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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조기의 황족. 청나라의 3대 황제. [[홍타이지]]의 아들이자, [[강희제]]의 아버지이다. | 청 조기의 황족. 청나라의 3대 황제. [[홍타이지]]의 아들이자, [[강희제]]의 아버지이다. | ||
+ | 연호인 순치의 뜻은 '順治' 순조로운 다스림이다. 여섯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고, 18년 동안 청 제국을 통치한 후 24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 ||
+ | 18년의 통치기간 중 8년은 도르곤과 호거, 특히 도르곤의 섭정을 받았으며, 도르곤 사후 약 10년간의 짦은 친정 후 세상을 떠났다. | ||
+ | 치세 기간중 알려진 가장 큰 업적은 북경천도와 아담 샬 등용이다. | ||
− | == | + | ==즉위 이전== |
− | === | + | ===순치제가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이유=== |
+ | 순치제의 이름은 푸린(福臨: 복림)으로, 숭덕 3년(1638년) 3월 15일,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와 효장문황후 사이에서 아홉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 ||
+ | 숭덕 8년인 1643년, 그의 아버지이자 선황인 홍타이지가 급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오후까지만 해도 정무를 처리하던 선황이 유언을 남기지도 못하고 밤중에 승하한 것이다. | ||
+ | 이때 순치제는 겨우 6살의 어린 나이였다. 때문에 당시에 쟁쟁한 황실 사람들에 밀려, 곧바로 차기 황제 후보로 거론된 것은 아니었다. | ||
+ | =====누가 세 번째 황제가 될 것인가===== | ||
+ | 태조인 [[누르하치]]가 '대칸의 계승은 반드시 만주 귀족회의를 거쳐야 한다'고 유지에 명시하였기 때문에, [[홍타이지]] 사후 후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당시의 4명의 친왕과 3명의 군왕 등 7명의 입김이 가장 강력했다. (친왕 자이산, 지루가란, 도르곤, 호거와 군왕 아치코, 도도, 아달예) 홍타이지가 죽은지 6일 째 되던 8월 14일부터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는데, 이들 중 대권을 얻는 것에 가장 열중했던 이들은 바로 호거와 도르곤이었다. | ||
− | == | + | 호거는 홍타이지의 큰아들로, 당시 유리한 입장이었다. 일단 그는 장남에 서른 다섯이라는 한창의 나이였고, 인물과 재질이 무척 출중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궁술과 마술이 뛰어났다. 영명하고 강인하며 지혜로웠다'고 묘사된다. 또한 많은 군공을 새웠고 경험도 많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많은 대신들이 그를 지지하였고, 특히나 [[팔기]] 중 정황기와 양황기의 패륵들이 특히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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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르곤]] 역시 몇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는데, 일단 그는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자 홍타이지의 이복 동생으로, 32세였다. 또 그는 누르하치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전설에는 그가 9황자였던 시절, 누르하치가 일찍이 유언으로 ‘9황자가 황위를 계승해야 할 텐데 나이가 어리니 다이산이 섭정하고 보좌하라’ 라는 말을 남겼으나, 다이산이 이를 무시하고 홍타이지를 옹립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도르곤은 계책과 전술에 뛰어나,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올린 것이 여러번이었다. (그리고 그 군사적 성과에서는 병자호란, 조선을 침략하여 남한 산성의 인조를 공격,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아낸 것도 포함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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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충안으로 선택된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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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유력한 후보의 접전은 아슬아슬한 군사적 긴장감이 도는 상황에까지 이어졌고, 보다못한 연장자 예친왕 다이산의 중재 아래, 겉으로는 어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셈이 빨랐던 정친왕의 제의가 최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제의는 바로 도르곤과 호거 양측의 논리를 모두 받아들여, 호거의 말 대로 선황제 홍타이지의 아들이되 호거가 아닌 어린 복림을 황제로 추대하자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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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되면 두 친왕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끔찍한 군사적 싸움으로 번질 염려도 없었으며, 특히 도르곤은 섭정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기에, 일곱 명의 친왕과 군왕들은 이에 합의하였고, 결국 두 실력자의 경합의 결과로 어린 황자 복림, 즉 순치제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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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위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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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으로, 순치제는 즉위하였을 때 친정을 할 수 없었다.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루갈린이 좌, 우 섭정왕으로서 그를 보좌했다. 왜냐하면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며, 또한 황실 어른들의 입김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은 바로 황숙이자 섭정인 예친왕 도르곤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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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섭정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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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치 원년,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3월 19일 새벽 자금성을 함락하였다. | ||
+ | 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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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경천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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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정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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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담 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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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심 천자=====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20년 12월 22일 (화) 15:38 판
청 세조 순치제 | |
---|---|
| |
본명 |
아이신기오로 푸린 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ᡶᡠᠯᡳᠨ 한자: 愛新覺羅 福臨 (애신각라 복림) |
출생 |
1638년 3월 15일 북경 |
사망 |
1661년 2월 5일 |
활동 기간 | 재위: 1643년 5월15일 ~ 1661년 2월 5일 |
칭호 | 세조(世祖) |
전임자 |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
후임자 | 강희제 |
가족 | 강희제(아들) |
부모 |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부), 효장문황후(모) |
친척 | 도르곤(황숙) |
목차
개요
청 조기의 황족. 청나라의 3대 황제. 홍타이지의 아들이자, 강희제의 아버지이다.
