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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트로츠키주의에 관심을 가져 중국좌익반대파의 총서기로 취임했으나, 1932년 국민당에게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붕괴되었다. 1937년 출옥한 이후에는 무산계급 혁명에 회의를 느끼고 민주주의자로 다시 전향하였다. 만년에는 충칭 인근에서 저술에 힘쓰다가 1942년 병사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무르던 저우언라이가 중병에 걸린 입원한 천두슈를 문병오기도 했다. | 이후에는 트로츠키주의에 관심을 가져 중국좌익반대파의 총서기로 취임했으나, 1932년 국민당에게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붕괴되었다. 1937년 출옥한 이후에는 무산계급 혁명에 회의를 느끼고 민주주의자로 다시 전향하였다. 만년에는 충칭 인근에서 저술에 힘쓰다가 1942년 병사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무르던 저우언라이가 중병에 걸린 입원한 천두슈를 문병오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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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운동 참가'''== | ||
+ | 1901년부터 당시 청조정부에 위해 장려해온 일보에 유학을 응해 신주쿠의 成城(성성)학교에 유학을 간다. 일본에서는 유핵생들 사이에서 만주족의 청나라를 타도한다는 민족주의혁명의 시조가 높아지고 그도 그 시조에 영향을 받는다. 귀국하자 고향에서 安徽愛國會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나 "安徽俗话报"라는 잡지를 출판하고나 岳王会라는 비밀결사적인 혁명운동의 조직을 설립하고나 활동을 했으나 모두 중간에 실패하고나 좌절했다. 신해혁명에서 1912년 중화민국이 설립하고 안후이 성에서 都督府秘書長라는 요직을 오르다. 하지만 적대적 세력을 배제하는 자세를 강하게 했기 때문에 진독수고 사직하고 일본에 망명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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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청년"과 신문화운동'''== | ||
+ | 중국의 현실에 절망한 진독수는 일본에서 "국민의 유일한 희망은 외국인을 위한 분할뿐이다" 등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문장을 쓰고 있었지만 이것에 대해 우인의 리다자오(李大釗)가 사랑하는 모국을 추구하는 것을 그만둬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진독수는 1915년 귀국하여 9월 상하이에서 "청년잡지"(현"신청년")을 창간한다. 신청년에서 진독수는 전통적인 문화나 사회 체제가 중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원인으로서 철저하게 비판하고 중국을 멸망 시키지 않게 현대사회의 안올리는 유고나 가족제도를 페절하여 "민주", "과학" 등 서양 문화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받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단순명쾌한 과격한 주장은 신해혁명후 정치 정세에 페한감을 느끼고 있던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세 큰 공감을 얻어 일약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된다. "신청년"의 활동은 역사상 "신문화운동"이라고 불리고 호적이나 루신 등 근대중국사상 유명한 작가나 학자를 산출했다. 젊은 날의 마오쩌둥도 "신청년"에 투고하고 진독수를 사상계의 명성이라고 평가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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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운동~공산당 설립'''== | ||
+ | 계기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 강화 회의었다. 서양주위자인 진독수는 의장인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세계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절찬헤 회의를 세계 평화를 이루는 계기리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회의에서 대화21개조 요구로 독일부터 일본에 양도 받은 산동 반도의 권익이 그대로 유지됨 등 이상보다 걸맞지 않는 현살에 "윌슨은 거짓말쟁이다"라고 깊이 실망했다. 5월4일에 베이징 천안문앞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산동 반도의 중국 반환을 인정하지 않는 파리 강화 조약에 부조인을 원하는 민중데모(5・4운동)가 일으켜 수많은 시민을 끌어넣은 민중운덩에 발전한다. 이 민중의 힘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이 길거리에서 "베이징시민선언"이라는 전단을 도르다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동안 옥중 생활을 보냈다. 보석 후는 도시 노동자의 운동 이론으로 마으크스주의에 급속히 경도한다. 1921년에 소련 코민테른 지도하에 상하이에서 리다자오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을 설립, 초대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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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 | =='''가족관계'''== | ||
