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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inese_Premiere_Li_Greets_Secretary_Kerry_in_Beijing_(12517506424)2.jpg|섬네일|2014년 2월, 리커창 총리와 만난 미국 국무 장관[[John Kerry]].

2019년 6월 2일 (일) 19:14 판

개요

리커창 총리

리커창(李克强, 1955년 6월 1일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무원의 총리인 중국의 정치인이다. 경제학자이자 리커창은 중국 정부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중앙재경위원회 (中央财经委员会), 중앙외사공작위원회(中央外事工作委员会), 중앙국가안전위원회(中央国家安全委员会), 중앙전면심화개혁위원회(中央全面深化改革委员会) 등의 배후에 있는 주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리커창은 또한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中国共产党中央政治局常务委员会)의 2인자로 사실상의 국가의 최상위 결정권자이다. 2013년 3월 14~17일까지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총리로 임명되어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제5세대 지도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리커창은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서 12번째로 2015년과 2016년에 선정된 바 있다.

리커창은 1976년 5월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74년~1976년에는 안후이성 펑양현(鳳陽縣) 다먀오공사(大廟公社) 둥링대대(東陵大隊)에서 지식청년(知識靑年)으로 활동하였으며, 1976년~1978년에는 안후이성 펑양현 다먀오공사 다먀오대대 당지부 서기를 지냈다.

1982년~1983년에는 베이징대학 당위원회 서기로 있었고, 1983년~1985년에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학교부 부장 겸 전국학교연합회 비서장,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서기처(中央書記處) 후보서기를 역임하였으며, 1985년~1993년에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서기처 서기 겸 전국청년연합회 부주석을 맡았다. 1993년~1998년에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겸 중국청년정치학원 원장을 지냈고, 1998년~1999년에는 허난성(河南省) 당위원회 부서기, 성장대리를 역임하였으며, 1999년~2002년에는 허난성 당위원회 부서기, 성장으로 있었다.

2002년~2003년에는 허난성 당위원회 서기, 성장을 맡았고, 2003년~2004년에는 허난성 당위원회 서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상무위원회 주임을 지냈으며, 2004년~2005년에는 랴오닝성(遼寧省) 당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2005년~2007년에는 랴오닝성 당위원회 서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으로 있었고, 2007년에는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랴오닝성 당위원회 서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을 맡았으며, 2008년에는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중국 공산당 제15기~제17기 중앙위원, 제17기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초기 삶과 교육

리커창은 1955년7월 1일 허페이 안후이 지방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안후이성 펑양현 다먀오 공사 둥링대대(安徽省凤阳县大庙公社东陵大队)로 하방되었다. 안후이성에서 결국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게되고 하방 2년 만인 1976년 둥링 당 지부 서기에 올랐다. 문혁 주도자였던 4인방이 체포된 후 문혁은 끝났고 중단됐던 대학 입시가 1977년 8월이 부활하였다. 그해 치러진 첫 대입시험에는 무려 670만 명이 응시하였는데 이 가운데 27만 3,000명 만이 대학에 들어갔다. 이때 리커창은 베이징대 법학과에 합격한다. 그 중에서도 법학과 성적 최우수생 4명 가운데 1명으로 졸업한다. 리커창은 베이징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상인 ‘쑨예팡(孙冶方) 경제 과학상 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82년에 리커창은 베이징대 공청단 당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이후 16년간 공청단과 함께하는 인연이 된다. 1983년 공청단 대학지부에서 중앙서기처로 옮긴 리커창은 당시 공청단 제1서기였던 후진타오를 만나 인연이 시작된다. 리커창의 능력에 주목한 후진타오의 지원에 힘입어 1993년 리커창은 당시 나이 38세로 최연소 공청단 제1서기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정계 입문

