와 안전을 모색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중국은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중국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적극 활용해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대일로 체제를 이끌어가도록 두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AIIB와 일대일로에 적극 참여하여, 동아시아 지역에 업그레이된 ‘브레튼우드 체제’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
+ | |||
+ | Paul Haenle는 중국이 미국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일대일로의 제창의 의미를 설명하고, 미국이 일대일로 건설에 참여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미국이 더 이상 AIIB처럼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는 | ||
==참고목록== | ==참고목록== | ||
462번째 줄: | 713번째 줄: | ||
- 이승신 외 6명,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 평가와 한국의 대응방안』, 2018,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 이승신 외 6명,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 평가와 한국의 대응방안』, 2018,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
- 이자호, 『(이슈보고서) 중국의 현대판 실크로드,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아시아 주요국 앞 추진 현황 및 향후 과제』, 2018, 해외경제연구소 | - 이자호, 『(이슈보고서) 중국의 현대판 실크로드,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아시아 주요국 앞 추진 현황 및 향후 과제』, 2018, 해외경제연구소 | ||
+ | - 이대성, 김태진, 「중국의 테러리즘 분석과 그 전망: 신장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2014, 한국콘텐츠학회 |
2019년 5월 28일 (화) 16:36 기준 최신판
목차
들어가며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 중국은 2001년 WTO 가입을 통해 국제경제체제에 편입된 이후 2005년에 GDP 기준으로 프랑스를, 2006년엔 영국을, 2007년엔 독일을, 그리고 2010년엔 일본을 차례로 따라잡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처럼 빠른 성장 속도는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을 포함한 기존 선진국의 경제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중국의 경제성장은 상대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중국경제의 성장은 지리적 공간의 확장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로부터 원유와 원자재를 수입하고 전 세계로 상품을 수출하면서, 중국 경제의 지리적 공간 역시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의 군사력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군사비는 경제성장률을 상회하는 연평균 10% 이상의 수준으로 증대되었다. 중국경제의 세계화는 중국이 보호해야 할 국가이익의 폭발적 팽창을 가져 왔다. 중국은 아시아 지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국가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특히 해군력의 증강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운용 중인 랴 오닝(遼寧) 항공모함 외에도 두 척의 항모를 건조 중이며, 네 번째 첨단 항모는 설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5년 5월 발표된 ‘중국의 군사전략’ 백서에 따르면, ‘적극방어전략(積極防禦戰略)’을 추진하기 위한 육해공군의 대대적인 개편과 증강 계획이 나타나 있다.
중국이 부상하고 미국 패권의 상대적 쇠퇴가 부각되면서 소련이 사라진 이후 사라졌던 아시아 역내 지정학적 긴장이 다시 시작되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도 가시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2012년 ‘아시아로의 회귀’ 혹은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표방하며 미국 외교정책의 초점을 중동과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긴 것이다. 이외에도 2011년 인도를 방문한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아프간 주변 서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는 ‘신실크로드’ 계획을 제안한 것을 들 수 있다.
지정학은 지리적인 환경이 국가에 미치는 정치적인, 군사적인, 경제적인 영향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지정학은 정치지리학에 속하는 하나의 이론체계로서, 지리적 요인과 정치구조에 따라 형성되는 역내 또는 국제사회의 전략적 정세와 국가행위를 분석 및 예측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정학은 19세기에 탄생한 이후 2차 세계 대전까지 국가관계의 핵심이론으로서 정계·학계에서 활발히 연구되었으나, 독일의 지정학 이론이 나치의 전쟁과 침략을 정당화했다는 지정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미·소 간 대립으로 이념이 중시된 냉전이 시작된 이후 그 중요성이 폄하되고 무시되어 관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이후 ‘새로운 질서’가 강조되면서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국제관계 분석에서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더불어 ‘탈냉전 질서 이후의 새로운 질서’로 지정학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
'일대일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지구적 지정학의 지도를 뒤집는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테두리 지역을 미국의 영향 아래 두어 심장부(heartland) 지역을 확보한 공산주의 세력이 뻗어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주변지대론(Rimland Theory)’이 보여주는 것처럼, 태평양은 냉전 이래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정학에서 보면 중국이 바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입구 곳곳에 미국이 포진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전략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세력권인 태평양 연해에서 미국과 경쟁하기보다, 아예 지정학의 중심을 유라시아로 옮겨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일대일로는 미국이 태평양 지대를 중심으로 패권을 유지하고 중국을 봉쇄하는 것에서 돌파하기 위한 중국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일대일로에서 실크로드 경제벨트’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목표가 지정학의 중심을 태평양에서(해양) 유라시아(대륙)로 옮기는 것이라면, 해상 실크로드보다는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해상 실크로드와는 달리 철도를 깔며 새로 길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과 그 파급력은 더욱 뛰어나다고 예상된다.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벨트에 해당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는 1991년 소련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에 독립하면서 미국, 중국을 포함한 강대국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 주요국들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렸다. 중국은 러시아, 미국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9.11 이후 적극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역량을 투입하며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대일로 정책을 언급한 2013년도보다 먼저 시행하고 있던 일이다. 이러한 중국의 정책은 중국이 이전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를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가치는 학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았다. 메킨더(Mckinder)는 ‘심장지대 이론’을 주장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핵심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곧 세계의 패권을 쥐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메킨더가 주장한 유라시아 대륙의 핵심지역은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자원의 수송에도 용이한 지역이어야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중앙아시아 지역은 유라시아의 핵심지역으로서의 조건이 충분하다. 그리고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저서에 따르면, 중앙아시아 지역을 ‘유라시아의 발칸’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지역이 강대국들 간의 지정학적 세력 경쟁의 장이 되면서 지정학적 요충지가 될 것을 암시한다.
중앙아시아는 지경학적으로 대규모의 통로의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높다. 중앙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중국을 통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까지 진출이 가능한 물류적인 거점으로서 큰 지정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유라시아 대륙과 아시아, 유럽을 이어주는 거점으로서 중앙아시아의 대륙은 국가들의 간의 패권다툼의 전략적인 지역으로서도 큰 지정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이유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적 동향이나 선택에 따라 중국과 미국 등 강대국의 대처도 크게 달라진다.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이 제거된 공백의 공간에 자신의 영향력을 관철시키려 하고 러시아는 소련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중앙아시아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오기 위해 노력한다. 중앙아시아는 미국과 러시아의 파워 게임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황
연표
시기 | 내용 | 계기/장소 |
---|---|---|
13.9.7 | 시진핑, "실크로드 경제대(帶)" 처음 제출 | 카자흐스탄 방문 강연 |
13.10.3 | 시진핑,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공동건설 처음 제출 | 인도네시아 방문 강연 |
13.12.13 | 시진핑, 실크로드 경제대 및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건설 지적 | 중앙경제공작회의 연설, 6개 정책과제중 하나로 지적 |
14.2.6 | 러시아 아시아-유럽횡단철도와 "일대일로" 연계 공동인식 달성 | 시진핑-푸틴 모스크바 회담 |
14.3.5 | <정부업무보고>에서 15년 중점 정책으로 지정 | 리커창 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 보고 |
14.11.8 | 시진핑, 실크로드 기금 400억 달러 출자 선언 | APEC 정상회담 |
15.2.1 | "일대일로" 건설 지도소조 구성 및 공작회의 - 구성:조장 장가오리 국무원 부총리 및 부조장 4명 인선 - 2015년 및 차후 일대일로 주요 사업 과제 제시 |
장가오리 부총리 |
15.3.28 | 일대일로 종합 정책 문건 공포 - 실크로드 경제대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장기 전망과 행동 공동 추진 |
발개위, 외교부, 상무부 공동 발표 |
15.12.25 | <아시아 인프라 개발 은행(AIIB)> 설립 | |
16.8.17 | <일대일로 건설사업 좌담회> 개최 | 베이징 |
17.5.14~15 | <일대일로 고위층 포럼> 개최 | 베이징 |
2013년 9월 시진핑 주석은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브대학 강연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국가 모두의 공통된 전략목표는 경제의 장기적이고 안정된 발전이라 강조하고 실질적인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발전모델로서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구축 구상을 최초로 제안했다. 2013년 10월에는 시진핑 주석은 인도네시아 의회 연설에서 ‘중국·아세안(ASEAN) 공동운명체’와 ‘21세기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건설을 역설하였다. 그 뒤에, 2013년 12월 중공 중앙경제업무회의에서 중국지도부는 시 주석이 카자흐스탄과 인도네시아에서 각각 제의한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건설, 즉 ‘일대일로’를 2014년 6대 정부 주요과제 중의 하나로 채택하기로 하였다.
2015년 3월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AIIB)의 흥행성공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한층 높아진 가운데 개최된 보아오(博鰲)포럼에서 일대일로에 관한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꺼내 놓으면서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2015년 4월 6일 중국은 ‘일대일로’프로젝트를 추진할 추진위원회(領導小組) 지도부를 확정하였다.
2016년 5월 22일에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는 카자흐스탄 최대의 경제도시이자 온 중앙아시아의 금융·교육센터인 알마티(Almaty)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 제안한 일대일로 전략은 이미 34개의 국제조직 및 국가가 중국과 같이 ‘일대일로’ 공동건설을 한다는 내용의 각각 정부 간의 협정을 체결했으며 총 74 개의 국제조직 및 국가가 이 전략을 참여·지지했다고 밝혔다.
참여국國들의 정보 및 일대일로 관련 실시간 정보는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업 구분
경제회랑 방식은 1998년 ADB가 GMS(Greater Mekong Subregion)라는 메콩강유역 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채택한 개발방식으로 이후 일본 주도로 추진된 다자 간 지역개발계획의 개발방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2008~2018년 기간 동안 일본과 인도가 추진하고 있는 인도 델리-뭄바이 회랑의 경우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경제회랑 방식은 관련 국가 및 지역의 교통 및 인프라 확충 효과가 개발권역에 속한 국가 및 지역의 산업 발전 및 생활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기획된 개발방식이다. 다자개발 주도 경험이 일천한 중국의 입장에서 아시아지역을 대상으로 일본이 시도한 바 있는 경제회랑 방식을 원용하여 양자 또는 다자 간 개발협력 프로젝트가 많은 일대일로 전략을 추진함으로써 앞선 경험의 활용과 시행착오 최소화를 도모한 것으로 파악된다.
발전단계 | 내용 |
---|---|
1단계 교통회랑(transport corridor) | 도로 및 인프라 구축 |
2단계 무역회랑(trade facilitation corridor) | 국경지역 무역 촉진을 위한 제도 정비 |
3단계 물류회랑(logistics corridor) | 국경 이외 지역까지 선진 물류시스템 구축 |
4단계 도시개발회랑(urban development corridor) | 교통, 상하수도 등 도시 인프라 구축 |
5단계 경제회랑(economic corridor) | 민간투자 증진 및 생산라인 구축, 경제특구 등 |
이해를 돕고자 앞서 일본이 추진했던 경제회랑 사례를 살펴본다. 향후 일대일로 전략의 추진과정에서 이와 다른 형태가 전개될 수도 있으나 경제회랑 방식의 선례와 일대일로 전략에서 각 경제회랑이 갖는 특성을 적절히 결합할 경우 향후 일대일로 전략의 경제회랑 방식 추진과정에 대한 이해와 전망에 적지 않은 시사를 얻을 수 있을것이다.
5대 중점 추진방향
중국은 관련국가와의 공동개발을 통한 시장 확대라는 일대일로 전략의 목적성을 반영한 5대 중점 추진방향을 제시하였다.
첫째, 인프라 상호 연결(교통 인프라, 에너지 인프라, 통신 인프라) 인데, 중점 추진방향 중 핵심 현안과제에 해당하며,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갖는 투자 프로젝트 분야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전략의 공간적 범위를 구성하는 엄청난 거리를 연결하기 위해 당사국들의 동의와 협조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중국은 적극적인 투자 노력을 경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투자 및 무역 원활화(투자와 무역 장벽 제거)인데, 관련 노선 의 인프라 및 기간시설 확충에 기반하여 동 노선을 활용한 실물 투자 및 상품무역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인프라 연결과는 달리 중국과 관련국 간 산업적 보완성 제고가 현실적으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셋째, 자금조달 원활화(AIIB 설립, 역내 국가간 화폐교환)인데, 인 프라 연결과 투자·무역 활성화를 위해서는 중국과 관련국 모두 엄 청난 규모의 투자 소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금융지원 플랫폼 구축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금융지원 플 랫폼과 관련국 간 금융협력을 통해 위안화 국제화의 새로운 추진동 력으로 작용할 여지가 적지 않다.
넷째, 정책 교류(정부 간 협력 강화)인데, 일대일로 공동 건설을 위 해 관련국 간 정책 협력 강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정책 교류의 주된 영역은 지역개발계획의 공동 추진, 양자·다자 간 대형 프로젝트의 입안 및 추진 등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지역경제 통합이 진전될 경 우 거시정책 협력단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문화적·인적 교류(관광, 학술, 문화, 매체 등)인데, 일대일로 공동 건설이 관련 국가 및 지역 간 실질적인 경제교류 증진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적·문화적 상호 이해 및 교류 증진이 뒷받침 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중국과 연선국 간 인적·문화적 교 류 프로젝트들을 지속적으로 발굴,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
3개 회랑
'일대일로' 전략의 육상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3개 노선이고,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는 2개 노선으로 총 5개 노선을 제시하고 있는데, 아래 그림과 같다.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 공동건설 추진의 비전과 행동(推動共建絲綢之路經濟帶與21世紀海上絲綢之路的願景與行動)> 및 관련 자료에 따라서 일대는 육상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중국→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 노선, 중국→중앙아시아→서아시아→페트시아만→지중해 노선, 그리고 중국→동남아시아→남아시아→인도양 노선의 3개 방향으로 도로 및 철도 등 교통물류 인프라의 경제무역 및 산업단지를 중점 건설하고,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는 중국-남중국해→인도양→유럽 노선, 중국→남중국 해→남태평양 노선의 2개 방향으로 고효율의 해상운송통로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북부 회랑
중국→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 노선
개요
북부 회랑은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벨트(一帶)’, 러시아의 ‘유라시아 대통로’, 몽골의 ‘초원의 길’ 프로젝트 간 연계를 통한 통관 및 운송 편리화 실현을 목표로 하며, 핵심 거점 국가는 몽골과 러시아이다.
