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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기=== | ===섭정기=== | ||
+ | 순치 원년부터 1650년 까지, 약 8년동안 순치제는 섭정 아래에 황위에 있었다. 처음에는 정친왕 지루갈린와 예친왕 도르곤이 함께 순치제를 보좌하였으나, 결국 정친왕은 실권을 잃었고, 예친왕 도르곤이 실질적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섭정하였다. | ||
− | 순치 원년,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3월 19일 새벽 자금성을 함락하였다. | + | =====북경천도===== |
− | + | 순치 원년,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3월 19일 새벽 자금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는 황후를 자살시키고 공주를 살해하고는 스스로 산에 올라 목을 메어 죽었다. 농민군의 북경 함락 소식에, 섭정왕이었던 도르곤은 거병하여 이자성을 치기 위해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귀순하는 관리와 백성은 관직을 유지하고 종사하던 일을 그대로 하게 해준다는 유화책을 사용하였으며, 군율에 의해 핍박하지 않을 것을 널리 공포하였다. | |
− | + | 대장군에 임명된 도르곤은 4월 9일 만주팔기와 몽골팔기, 한군팔기를 이끌고 산해관에 진격하였다. 21일부터 23일까지 이뤄진 전쟁을 통해 오삼계는 청에 항복, 팔기군과 연합하였다. 이에 청군은 이자성의 농민군을 대패시키고 북경으로 출격하였으며, 수차례의 전투 이후 5월 2일, 비로소 북경에 입성하여 자금성의 무영전에서 섭정 업무를 개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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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에 자연스럽게 북경 천도 문제가 거론되었고, 당시 7세밖에 되지 않았던 순치제는, 도르곤의 북경 천도 제의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10월 초하루, 순치제는 황극문에서 ‘연경으로 천도한다’는 조서를 공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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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 태조와 태종이 누리지 못했던 북경 천도를 겨우 7세의 나이였던 순치제는 도르곤의 보필을 받아 완성해 냈으며, 이 업적, 즉 명의 수도였던 북경을 정복하고 천도한 업적을 통해 ‘세조’라는 묘호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
+ | =====섭정의 영향력 아래 무력한 황제===== | ||
+ | 북경을 천도하여 완성된 청을 이룩하였다는 업적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순치제는 무력하였다. 정치적 방패가 되어줄 수 있는 인물 중 하나, 어머니였던 효장문황후와 정치적으로는 긴밀하였으나, 그리 원만한 관계는 아니었을뿐더러, 섭정왕이었던 도르곤이 대부분의 거사를 맡아 치세하였고, 그가 죽기 전 8년의 섭정기간동안 순치제는 유명무실한 황제의 이름을 지키고 있었다. 도르곤은 순치제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인 정황기와 양황기를 분화시키고, 정친왕의 세력을 억누르고 스스로 수석격의 위치에 올라 모든 정사를 우선 보고 받으며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장 큰 경쟁자인 호거를 반란과 엮어 제거하면서 순치제를 마음껏 휘둘렀다. 때문에 순치제는 도르곤이 병사할 때까지 황숙을 넘어 황부의 칭호를 도르곤에게 내주어야 했으며, 그의 뜻대로 정치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 두어야만 했다. | ||
===친정기=== | ===친정기=== | ||
+ | |||
+ | 그러나 순치 7년, 12월. 7년, 8년의 섭정을 바라보던 도르곤이 카라 성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이듬에부터는 8년간의 섭정이 완전히 끝나고, 비로소 순치제는 친정을 할 수 있었다. | ||
+ | 2월에는 도르곤의 10가지 죄상을 공포하고, 가업을 차압하고, 작위를 삭탈하고 수족을 모조리 제거하였다. 심지어 부관참시까지 진행하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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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르곤 사후, 친정을 이어나가며 순치제는 중앙집권화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적극적으로 한족 세력의 융화를 추진해 나갔다고 한다. | ||
=====아담 샬===== | =====아담 샬===== | ||
+ | 순치제는 명·청대를 통틀어 가장 예수회 선교사를 존중했던 황제로 이야기된다. 특히나 그는 선교사이자 학자인 [[아담 샬]]을 무척이나 신뢰하며 아꼈는데, 이는 군신관계를 초월하였다고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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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담 샬은 본디 순치 원년, 시헌력을 반포하여 서양인 최초로 흠천감의 벼슬을 얻은 사람이었다. 순치제가 그를 신임하게 된 계기는, 바로 효장황태후의 병을 고쳐준 일이었다. 황태후는 그를 의부라고 높여불렀고, 이에 따라 순치제도 그를 만주어로 할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마파’라고 불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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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순치제는 아담 샬의 간언을 즐겨들었다. 아담 샬이 순치제에게 올린 장계가 300건이 넘었고, 이중 대부분의 간언이 수용되었다. 또한 순치제는 그로부터 천문, 역법, 종교, 그리고 치국의 방법까지도 전수받았다. 순치 13년부터 14년까지 24번이나 친히 아담 샬의 관사에 방문하고, 학문을 논하고, 나란히 화원을 거니는 등 스스럼 없는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심지어 순치제는 아담 샬이 수시로 대궐을 방문하도록 허가하였다. | ||
