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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당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후손에게 전해져오던 이 작품은 절대 권력자였던 당 태종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를 무척 좋아하여, 그의 작품을 모두 모았다. 당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 중에서도 특히 이 난정서를 좋아하여 애지중지하다가 자신이 운명할 때 난정서를 자신과 함께 순장할 것을 명한다. 이에 난정서는 당 태종과 함께 소릉에 묻혀버렸고 이때부터 난정서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하연지는 기술하고 있다. | 난정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당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후손에게 전해져오던 이 작품은 절대 권력자였던 당 태종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를 무척 좋아하여, 그의 작품을 모두 모았다. 당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 중에서도 특히 이 난정서를 좋아하여 애지중지하다가 자신이 운명할 때 난정서를 자신과 함께 순장할 것을 명한다. 이에 난정서는 당 태종과 함께 소릉에 묻혀버렸고 이때부터 난정서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하연지는 기술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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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 == 참고문헌 == |
2019년 12월 1일 (일) 04:31 판
개요
중국의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인 위진남북조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귀족문화가 꽃핀다. 그리고 난정서는 이러한 귀족문화의 정점에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난정서는 서성이라 불리는 왕희지의 서예작품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그러나 난정서는 서예작품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문학적 수준이 우수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 또한 난정서에는 왕희지의 유, 불, 도가 융합된 사상과 자연과의 깊은 교감, 예리한 통찰에 의해 응집된 조화의 미가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난정서는 차원 높은 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왕희지
왕희지(307~365)의 자는 일소이다. 우장군을 지냈기에 보통 우군이라고도 부른다.
낭야 왕씨로 불리는 왕희지의 가문은 동진 시대 당시에 진군 사씨 집안과 더불어 최고의 사족 가문을 이루었다. 대대로 도교를 믿었고 전통적인 서예가 가문이었다.
당시 귀족들 가운데 왕씨, 사씨, 치씨 등은 서로 일족간의 혼인관계를 통해 폐쇄된 귀족사회를 유지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문예에 뛰어났으며 서예에 능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왕희지는 축복받은 환경과 뛰어난 재능이 어우러져 서예사 최고봉인 서성으로 추앙받는 업적은 이루게 된 것이다.
왕희지는 도교에 매우 심취하였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비단 왕희지 자신뿐 아니라 낭야 왕씨 집안 자체게 대대로 도교를 믿는 독실한 집안이었다. 당시의 도교는 특히 서예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당시 도교의 영수들이 모두 서예를 잘하였으며, 또한 서예의 대가들이 모두 도교를 받드는 세가 출신들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왕희지가 서예에 힘쓴 것은 단순히 서예가 좋아서 하는 차원이 아닌, 일종의 '도교적 수양행위' 였던 셈이다.
한편 그는 거위를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거위는 도교와 관계는 없으나, 거위의 목이 길고 유연하며 변화무쌍하여, 이러한 거위의 목을 보면서 서체와 서예의 획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난정서
탄생 배경
동진의 다섯 번째 임금 목제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해인 영화 9년 3월 3일, 왕희지는 현재의 소흥 지역인 당시 회계현을 다스리던 회계내사이자 우군장군이었다.
왕희지는 자신의 아들 7명을 포함한 사족과 명사 등 동진을 대표하는 41명의 인문들은 회계현의 난정에 초청해 대규모 연회를 열게 된다. 이날의 연회를 난정연회 또는 난정집회라고 부른다. 이러한 연회는 배타적인 동진시대 귀족문화의 특성상 사족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형식으로 자주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이날은 삼월 삼짓날이었는데 계사 형식을 빌린 모임이었다. 이날의 모임은 술잔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당시 벌주로 술 세 말을 마시는 소위 '유상곡수'의 연회였다. 당시 참석한 사람 중 유명 인사였던 왕희지, 사안, 손작 등 26명은 시를 지었고, 나머지 15명은 시를 짓지 못해 술을 마셨다. 이날 지은 시들을 모아 철을 하고 그 서문을 왕희지가 썼으며, 당시 참여한 인사 중 가장 문명이 높았던 손작이 그 집회를 마무리하는 후서를 쓰게 된다. 이 중 왕희지가 쓴 서문이 바로 난정서이다.
당 현종 때이의 문인인 하연지가 기술한 난정기 또는 난정시말기라고도 하는 글을 보면, 당시 왕희지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에 서수필로 28행 324자를 써서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난정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당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후손에게 전해져오던 이 작품은 절대 권력자였던 당 태종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를 무척 좋아하여, 그의 작품을 모두 모았다. 당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 중에서도 특히 이 난정서를 좋아하여 애지중지하다가 자신이 운명할 때 난정서를 자신과 함께 순장할 것을 명한다. 이에 난정서는 당 태종과 함께 소릉에 묻혀버렸고 이때부터 난정서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하연지는 기술하고 있다.
내용
참고문헌
학술논문 서지헌, 「난정서에 나타난 서예미 연구」, 대전대학교 대학원, 2012
단행본 하태형, 『난정연회: 왕희지의 난정서와 중국 귀족문화』, 한길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