중점 협력분야는 러시아 서부 시베리아와 중국 신장자치구 간 천 연가스 수송로 확보와 3국 간 육상 물류 개발이라 할 수 있다. 동 회랑은 관련국 모두 유사한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력 여건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몽골은 종합 국가 발전전략인 밀레니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마련하고 몽골이 아시아와 유럽 연결의 교량이 되어 에너지 수출 및 지역 운송 서비스를 연결하는 중심지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몽골 정부의 철도 운송 시스템 개발의 목적은 중국과 러시아에 새로운 철도 노선을 구축하여 광산제품 수출시장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도 ‘철도 운송 2030 전략’을 추진해왔다. 이는 극동지역과
자바이칼(Zabaykalye)지역의 천연자원 이용, 몽골과 중국, 북한, 일본으로의 운송 증대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국내 자원 수출을 확대하여 유럽 경제 제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아시아지역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반면, 시장 성장성 측면에서는 중장기적으로 중국과 러시아 간 무역 증대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산업 측면의 파급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국가
몽골(蒙古)
몽골은 2001년부터 종합 국가 발전전략인 밀레니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제시하고 몽골이 아시아와 유럽 연결의 교량이 되어 에너지 수출 및 지역 운송 서비스 연결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몽골 정부의 철도 운송시스템 개발의 정책적 목적은 중국과 러시아에 새로운 철도 노선을 구축하여 단일 광산제품 수출시장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와 노동력 부족으로 장시간 교착상태에 있었다. 이후 몽골 정부는 2013년에 “랜드로드(The Land Road)”로 불리는 새로운 이니 셔티브를 제안하였는데, 본 프로젝트는 997km의 중국과 몽골, 러시아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과 1,100km의 전기 철도 노선, 석유 및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몽골이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최단 경로이며, 본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서는 500억 달러의 자금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몽골의 이러한 전략은 중국 일대일로 전략과 맞물려 새로운 추진 동력을 얻고 있다.
러시아(俄罗斯)
러시아는 철도 운송 2030 전략을 통해 극동지역의 천연자원 운송로를 확충하고, 극동지역 내 경제협력 확대를 통해 유럽 경제 제재 영향을 줄이려는 정책적 노력을 경주해왔다. 러시아는 몽골, 중국, 북한, 일본 운송화물의 수요 충족을 목표로 시베리아와 바이칼-아무르 철도노선의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새로운 교통노선 개발, 기존 철도 개선, 횡단철도 구축, 철도의 전기 공급 원활화, 차고 및 역 재건축, 기술 현대화를 추진 중이다. 극동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의 천연자원에 대한 외국인 투자 유치는 현재 러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정책 우선순위를 부여받고 있다.
교통 인프라 | |
---|---|
1 | 경제회랑(러시아 울란우데(Ulaan Ude)-몽골 나우쉬키(Naushki)-수흐바타르(Sukh baatar)-울란바토르 (Ulaan baatar)-자민우드(Zamiin Uud)-중국 얼롄하오터(二连浩特)-몽골 울란자브(Ulaan Tsav)-중국 장자커우(张家口)-베이징(北京)-텐진(天津))구간의 주요 철도노선의 포괄적 재개발, 복선 철도 건설, 배전 등에 대한 타당성 조사 실시 |
2 | 경제회랑 북부 노선(러시아 쿠라기노(Kuragino)-키질(Kyzyl)-몽골 차강 톨고이(Tsagaan Tolgoi)-아츠 수리(Arts Suuri)-오붓(Ovoot)-에르데네트(Erdenet)-살히트(Salkhit)-자민우드(Zamiin Uud)-중국 얼롄하오터(二连浩特)-몽골 울란자브(Ulaan Tsav)-중국 장자커우(张家口)-베이징(北京)-텐진(天津))의 철도 연결 사업 타당성 조사 시행 후 사업타당성이 있을 경우 즉시 착공 |
3 | 경제회랑 서부노선(러시아 쿠라기노(Kuragino)-키질(Kyzyl)-몽골 차강 톨고이(Tsagaan Tolgoi)-아츠 수리(Arts Suuri)-호브드(Khovd)-중국 다커스컨(塔克什肯)-하이시주(海西州)-우루무치(乌鲁木齐))의 철도 연결사업 타당성 조사 시행 후 사업타당성이 있을 경우 즉시 착공 |
4 | 경제회랑 동부노선(러시아보르자(Borzya)-솔로베프스크(Solovevsk)-몽골 이렌자브(EreenTsav)-초이발산(Choibalsan)-후트(Khuut)-비칙트(Bichigt)-준 카타브츠(Zuun Khatavch)-울란 하드(Ulaan Khad)-중국츠펑(赤峰)-진저우(锦州))의 철도 연결사업 타당성 조사 시행 후 사업타당성이 있는 경우 즉시 착공 |
5 | 두만강 수송회랑 프로젝트 (해안-2회랑) (몽골 초이발산(Choibalsan)-숨베르(Sumber)-중국 아얼산(阿尔山)-울란호트(Ulanhot)-창춘(长春)-연길(延吉)-러시아 자루비노(Zarubino))노선에 대한 타당성 조사 시행 후 사업 타당성이 있는 경우 즉시 착공 |
6 | ‘해안1’ 철도회랑 노선(몽골초이발산(Choibalsan)-숨베르(Sumber)-중국아얼산(阿尔山)-만주(满洲)치치하얼(齐齐哈尔)-하얼빈(哈尔滨)-목단강(牡丹江)-쑤이펀허(绥芬河)-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나홋카(Nakhodka))에 대한 타당성 조사 시행 후 사업타당성이 있는 경우 즉시 착공 |
7 | 모스크바-베이징 고속도로(Super-highway)의 몽골 연결 가능성 조사 |
8 | 3국 공동 물류 회사 설립에 대한 토론 세션 구성 |
9 | 아시안 하이웨이 3호선 (AH-3) (러시아 울란우데(Ulaan Ude)-캬흐타(Kyakhta)-몽골 알탄불라크(Altanbulag)-다르항(Darkhan)-울란바토르(Ulaanbaatar)-사인샨드(Sainshand)-자민 우드(Zamiin Uud)- 중국 엘롄하오터(二连浩特)-베이징(北京)-텐진(天津))의 활용을 촉진하고 몽골의 AH-3 참여에 대한 타당 성 조사 시행 |
10 | AH-3구간건설(러시아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바르나울(Barnaul)-고르노알타이스크(Gorno-Altaysk)-타샨타(Tashanta)-몽골 울란바이신트(UlaanBaishint)-호브드(Khovd)-야란타이(Yarantai), 중국 다커스컨 (塔克什肯)-우루무치(乌鲁木齐)-카스(喀什)-훙치라푸(红其拉甫)) |
11 | 동부해안회랑 러시아보르자(Borzya)-솔로베프스크(Solovevsk)-몽골 이렌자브(EreenTsav)-초이발산(Choibalsan)-바룬우르트(Baruun Urt)-비칙트(Bichigt)-준카타브츠(Zuun Khatavch)-중국 시우주무친기(西乌珠穆沁)-울란하드(Ulaanhad) 노선, 준카타브츠(Zuun Khatavch)-차오양(朝阳) 노선, 청더(承德)-진저우(锦州)노선에 대한 타당성 조사 시행 후 사업타당성이 있는 경우 즉시 착공 |
12 | 아시아 하이웨이 네트워크에 대한 몽골, 러시아, 중국 정부 간 협약 체결 |
13 | 수송 회랑 러시아 울란우데(Ulaan Ude)-캬흐타(Kyakhta) 구간 및 몽골 알탄불라크(Altanbulag)-다르항(Darkhan)-울란바토르(Ulaan-baatar)-사인샨드(Sainshand)-자민우드(Zamiin Uud) 및 중국 엘롄하오터(二连浩特)-몽골 울란자브(Ulaan Tsav)-중국 베이징(北京)-텐진(天津) 구간의 통신 기반 시설 건설 촉진, 기술 작업 관리, 안전 보장 |
산업 | |
14 | 몽골-러시아-중국 경제회랑의 주요 구간 건설 촉진 및 3국간 산업 협력 협정 체결 가능성 조사 |
15 | 중국 흑룡강성(黑龙江省)-내몽골 자치구(内蒙古自治区)-몽골-러시아 경제협력구 건설에 대한 타당성 조사 시행 |
국경검문소 개혁 | |
16 | 3국의 해당 국경지역 검문소 보수: 러시아 국경 검문소 자바이칼스크(Zabaikalsk), 포그라니치니(Pogranichny), 크라스키노(Kraskino), 몬디(Mondi), 중국국경검문소만주(满洲)지역, 쑤이펀허(绥芬河), 훈춘(珲春), 얼롄하오터(二连浩特), 몽골 내 모든 국경검문소 |
에너지 | |
17 | 몽골, 러시아의 전기 배전 계통 개선 작업 관련 중국 기업의 협력 기회 조사 |
무역, 세관, 검사 및 검역 | |
18 |
2015년 7월 9일 체결된 3국간 무역 개발 촉진을 위한 호혜적 환경 조성을 위한 ‘통관항 개발 기본 협력 협의’이행 |
19 | 3국 관세국간 체결된 ‘특정 물품의 세관 조사 결과 상호 인정 협약’ 이행 관련 승인 및 지원 |
20 | 2015년 10월 3일 체결된 ‘3국간 식량 안보 협력 공동선언 이행’ 및 ‘국경지역 식품 무역 통제 강화 및 무역 환경 향상’ 협의 이행 |
21 | 2016년 6월 23일 3국 세관 당국 간 체결된 ‘동식물 질병 및 유해 생물 발생 확산 방지를 위한 동식물 제품 원산지 검역 강화 협약’에 대한 지원 및 동식물 제품 원산지 안전 통제 강화 |
환경 보호 및 생태 | |
22 | 특별보호구역에 대한 실질적 협력 및 소통 강화, 3국 자문회의 구성 및 몽골 Daguur보호구역 조치의 범위 내에서 상호 호혜적 협력 강화 |
23 | 야생 동식물, 조류 이동, 야생 동식물과 수역 탐색 및 사찰 관련 3자 협력 강화 |
24 | 환경 보호 및 생태 분야에 대한 당국 간 정보 교환 시스템 개설 및 협력 기회 모색 |
과학 및 기술 협력 | |
25 | 운송, 환경보호, 천연 자원 사용, 지속가능한 발전 관련 기술, 정보 통신 기술, 나노기술, 에너지, 에너지 보존 및 폐기물 감소, 농업 과학, 신산업기술, 자연 및 기술 재해 분야에서의 3국 혁신 기업 및 과학 기술 연구단지의 협력 촉진 |
26 | 3국의 과학 및 기술 발전 관련 정보 교류 활성화 및 학계 간 교류 촉진 |
27 | 3국간 학생 교류 범위 확대, 교육기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청소년 교육 교류 향상 |
인도주의적 협력 | |
28 | 3국 공동 관광지구 건설, 몽골 흡수골(Khuvsgul) 호수-러시아바이칼(Baikal) 호수-중국후룬베이얼(呼伦贝尔) 초원을 포함한 국경 간 여행지개발 |
29 | 몽골-러시아-중국 관광사업 브랜드 ‘위대한 찻길(Great Tea Road)’ 제작 |
30 | 3국간 영화 거래 및 교류 향상, 공동 영화 산업 개발 |
농업 | |
31 | 2015년 9월 12일 3국 농림부간 체결한 협약 이행 |
의학 | |
32 | 의학 및 보건 관련 국제 세미나 공동 구성 및 공중보건 분야 협력 |
카자흐스탄(哈萨克斯坦)
중국은 2013.9월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카시 일대일로 구축 제안을 계기로 카자흐와 협력을 제안하였으며, 이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도 新실크로드 건설을 통한 대대적인 인프라 건설투자로 내수시장을 부양하고 아시아-유럽을 잇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새로운 물류루트의 중심지로 부상하려는 목표하에 2014.11월 누를리졸(Nurly Zhol)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누를리졸 프로그램은 중국의 실크로드 부활(일대일로)이라는 목표와 부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이 누를리졸 정책 입안과 시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누를리졸의 사업 대상은 운송·물류인프라, 산업인프라, 에너지 인프라, 난방·수도 등 주거환경 개선, 주택공급, 사회인프라, 중소기업지원 등 7개 분야이며, 특히 아스타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간선 도로건설, 카스피해 항만 단지 개발 및 두 개의 송전라인 구축 등이 주요 사업으로 진행 중이다. 양국은 서중국-서유럽 도로건설사업, 연운항 국제물류협력기지 운영, 호르고스 국경협력센터 설립 등의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야심차게 추진 중이다.
대표적 사업인 서유럽-서중국 도로공사는 알마티, 잠블, 남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악토베주 5개 지역을 관통하며, 당초 계획은 2015년말 완공을 목표로 했으나 지연되어 2017년 서유럽-서중국 도로의 카자흐스탄 구간(2,857km)이 건설 완료되었다. 지역간 화물매출은 2.5배 증가, 화물 운송량은 3배 증가하였는 바, 동 도로 건설로 인한 연간 효과는 약 180억 텡게이며, 향후 매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카-중 국경지역인 호르고스에 Khorgos Eastgate 내륙항 구축, 연운항 카자흐 전용 부두 건립, 카스피해 악타우항 확장 및 쿠릭항 건설 등 카자흐스탄의 다양한 인프라 프로젝트 추진에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호르고스 내륙항과 연운항 카자흐 전용 부두는 카·중 양국이 공동투자한 것으로, 호르고스 카측 51%, 중국 49%, 연운항 카측 49%, 중국 51%)
‘누를리졸’과 ‘일대일로’의 협력
- 2013년 9월 중국의 주석 시진핑의 카자흐스탄을 방문에서 처음으로 ‘신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대해 언급함. - 카자흐스탄은 2014년 ‘경제발전 전략 2050’의 일부로 2015년~2019년 까지 시행되는 카자흐스탄 경제위기 극복 프로젝트 ‘누를리 졸’을 발표함. - 2014년 12월 리커창 총리의 카자흐스탄 방문 중 140억 달러의 협정 조약이 체결됨. - 카자흐스탄의 총리 카림 마시모프는 2015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의 리커창 총리와 함께 236억 달러 규모의 산업 협력에 서명 - 2015년 5월 7일 시진핑 중국 주석의 카자흐스탄 방문과 일대일로 참여에 지지를 구함.
‘누를리 졸’과 ‘일대일로’의 유사점
-‘누를리 졸’의 카자흐스탄 도로, 철도등의 교통·운송 인프라 구축에 대한 부분과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유라시아 대륙 교통·운송 인프라 연결과 대륙노선을 따라 각종 인프라 구축에 대한 목표가 같으며, 카자흐스탄 중국 전문가 따찌아나 카우케노바는 이러한 공통점이 중국의 약 236억 달러 규모의 산업협력의 이유라고 전함. - '누를리 졸’은 카자흐스탄의 ‘경제발전 전략 2050’의 일부로 경제위기 극복과 각종 산업 인프라 구축에 주목적을 두고 있음. 이중 도로, 철도 및 항공등 물류 운송 인프라 구축이 ‘누를리 졸’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음.