+ | 또한 많은 직함을 내렸는데, 태복사경, 태상사경, 통현교사, 통정사를 이어 이후에는 정 1품 광록대부라는 작위를 하사하였다. | ||
+ | 심지어는 효장황태후와 후계를 놓고 갈등하다가도, 아담 샬의 조언에 따라 황위 계승자로 효장 황태후의 의견대로 현엽을([[강희제]]) 지목하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 ||
− | + | 이에 대해 진원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청 세조에게 아담 샬의 존재는 당 태종에게 위정의 존재와도 같았다.’ | |
+ | ===순치제의 죽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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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치제는 1661년 2월 5일, 스물 넷의 나이로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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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그의 사망의 계기에 대해 혹자는 동악비라는 총애 후궁의 이야기를 들기도 한다. 그의 승하일이 동악비의 사망이로부터 약 100일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 순치제는 본래 여느 만주 귀족들처럼 호색과 방종에 젖어있었으나, 동악비를 만나고는 순애보적인 사랑을 했으며, 이러한 몰입과 애정이 상실로 이어지자 오히려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
+ | 귀비 동악씨가 아이를 잃고 세상을 떠나자, 순치제는 무척이나 상심하여 5일 연속 아침조회에 빠졌다. 장례를 무척 성대하게 준비하였으며, 제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비통함이 어찌나 컸던지, “무작정 죽겠다고 해서 밤낮으로 지키며 황제의 자살기도를 막아야 했다”고 전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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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가를 했다, 혹은 병사 했다, 여러 가지 설들이 많지만, 한림원의 장원학사 왕희의 <왕희자정연보>에 의하면 순치제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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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 2일 갑자기 순치제가 쓰러졌다. 이튿날 왕희를 양심전으로 불렀다. 6일 밤 다시 왕희를 불러들여, ‘짐이 지금 천연두를 앓고 있는데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 그대는 짐의 말을 귀담아 듣고 속히 조서를 작성하라’고 하였다. 이에 왕희는 어의에 따라 유조를 작성하였고, 7일 저녁 ‘유조’가 완성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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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치제는 임종에 앞서 “조상의 법도에 화욕이 있다. 지금 짐은 선도에 마음을 빼앗겼으니, 필히 횟불을 들고 그 법도를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 ||
+ | 따라 4월 17일, 경산의 수왕전에서 순치제는 화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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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치제가 승하하자, 황태후의 교지와 순치제의 유조에 따라 8세의 현엽이 황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바로 [[강희제]]이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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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국문화사 수업 및 수업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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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중국사, 존 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 까치, 2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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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나라, 제국의 황제들, 옌 총니엔, 장성철, 산수야, 20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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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윤혜영, 서해문집, 2004 |
2020년 12월 22일 (화) 16:46 기준 최신판
청 세조 순치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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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명 |
아이신기오로 푸린 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ᡶᡠᠯᡳᠨ 한자: 愛新覺羅 福臨 (애신각라 복림) |
출생 |
1638년 3월 15일 북경 |
사망 |
1661년 2월 5일 |
활동 기간 | 재위: 1643년 5월15일 ~ 1661년 2월 5일 |
칭호 | 세조(世祖) |
전임자 |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
후임자 | 강희제 |
가족 | 강희제(아들) |
부모 |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부), 효장문황후(모) |
친척 | 도르곤(황숙) |
목차
개요
청 조기의 황족. 청나라의 3대 황제. 홍타이지의 아들이자, 강희제의 아버지이다.