연호인 순치의 뜻은 '順治' 순조로운 다스림이다. 여섯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고, 18년 동안 청 제국을 통치한 후 24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18년의 통치기간 중 8년은 도르곤과 호거, 특히 도르곤의 섭정을 받았으며, 도르곤 사후 약 10년간의 짦은 친정 후 세상을 떠났다.
치세 기간중 알려진 가장 큰 업적은 북경천도와 아담 샬 등용이다.
즉위 이전
순치제가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이유
순치제의 이름은 푸린(福臨: 복림)으로, 숭덕 3년(1638년) 3월 15일,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와 효장문황후 사이에서 아홉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숭덕 8년인 1643년, 그의 아버지이자 선황인 홍타이지가 급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오후까지만 해도 정무를 처리하던 선황이 유언을 남기지도 못하고 밤중에 승하한 것이다. 이때 순치제는 겨우 6살의 어린 나이였다. 때문에 당시에 쟁쟁한 황실 사람들에 밀려, 곧바로 차기 황제 후보로 거론된 것은 아니었다.
누가 세 번째 황제가 될 것인가
태조인 누르하치가 '대칸의 계승은 반드시 만주 귀족회의를 거쳐야 한다'고 유지에 명시하였기 때문에, 홍타이지 사후 후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당시의 4명의 친왕과 3명의 군왕 등 7명의 입김이 가장 강력했다. (친왕 자이산, 지루가란, 도르곤, 호거와 군왕 아치코, 도도, 아달예) 홍타이지가 죽은지 6일 째 되던 8월 14일부터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는데, 이들 중 대권을 얻는 것에 가장 열중했던 이들은 바로 호거와 도르곤이었다.
호거는 홍타이지의 큰아들로, 당시 유리한 입장이었다. 일단 그는 장남에 서른 다섯이라는 한창의 나이였고, 인물과 재질이 무척 출중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궁술과 마술이 뛰어났다. 영명하고 강인하며 지혜로웠다'고 묘사된다. 또한 많은 군공을 새웠고 경험도 많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많은 대신들이 그를 지지하였고, 특히나 팔기 중 정황기와 양황기의 패륵들이 특히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도르곤 역시 몇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는데, 일단 그는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자 홍타이지의 이복 동생으로, 32세였다. 또 그는 누르하치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전설에는 그가 9황자였던 시절, 누르하치가 일찍이 유언으로 ‘9황자가 황위를 계승해야 할 텐데 나이가 어리니 다이산이 섭정하고 보좌하라’ 라는 말을 남겼으나, 다이산이 이를 무시하고 홍타이지를 옹립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도르곤은 계책과 전술에 뛰어나,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올린 것이 여러번이었다. (그리고 그 군사적 성과에서는 병자호란, 조선을 침략하여 남한 산성의 인조를 공격,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아낸 것도 포함되어 있다.)
절충안으로 선택된 황제
두 유력한 후보의 접전은 아슬아슬한 군사적 긴장감이 도는 상황에까지 이어졌고, 보다못한 연장자 예친왕 다이산의 중재 아래, 겉으로는 어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셈이 빨랐던 정친왕의 제의가 최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제의는 바로 도르곤과 호거 양측의 논리를 모두 받아들여, 호거의 말 대로 선황제 홍타이지의 아들이되 호거가 아닌 어린 복림을 황제로 추대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두 친왕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끔찍한 군사적 싸움으로 번질 염려도 없었으며, 특히 도르곤은 섭정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기에, 일곱 명의 친왕과 군왕들은 이에 합의하였고, 결국 두 실력자의 경합의 결과로 어린 황자 복림, 즉 순치제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 이후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으로, 순치제는 즉위하였을 때 친정을 할 수 없었다.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루갈린이 좌, 우 섭정왕으로서 그를 보좌했다. 왜냐하면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며, 또한 황실 어른들의 입김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은 바로 황숙이자 섭정인 예친왕 도르곤이었다.
섭정기
순치 원년,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3월 19일 새벽 자금성을 함락하였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