키르기스스탄(吉尔吉斯坦)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 중 하나이며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중국과 국경이 접해 있다. 지형의 3분의 2이상이 3,000m를 넘는 고지이며, 전 국토의 98%가
산악지형이기 때문에 교통 환경에 있어 제한이 심한 편이다. 또한 내륙국가로서 실질적인 해운항만이 부재한 관계로 철도, 도로 등 육상운송망의 수송 분담 비중이 높
은 편이다. 그마저도 철도의 경우 산악지형에서는 개발이 쉽지 않아 운송 수단 중 도로를 통한 수송이 대부분이다.
키르기스스탄은 중국의 ‘신실크로드 경제권구축’ 전략이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창구 또는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기타 동지역 국가들보다도 더욱 중요한 지정학적인 가치를 지닌다. 중국이 키르기스스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중국이 기타 동지역 국가들에게 갖는 관심과는 다소 구별된다. 키르기스스탄은 동지역 국가들 중 타지키스탄과 함께 비교적 자원빈국에 속한다. 즉 키르기스스탄은 ‘지경학적’인 중요성보다는 ‘지정학적’인 중요성이 더 많은 국가이다. 즉, 중국정부는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21세기 그 ‘전략적’인 가치가 국제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키르기스스탄을 적극 활용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차지고자 한다.
키르기스스탄-중국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양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접경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게 키르기스스탄은 창구역할을 하는 접경국가이지만, 한편 상대적인 키르기스스탄의 민주화로 인하여 중국이 정치적으로 접근하기에는 여전히 그리 용이하지 않은 국가이다. 따라서 중국정부의 효과적인 대키르기스스탄 관계발전은 중국 국내문제의 핵심인 신장위구르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높일 수 있느냐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키르기스스탄-중국 양국은 약 1,100km 달하는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며, 특히, 키르기스스탄의 주요 접경지역인 이르케스탄(Irkestan)과 토루가트(Torugart) 지역은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국지도자들은 키르기스스탄에 살고 있는 약 5~25만 명에 이르는 위구르인들의 불안정성이 키르기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신장위구르 지역의 과격한 분열을 초래할 가능성에 대하여 항상 경계하고 있다. 이러한 양국의 접경지역의 문제는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신장지역으로까지 연결되어지는 도로, 철로, 파이프라인 등 광대한 네트워크 인프라에 대한 위험이 중국에게 증가되어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일대일로의 추진과 함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교통물류 네트워크의 출현은 키르기스스탄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중앙아시아 지역의 키르기스스탄은 중국의 고부가가치 상품들이 유럽으로 향하는 필수적인 중요한 길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키르기스스탄이 유럽으로 향하는 중요한 교차 길목에서 중국 대유럽 무역의 무역 허브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이 키르기스스탄을 제외한 기타 중앙아시아 국가들, 러시아, 그리고 그 외 지역으로 수출하려는 물품의 약 80% 정도를 키르기스스탄의 시장으로 유입한 다음, 키르기스스탄에서 완성품을 만들어 이들 국가들에게 수출하고 있다.
또한 일대일로 사업의 일환으로 2018년 8월 25일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메인 도로인 마나스 스트리트의 수리 복구 공사가 준공되어 당일에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은 마나스 스트리트를 포함해 비슈케크의 많은 도로는 파괴가 심한 상태였다. 비슈케크 도로 수리 복구 프로젝트는 중국도로교량회사가 건설을 수주했고 2019년 11월에 모든 공사가 준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부 회랑
개요
중부회랑은 중국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서아시아→페트시아만→지중해에 이르는 노선이다. [1] '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실크로드 경제벨트 프로젝트를 행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핵심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실크로트 경제벨트 3개의 노선 중 2개의 노선이 중앙아시아를 거친다. 이전의 중앙아시아는 폭력과 테러, 종교극단주의, 민족분열주의등 여러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그리고 이 위협들은 이 지역의 평화와 발전을 위협해왔다. 경제문제로 인해 생긴 문제가 다시금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딜레마를 불러오고 있었 던 것이다. 중국에 의한 일대일로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내륙에 갇힌 국가(land-locked countries)에서 내륙 연결국가(land-linked countries)로 탈바꿈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이다.
주요 국가
우즈베키스탄(乌兹别克斯坦)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내륙국가이다. 하지만 쌍내륙국双内陆国이라고도 불리는데, 쌍내륙국의 의미는 국가 자체적으로 바다로 나갈 출로가 없고, 주변에 인접한 국가들 또한 모두 내륙국인 국가를 말한다. 인접한 내륙국가로는 쪽은 아프가니스탄, 북쪽과 동북은 카자흐스탄, 동쪽과 남동쪽은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과, 서쪽은 투르크메니스탄이다.
과거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살던 민족은 소그드인들로, 실크로드 무역에 종사했던 민족이다. 실크로드 무역으로 이 지역은 매우 부유했으며 황금과 소,양과 음식이 넘쳐났다는 기록이 있다. 우즈베키스탄 민족은 상업에 매우 재능이 있어서 우즈벡 민족에 대해서 "우즈벡 사람들은 달나라에 가서도 장사를 할 사람들이다."라는 카자흐 속담이 있다. 예전에는 면화 재배가 많았으나 현재 우즈베키스탄은 공업과 농업이 주산업이다. 금 매장량은 약 5300t으로 세계 4위, 우라늄 매장량은 세계 8위로 광산 자원이 비교적 풍부하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은「중국-중앙아-유럽」철도 사업의 일환으로 '안그렌-팝' 신규 철도 건설/전철화 사업(124km)을 2013년 7월에 착수하였으며 이란과 직통 철도 건설 방안에 협의하였다.[2] 다만, 중국-우즈베키스탄의 연결 노선은 사이에 있는 키르기스스탄과의 ‘궤간’[3]문제 등으로 지연이 되었었으나[4]우즈벡-키르기스-중국 도로가 완공되었고 2018년 2월 16일 첫 화물운송이 시작되었다. 우즈벡 타슈켄트에서 키르기스를 경유해 중국 카스로 연결되는 도로의 3개국 간 총 거리는 920km로약 31시간이 소요되며, 기존 8-10일의 배송기간이 단축되었다. 세 국가는 해당 도로망을 활용한 신속한 배송을 위해 행정·법률 절차에 대해 합의를 마무리했으며, 3개국을 통과할 수 있는 특별 허가증을 발급하기로 하였다. 또한 앞으로 동일 구간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질 예정이다.[5]
이란(伊朗)
이란은 아시아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로,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터키, 이라크,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과 오만만, 북쪽은 리하이와 러시아, 카자흐스탄과 마주보고 있다. 떄문에 "동서양의 육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45,000년의 역사를 지닌 국가로 과거 페르시아제국이 이곳에 있었다. 석유와 천연가스,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특히 석유산업으로 이란 전체 외화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이란의 외화 수입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이란은 패권주의나 강권정치와 (미국 중심의) 단극세계에 반대하며 때문에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다. 서구 국가들이 민주나 자유, 인권 및 군축 등을 구실로 타국 내정에 간섭하거나 자신들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한다.이스라엘을 중동지역 정세 긴장의 주요 근원으로 꼽고, 자국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팔레스타인 국민의 투쟁을 지지한다. 국제정세로 분석해볼 때, 미국보다는 중국과 가까월 질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다.
이란은 석유 공급을 통해 對우즈베키스탄 무역 확대를 희망하고 있으며, 새로운 교통 회랑 건설 프로젝트 관련 연 1백만 톤의 이란산 석유를 우즈베키스탄에 공급하는 의사를 기표명한 바 있다.[6]특히 양국은 2014.8월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이란-오만간 「중앙아시아-페르시아만 교통회랑」 건설 협정 MOU를 서명하여 추진 중인데 이로써 모든 중앙아시아 국가 사이의 운송 네트워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이라크伊拉克
아시아 남서부, 아라비아 반도 북동쪽에 위치한 이라크는 북으로는 터키, 동쪽으로는 이란, 서쪽으로는 시리아, 요르단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남쪽으로는 쿠웨이트, 동남으로는 페르시아만과 접하고 있다. 중국과 이라크는 2015년 회담을 통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라크의 자원은 아주 풍부한데, 석유 매장량은 202억 톤으로 세계 5위이고 천연가스 매장량은 약 3조6000억m3로 세계 12위다. 때문에 중국은 일대일로의 틀 안에서 에너지전력통신인프라 구축 등 중점분야 재건을 위해 이라크와의 경제민생과 관련된 대형 프로젝트에 중국 기업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7]특히,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약 160km 떨어진 아흐다이브 유전에는 ‘중국 석유中国石油’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시리아叙利亚
시리아는 아시아 대륙 서부와 지중해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북은 터키, 남동쪽은 이라크, 남연 요르단, 남서쪽은 레바논,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긴 내전으로 인해 경제는 파괴되었고 휴전 이후 현재, 전후 복구를 추진하고 있다. 2017년 시리아의 외교부장은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을 만나 일대일로 참여를 확인하였다. 이 만남에서 시리아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환영하고 지지하며, 양국이 협력해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적극 동참할 뜻을 밝혔다.[8]
터키土耳其
실제로 터키는 카자흐스탄에서 출발한 철도선을 연장하여 잇는 지역 철도망을 구상했었다.(중부 회랑Middle Corridor 프로젝트). 줄라크 루오乔拉克卢奥라는 터키 학자는 “중국과 '중부 복도'와 실크로드의 경제벨트를 결합한 일체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9]고 말했으며 2017년에는 터키의 총리 을드럼Yıldırım이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는 긴밀한 비즈니스 연계의 모범 사례라며 아시아가 다시 한 번 세계 경제무역 관계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一带一路”倡议是密切商业联系的典范,使亚洲再次成为世界经贸关系中心”[10]며 일대일로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意大利
남부 회랑
중국→동남아시아→남아시아→인도양 노선
개요
중국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기존의 세계화와 다르게 다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 전략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각종 FTA, RTA와 별개로 세로운 연계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시한 새로운 연계성은 물리적, 제도적, 민간교류 인프라를 공간으로 규정에 엮으면서 동시에 산업벨트, 글로벌 사슬을 형성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계성은 중국이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장한 일대일로와 연결된다. ASEAN(동남아시아 국가연합)도 2009년 10월 15차 ASEAN 정상회의에서 이 연계성을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행했다. ASEAN은 글로벌 사슬 가치에서 미국과 유럽시장의 의존도가 높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수시장 확대에 힘썼다. 1997년 아시아발 금융위기가 발발했고 이것은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 일본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이를 대응하기 위해 ASEAN+3(한,중,일)과 ASEAN+1(한,중,일)을 구성하였다. ASEAN은 일련의 정책의 연장으로 새로운 연계성을 수용하였다. ASEAN이 새로운 연계성에 대한 전략을 수용하면서, 2000년대부터 ASEAN+1,3,6,8등 ASEAN 10개국 중심으로 다층위의 지역협력체를 구상하며 새로운 연계성을 가진 경제협력체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중국은 본격적으로 2009년부터 ‘중국판 마셜 플랜’을 추친하면서 ASEAN과의 새로운 연계성을 추친했다. 2011년 11월 제 14차 ASEAN+3 정상회담에서 중국 원자바오는 태국이 제안한 ‘ASEAN+3 연계성 파트너 관계 이니셔티브’를 지지하며 중국이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2012년 11월 제 15차 ASEAN+3 정상회담에서 13개국 정상은 ASEAN+3 연계성 채택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ASEAN+6, ASEAN+8에서도 연계성을 채택해 그 범위를 확장했다. 중국의 윈난 성, 광시좡족자치구, 남중국해는 ASEAN국가들과 인접해 있다. 이런 지리적 이점은 앞으로 ASEAN과의 새로운 연계성을 형성하며 남부회로를 형성하는 것에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중국기업은 2014~2017년 사이에 일대일로 직접투자 및 EPC 계약 규모가 각각 592억 달러, 4,492억 달러에 달하는 큰 금액을 투자했는데 그 중에 동남아 지역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2016년에 파키스탄, 말런, 인도네시아와 EPC 계약 규모는 약 100억달러를 초과했다. 중국은 2016년 말을 기준으로 ASEAN 10국에 715.5달러라는 금액을 직접 투자했는데 이것은 일대일로 직접투자 잔액의 55.3%로를 차지한다고 한다. 주요 투자 분야는 제조(18.4%), 리스(15.7%),채굴(14.2%), 유통(13.5%)이다. 하지만 이들의 새로운 연계성 전략은 아직 초반 단계에 머물러 있다. 대부분의 인프라 프로젝트가 장기에 걸친 대규모 사업이기 때문이다. 중국-파키스탄 회랑이 현재 진전이 있는 상태이며, 기타 국가들은 아직 MOU나 투자협정 체결단계에 머물러 있다.
주요국가
말레이시아
중국은 말레이시아에 산업단지 조성 등을 통한 협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일대일로 사업을 진행했다. 2011년 4월, 중국의 원자바오(溫家保) 당시 국무원 총리가 말레이시아 방문 시 말레이시아 나집(Najib) 총리와 양국이 공동으로 중국 광시장족 자치구 친저우(欽州) 시에 산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합의하였으며, 2012년 4월 업무 개시했다. 중국-말레이시아의 사업은 아세안(ASEAN)국가에 대한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간편한 입주절차 등을 바탕으로 2017년 7월까지 모두 150여개의 기업 및 총 400억 위안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였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재정건전성 강화 조치에 따른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마하티르 신임 총리는 만성적인 재정적자 개선을 위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 중단했으며 재정건전성 강화 조치를 취했다. 마하티르 행정부는 말레이시아의 대외부채를 약 2,500억 달러(GDP의 80%)로 추정하여 통계자료보다 심각한 수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대규모 프로젝트 진행 중단 및 연기 등을 통해 재정건전성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18년 8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기존에 진행하던 3개 프로젝트(말레이시아 본섬 및 보르네오 섬에서 추진되던 석유·가스관 프로젝트(2개, 총 20억 달러), 말라카와 페트로나스 정유소를 잇는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8억 달러)) 의 취소를 통보했다. 동부해안 철도 건설사업(ECRL,(동북부의 태국과의 접경지역인 코타바루(Kota Baru)에서 수도인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를 거쳐 말라카 해협의 클랑(Klang)까지 총 688km에 이르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과도한 사업비책정 및 사업조건 변경 등을 사유로 추가 연기 또는 취소할 예정이다. 한편,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8년 9월 대외채무 관리 및 재정안정화를 위해 쿠알라룸푸르-싱가포르 고속철도(HSR) 프로젝트 시행을 2020년 5월 말로 연기하기로 싱가포르 정부와 합의했다.