연호인 순치의 뜻은 '順治' 순조로운 다스림이다. 여섯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고, 18년 동안 청 제국을 통치한 후 24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18년의 통치기간 중 8년은 도르곤과 호거, 특히 도르곤의 섭정을 받았으며, 도르곤 사후 약 10년간의 짦은 친정 후 세상을 떠났다.
치세 기간중 알려진 가장 큰 업적은 북경천도와 아담 샬 등용이다.
즉위 이전
순치제가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이유
순치제의 이름은 푸린(福臨: 복림)으로, 숭덕 3년(1638년) 3월 15일,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와 효장문황후 사이에서 아홉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숭덕 8년인 1643년, 그의 아버지이자 선황인 홍타이지가 급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오후까지만 해도 정무를 처리하던 선황이 유언을 남기지도 못하고 밤중에 승하한 것이다. 이때 순치제는 겨우 6살의 어린 나이였다. 때문에 당시에 쟁쟁한 황실 사람들에 밀려, 곧바로 차기 황제 후보로 거론된 것은 아니었다.
누가 세 번째 황제가 될 것인가
태조인 누르하치가 '대칸의 계승은 반드시 만주 귀족회의를 거쳐야 한다'고 유지에 명시하였기 때문에, 홍타이지 사후 후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당시의 4명의 친왕과 3명의 군왕 등 7명의 입김이 가장 강력했다. (친왕 자이산, 지루가란, 도르곤, 호거와 군왕 아치코, 도도, 아달예) 홍타이지가 죽은지 6일 째 되던 8월 14일부터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는데, 이들 중 대권을 얻는 것에 가장 열중했던 이들은 바로 호거와 도르곤이었다.
호거는 홍타이지의 큰아들로, 당시 유리한 입장이었다. 일단 그는 장남에 서른 다섯이라는 한창의 나이였고, 인물과 재질이 무척 출중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궁술과 마술이 뛰어났다. 영명하고 강인하며 지혜로웠다'고 묘사된다. 또한 많은 군공을 새웠고 경험도 많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많은 대신들이 그를 지지하였고, 특히나 팔기 중 정황기와 양황기의 패륵들이 특히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도르곤 역시 몇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는데, 일단 그는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자 홍타이지의 이복 동생으로, 32세였다. 또 그는 누르하치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전설에는 그가 9황자였던 시절, 누르하치가 일찍이 유언으로 ‘9황자가 황위를 계승해야 할 텐데 나이가 어리니 다이산이 섭정하고 보좌하라’ 라는 말을 남겼으나, 다이산이 이를 무시하고 홍타이지를 옹립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도르곤은 계책과 전술에 뛰어나,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올린 것이 여러번이었다. (그리고 그 군사적 성과에서는 병자호란, 조선을 침략하여 남한 산성의 인조를 공격,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아낸 것도 포함되어 있다.)
절충안으로 선택된 황제
두 유력한 후보의 접전은 아슬아슬한 군사적 긴장감이 도는 상황에까지 이어졌고, 보다못한 연장자 예친왕 다이산의 중재 아래, 겉으로는 어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셈이 빨랐던 정친왕의 제의가 최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제의는 바로 도르곤과 호거 양측의 논리를 모두 받아들여, 호거의 말 대로 선황제 홍타이지의 아들이되 호거가 아닌 어린 복림을 황제로 추대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두 친왕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끔찍한 군사적 싸움으로 번질 염려도 없었으며, 특히 도르곤은 섭정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기에, 일곱 명의 친왕과 군왕들은 이에 합의하였고, 결국 두 실력자의 경합의 결과로 어린 황자 복림, 즉 순치제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 이후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으로, 순치제는 즉위하였을 때 친정을 할 수 없었다.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루갈린이 좌, 우 섭정왕으로서 그를 보좌했다. 왜냐하면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며, 또한 황실 어른들의 입김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은 바로 황숙이자 섭정인 예친왕 도르곤이었다.