리커창은 1998년 6월 44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나이에 허난성의 성장으로 임명된다. 리커창은 허난성에서 경제성장을 주도하였다. 당시 1990년대 초 31개의 성과 시 가운데 28위였던 허난성의 1인당 국민소득을 2004년 18위까지 끌여 올렸다. 또 1998년 4,308억 위안이던 허난성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6년만에 8,554억 위안으로 두배 가까이 늘었다. 그 이후 리커창의 인기는 높아졌고 후진타오의 후계자라는 말이 돌기 시작하였다. 리커창은 2004년 12월 랴오닝성 당서기로 이동하였다. 랴오닝 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주거환경이 열악하였고 ‘모든 사람은 거주할 집이 있어야 한다(人人有房住)’라는 구호 아래 판잣집 100만호에 대한 주택 개량사업을 벌였다. 2년의 공사 끝에 184만 5,000호의 집을 개량하고 50만호의 주택을 지었다. 또한 동북진흥계획의 일환으로 다롄(大连),잉커우(营口), 단둥(丹东) 등 연해 공업지구 개발을 위한 ‘5점 1선(五点一线)’ 계획을 추진하여 랴오닝성을 가장 모범적으로 ‘조화사회’를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리커창은 2007년 10월 제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권력 서열은 7위로 시진핑(6위)에 밀리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 당시만해도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 자체가 불투명한 인물이었다. 아무도 리커창이 시진핑에 밀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였다. 이후 다양한 분석이 쏟아졌는데 가장 설득력이 컸던 세 가지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첫 번째는 후진타오가 후계자로 자신의 최측근 인사를 지명하는 데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장쩌민과 쩡칭홍 전 부주석 등 원로구룹의 담합으로 자신들의 권력 입지가 좁아지자 결사적으로 리커창의 후계 구도를 막았다는 분석이다. 가장 설득력있는 세 번째 분석은 군부의 반발이다. 태자당 출신인 시진핑은 군부 내 네트워크가 강력했지만 리커창은 그러지 못했다.

부총리(2008–2013)

리커창은 2008년 3월 제11기 전인대를 통해 국무원 상무부총리로 임명되었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대부제(大部制) 개혁이었다. 줄곧 차기 국가주석감으로 꼽혀오던 리커창은 성공적인 부처 개혁으로 시진핑에 밀린 권력 서열을 뒤집고 싶었다. 당시 중국 국무원(행정부)에는 28개의 부처가 있었다. 미국의 15부, 일본의 12부, 프랑스의 18부에 비해 지나치게 부처가 많았고 행정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리커창은 국무원의 부처를 20개 안팎으로 축소하려 했으나 관료집단의 반발과 정치세력간 갈등에 밀려 부처 수는 종전 28개에서 27개로 단 한 개 순감하는데 그렸다.

2009년 의료개혁을 시작하였다. 국무원은 16개 부처로 구성된 의료개혁 영도소조를 조직했고 리커창이 조장을 맡았다. 의료개혁은 공익성을 앞세워 대부분 국민이 의료혜택을 보게 하자는 취지였다. 3년 내 8,500억 위안을 투자하는 기본의료보험 제도를 통해 성에서 향까지 모든 단위의 주민들이 혜택을 받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료 서비스는 확대됐지만 그 질은 향상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연달은 실패에 리커창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나왔으나 그는 결국 후진타오를 핵심으로하는 공청단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2013년 3월 총리에 올랐다.

2012년 11월 15일 제 18대 당대회에서 리커창은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중국 공산당 내 권력 순위 2위에 오르게 된다. (1순위는 시진핑)

총리(2013 부터 현재)

인도의 총리 Narendra Modi와 필리핀의 Rodrigo Duterte 대통령을 만난 리커창
2015년 7월, 프랑스-중국 경제 정상회의에서 리커창이 연설을 하는 모습
2015년 3월, 중국과 해외 언론의 기자회견에 참석한 리커창 총리


2013년 3월 15일 리커창은 모두가 예상했던대로 제12기 전인대를 통해 약 3000표 중 2940표(득표율 99.7%, 3반대 6기권 )로 국무원 총리로 당선되었다. 동시에 시진핑은 국가주석직으로 선출되었다. 리커창은 두 번의 임기를 치른 원자바오의 후임자로 총리가 되었다. 5년의 임기로 당선되었으나 전임자 원자바오같이 두 번의 임기를 지낼 것으로 예상되었다.