인도네시아
중국과 인도네시아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중국 고속철 굴기가 연계하여 현재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도로, 항만, 전력 등의 인프라가 부족해서 일대일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중국은 고속철 굴기를 추진하여 2008년 이후 10여 년간 중국 내 철도 인프라를 구축하는 한편 102개국 앞1,430억 달러 규모의 고속철 및 부품 수출을 통해 2018년 3월 말 기준으로 세계 고속철 시장의 66%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 철도사업이 시행되면 자카르타-반둥 간 이동시간을 단축하게 된다.(기존 3시간→40분) 또한 철도 건설로 파생되는 현지 건설 소재 산업 성장, 현지인력 채용 및 육성 등의 기대효과도 얻을 수 있다. 2018년 8월 말 중국 광저우에서 개최된 투자유치 설명회에서 인도네시아 투자조정청은 90개 중국 기업 앞 민자발전사업, 고속도로 건설 사업 등 약 132억 달러 규모의 인프라 건설 사업을 제안했다. 하지만 아직 여러 불안요소들이 존재한다. 인도네시아는 여러 당이 연립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정부 정책이 자주 변경되어 투자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장기간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특성상 각종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사회의 고질적인 관료주의 및 부패 문제는 외국인 투자 유치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는 전통적으로 비동맹 중립외교를 펼치고 있어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였다. 이런 외교적 경향으로 봐서, 중국과의 일대일로 추진을 통한 중국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커지는 것은 지양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 신자가 87%에 이르는 세계 최대 인구의 이슬람 국가로서, 2016~17년 자카르타및 2018년 수라바야 폭탄테러 등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의 공격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제2의 테러 무대로 발전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음. 인도네시아 대테러청(National Terrorism Handling Body)에서도 테러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다각도로 대응하고 있지만 여전히 위험성은 존재한다.
인도
인도는 중국과 함께 세계 양대 개발도상국으로, 오랜 기간 국경분쟁의 상대국이었던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주변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에 대해 견제 심리가 존재했다. 중국은 인도의 세계 최대 교역국이며, 인도는 중국의 세계 6위 교역국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동진정책인 ‘Act East‘ 전략, 경제 몬순정책 등을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응하는 양상을 보였다. 2014년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유산 정부간 위원회에서 인도양 연안 국가 간의 문화유산 보호 및 개발 영역에서 협력하는 것을 기초로 했다. 2014년 9월 16일 인도 외교부와 문화부의 회의를 통해 동 계획은 외교경제 기능을 갖추어 인도의 국가전략으로 발전했다. 인도, 정치·사회·문화적 요소 등으로 인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소극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도 국민은 문화적으로 4대 문명의 발상지로서의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중국에 의해 추진되는 “일대일로” 정책 자체에 대하여 반감이 있다. 인도 국민은 1962년 중국과의 국경분쟁에서 패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다. 또한 중국이 인도의 UN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에 대하여 줄곧 반대 입장을 표명함에 따라 인도는 중국을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다. 인도는 중국이 파키스탄과 우호관계를 맺은 것도 자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인도는 정치적으로 중국의 해군 증강을 통한 인도양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 추진은 인도양에서의 자유로운 활동 및 영향력 확대에 명분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를 통해 장래 중국 해군의 전투력을 증강하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파키스탄
중국과 파키스탄은 ‘중-파 경제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CPEC)’ 조성했다. ‘중-파 경제회랑’은 6대 경제회랑 중 유일하게 단일 국가와 추진한 경제회랑이다. 중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기반하여, 파키스탄은 중국과 유일하게 ‘전천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다. 중-파 경제회랑에서는 중국은 약 620억 달러 규모 투자를 계획 중이며, 이를 통해 파키스탄의 과다르 지역에서 중국 서부의 신장 지역(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이르는 구간을 개발해 연결할 예정이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참여로 거시경제 안정성 저하 및 외화유동성 위기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중-파 경제회랑(CPEC) 사업 추진 및 고유가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심화 등을 감안, IMF 추정 기준 2018년 외화금융수요가 215억 달러로 예상되나 ’2018년 8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이 99억 달러(1.7개월 수입분)까지 축소되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 누적과 통화가치 평가절하*로 ’18.6월 말 정부 및 정부보증 채무가 GDP의 76%까지 증가하였으며, 국내 공공채무의 60%가 만기 1년 미만으로 만기구조도 취약하다. 특히, 중국에 대한 총 공공외채는 ’18.9월 현재 GDP의 24%(IMF 추정) 수준이나, 프로젝트 소요자금은 중국으로부터의 장기 양허성 차관 외 FDI, 민간 부문 차입분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파키스탄 재무장관은 2018년 10월 11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에서 IMF 총재와의 면담을 통해 IMF의 금융지원을 공식 요청하였으며, IMF 총재는 가까운 시일 내에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조사단을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 IMF에서는 파키스탄 내 중국 일대일로 사업과 관련해 비공개된 정보의 투명화를 요구할 것으로 예측되며, 미국 폼페이오 장관이 파키스탄에 대한 IMF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에 대해 중국 견제의 필요성을 감안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등 IMF 구제금융 승인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등으로 인한 사회불안 요소도 파키스탄과의 사업을 위협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과격 이슬람 세력의 테러 활동과 발루치스탄 지역 내 분리주의자 테러 활동이 여전히 활발하여, 수십 명의 중국인 근로자가 테러로 사망함에 따라 18,000명에 이르는 병력이 건설현장에 투입되는 등의 사회불안 요인이 위험요소로 작용한다. 파키스탄은 경제개발 수준이 낙후되어 있으며, 투자환경이 열악하다. 파키스탄의 2017년 세계은행 비즈니스 환경 순위는 190개국 중 147위, 글로벌 경쟁력 순위는 137개국 중 115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의 최근 CPEC 관련 대규모 투자 유입에도 불구하고 FDI 유입 규모는 GDP의 1% 미만에 불과하다.
국내 주요 거점
'일대일로' 전략의 대내적인 목적은 지역 불균형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추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대일로' 관련 주요 거점지역의 개발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내 '일대일로' 거점지역은 2개 핵심지역, 2개 국제 거점, 18개 성, 7개 고지(高地), 16개 항구를 포함한다. 2개 핵심지역은 신장과 푸젠이며, 2개 국제 거점은 상하이와 광저우이다. 18개 성(산시성, 간쑤성, 칭하이성, 닝샤자치구, 신장자치구, 내몽골자치구, 충칭시, 윈난성, 시장자치구, 광시자치구, 랴오닝성, 지린성, 헤룡강성, 상하이시,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해남성)은 서북 6성, 동북 3성, 서남 3성, 연해 5성, 내륙의 충칭이고 7개 고지(高地)는 청두, 창사, 시닝, 우한, 정저우, 난창, 허베이이며, 16개 항구는 대련, 광저우, 샤문, 상하이, 칭다오, 닝보, 푸저우, 산야 등을 의미하는데. 그 구체적인 지역은 다음 그림이다.
‘육상실크로드’ 거점도시는 시안, 난저우, 시닝, 우루무치 등 4개 거점도시를 선정하였다. ‘육상실크로드’는 중국 동북 3성, 서북 5성, 서남 4성을 거친다.
동북지역
서북지역
화북지역
에너지 사업
중국의 에너지 안보
에너지 안보의 일반적 개념
안보의 개념은 크게 2가지 의미가 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안보는 생존, 환경, 치안 등의 개념을 포함하는 안보이다. 에너지 외교와 정치 관점에서의 안보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에너지 수송로와 에너지 자체를 확보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번에 차용할 안보의 개념은 후자이다.
Yergin은 과거의 에너지 안보의 핵심요소와 대책은 석유 공급량의 안정적 확보와 이를 위한 공급원 다변화가 주요 내용이었지만, 이제는 더 넓은 차원으로 확대되어 모든 에너지의 생산, 수송, 유통 체계 및 인프라의 보호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대된다고 얘기한다. 1980년 중반 이후에서 현재까지 제시된 에너지 안보의 개념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고 한다. 공급량의 “적정성”, “안정성/신뢰성”, 그리고 가격의 “합리성”이다. 이 요소들은 정책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너지 안보 정책은 에너지 공급이 어떠한 방해나 위협 없이 원활히 가능하며, 석유 가격의 폭등 등의 문제를 저지해서 적절한 에너지 가격을 유지하고, 큰 위기상황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해결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안드리스 피에발그스(유럽연합 에너지 집행위원)은 공급 안보의 문제라는 게 예전에는 매우 전문적인 공학자나 시스템 운영자가 담당하는 기술적인 문제였지만, 이제는 에너지 안보 문제를 유럽 전역의 에너지 장관들뿐 아니라 외교, 재무, 산업 장관들이 검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에너지 안보는 과학적 발전 방향뿐만 아니라 경제적, 외교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려면 에너지를 국가 내에서 생산해 자급자족이나 단일통로만 공급받는 것으로 한계가 있다. 다양한 새로운 에너지 통로를 구축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에너지 안보 정책은 국가차원에서 외교적, 경제적, 지정학적 고려를 통해 시행되어야 한다.
중국의 에너지 안보
중국 우한대학의 양쩌웨이 교수는 중국의 에너지 안보를 3단계로 설명했다. 1단계는 1949년에서 1992년까지의 시기이다. 중국은 이 당시에는 에너지를 자급자족하였다. 2단계는 1993년에서 2002년까지의 시기이다. 중국은 에너지 공급 안보에 주의하던 시기였다. 중국은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에너지 수입국으로 전환되면서 에너지 안보에 집중했다. 3단계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중국은 에너지 개척과 효율적인 물류노선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3단계 에너지 안보정책을 시행하고 있다.중국의 에너지 안보정책은 에너지 공급원 및 수입경로의 다변화, 해외 자원개발 확대, 석유 및 가스저장 능력 강화, 국내 생산능력 제고, 에너지 효율 제고로 구분된다. 기본적인 방침은 국내와 해외에서 에너지 공급력을 확보하는 것에 주력하며, 더 세부적으로는 수송상의 안정 확보와 안정적 에너지 수급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중국은 1993년부터 원유 순수입국으로 전환되면서 원유 해외수입 의존도가 높아졌다. 수입 의존도의 확대는 에너지 안보정책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에너지 공급원 및 수입경로의 다변화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은 다양한 국가와 에너지 계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석유 공급의 60%로는 중동에 의존하고 80%를 말래카해협을 통과하는 통로에 의존하여 수입 경로가 한정적이었다.그래서 에너지 공급 국가들과 에너지 계약과 수송로 건설 계약을 맺었다. 석유의 경우, 2013년 6월에 러시아 국영석유사 Rosneft와 원유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하였고 9월에 카자흐스탄의 카스피해 카샤간 유전 지분의 8.4%를 매입했다. 천연가스의 경우, 중국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잇는 25bcm이르는 가스관을 추가 건설해서 이전에 있던 가스관을 더 확장하는 계약을 합의했다. 2013년 7월에 미얀마-중국가스관을 건설해 가동하기도 했다. 2014년 5월에는 러시아 국영천연가스회사 가스프롬과 장기 가스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는 석유, 가스 공급원 모두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 동부지역에 진출하고, 중국CPNC(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는 아프리카의 정제공장과 파이프라인에 투자하고 있다. 중국은 중동지역 단일화 통로에서 벗어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리카 등의 지역의 다양한 수송로를 확보하는 정책을 시행중이다. 해외 자원 개발을 확대하기 위해, 중국은 정부와 정책은행은 국유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해외 에너지 수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중국 정부가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한 에너지,금속 관련분야 투자 비율을 보면 해외직접투자의 70%에 해당한다. 중국의 국영 정유회사인 CNPC, CNOOC,Sinopec은 해외유전매입에 고액을 투자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해외자원개발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 지역에 원조를 강화해왔다.
일대일로 에너지 산업 전망
중국의 에너지 수입의 필요성
중국의 에너지 수요는 총체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중국에서 주요하게 사용하는 에너지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이 있다. 이들의 수요 비율은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약 석유는 17%, 석탄은 72%, 천연가스는 2%~5%를 차지하고 있다. 수력, 원전, 풍력 등의 신재생 에너지원의 비율은 2015년에 11.2%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이 데이터를 통해, 석유, 석탄, 천연가스가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중국 에너지 소비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한 3가지 에너지에 집중하여 살펴보면, 석유는 2007년에서 2015년까지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 것에 비해 소비량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중국의 석유소비량과 경제성장률은 정비례한다. 중국은 석유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였지만 개혁개방 이후 석유소비량이 증가했다. 1993년부터 석유 소비량(1만 4950억톤)이 국내 생산량(1억 4400만톤)을 증가하면서 석유수입국으로 전환했다. 중국 내 최대 유전으로 알려진 다칭유전(大庆油田)의 석유생산량은 2020년까지 연평균 130만 톤을 감산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들은 중국의 석유소비가 심각하게 해외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국제에너지기구(IEA)와 중국내 관련 예측 치에 따르면 2025년에 중국의 석유 수입의존도는 82%에 도달하며, 2030년쯤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2030년 이후 전기자동차 보급이 확대되고 중국정부가 차량 소유 증가 제한, 수송부분 전력화 추친 등의 정책을 시행한다는 가정 하에 석유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석탄은 2007년에서 2014년까지 생산량과 소비량이 둘 다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고 2015년에는 소비량은 증가한 데 비해 생산량은 약간 감소했다. 석탄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총 에너지의 3분의 2를 담당하는 소비량의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중국은 석탄의 수요가 높은 만큼 많은 양의 석탄을 수입한다. 예를 들면, 중국은 2013년도 기준으로 약 327만 톤의 석탄을 수입했다. 국가별로 비중을 보면 인도네시아(39%), 호주(26%)에서 65%를 수입했고, 러시아에서 8%를 감안하면, 이들 3개국에서 전체의 73%를 수입했다. 중국의 석탄 수입은 202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증가하다가 노후된 발전설비 교체, 저열량탄 사용의 축소 등의 이유로 이후에 완만하게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035년에도 중국의 석탄 수입은 2012년의 2배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ET시나리오에 따르면 2020년대에 이르면 수요성장 둔화와 저탄소 연료로의 전환에 의해 에너지소비에 의한 중국의 탄소배출량이 최대치에 이를 것으로 보이며 이후부터 석탄소비가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천연가스는 2007년에서 2015년까지 생산량은 2008년부터 국내 수급 불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에 비해 소비량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나 중국내 관련 예측 치에 따르면 천연가스 수요는 5,000억 ㎥에 도달하여 40% 정도의 수입의존도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IEA에 따르면 천연가스 수요는 청정에너지원 보급 차원에서 산업 부문, 발전 부문 및 건물 부문에서 더욱 확대될 예정이다. 중국 천연가스 수요는 2040년까지 세계 천연가스 소비량의 4분의 1에 도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천연가스 생산량은 소비량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석유, 석탄, 천연가스는 전체적으로 수요량이 증가하는 것에 비해 생산량은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중국의 에너지 수요 비율과 현황은 중국의 에너지 수입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주요한 3가지 에너지에 집중하여 살펴보면, 석유는 2007년에서 2015년까지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지 않는 것에 비해 소비량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중국 내 최대 유전으로 알려진 다칭유전(大庆油田)의 석유생산량은 2020년까지 연평균 130만 톤을 감산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들은 중국의 석유소비가 심각하게 해외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국제에너지기구(IEA)나 중국내 관련 예측 치에 따르면 2025년에 중국의 석유 수입의존도는 82%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석탄은 2007년에서 2014년까지 생산량과 소비량이 둘 다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고 2015년에는 소비량은 증가한 데 비해 생산량은 약간 감소했다. 석탄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총 에너지의 3분의 2를 담당하는 소비량의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중국은 석탄의 수요가 높은 만큼 많은 양의 석탄을 수입한다. 예를 들면, 중국은 2013년도 기준으로 약 327만 톤의 석탄을 수입했다. 국가별로 비중을 보면 인도네시아(39%), 호주(26%)에서 65%를 수입했고, 러시아에서 8%를 감안하면, 이들 3개국에서 전체의 73%를 수입했다. 중국의 석탄 수입은 202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증가하다가 노후된 발전설비 교체, 저열량탄 사용의 축소 등의 이유로 이후에 완만하게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035년에도 중국의 석탄 수입은 2012년의 2배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천연가스는 2007년에서 2015년까지 생산량은 2008년부터 국내 수급 불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에 비해 소비량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나 중국내 관련 예측 치에 따르면 천연가스 수요는 5,000억 ㎥에 도달하여 40% 정도의 수입의존도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석유, 석탄, 천연가스는 전체적으로 수요량이 증가하는 것에 비해 생산량은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중국의 에너지 수요 비율과 현황은 중국의 에너지 수입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알대일로 사업 현황
중국-중앙아시아 에너지 수송로
1) 석유 파이프라인
중국-카자흐스탄 석유 파이프라인이다. 서쪽의 카자흐스탄 서부 항구 도시 아티라우에서 시작 되어 중국 측이 카자흐스탄에서 구매한 악퇴베 유전 지역을 거친다. 카자흐스탄 지역 전체를 가로질러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변경에 있는 아라산커우시(阿拉山口市)를 지나 최종적으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도착한다.
