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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괄의 어머니가 간언하다=== | ===조괄의 어머니가 간언하다=== | ||
− | + | 조괄은 어렸을 적부터 병법을 익히고 전략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그는 병법에 있어서 자신에 비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 조사와 전진의 배치에 대하여 논하였다. 비록, 조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를 논하였지만 조사는 그가 병법을 이해했다고 인정해 주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이유를 묻자, 조사는 “전쟁은 장수들의 생사존망이 걸린 대사입니다. 하지만 괄이는 이를 너무나 가벼이 여깁니다. 훗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괄을 조나라의 장수로 쓰면 안될 것입니다. 그를 쓰게 된다면, 조나라에 참패를 안겨줄 인물은 필히 조괄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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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조괄이 대군을 거느리고 전쟁터로 나서려고 할 때, 그의 모친은 조 효성왕에게 글을 올렸다. “조괄을 장수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효성왕은 연유를 물었고, 조괄의 모친은 대답하였다. “당초 소인이 그의 부친을 섬길 때에 그의 부친은 장수였는데, 그의 식객은 수십명이었고, 인망이 두터워 그를 친구로 두는 이도 수백이었습니다. 왕께서 하사하신 재물들도 전부 그의 군사들과 하급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출정을 명 받은 날부터는 집안의 일에 대하여 묻는 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조괄은 단번에 장수가 되었는데, 그의 군사들은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 못합니다. 또한 왕께서 내리신 하사품들을 모두 집에 숨겨놓고 논밭과 가옥의 부지를 싸게 사들일 궁리만 할 뿐입니다. 어디를 보아 그의 아버지를 닮았습니까? 부자는 마음의 깊이가 다르니, 왕께서는 조괄을 장수로 세우지 마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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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 결정한 일이니, 상관하지 않도록 하여라.”하고 효성왕은 말했다. 이에, 조괄의 모친은 “그를 꼭 장수로 내보내야 하신다면, 후일에 그가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도 소인을 그 죄에 연루하지 마시옵소서.”하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조효성왕은 그녀의 부탁을 승낙해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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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나라의 군대는 양분되었고 군사들의 사기는 어지러워졌다. 조나라의 군사들은 포위망 속에서 40여일을 굶었다. 조괄은 직접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였지만, 4번이나 실패하고 결국 진나라 군사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주장이 죽자, 수십만 대군은 진나라에 투항하였고 진나라 군사들은 그들을 전부 갱살하였다. 조나라의 병사 총 사십 오만명이 죽게 되었다. 이듬해,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은 진나라 군대에 포위당하여 나라가 멸망위기에 처하였고 [[초]](楚)와 [[위]](魏)의 원조로 겨우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효성왕은 조괄 모친의 청을 들어 결국 그녀를 벌하지 않았다. | ||
==관련성어== | ==관련성어== | ||
− | + | 지상병담(紙上兵談): 종위 위에서 펼치는 용병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실현성(實現性)이 없는 허황(虛荒)된 이론(理論)을 일컬음. | |
− | + | 교주고슬(膠柱鼓瑟): 아교풀로 비파나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붙여 놓으면 음조를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고지식하여 조금도 융통성이 없음을 이르는 말.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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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 <사기선집>, 민음사, 2014. | *김원중, <사기선집>, 민음사, 2014. | ||
*바이두백과, 赵括 | *바이두백과, 赵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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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7일 (목) 23:01 기준 최신판
조괄(趙括) | |
---|---|
출생 |
? |
사망 |
B.C 260 |
국적 | 조(趙)나라 |
개요
조괄(?-260년),성은 영(嬴), 조씨, 이름은 괄이다.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으로, 조나라의 명장 마복군 조사(趙奢)의 아들이다. 조괄은 병서를 통달하였으나, 전장에서의 경험이 부족했으며, 영민하게 임기응변하는 능력은 없었다. 조효성왕 7년(기원전 260년) 장평전쟁(長平之戰) 중, 진(秦)나라의 이간책에 속아 넘어간 조효성왕은 노장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을 장수로 보내었다. 조괄은 기존 염파의 계략에 반하여, 수비태세를 전면공격으로 전환하였고 장평(오늘날의 산시성 고평 서쪽)에서 진나라 진영으로 진격하였다. 진나라의 백기는 병사들을 양분하여 한쪽으로는 진군의 병영에서 조나라의 군대를 포위하고, 한쪽으로는 조나라 군사들의 퇴로를 막아,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장평에 가두어 놓았다. 조나라 군대는 46일 동안 굶으며, 여러차례 포위망을 뚫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조괄은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직접 전투에 나섰지만 진나라 군사의 활을 맞고 죽었다. 40여만 조나라 군사는 투항하였으나, 결국 갱살당하였다.