국내 정책

리커창은 경제학의 학문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경제 정책 결정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경제 통계학을 전공하였다고 알려졌으며, 데이터의 신뢰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리커창은 소위 “리커창 지수” 라고 불리는 용어의 창시자이다. 리커창 지수란 리커창 중국 부총리가 신뢰성이 떨어지는 GDP 대신 경제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참고하는 △철도 물동량 △전력 소비량 △은행 신규대출 등 세 가지 지표를 재구성해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산출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국무원 총리는 경제정책을 전담했다. 리커창이 처음 총리로서의 업무를 시작할 때, 중국은 이전 정부에서부터 이어져온 수많은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글로벌 금융 위기 시기에서부터 중국 정부가 투자한 거대한 인프라 프로젝트들에 투자된 탕감하기 벅찬 어마어마한 부실채권과 기대보다 저조한 수익, 그리고 빈부격차의 증대 등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리커창의 “리커노믹스”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다. 리커노믹스는 영국의 투자은행 바클레이스 캐피탈이 만든 용어로 단기적인 고통은 감수하고라도 중장기적인 안정 성장을 추구하겠다는 것이 주된 기조이다. 2013년 6월 대규모 부양책 중단, 금융권 채무조정, 경제 구조 개혁, 민생 안정 등을 강조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는데, 리코노믹스는 전임 총리 원자바오(溫家寶)의 정책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나 2014년 글로벌 경제의 압력과 중국 수출에 대한 수요 감소에 예상보다 낮은 경제 성장을 기록하였다. 전년대비 GDP 성장률이 1989년 이후 처음으로 7.5% 이하를 기록하였다. 리커창의 정부는 중소 기업, 도심낙후지역 개혁 프로젝트, 철도 건설 사업 등에 대한 지원금을 줄이고 특히 내수 경제에 포커스를 맞추는 방향으로 반응하였다. 중국 경제를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바꿔 체질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리커창의 리커노믹스는 실행 1년도 되지 않아 시진핑이 주도하는 ‘신창타이(新常态)’경제 개혁으로 대체되는 수모를 당한다. 동시에 경제정책의 주도권이 국무원이 아닌 시진핑 총서기가 주도하는 당으로 넘어가게된다.

외교 관계

리커창 총리는 첫 번째 해외 일정으로 2013년 5월 국경 분쟁을 해결하고 경제 관계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인도를 방문하였다. 리커창은 인도를 첫 번째 방문으로 선택한 것이 인도와 중국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도의 총리 Narendra Modi 가 2015년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리커창과 함께 천단공원(天坛公园)에서 셀카를 찍기도 하였다.


리커창 총리의 파키스탄 방문 중 파키스탄 지도자와의 만남에서 “파키스탄의 가장 친밀한 친구이자 형제로서 우리는 파키스탄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할 것이다.” 라는 견해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리커창 총리는 그의 첫 유럽 일정에서 스위스와 독일을 방문하여 양국의 정상과 만났다.


시-리 정부 “Xi-Li Administration”

시진핑(왼쪽)과 리커창(오른쪽)

2013년 가을에 열린 제 18기 삼중전회(At the Third Plenum of the 18th Central Committee, 三中全会)에서 공산당은 경제와 사회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에 관한 문서 개요 작성은 시진핑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으며, 리커창은 표면적으로 문서 준비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 정부의 원자바오 총리가 2003년 삼중전회에서 발표한 개혁 문서의 작성자였던 것과 비교하면 새 정부에서 리커창의 존재가 점차 소외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관점도 나오기 시작하였고 사실상 “시-리 정부”는 존재하지 않고 시진핑에 대한 권력 집중이 심화되고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2013 삼중전회 이후 시진핑은 ‘중앙전면심화개혁위원회 (中央全面深化改革委员会)’ , 중앙망신위(中央网信委),중앙군위심개조(中央军委深改组), 중앙국가안전위원회(中央国家安全委员会)등의 4개의 핵심 조직의 리더쉽을 차지하였다. 특히 “심화개혁”의 부분의 경우 주로 총리직의 경제 영역이 침범되어 리커창의 제도적 권력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인다. 그러나 리커창은 시진핑의 가장 중요한 참모로서 공식 언론에 등장하였고 중앙국가안전위원회의 부주석으로 지명되기도하였다. 게다가 심화개혁, 중앙망신위, 중앙재경위원회 등에 2인자가 되었다. 2018년 3월 18일 리커창은 2,964표를 얻어 중국의 총리로 재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