섭정기
순치 원년부터 1650년 까지, 약 8년동안 순치제는 섭정 아래에 황위에 있었다. 처음에는 정친왕 지루갈린와 예친왕 도르곤이 함께 순치제를 보좌하였으나, 결국 정친왕은 실권을 잃었고, 예친왕 도르곤이 실질적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섭정하였다.
북경천도
순치 원년, 이자성이 농민군을 이끌고 3월 19일 새벽 자금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는 황후를 자살시키고 공주를 살해하고는 스스로 산에 올라 목을 메어 죽었다. 농민군의 북경 함락 소식에, 섭정왕이었던 도르곤은 거병하여 이자성을 치기 위해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귀순하는 관리와 백성은 관직을 유지하고 종사하던 일을 그대로 하게 해준다는 유화책을 사용하였으며, 군율에 의해 핍박하지 않을 것을 널리 공포하였다.
대장군에 임명된 도르곤은 4월 9일 만주팔기와 몽골팔기, 한군팔기를 이끌고 산해관에 진격하였다. 21일부터 23일까지 이뤄진 전쟁을 통해 오삼계는 청에 항복, 팔기군과 연합하였다. 이에 청군은 이자성의 농민군을 대패시키고 북경으로 출격하였으며, 수차례의 전투 이후 5월 2일, 비로소 북경에 입성하여 자금성의 무영전에서 섭정 업무를 개시하였다.
이에 자연스럽게 북경 천도 문제가 거론되었고, 당시 7세밖에 되지 않았던 순치제는, 도르곤의 북경 천도 제의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10월 초하루, 순치제는 황극문에서 ‘연경으로 천도한다’는 조서를 공포하였다.
청 태조와 태종이 누리지 못했던 북경 천도를 겨우 7세의 나이였던 순치제는 도르곤의 보필을 받아 완성해 냈으며, 이 업적, 즉 명의 수도였던 북경을 정복하고 천도한 업적을 통해 ‘세조’라는 묘호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섭정의 영향력 아래 무력한 황제
북경을 천도하여 완성된 청을 이룩하였다는 업적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순치제는 무력하였다. 정치적 방패가 되어줄 수 있는 인물 중 하나, 어머니였던 효장문황후와 정치적으로는 긴밀하였으나, 그리 원만한 관계는 아니었을뿐더러, 섭정왕이었던 도르곤이 대부분의 거사를 맡아 치세하였고, 그가 죽기 전 8년의 섭정기간동안 순치제는 유명무실한 황제의 이름을 지키고 있었다. 도르곤은 순치제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인 정황기와 양황기를 분화시키고, 정친왕의 세력을 억누르고 스스로 수석격의 위치에 올라 모든 정사를 우선 보고 받으며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장 큰 경쟁자인 호거를 반란과 엮어 제거하면서 순치제를 마음껏 휘둘렀다. 때문에 순치제는 도르곤이 병사할 때까지 황숙을 넘어 황부의 칭호를 도르곤에게 내주어야 했으며, 그의 뜻대로 정치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 두어야만 했다.
친정기
그러나 순치 7년, 12월. 7년, 8년의 섭정을 바라보던 도르곤이 카라 성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이듬에부터는 8년간의 섭정이 완전히 끝나고, 비로소 순치제는 친정을 할 수 있었다. 2월에는 도르곤의 10가지 죄상을 공포하고, 가업을 차압하고, 작위를 삭탈하고 수족을 모조리 제거하였다. 심지어 부관참시까지 진행하였다고 한다.