2) 중국-중앙아시아 천연가스관
중앙아시아 - 중국 가스관 1기 : 2009년 12월 14일에 개통해서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국경 지대인 게다임을 출발해서 카자흐스탄을 거쳐 중국 서부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호르고스까지 1,833km에 이르는 거리를 연결한다.
중앙아시아-중국 가스관 2기 : 2007년 8월 18일에 카자흐스탄 국내 가스관의 건설은 20베이징에서의 중국 - 카자흐스탄 정상회담, 2008년 11월 3일 아스타나에서의 상하이협력기구 제7차 총리 회담에서 원자바오 총리와 마시모프 총리의 천연가스 협력 확대 협정 조인을 통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9년 여름까지는 중앙아시아 가스관 연결 공사로 인해 카자흐스탄 국내 가스관건설 사업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그로 인해 중앙아시아 가스관이 개통되기 2개월 전인 2009년 10월이 되어서야 2기 구간인 카자흐스탄 국내 가스관프로젝트 실시가 확정되었고 2010년 6월 12일에 공사 관련 협의가 완료되어 동년 12월 21일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카자흐스탄 국내 가스관의 기점은 천연가스가 생산되는 베이네우이다. 베이네우에서 운송이 시작된 천연가스는 베레조이를 거쳐서 소비 지역인 쉼켄트까지를 연결하며 연간 150m³까지를 수송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쉼켄트는 중앙아시아 가스관의 가스 압축센터(compressor station)가 있는 곳이기도 하여서 카자흐스탄 국내 가스관은 중앙아시아 - 중국 가스관과도 바로 연결될 수 있다. 중앙아시아 - 중국 가스관 1기, 2기는 4개국을 통과하고 1기, 2기의 길이를 합치면 현존하는 가스관들 중에서 세계 최장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1기, 2기 가스관은 매년 300억m³까지 중국 신장으로 수출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설계된 용량대로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가 수입되면 중국의 기존수입국인 호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중동 지역 국가들로부터의 LNG선을 통한 장거리 운송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줄여 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앙아시아 - 중국 가스관의 수출 가격은 m³당 250달러로 러시아의 대유럽 천연가스 수출가격인 m³당 300달러보다 낮게 책정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에너지 안보에 있어서 중요한 적정 가격으로의 천연가스 수입에 적합한 가격 수준이다.
중앙아시아-중국 가스관 3기 : 1기, 2기 건설과 마찬가지로 중국석유의 참여와 중국국가개발은행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정부 간 협의를 진행하였다. 정부 간 협의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국가는 우즈베키스탄이었다. 이는 우즈베키스탄이 3기 가스관을 통해 중국으로의 천연가스 수출을 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2011년 2월에 3기 가스관을 유망 투자 프로젝트 리스트에 넣으면서 가스관 건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그 결과 2011년 4월 21일에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3기 가스관의 우즈베키스탄 구간 협의서를 교환하였다. 카자흐스탄 정부도 동년 9월 6일에 3기 가스관의 카자흐스탄 구간에 대한 협의서를 중국 정부와 교환하였다. 카자흐스탄이 3기 가스관 사업에 참여한 것은 카자흐스탄 천연가스가 중국으로 수출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는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도 동참하여 중국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함께 3기 가스관 1,830km의 길이로 매년 250억m³의 천연가스를 수송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그 결과 3기 가스관은 2014년 6월 15일부터 중국 서부 지역으로의 천연가스 수출을 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중국 가스관 4기 :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를 타지키스탄을 거쳐서 중국 서부 지역으로 수출하는 길이 1,000km의 노선이다. 이 노선은 2014년 9월 15일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산베에서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과 타지키스탄 대통령 에모말리 라흐몬(Emomali Rakhmon)가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거행하면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4기 구간의 공사는 타지키스탄의 지형이 하류와 산간 지역이 많으며 타지키스탄의 교통, 물류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기존 3개 구간보다 어려운 공사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공사가 완료되어 중국 서부 지역으로의 천연가스수출이 시작되면 타지키스탄에 천연가스관의 관리와 천연가스 통행과 관련된 수입이 확보되기 때문에 중국이 구상하는 실크로드 경제권의 구축과 실현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실크로드 인프라 건설 현황
일대일로’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분야는 ‘인프라 확충으로, 향후 중국 내 인프라 투자와 건설이 활발해지며, 항공업계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게 될 전망이다. 중국의 기존 항공시장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으며, 국제선 시장보다는 자국 내 국내선 시장을 중점적으로 육성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대일로’를 배경으로 인프라 투자와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중서부 지역 시장이 발달하고 있으며, 국제선 역시 빠르게 확충되며 새로운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 서부지역의 공항 건설을 통해 노선을 확대하고 중앙아시아를 관통하여 중국과 유럽이 연결되도록 하였다. 중국민항총국(CAAC, CivilAviation Administration of China)의 Li Jiaxing 국장은 ‘2015 China Civil Aviation Development Forum’에서 공항 인프라 구축이 도로와 철도 건설비용보다 저렴하며 실크로드 상의 나라들과 중국 간의 무역을 더 촉진시킬 수 있음을 언급하는 등 항공 인프라와 국제운송의 확대를 언급하였다. 또한 중국은 영공을 더욱 더 개방함으로써 운항편수와 노선을 증대하기로 하였다. 예들 들면 우루무치(乌鲁木齐) 공항을 기반으로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동, 유럽 등의 일대일로 국가와 국제선 직항노선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중국민항총국(CAAC)은 국제선 취항을 자유롭게 하는 등 항공교통의 ‘일대일로’ 정책과의 부합과 지원을 위해 투자와 규제완화를 시도하고 있다.
에너지 실크로드의 불안전성
지역상의 위험성
에너지 안보식 통치는 언제나 석유 채굴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부터 댐 건설로 가난해진 사람들, 발전소가 일으킨 오염 탓에 병든 사람들, 농업 연료 플렌테이션 때문에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숱한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에너지 시스템이 더욱 확대되고 군사화될수록, 지방,국가,종교 측면에서 다른 논리를 따르는 공동체들의 저항과 거부의 분위기도 더욱 확산된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국가와의 관계는 우호적이나 중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국경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언어와 종교, 밀입국, 수자원 안전, 테러리즘과 같은 문제들이 얽혀 있다. 중국 신장 지역의 분리독립 세력인 동투(东突)와 관련된 중앙아시아의 분리주의 및 테러리즘 세력은 ‘일대일로’ 전략을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특히 최근 신장 지역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지역 안보가 불안해지는가 하면 ‘일대(一帶)’의 첫 정거장인 카자흐스탄은 중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교역량이 하락하는 등 첫 단계부터 만만치 않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철도 측면의 문제점
해상통로보다 비교우위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미국의 잠재적 해상 봉쇄를 뚫는 이러한 대륙 횡단 화물 열차를 중국에서 속속 개통했지만 문제는 해상 선박 운송에 비해 화물 열차의 한계 또한 뚜렷하다는 점이다. 화물 열차가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컨테이너는 최대 몇 백 개에 불과하지만 화물 컨테이너는 최대 만 8천 개까지 실어 나를 수 있다. 물론 속도는 열차가 더 빠르겠지만 비용 면에서 선박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수송비 측면의 이러한 압도적 차이 때문에 화물 열차는 절대 선박을 대체 할 수가 없다.
EU에서 온 일대일로에 대한 의심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U(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에 제동을 걸었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사이에 추진되고 있는 고속철도 건설사업이 EU의 공공조달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잡고 조사하고 있다.중국은 작년 11월 라트비아에서 열린 중국과 동유럽 16개국 간 정기협의체 ‘중국·동유럽 정상회의’에서 헝가리·세르비아 정부와 양국 수도를 잇는 고속철을 건설하기로 각각 합의했다. 총 28억 9000만 달러가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고속철이 건설되면 육로 기준 8시간 정도 걸리는 이동시간이 3시간으로 대폭 단축되어 헝가리·세르비아 정부도 큰 기대를 걸어왔다. 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간 고속철은 서유럽·아프리카 등지에서 피레우스 항구까지 해상 운송을 통해 들여온 물자를 동유럽·중앙아시아지역으로 실어나를 육상 운송로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고속철 사업에서 차질이 발생하면 중국이 실질적인 손해도 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역사
실크로드 개요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를 범칭한다. 사실 '실크로드'라는 말의 출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독일의 지리학자인인 리히트 호펜(F. von. Richthofen)이 19세기 후반 중국 각지를 답사하면서 처음 명명하였다. 그는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서북 인도로 수출된 주요 물품이 비단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세(Seidenstrabe)"라고 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동양학자들은 지속된 연구를 통해 정의된 실크로드로는 동서 교류의 3대 통로, 즉 북방의 초원로와 중간의 오아시스로, 해로이다. 우리가 보통 실크로드라고 하면 낙타를 타고 사막에서 비단을 운반하는 상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리히트호펜이 처음 오아시스로를 실크로드라고 지칭하였기 때문이다.
실크로드는 비단이 통한 길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실 비단을 제외한 수많은 물품들이 오갔다. 지금에 와서는 그 개념이 확대된 결과 하나의 상징으로서 쓰인다. 실크로드는 광의로서의 실크로드와 협의로서의 실크로드로 나눠볼 수 있다. 광의의 실크로드는 이 교역이 선사시대에 개통된 이후에 지금까지 기능하고 있다는 의미의 실크로드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인류의 대이동에 의해 유리시아에 몇 개의 길이 열렸는데 이것이 실크로드의 개통이며 지금에 와서도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협의로서의 실크로드는 교류의 흔적이 유물뿐만 아니라 문헌에 의해서도 입증된 7~8세기 초원로나 해로를 통한 실크로드로 18세기까지 기능했다는 의미의 실크로드이다. 근대적인 교통수단의 발명되었지만 근대 민족국가들이 출현으로 자유로운 이동이 제약되었기에 18세기를 실크로드의 종말로 본다. 오늘날의 실크로드는 대게 협의로서의 실크로드를 의미한다.
실크로드의 변화과정은 크게 개척기와 번영기, 쇠퇴기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개척기는 기원전 8~7세기 스키타이가 초원로를 개척한 시기부터 장건의 서역로 개척으로 인해 동서간의 통교가 이루어진 시기를 말한다. 번영기는 중국의 비단이 다량으로 서역에 전파된 때부터 중국 당제국과 이슬람 제국에 의한 활발한 동서교류와 몽골제국의 형성에 의해 17세기 대륙 간 교역이 진행되던 시기를 말한다. 쇠퇴기는 18세기 이후 초원로와 오아시스로의 이용이 점차 퇴조, 마비된 시기이다.
초원로의 역사
실크로드의 3대 교역로 중 가장 오래된 길은 '초원로'이다. 초원로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동서교류 통로를 지칭한다. 초원은 연평균 강수량이 250~500mm로 수목이 자라는데 적합하지 않고, 건기에는 볼모지이지만 우기에는 풀이 무성해지는 지대의 기후를 말한다. 유라시아는 총 4개의 긴 기후대가 형성되어 있다. 가장 북쪽에는 동토대(冻土带-흙이 어는 지대), 다음은 침엽수립 지대, 초원대, 가장 남쪽에 사막대이다.
초원로의 특징은 길의 이용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 길은 지형이나 기후의 제약이 크게 없이 수시로 이용이 가능하며 길의 너비과 길이도 제약이 없다. 때문에 오아시스로나 해로에 비해 노선이 분명치 않다. 또한 이 길은 기마유목민족 전용의 길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교류 및 이동통로로 기능해왔다.