생애
장수로 임명되다
조 효성왕 7년(기원전 260년), 조나라와 진나라군사는 장평지역에서 대치하였는데, 당시에 조괄의 부친 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조상 인상여는 병환 중에 있었다. 조 효성왕은 염파를 장수로 임명하여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 군사에게 몇 차례 공격을 받았지만, 조나라 부대는 진영을 지킬 뿐 출전하지 않았다. 진나라의 수차례 도전에도 염파는 꿈적하지 않았다. 조 효성왕은 승리에 급급하여 진나라 군대에서 간첩을 통해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었다. “진군이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마복군의 조사의 아들 조괄이 조나라의 장수로 나서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요언이었는데, 이를 듣고 조 효성왕은 조괄을 장평 조군의 장수로 임명하여 염파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염파는 “왕께서는 지금 헛된 명성만을 믿고 조괄을 장수로 임명하려고 하시는데, 그는 아교로 기러기발을 붙여 놓은 비파를 연주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임기응변을 할 줄 모릅니다. 조괄은 그의 아비가 물려준 병서를 읽었을 뿐이지, 합변을 전혀 모릅니다.”라며 간언하였다. 그러나 조 효성왕은 끝내 듣지 않고 조괄을 전장의 주장(主将)으로 임명하였다.
조괄의 어머니가 간언하다
조괄은 어렸을 적부터 병법을 익히고 전략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그는 병법에 있어서 자신에 비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 조사와 전진의 배치에 대하여 논하였다. 비록, 조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를 논하였지만 조사는 그가 병법을 이해했다고 인정해 주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이유를 묻자, 조사는 “전쟁은 장수들의 생사존망이 걸린 대사입니다. 하지만 괄이는 이를 너무나 가벼이 여깁니다. 훗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괄을 조나라의 장수로 쓰면 안될 것입니다. 그를 쓰게 된다면, 조나라에 참패를 안겨줄 인물은 필히 조괄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후, 조괄이 대군을 거느리고 전쟁터로 나서려고 할 때, 그의 모친은 조 효성왕에게 글을 올렸다. “조괄을 장수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효성왕은 연유를 물었고, 조괄의 모친은 대답하였다. “당초 소인이 그의 부친을 섬길 때에 그의 부친은 장수였는데, 그의 식객은 수십명이었고, 인망이 두터워 그를 친구로 두는 이도 수백이었습니다. 왕께서 하사하신 재물들도 전부 그의 군사들과 하급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출정을 명 받은 날부터는 집안의 일에 대하여 묻는 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조괄은 단번에 장수가 되었는데, 그의 군사들은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 못합니다. 또한 왕께서 내리신 하사품들을 모두 집에 숨겨놓고 논밭과 가옥의 부지를 싸게 사들일 궁리만 할 뿐입니다. 어디를 보아 그의 아버지를 닮았습니까? 부자는 마음의 깊이가 다르니, 왕께서는 조괄을 장수로 세우지 마소서.”
“이미 결정한 일이니, 상관하지 않도록 하여라.”하고 효성왕은 말했다. 이에, 조괄의 모친은 “그를 꼭 장수로 내보내야 하신다면, 후일에 그가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도 소인을 그 죄에 연루하지 마시옵소서.”하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조효성왕은 그녀의 부탁을 승낙해주었다.
전쟁터에서 죽다
조괄은 염파의 직권을 얻은 즉시, 군법을 전면 개정하고 군리들까지 교체하였다. 진나라의 장군 백기는 이 소식을 듣고 기병(奇兵)을 이용한 계략을 꾸몄다. 전쟁에서 패해 후퇴하는 것처럼 꾸미다가 배후에서 조군을 습격하여 군수품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조나라의 군대는 양분되었고 군사들의 사기는 어지러워졌다. 조나라의 군사들은 포위망 속에서 40여일을 굶었다. 조괄은 직접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였지만, 4번이나 실패하고 결국 진나라 군사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주장이 죽자, 수십만 대군은 진나라에 투항하였고 진나라 군사들은 그들을 전부 갱살하였다. 조나라의 병사 총 사십 오만명이 죽게 되었다. 이듬해,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은 진나라 군대에 포위당하여 나라가 멸망위기에 처하였고 초(楚)와 위(魏)의 원조로 겨우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효성왕은 조괄 모친의 청을 들어 결국 그녀를 벌하지 않았다.
관련성어
지상병담(紙上兵談): 종위 위에서 펼치는 용병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실현성(實現性)이 없는 허황(虛荒)된 이론(理論)을 일컬음. 교주고슬(膠柱鼓瑟): 아교풀로 비파나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붙여 놓으면 음조를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고지식하여 조금도 융통성이 없음을 이르는 말.
참고자료
- 고종문, <사마천의 사기열전> 염파인상여열전, 키메이커, 2015.
- 김원중, <사기선집>, 민음사, 2014.
- 바이두백과, 赵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