도르곤 사후, 친정을 이어나가며 순치제는 중앙집권화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적극적으로 한족 세력의 융화를 추진해 나갔다고 한다.
아담 샬
순치제는 명·청대를 통틀어 가장 예수회 선교사를 존중했던 황제로 이야기된다. 특히나 그는 선교사이자 학자인 아담 샬을 무척이나 신뢰하며 아꼈는데, 이는 군신관계를 초월하였다고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아담 샬은 본디 순치 원년, 시헌력을 반포하여 서양인 최초로 흠천감의 벼슬을 얻은 사람이었다. 순치제가 그를 신임하게 된 계기는, 바로 효장황태후의 병을 고쳐준 일이었다. 황태후는 그를 의부라고 높여불렀고, 이에 따라 순치제도 그를 만주어로 할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마파’라고 불렀다.
또한 순치제는 아담 샬의 간언을 즐겨들었다. 아담 샬이 순치제에게 올린 장계가 300건이 넘었고, 이중 대부분의 간언이 수용되었다. 또한 순치제는 그로부터 천문, 역법, 종교, 그리고 치국의 방법까지도 전수받았다. 순치 13년부터 14년까지 24번이나 친히 아담 샬의 관사에 방문하고, 학문을 논하고, 나란히 화원을 거니는 등 스스럼 없는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심지어 순치제는 아담 샬이 수시로 대궐을 방문하도록 허가하였다.
또한 많은 직함을 내렸는데, 태복사경, 태상사경, 통현교사, 통정사를 이어 이후에는 정 1품 광록대부라는 작위를 하사하였다. 심지어는 효장황태후와 후계를 놓고 갈등하다가도, 아담 샬의 조언에 따라 황위 계승자로 효장 황태후의 의견대로 현엽을(강희제) 지목하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진원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청 세조에게 아담 샬의 존재는 당 태종에게 위정의 존재와도 같았다.’
순치제의 죽음
순치제는 1661년 2월 5일, 스물 넷의 나이로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의 계기에 대해 혹자는 동악비라는 총애 후궁의 이야기를 들기도 한다. 그의 승하일이 동악비의 사망이로부터 약 100일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치제는 본래 여느 만주 귀족들처럼 호색과 방종에 젖어있었으나, 동악비를 만나고는 순애보적인 사랑을 했으며, 이러한 몰입과 애정이 상실로 이어지자 오히려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귀비 동악씨가 아이를 잃고 세상을 떠나자, 순치제는 무척이나 상심하여 5일 연속 아침조회에 빠졌다. 장례를 무척 성대하게 준비하였으며, 제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비통함이 어찌나 컸던지, “무작정 죽겠다고 해서 밤낮으로 지키며 황제의 자살기도를 막아야 했다”고 전해진다.
출가를 했다, 혹은 병사 했다, 여러 가지 설들이 많지만, 한림원의 장원학사 왕희의 <왕희자정연보>에 의하면 순치제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1월 2일 갑자기 순치제가 쓰러졌다. 이튿날 왕희를 양심전으로 불렀다. 6일 밤 다시 왕희를 불러들여, ‘짐이 지금 천연두를 앓고 있는데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 그대는 짐의 말을 귀담아 듣고 속히 조서를 작성하라’고 하였다. 이에 왕희는 어의에 따라 유조를 작성하였고, 7일 저녁 ‘유조’가 완성되었다,”
순치제는 임종에 앞서 “조상의 법도에 화욕이 있다. 지금 짐은 선도에 마음을 빼앗겼으니, 필히 횟불을 들고 그 법도를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 4월 17일, 경산의 수왕전에서 순치제는 화장되었다.
순치제가 승하하자, 황태후의 교지와 순치제의 유조에 따라 8세의 현엽이 황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바로 강희제이다.
참고문헌
- 중국문화사 수업 및 수업자료
- 신중국사, 존 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 까치, 2005
- 청나라, 제국의 황제들, 옌 총니엔, 장성철, 산수야, 2014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윤혜영, 서해문집,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