기원전 8세기, 스키타이 문화는 초원로를 따라 동전하여 몽골고원을 지나 중국 화북지방의 오르도스 일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몽골 고원에서 일어난 흉노는 스키타이 문화를 비롯한 북방 기마 유목민족 문화와 한漢문화를 흡수, 융합하여 호한문화라는 흉노 특유의 기마유목문화를 창출하였다. 흉노에 이어 초원로를 누비며 동서교류의 주역을 담당한 민족은 돌궐족이다. 기원전 4세기 부터 몽골고원 곳곳에 산재한 유목민 일족인 돌궐은 기원후 552년에 유연 등 여러 미녹을 정복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6세기말, 소그디아나에 건국된 서돌궐은 동로마제국과 수차례에 걸쳐 사절을 교환하고 교역도 진행하여 초원로는 동서교류의 한 간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657년 서돌궐이 당에 의해 멸망한 뒤,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초원로는 당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8세기 아랍-이슬람군이 이 지역에서 당을 축출함으로서 당의 서진을 막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진다. (탈라스 전투) 이후, 이 지대는 아랍-이슬람 세력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3세기 몽골제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13세기 초, 아시아 전역과 유럽, 러시아지역은 몽골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기마유목민족인 몽골의 대규모 서방 정복은 초원로를 따라 진행된다. 몽골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부진한 상황에 처한 초우너로는 16세기 후반에 와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로 인해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다. 1581년 러시아는 탐험대를 파견하였으며 우랄산맥 동쪽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시베리아 라고 칭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의 초원로를 따라 계속 동진하였고 1638년에는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여으며 이후 남진하여 청나라의 국경지역 까지 세를 확장하였다.(네르친스크 조약). 우랄산맥 동쪽으로부터 남러시아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지나 부분적으로 북방 침엽수림대를 관통하여 흑룡강 일때까지 이어지는 길을 시베리아 초원로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길의 서쪽 부분은 전통적인 초원로의 일부분이나, 동쪽 길은 새로 개척된 초원로이다. 초원로는 다른 두 로드(오아시스로, 해로)보다 일찍 개통되었으며 상당히 오랫동안 동서 교류의 중요한 통로로 기능해왔다. 기록으로만 본다면 기원전 8~3세기의 스키타이의 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개척기에 이은 번영기는 흉노가 흥기한 기원전 3세기부터 몽골제국이 멸망한 14세기까지 볼 수 있다. (1700여년간 지속)몽골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부진하던 초원로는 16세기 후반, 시베리아 초원로(모피로)가 개척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초원로는 왕래가 줄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오아시스로의 역사
오아시스로는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건조지대(사막)에 존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동서교류의 통로를 지칭한다. 오아시스는 누구나 알다시피 사막의 건조지개 군데군데에 물이 괴어 있어 초목이 자라고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오아시스는 사막인들 생활의 보금자리일 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로서 문물이 집중되고 교통이 발달하여 도시도 형성되었다. 유라시아대륙에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고비사막-타클라마칸 사막 - 키질쿰 사막 - 카라쿰 사막 - 루트 사막 - 카비르 사막 - 시리아 사막으로 이어져 지중해 동안에 이른다. 이러한 사막대带에는 곳곳에 오아시스가 산재해 있다. 이것들이 이어져 이룬 길이 오아시스로이다.
오아시스로는 실크로드의 여러 지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길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용도나 이용에서 여러 차례 기복을 겪은 초원로나 해로와는 달리 고대부터 근대까지 큰 변동 없이 줄곧 이용되어 왔다. 수많은 왕조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으며 오아시스로는 동서 교통로에서 문자 그대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때문에 리히트호펜 또한 이 오아시스로만을 실크로드로 간주하였다. 협의에서 오아시스로를 실크로드로 지칭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 오아시스로는 처음부터 동서 구간이 일시에 개통된 것이 아니다. 파미르 고원의 횡단로가 뚫리면서 서로 연결되어 동서 관통로가 생긴 것이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에는 이미 정비된 교통이 존재하였는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가 광대한 교통로를 연결해 놓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서아시아 일대에는 발달된 교통로가 줄줄이 뻗어 있었다.
파미르 고원의 동쪽은 서아시아 일대보다 그 기록이 늦는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의 명으로 서역을 개척한 장건이 이 지역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겼다. 전한 시기, 한나라에서 서역으로 가는 오아시스로는 남도南道와 북도北道 두 길이 있었다. 남도는 돈황 남쪽의 양관陽關을 지나 타림 분지의 우기于闐 등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나며 두 달래 길로 나뉜다. 한 길은 파르티아에 이르며, 다른 한 길은 시리아에 이른다. 북도는 투르판을 지나 천산 산맥의 기슭을 따라 가는 길이다. 이 길 역시 대완(페르가나)에서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한 길은 아랄해 북단 까지 이어지고, 또 다른 길은 안식(파르티아)에 이른다.기원전 60년, 한인들은 파미르 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제국까지 이어지는 오아시스로 남도와 북도를 알고 있었으며 이 길을 통해 서역제국과 사절을 교환하고 교역도 진행하였다.
기원후 25~220, 후한 시기에 와서 서역과의 관계가 확대되며 오아시스로의 이용이 빈번해졌다. 7-8세기 수당대에는 서역과의 교역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해짐에 따라 동서교류의 주통로인 오아시스로의 역할이 한층 더 커지고 노선이 고착되기에 이른다. 일반적인 노선은 큰 변화가 없었으나 특히 당대에 와서는 당조가 지배권을 확립하고 파미르 고원 서쪽에 22개의 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서역에 대한 경영을 본격화한다. 이전에는 강종 교류가 오아시스로의 구간별로 간접적이고 단절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전노선에 걸쳐서 직접적이고 관통적인 방식으로 추진된다. 서역의 지역적 개념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와 이란, 아랍과 로마까지 확대되었다.
오아시스로가 중국 당대에 고정된 이후에는 이 길을 따라 중세의 여러 역사적 변화가 전개되었다. 13세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대한 몽골의 정복과 정복 이후 일 칸국을 비롯한 서역의 속령에 대한 몽골의 경영은 오아시스로의 서단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몽골제국을 계승했다는 티무르 제국은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이 길의 서단을 종횡무진하며 전무후무한 중앙아시아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정리하자면,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 까지 1000년간 파미르 고원을 사이에 두고 서단과 동단이 각기 길을 개척, 정비하다가 기원전 2세기 장건에 의해 동서 양단이 연결, 소통하게 되었다. 기원 후 6세기 까지 주변 정세에 따라 노선이 가변적이었으나 당나라 시기 이후 노선이 고착화 되고 그 길을 따라 동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전망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의의
중국 소프트파워의 제고
경제적 가치
지정학 패권의 전환
미국중심의 패권
실크로드 건설에의 난제
중화 패권으로의 회귀
민족문제
신장 분리주의 운동
최근 중국은 중앙아시아를 유럽으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한다는
계획 하에서 2012년 9월 중국과 중앙아시아 인구 30 억 명을 하나로 묶는
경제공동체(실크로드 경제벨트) 구상을 발표했다. 중동지역에 50% 이상 석유를 의존하고 있는 중국은 엄청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함께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에너지 로드(Energy Road)’로 만들 계획에 있다. 최근 중국은 투르크메니스탄에 가스수송관 2개를 추가 건설하고 천연가스 수입량을 늘리기로 하고 카자흐스탄에 1100여㎞에 이르는 가스수송관
공동개발 협약을 맺었다. 또한 이러한 구상 하에서 현대적 인프라 구축을
위해 2012년 11월에는 시안에서 출발하는 3개 노선으로 구성된 ‘시안-중앙아시아 장안호(長安號) 국제화물열차’가 개통되었다.
중국은 중앙아시아에 광범위한 투자와 원조를 시행하고 있다. 공개된 자료로만 봐도 2010년 현재까지 중앙아시아 제 국가들에게 무려 약 9,500 만
위안 정도의 무상원조가 제공되었으며, 같은 시기 약 1.2억 달러에 이르는
무이자 차관을 제공하였다. 일반 대외 원조 차관도 약 2억 달러가 제공되었으며, 우대신용 차관도 약 150 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중국의 대 중앙아시아
투자도 급격히 증가해 왔는데 직접투자액의 경우 2008년에 19억 4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경제기술투자액 역시 동 년도에 20억 달러를 초과해 2000년도에 불과 4천 3백만 달러에 비해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
이렇듯 중앙아시아와 중국은 단순한 교역량 증대를 넘어 급격하게 경제적 통합성이 강화되고 있다. 이렇게 급격하게 증대된 교역과 통합의 중간
매개 지역이 바로 신장 지역이다. 그러나 신장 지역은 기회의 땅이자, 동시에 불안정성이 극대화된 지역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와의 통합성 증대는
중국 내부의 통합성 약화로도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위구르 문제는 급격한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양대 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중국에게 있어서
약한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서부 대개발’정책을 비롯한 중국 정부의 서부 지역 개발 정책은 신장을
비롯한 서부 국경지대 소수민족들의 경제적 번영을 목표로 한 것이었지만,
개발로 인해 증대된 부의 분배 정책의 미비 혹은 실패로 인하여 성장의 혜택은 한족 이주민들에게만 집중되어 민족 간 불평등이 증대되어 역내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1990년대 가장 규모가 컸던 일련의 위구르인 폭동이 일어난 지역은 우루무치를 제외하면 주로 서부와 남부 신장 지역이었는데, 이들 지역은 높은 실업율과 그 외의 여러 경제적 문제들이 심각한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적 원칙 하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아 온 시스템은 이제 사라졌고, 그 대신 일부에게는 성공과 번영의 기회가 주어진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한층 더 노동 시장에서의 불안정성이나 차별이 확대되면서 갈등은 더욱 확대되어 왔다. 특히 오랜 기간 동안 중국정부가 실행해왔던 소수민족에 대한 일부 영역에서의 우대 정책들은 ‘경쟁력 있는’ 시장
체제 건설 논리에 밀려서 축소되어 왔고, 이러한 장치가 약화되면서 민족차별 현상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옛 소련 지역의 중앙아시아 국가, 투르크계 민족들과 중국 신장, 위구르인 사이에는 깊은 역사적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 간의 통합성 증대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중국 양자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동쪽과 남쪽으로의
영향력 확대가 여의치 않은 중국 정부는 경제적 측면 외에도 중앙아시아와의 교류와 교역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있고,
그에 따라 ‘신 실크로드’구상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방치한 채, 공정한 분배 시스템과
사회복지의 확충 없는 신장의 경제 발전과 중앙아시아와의 통합성 증대 노력은 오히려 위구르 민족분리운동에 자양분을 심어 주고, 초국적화된 이슬람 운동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중국 정부의 다양한 전략으로 위구르 문제는 적절히 통제되고 있지만, 향후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의 성공과 실패 여부에 따라 상황은 급변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신장위구르족들의 저항이데올로기를 크게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들이 이슬람교를 믿는 것을 존중하고, 위구르어 사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신장위구르족 자신들의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는 용인하지 않는다.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는 19세기 말에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입으로 쇠퇴하던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아랍세계의 투르크족과 이슬람교도들의 자발적 근대화 운동이다.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근대화 사상으로서 모든 투르크족의 단결을 주장한 투르크주의와 이슬람교 신자들의 단결을 주장하는 종교사상인 이슬람주의는 계급대립이 격화되면서 그 계급적 본질이 드러나 결국 무너졌다며, 한족과 소수민족의 단결을 통한 통일된 중국이 위구르족들에게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신장위구르족의 저항운동은 미국과 같은 서방 제국주의의 선동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근본적인 쟁점인 것도 아니다. 전자는 위구르족 저항 세력 중 일부가 반미 테러리스트 조직과 연관되어 있고 미국도 이들을 테러조직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는 같은 이슬람을 믿는 민족인 회족들은 중국 정부의 편에 서 있는 반면 일부 위구르족 저항 세력들은 불교에 기반을 둔 티베트 저항운동, 내몽골 저항운동과 협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물론 위구르족 저항 세력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장위구르족 저항운동의 성격을 한 가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중국 정부의 민족문화에 대한 억압과 ‘통합된 중국’ 정책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적 언사와 다양한 노선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민족해방운동적 성격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장 분리주의 운동의 역사
19세기 중반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압력이 거세졌다.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태평천국 운동과 샨시(陝西)성과 간쑤성에서 일어난 통간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통간들은 1864년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청군이 상대적으로 적게 배치되었던 카슈가르 지역에서 처음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회족뿐만 아니라 오늘날 신장의 주 소수민족인 위구르족 등 기타 무슬림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반란은
신장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코칸드 칸국 출신 군인 야쿱 벡(Yaqub Bek)은 러시아가 점령한 이리 지역을 제외한 신장 모든 지역의 반청 반란군을 제압했다.
그리고는 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영국과 협상하고 오스만 튀르크의 제후국임을 선포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청은 신장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청은 “신장을 잃을 경우, 러시아에 의해 수도 북경에서 가까운 몽골까지 빼앗길 수 있다”며 신장 재정복을 주장한 좌종당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야쿱 벡 정권을 무너뜨렸다.
10여 년간의 반청 저항은 신장 무슬림 주민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과거 종교적 권위를 갖던 이슬람 성직자들의 권위는 약해졌다. 이슬람권의 쇠퇴를 각성하며 새로운 교육과 의식을 강조하는 ‘신문화 운동(Jadidism)’의
물결이 러시아가 점령한 중앙아시아에서 신장으로 전파되었다. 청이 재정복 이후 신장에 성(省)을 세우고 중국어 교육 등을 펼치면서 무슬림 주민들을 ‘한족화’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신장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 신문화운동을 수용했다. 이들은 훗날 신장에서의 동투르키스탄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은 신장 무슬림 주민들이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갖지 않고, 자신들을 ‘무슬림’이라고 부르거나 자신이 사는 지역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런 점에서 1864∼1877년의 신장 무슬림들의 반청 저항은 신장(동투르키스탄)의 역사가 근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신장 무슬림들도 민족국가 실현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 점에서 위구르족의 기원인 무슬림들의 반청저항은 위구르족 민족형성에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33년 제1차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 운동
제1차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은 1933년 11월에 위구르족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인 카슈가르에서 근대화운동을 통해 계몽된 위구르족 상인과 지식인들과 키르기즈족 등 다른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비록 이 신생 공화국은 발전할 기회를 충분히 갖추기 전에 마중잉의 회족 세력에 의해 멸망했지만, 위구르족들의 독립 열망이 최초로 표현된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44년 제2차 동투르키스탄 인민공화국 운동
제2차 동투르키스탄 인민공화국은 1944년 이리에서 ‘3구 정부’가 설립하였다. 중국인 학자들은 이 공화국을 ‘3구 혁명’이라고 부른다. 중국인 학자들은
이 정부를 주도한 세력이 이슬람 성직자였기 때문에 이들이 이끈 ‘3구 혁명’이
초기에는 종교적 성격이 있었지만, 이후에 소련의 지지와 중국 공산당의 영향
으로 위구르족 등 신장 내 여러 민족이 한족 군벌 성스차이와 국민당에 맞선
민족해방운동으로 규정짓는다. 한편에서는 스탈린이 장제스에게 ‘중소우호동
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이닝 주재 소련 영사관에 선동에 의해
만들어진 운동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카자흐족 이슬람 성직자였던 오스만
은 동투르키스탄 인민공화국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벌이
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 ‘3구 정부’는 국민당정부와 협상을 통해 신장성정부와 연합정
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해산되었다. 하지만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여
전히 자체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9년까지 존재했다.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주요 인사들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한
이후인 1949년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에 통합되는 것을 거부했다. 정부
요인 5명은 자신들의 입장을 중국 정부에 전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
들을 태운 비행기가 중국 수도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추락해서 탑승자 전원
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결과, 위구르족, 전체 동투르키스탄 저항운
동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남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지도자가 중국 정부에 뜻
에 따르겠다고 전함으로써 마오쩌둥의 신장 지역 병합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이루어졌다.
1949년 이후 신장 분리주의 운동
중국의 신장 점령 초기에 일부 신장위구르족 지식인들은 중국 정부에 대해
소극적으로 기대를 했었다. 왜냐하면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들이 공산당에 충성한다는 전제하에 이슬람교를 인정하고 위구르족들의 민족문화를 발전시킬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1949년 이전까지 신장을 지배해온 한족 군벌들과 국민당 군사지도자들의 통치와 대조를 이뤘다. 물론 일부 위구르족과 오스만을 중심으로 한 카자흐족 등 일부 소수민족 종교지도자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 정부에 대한 저항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압되었다.
1945년 12월 중국 정부는 신장을 ‘신장성민족민주연합정부’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신장에 어떤 정부를 만들지에 대해서 신장 소수민족 지도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1951년 3월 신장의 소수민족 공산당원들은 중국 공산당의 ‘민족구역자치시행조례초안에 관하여’와 ‘의견조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위구르족 공산당원들은 여전히 신장지역을 자치공화국으로 하는 연방제 국가를 원하였다. 소련이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처럼 중앙아시아의 각 민족들이 다수인 지역에 그 민족의 이름의 자치공화국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오홍엽, 2009: 102). 당시 일부 당원들은 ‘신장위구르스탄자치공화국’, ‘위구르스탄자치공화국’의 설립을 주장했으며, 일부는 소련으로 편입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독립 염원’과 ‘친소 성향’을 가진 위구르족 공산당원들을 탄압했다. 우선 1951년 5월 신장성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1944년 제2차 동투르키스탄 인민 공화국의 주요 지도자들이었던 전 신장성정부위원 아이니압둘라(艾尼·阿不都拉)와 전 궁하현 현장 파티흐 무슬리모프(Fatih Muslimov)의 직위를 박탈하고 이들을 감시대상으로 지정했다. 이들이 봉건세력을 옹호하고 혁명에 대항했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런데 탄압이 과도하다는 지적이 있어서 1952년과 1953년 10월 사이에 이미 체포한 위구르족 548명에 대해 다시 심사했다. 결국 1955년 10월 1일에 ‘신장위구르자치구’가 세워졌다. 자치구의 대표인 주석 1명은 위구르족이 맡고 부주석은 각각 한족, 위구르족, 카자흐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5개 민족자치구 중에 ‘족’자가 들어가지 않은 민족자치구는 신장위구르자치구와 내몽골자치구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위구르족들은 이를 ‘중국 정부의 견제’로 규정짓고 불만을 가졌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억압하고 신장의 경제발전을 위해 본토의
한족들을 대량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본토에서 신장의 경제개발을 위해 자원한 한족들과 신장이 점령당한 이후에 남은 국민당 패잔병들로 신장농업생산건설병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신장 각지에 대학과 공장을 세우고,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등이 소련으로 이주하고 빈 땅의 농업생산을 담당했다. 동시에 병단은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탄압하는 역할을 했다.
1950~1970년대 신장 분리주의 운동
이러한 중국 공산당 정부의 정책에 따라 위구르족들은 다시금 새로운 중국공산당 정부에 맞선 저항을 시작했다. 전직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총리였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Isa Yusuf Alptekin)의 아들 앨킨 알프테킨(Erkin Alptekin)에 의하면 1945~1951, 1954~1958, 1959~1963, 1965~1968년에 대규모 반란이 58차례나 일어났다고 한다. 1950년대 위구르족 저항운동은 크게 세 가지 세력이 주도하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1930년대, 1940년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운동을 주도했던 종교 지도자와 소수민족 군인들이고, 세 번째는 종교군대이다.
중국 정부는 이에 지역주민들을 동원하여 저항세력들을 진압하는 인민운동을 대대적으로 조직했다. 그리고 1952년 2월 2일에 저항세력들을 공개심판하는 대회를 열었다. 3월 6일 하루 동안에만 258명의 저항세력이 체포되었다.
한편, 소련은 1960년대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이용했다. 그 결과, 중국 정부에 따르면, 이닝 주재 소련 영사관의 ‘선동’으로 이리지역과 타청지역의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5~6만 명이 가축과 중국 정부문서를 훔치고, 소련으로 집단 월경하는 ‘이타 사건’과 이닝주민 2,000여 명이 참가한 정치적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소련을 지지한 위구르족들은 ‘동투르키스탄인민혁명당’을 창당하고 신장 전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를 진압하면서 한동안 위구르족 저항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1980년대 신장 분리주의 운동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가 된 덩샤오핑이 마오쩌둥 시기에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투옥된 위구르족 인사들을 석방시키고 종교 완화정책을 시행했다. 석방된 위구르족 인사들은 소수민족 정책이 완화된 틈을 타서 저항운동을 만들었다. 한편,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신장위구르족과 한족 간의 경제적 불평등이 가속화되면서 위구르족의 역사를 되찾으려는 위구르족들의 민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
1980년대 신장 분리주의 운동은 대중들의 참여가 많았는데, 특히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들의 구호는 1950∼1960년대 위구르족 저항운동 구호와 유사했다. 즉 신장에서 한족을 몰아내고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1980년대 신장 분리주의 운동은 소련붕괴 이후 1990년대 위구르족의 저항운동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만이 아니다. 어떤 교사들은 강의 시간에 이슬람교를 지지하고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일부 교사들과 학생들은 아예 퇴직, 퇴학하여 저항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위구르족 학생운동은 한족 학생운동과 함께 1989년 텐안먼 항쟁에도 적극 참가했었다. 물론 텐안먼 항쟁은 위구르족들의 독립을 지지한 시위가 아니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이행하지 못한 ‘민주화’를 요구하고 경제적 빈부 격차 심화에 항의하는 시위였다는 점에서 위구르족의 저항운동이 아니다.
하지만 위구르족들이 한족들과 함께 이 시위에 참가함으로서 중국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을 보여줬다. 이때 외르케슈 될레트(Örkesh Dölet)라는 위구르족 학생이 텐안먼 항쟁의 주요 학생지도부였다. 또한, 이슬람교를 비하하는 내용의 『성풍속』이라는 책에 대해 소수민족 엘리트 양성 대학인 중앙민족대학의 학생들이 단식 투쟁과 시위를 하면서 항의한 결과, 중국 정부는 이 책에 대한 유통을 중단시켰다.
또한, 신장 개발을 위해 본토에서
파견된 악수의 한족 청년들이 고향으로 귀환을 요구하면서 한 달간 악수 정부청사를 점령했을 때, 위구르족 주민들이 한족 청년들의 시위에 연대했었다. 이 시위는 결국 정부에 의해 진압 당했지만, 중국 정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한족 청년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중국 정부가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 벌인 종교, 민족 억압 정책 때문에 위구르족들의 한족들에 대한 반감이 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텐안먼 항쟁과 한족 청년들의 악수 청사
점거 투쟁에서 보여준 한족과 위구르족의 연대는 소수민족과 한족 민중운동이 중국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신장 분리주의 운동
1990년대 이후 신장 분리주의 운동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바로 소련의 해체와 주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이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이후 신장 분리주의 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독립론이고, 다른 하나는 자치론이다.
①독립론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자신들의 이웃민족들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위구르족들의 저항운동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중국 공안부는 2003년 12월 북경에서 처음으로 ‘3대 세력’으로 지목되는 4개 ‘동투르키스탄’ 저항조직과 11명의 ‘동투르키스탄’ 저항세력 지도자 명단을 발표했다. 중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1990년에서 2001년까지 신강지역에서 위구르족 저항세력에 의한 200건 이상의 테러행위가 발생해서 162명의 사망자와 44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로 해서 발생한 테러로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2009년 7월 우루무치와 카슈가르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15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저항세력들의 테러활동은 시간이 갈수록 조직화, 무장화되고 있으며 테러대상도 다양화되어 당정간부, 공안간부 등으로 확대되고, 테러목표물도 공안시설, 호텔, 상점, 버스 등에서 주요군사기지, 통신시설, 발전소 등 중요국가시설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2013년에는 텐안먼 차량 폭탄테러사건이 있었고, 2014년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도검류로 공격한 춘졔(한국으로 따지면 음력 설: 구정) 쿤밍역 테러 사건, 신장의 지역정부청사 습격 사건, 베트남 국경에서 ISIS에 가담하려던 위구르족과 중국 국경수비대가 충돌한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서기 장춘셴은 위구르족들 중에 ISIS 가담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독립을 지지하는 위구르족 저항운동가 중에는 본래 중국 정부를 지지했던 위구르족들도 있다. 레비야 카다르(Rebiya Kadeer)가 대표적이다. 그는 신장에서 성공한 사업가이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그가 미국에 망명한 그의 남편에게 중국소식을 다룬 신문을 편지로 보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가 탄압한 것을 계기로 미국으로 망명하고 현재 세계위구르족회의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키스탄군의 테러조직 소탕과정에서 사살당한 하산 마숨(Hasan Masum)이란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 지도자는 원래 중국 군인이었다. 하지만 위구르족 저항운동을 위해 국외로 탈출했다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대신 오사마 빈 라덴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위구르족 저항운동조직을 ‘테러조직’ 혹은 이슬람주의 조직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 정부가 ‘테러조직’으로 지정한 위구르족 저항운동 조직 중에는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는 조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 정부가 자신들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한 것에 대해 반박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위구르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위구르 저항세력 단체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안와르 서프 투라니(Anwar Yusuf Turani, 1962)가 수반으로 있는 동투르키스탄 국립 자유센터(East Turkistan National Freedom Center,ETNFC)는 순수한 비폭력 분리 독립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탄압이 강하다 보니, 위구르족들의 독립운동은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기 쉽지 않다. 게다가 달라이 라마라는 상징적 지도자가 존재하는 티베트족과 달리 상징적인 지도자 없이 수많은 저항운동 조직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위구르족들의 저항운동이 중국 정부에 맞서 단결하기 어려워 보인다. 위구르족 저항운동 단체들이 서로를 ‘이교도’라고 규정짓는가 하면, 2013년 텐안먼 차량폭탄테러사건에 대해서도 세계위구르족대회는 중국
정부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타이완에 소재한 ‘위구르의 친구들’이란
조직은 위구르족이 저지른 테러가 맞다고 주장하는 등, 엇갈린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②자치론
일부 위구르족들은 중국 정부가 건국 이래 주장하고 있는 소수민족 정책인 민족자치론을 완전히 실현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중국 체제 내에서의 위구르족 권리 신장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자치론자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정부의 통제가 강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위구르족 다수는 민족자치론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자치론자는 1930년대 동투르키스탄(East Turkistan) 공화국 내에도 존재할 정
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맺고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맞설 때, 중국 무슬림들도 중국회교구국협회, 하더청(哈德成)이 상하이에서 조직한 중국회교학회, 바이셔우이(白寿彝) 등 무슬림 학자들이 구이린(桂林)에서 조직한 중국회교문화학회 등을 만들었다.
중국 정부의 신장지배가 시작된 1950년대에는 부르한 세시디(Burhan Shehidi), 양징런(楊靜仁), 다푸성(达蒲生), 마젠(马坚), 팡스첸(厐士谦) 등 각 민족의 무슬림 인사들이 발기하여 만들어진 중국이슬람교협회가 중국 정부를 지지하는 대표적 단체이다. 중국이슬람교협회가 만든 중국이슬람교경학원은 협회가 주관하는 전국 최고의 이슬람교 학부로서, 1955년에 창립되어 이슬람교 전문인력을 양성한다. 협회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중국 정부에 얼마나 충성하는지 여부에 대해서 심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래서 위구르족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슬람 성직자들은 이 심사에서 떨어진다. 따라서 중국이슬람교협회와 ‘독립’을 지지하는 위구르족 저항세력 사이에 긴장관계가 존재하는데, 위구르족 민족지도자이자 종교지도자인 신장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 1996년 5월에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위구르족 저항세력들에게 피습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중에는 중국 정부의 이슬람교 통제에 대해 분노하면서 저항에 나설 수도 있다. 설령 그 저항이 중국 정부의 민족자치론을 완전히 실행하라는 요구일 지라도 말이다. 실제로 1980년대 위구르족 저항세력들이 우루무치에서 조직한 시위에 이슬람경학원 학생들도 참가했었다. 또한 교사와 대학교수들 중에도 민족자치론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중국 정부의 틀에서 위구르족들이 발전할 수 있음을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민족자치론자로서 중국 정부가 위구르족 저항운동가로 의심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중앙민족대학 전직 위구르어 강사 일함 토티(Ilham Tohti)를 들 수 있다. 일함 토티는 위구르족의 저항운동에 우호적인 학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위구르족은 중국에 연방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독립론자와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출국 금지 및 구금 처분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14년 1월에 ‘국가 분열’ 혐의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고, 9월 23일에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烏魯木齊) 중급인민법원에 의해 국가분열 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정치적 권리 박탈 및 개인 재산 몰수 판결을 받았다.
자치론은 위구르족 독립을 주장하기에 너무나 강력한 중국 정부의 현실을 인정하고, 체제 내의 위구르족들의 지위 향상을 주장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정부도 민족자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일함 토티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 독립론자들이 민족자치론자로 행세하면서 활동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갖고 이들에 대해서도 강한 탄압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자치론이 현재 독립론보다 현실적인 안으로서 신장위구르족 내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효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만약 중국 정부가 일함 토티의 사례와 같이 자치론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면 신장위구르족이 오히려 독립론으로 기울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최근 중국의 유혈사태 및 테러 관련 사건 발생 현황
년 월 일 | 사례 |
---|---|
2008. 8. 4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에서 경찰관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여 17명 사망 15명 부상 |
2008. 8. 27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 인근 수색 경관이 괴한의 습격으로 2명 사망, 5명 부상 |
2008. 8. 29 | 중국 공안이 카스 지역에서 이슬람분리독립주의자 6명 사살, 3명 체포 |
2009. 2. 25 | 위구르족 남녀가 베이징 도심에서 아들과 함께 분신자살을 시도 했으나 실패 |
2009. 7. 5~ 7. 6 |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3천명 이상의 대규모 유혈시위가 발생하여 140명 사망, 828명 부상, 300명 체포 |
2009. 7. 7~ 7. 8 | 유혈시위로 156명 사망, 1080명 부상, 1434명 체포.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최악의 유혈사태 |
2010. 1. 6 | 광동성 선반 시 식당에서 한족 손님에게 위구르족 종업원이 흉기를 사용하여 사망 |
2010. 8. 19 | 신장위구르자치구 아커쑤 시 교외에서 폭발성물질을 탑재한 삼륜차가 인파로 돌진하여 21명 사상 |
2011. 6. 6 | 중국공안과 신장위구르자치구 허톈 시 미등록 이슬람 코란학교관계자가 충돌하여 어린이 12명 포함 17명 부상 |
2011. 7 .18 | 신장위구르자치구 허톈 시 경찰서 습격으로 14명 사살, 4명 체포 |
2013. 6. 26 |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루판 지구 루커친잔 관공서 습격으로 35명 사망 |
2013. 10. 28 | 베이징 시 톈안먼 광장에서 위구르인 일가족 차량으로 돌진하여 5명 사망 |
2014. 1. 24 | 신장위구르자치구 아커쑤 지구 신허현에서 경찰을 공격하여 12명 사망 |
년 월 일 | 사례 |
---|---|
2007. 1. 5 | 중국 파미르고원 산악지대에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 테러리즘 훈련 기지를 급습하여 18명 사살, 17명 체포 |
2008. 1. 27 | 중국 공안,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에서 테러범 2명 사살, 15명 체포 |
2008. 3. 7 | 위구르족 10대 여성이 우루무치발 베이징행 남방항공 여객기 테러리즘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
2008. 5. 5 | 중국 상하이 버스폭탄테러리즘 발생 |
2008. 7. 22 | 윈난성 쿤밍 지역에서 사제폭발물에 의한 버스폭탄테러리즘 발생 |
2008. 8. 10 | 신장위구르자치구 쿠처 현에서 연쇄폭탄테러리즘이 발생하여 테러범과 경찰관 등 10여명 사망 |
2010. 8. 19 |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중국공안을 대상으로 한 자살폭탄테러리즘 발생으로 7명 사망, 14명 사상 |
2011. 2. 29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 시 예청 현에서 흉기 테러리즘이 발생하여 10명 사망 |
2011. 3. 8 | 중국공안, 폭탄 제조의심 농가를 급습하여 용의자 21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테러 용의자 4명 사살 |
2011. 6 .29 | 신장위구르자치구 허톈 공항에서 항공기 납치테러리즘 시도 |
2011. 8. 31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 시에서 연쇄 흉기테러리즘 발생하여 19명 사망 |
2012. 2. 28 |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 시 예청 현에서 흉기테러리즘 발생하여 민간인 13명 사망, 용의자 7명 사살 |
2012. 6. 29 | 위구르인 6명이 항공기를 납치하여 자살폭탄테러리즘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
2014. 3. 1 | 윈난성 쿤밍 시 쿤밍철도역에서 흉기테러리즘이 발생하여 170여명 사상 |
2015. 9. 18 | 신장의 악수에 있는 탄광에서 위구르족들이 한족 공격, 경찰 5명 등 50명 사망 |
2016. 8. 30 |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 조직원이 중국 대사관 자폭테러. 대사관 직원 3명 사망, 범인 5명 체포, 용의자 4명 수배 |
2016. 9. 10 | 허톈 피산현, 공안, 폭탄 제조 거점 수색 중 용의자가 터트린 폭탄에 의해 공안 부국장 1명 사망, 여러 명 중경상 |
2017. 1. 10 | 신장에서 테러 용의자 3명이 체포 과정 중 사살당함 |
2017. 3. 2 | IS, 중국을 무슬림 소수민족 탄압 국가로 지목, 공개적 선전포고. |
2018. 11. 28 | 중국 노동자 출신 저명한 사진작가 뤼광,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실종. 공안에 의한 억류로 추정 |
2019. 2. 12 | 위구르계 호주인 17명, 친척을 보러 갔다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억류 |
한국과 일대일로
긍적적 전망
부정적 전망
미국과 일대일로
미국 언론의 관점
1) 미국매체의 관점 : CNN/ 워싱턴 포스트 / 뉴욕타임즈/ 로스엔젤러스 타임즈 중심
1. 새로운 세계질서 수립
미국언론은 중국이 미국을 대변해 세계의 새로운 리더가 되려고 한다는 인식이 주류이다. 미국 언론이 본 일대일로의 목적은 새로운 세계질서 수립, 소프트파워 수출을 통한 외교범위 확장, 연선국가 정치 간섭, 세계무역 주도 등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주장한 뒤에 나온 미국 기사들이 그 신빙성을 더해준다. 미국언론은 일대일로가 중국이 외부투자를 통해 신형대국관계를 형성하고 미국을 대신해 세계의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2013년 10월 기사에서 중국이 자국의 실크로드를 통해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피스는 정치면에 중국이 일대일로 제창을 통해 아시아에서의 존재를 공고히 하고, 아시아의 주요 대국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CNN은 중국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를 원한다고 발표했으며 그 새로운 질서에는 중국,러시아 그리고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나라들만을 지칭한다고 얘기했다. 시진핑-푸틴의 정상회의 연설은 미국을 의식하고 한 것으로 보았다.
2. 에너지 안보 차원의 고려
미국언론 보도에서 에너지 안보차원에서 접근한 기사는 다른 관점에 비해 적었다. 하지만 몇몇 기자들은 에너지 안보차원의 일대일로 목적성을 언급했다. 뉴욕타임즈는 2013년 9월 중국의 에너지 소비는 중동 지역의 석유 의존도가 증가하며, 베이징은 중국의 에너지 수입원을 다변화하고 싶어한다고 발표했다. 순회기자 Pepe Escobar는 일대일로는 에너지 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3. 국내 과잉생산 해결
많은 미국 언론은 중국이 중국의 경제문제의 관점에서 일대일로를 해석했다. 제임스 그리피즈는 CNN에서 일대일로는 아시아, 유럽, 태평양에 무역과 인프라를 설립하는 프로젝트이며 진행중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국내의 과잉생산 능력을 전가해서 다른 나라를 지원해 부유하게 하여 중국 제품의 판매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란 존슨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전문적으로 보도했다. 그는 일대일로가 중국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국내 과잉생산 능력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중국의 역할 위상을 높여줄 것이라고 보았다.
미국 싱크탱크의 관점
1. 새로운 세계 질서 수립
많은 학자들은 중국이 아시아 및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케말 크리히와 필리푸러콜은 중국이 국제질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아시아의 국제관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에 발전과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이 세계은행, 아시아발전은행과의 협력을 바라고 있으며 이것은 세계를 향해 경제력을 과시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존,에켄베리는 이미 고착화된 국제질서를 뒤집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중국은 아예 독자적인 세계질서를 형성하려고 한다고 보았다. 중국이 주도해 만든 AIIB은행은 중국의 상업상 이익 확대하고 지역적 영향력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부상하는 대국이 현존하는 매커니즘에 대항해 새롭게 형성한 국제 매커니즘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황육천은 중국의 외교정책 차원에서 일대일로를 분석했다. 그는 시진핑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주장하면서 국제적인 일과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국제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중국몽’을 실현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파르는 미국이 이전과 같은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경쟁적인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트럼프 정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국제체제를 형성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해야 하며, 필리핀과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통해 중국이 남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멜처는 일대일로 이니셔티브가 중국과 아시아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대일로 중, 하선 지역의 경제 연계는 전략적 의미가 상당하다. 예를 들어, 중국에게 파키스탄 과달항은 중국의 세력이 인도양 깊숙이 영향력을 미치게 하여 중국 해군에게 길을 제공했다. 그는 일대일로의 이니셔티브는 중국이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점진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국내 과잉생산능력 해결
데이비드 도랄은 중국 내 중공업, 부동산 및 인프라를 건설 과잉으로 국내 투자를 늘릴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국정부가 일대일로를 제안해, 중국 기업의 해외투자를 규제하고 국내 기업들이 자금을 연선에 투자하도록 장려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중국의 일대일로와 AIIB 설립의 이니셔티브는 모두 국내경제라고 평가했다. 국내 경제 개혁에 문제가 생기면서, 중국정부는 해외로 발전기회를 돌려 국내기업들이 해외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조슈아,P,멜책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가 중국의 국내 공업 생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분석했다. 연선에서 인프라가 구축되면 외부 수요가 촉진되고 중국의 수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미국이 TPP를 탈퇴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으며, TPP탈퇴는 단지 트럼프가 ‘미국 우선’ 정책 구호를 실현시키기 위한 개인의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TPP탈퇴 이후,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가 받는 저항은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3. 일대일로에 대한 미국의 대응
오바마 시절 ‘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트럼프 취임하고 TPP 탈퇴한 뒤, 미국 내에서는 중국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와 일대일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싱크탱크 학자들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항하는 관점들이 많지만, 일부 싱크탱그 학자들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을 인정하며 미국이 일대일로에 가담해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ouglas.H.paal은 중국이 국제적인 변화에 대응해 일대일로를 재창했고, 미국은 포스트TPP시대에 대응해 중국 및 아태지역에 대응할 새로운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직 중국이 아직 규칙을 수용하는 위치이지 규칙을 만드는 위치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중국은 다른 국가들 간의 무역의 규칙을 완전히 뒤엎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새로운 시기의 외교정책을 이용해 중국에 맞는 경제와 안전을 모색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중국은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중국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적극 활용해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대일로 체제를 이끌어가도록 두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AIIB와 일대일로에 적극 참여하여, 동아시아 지역에 업그레이된 ‘브레튼우드 체제’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aul Haenle는 중국이 미국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일대일로의 제창의 의미를 설명하고, 미국이 일대일로 건설에 참여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미국이 더 이상 AIIB처럼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는
참고목록
- 서정경,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 시진핑 시기 중국 외교: ‘일대일로’ 전략을 중심으로」 Dbpia
- 조영삼 외 3명, 「중국 일대일로 전략의 추진현황 평가와 향후 대응과제」, 산업연구원, 2016.12
- 제18차 당대회 정치보고 http://theory.people.com.cn/n/2013/1205/c40555-23756883.html
- 조영남, 『중국의 꿈: 시진핑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 , 각주 252번 / 학교도서관 대여 가능
-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 시진핑 시기 중국 외교: ‘일대일로’ 전략을 중심으로」 240쪽에서도 언급 http://hk.crntt.com/doc/1023/8/2/8/102382838.html?coluid=7&kindid=0&docid=102382838 원본 기사
- 金灿荣等, 「“美国亚太再平衡战略”对中美关系的影响」 http://www.aisixiang.com/data/89297.html 2014년 7월 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6차 미중 전략경제대화 개막식 연설
- 郑永年:美国人为什么有强烈危机感? http://www.dunjiaodu.com/daguo/2019-02-19/4242.html
- 《推动共建丝绸之路经济带和21世纪海上丝绸之路的愿景与行动》 (国家发展改革委、外交部、商务部28日联合发布) http://www.xinhuanet.com//world/2015-03/28/c_1114793986.htm
- 서정경, 「시진핑 시기 중국의 주변외교 분석: 동아시아 지역주의에 대한 인식 변화를 중심으로」 RISS
- 서정경, 「동아시아 지역주의와 중국의 대응전략」 DBpia
- 권용립, 『미국 외교의 역사』
-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제국의 구조』, 도서출판b, 2016
- 박경석 엮음, 『연동하는 동아시아를 보는 눈』, 창작과 비평, 2018
- 박홍서, 『내재화된 위선? : 중국의 세계질서의 현실주의적 재해석』, 국제정치논총 제50집 4호, 2010,
- 백영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 한중관계의 과거·현재·미래』, 역사비평
-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창작과 비평, 2000
- 백영서, 『중국이 동아시아를 의식한다는 것』, East asia brief
- 송한용, 『하마시타의 조공시스템론을 통한 ‘아시아교역권론’에 대한 재론』, 용봉인문논총
- 왕후이 지음, 송인재 옮김, 『아시아는 세계다』, 글항아리, 2011
- 이시카와 료타, 『국경을 뛰어넘는 지역의 다중적 구조-개항기 조선과 아시아교역권론』, 한국학 연구, 2008
- 조경란, 『중국은 제국의 원리를 제공할 수 있는가-가라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에 대한 비판적 분석』, 역사비평, 2016
- 최희재, 『‘중화제국질서’를 둘러싼 논의의확산과 수렴 – 조공체제론과 다중체제론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제65집
- 천꽝싱, 『제국의 눈』, 창비, 2003
- 야마무로 신이치,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 창비, 2003
- 왕후이,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다』, 창비, 2003
- 서종원, 김현철,『우즈베키스탄 고속철도산업의 발전현황과 전망』, 유라시아·북한교통물류 이슈페이퍼 23호,
- http://kr.people.com.cn/n3/2018/0828/c203282-9494644.html
- 이창주, 『일대일로의 모든 것』, 2017, 서해문집
- 주예성, 『중국기업의 '일대일로』' 진출 현황 및 금융기관 지원 사례, 2018, KDB 미래전략연구소
- 이승신 외 6명,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 평가와 한국의 대응방안』, 2018,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이자호, 『(이슈보고서) 중국의 현대판 실크로드,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아시아 주요국 앞 추진 현황 및 향후 과제』, 2018, 해외경제연구소
- 이대성, 김태진, 「중국의 테러리즘 분석과 그 전망: 신장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2014, 한국콘텐츠학회
- ↑ 본래 '중부회랑'이라는 명칭은 중국이 만든 단어가 아닌 중앙아시아의국가들의 노선 건설계획을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부회랑 프로젝트의 목적이 유라시아 지역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것을 고려해 볼 때,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과 연관을 지어 서술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실제로 터키의 경우는 '중부 회랑'에서 중국의 '일대일로'와 어떻게 호환될 수 있을까'라는 기고문이 실리는 등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기사 : 《土耳其学者:土耳其“中部走廊”应力争与“一带一路”兼容》,https://www.yidaiyilu.gov.cn/ghsl/hwksl/42769.htm
- ↑ 서종원, 김현철,『우즈베키스탄 고속철도산업의 발전현황과 전망』, 유라시아·북한교통물류 이슈페이퍼 23호, p.8
- ↑ 철도에 있어 한 레일과 마주 바라보는 레일과의 거리
- ↑ 현재 중국을 포함한 유럽, 미국, 한국, 일본(신칸센) 등은 표준궤간인 1435mm를 사용하고 있다. 표준궤간은 세계 60%의 국가가 사용하고 있고 - 현대 로템(Retem) 블로그,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084865&memberNo=38158951&vType=VERTICAL
- ↑ CSF 중국 전문가 포럼, 『지역 연구 동향 세미나_ 우즈벡-중국 교통·물류 협력 확대 동향』, 2018.2.23
- ↑ 주 우주베키스탄 대한민국 대사관, http://overseas.mofa.go.kr/uz-ko/brd/m_8563/view.do?seq=1177422&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
- ↑ 기사 - 『习近平会见伊拉克总理阿巴迪』, https://www.yidaiyilu.gov.cn/xwzx/xgcdt/7008.htm
- ↑ 기사 - 『王毅会见叙利亚外长:欢迎叙参与“一带一路”建设』 https://www.yidaiyilu.gov.cn/xwzx/bwdt/28974.htm
- ↑ 일대일로 공식 사이트 기사 : 《土耳其学者:土耳其“中部走廊”应力争与“一带一路”兼容》, https://www.yidaiyilu.gov.cn/ghsl/hwksl/42769.htm
- ↑ 일대일로 공식 사이트 기사 : 《土耳其总理:“一带一路”是密切商业联系的典范》, https://www.yidaiyilu.gov.cn/ghsl/hwksl/3603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