본처와는 4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맞아들 천옌녠(1898-1927)과 둘째 아들 첸자오녠(1902-1928)은 공산당원으로서 4.12 상하이 쿠데타이후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현재 공산당에서는 열사로 기념하고 있다. [1] 세째아들 천광메이(1907-1999)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살아갔으며, 네째아들 첸쑹녠 (1910-1990) 은 안후이성의 관리를 지냈다. 애인이 낳은 자식은 둘이 있는데 모두 중국을 떠나 망명, 미국 홍콩에 살았다. 이렇게 자녀 둘이 공산당을 위해 활동하다 처형되었기 때문에, 중공정권에서 본인의 평가가 그다지 박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 본처와는 4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맞아들 천옌녠(1898-1927)과 둘째 아들 첸자오녠(1902-1928)은 공산당원으로서 4.12 상하이 쿠데타이후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현재 공산당에서는 열사로 기념하고 있다. [1] 세째아들 천광메이(1907-1999)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살아갔으며, 네째아들 첸쑹녠 (1910-1990) 은 안후이성의 관리를 지냈다. 애인이 낳은 자식은 둘이 있는데 모두 중국을 떠나 망명, 미국 홍콩에 살았다. 이렇게 자녀 둘이 공산당을 위해 활동하다 처형되었기 때문에, 중공정권에서 본인의 평가가 그다지 박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 ||
=='''평가'''== | =='''평가'''== | ||
전향자이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그래도 당 시조로서 어느 정도는 평가받고 있다. 고향에 동상과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다만 그와 별개로 중공 공식 역사상에서는 여전히 제명된 당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2001년 편찬된 역사서에 '우경기회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다만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짤막하게 서술된 것이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의 유일한 재평가이다. | 전향자이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그래도 당 시조로서 어느 정도는 평가받고 있다. 고향에 동상과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다만 그와 별개로 중공 공식 역사상에서는 여전히 제명된 당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2001년 편찬된 역사서에 '우경기회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다만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짤막하게 서술된 것이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의 유일한 재평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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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독수는 중국공산단의 창립자고 마오쩌동, 손문, 장제스 등 근대중국 역사상에 중요인물 중 그와 관계가 없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신문화운동, 5・4운동, 국민혁명등 1910년대부터 20년대에 중롸민국사의 흐름의 중심으로 늘 있었다. 역사상 중요인물이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유명하지 않고 그 평가도 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 하나로 국민혁명의 실패와 토로츠키스트에 전향에서 중국공산당의 공식서관애소 비판적으로 평가를 받아 온 것과 또 하나는 사상 자체가 서양의 표면적 사상을 그대로 갖어 온 것이고 독자성이 없었기 때문에 연구대상으로 매력이 없었다는 이유가 있다. |
2020년 12월 28일 (월) 10:49 기준 최신판
요약
중국공산당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 유교 도덕을 비판하며 문학혁명론을 주장했고, 이는 이후 5·4 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중국공산당을 창당해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했고, 제1차 국공합작을 제안했다.
생애
1879년 안후이성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일본,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1916년 베이징에서 '신청년'을 발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었다. 이후 리다쟈오와 의논하여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당의 창당을 논의해 소련의 지원으로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을 창당하고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1920~1922년에는 천중밍과 협력하여 광동의 교육개혁 운동을 지도했으며, 광동에서 임조함, 담평산, 천궁보와 함께 공산주의 소조를 결성했다. 쑨원의 2차 호법운동에 대해서는 이를 시기상조라 여겨 반대했다. 1921년 쑨원과 코민테른 대표 마링의 만남을 주선했고, 천중밍이 1922년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천중밍과 단절하고 쑨원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1923년 3차 광동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선전주임을 맡아 쑨원을 원조했다.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했으며, 1922년 코민테른이 국민당과의 당내 합작을 지시하자 반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결국 국민당의 개조, 쑨원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폐하는 조건으로 합작에 동의하여 중국 국민당 당적을 획득하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일어난 이후 국민혁명에 종사했다. 이후 1927년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로 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붕괴되고 마일사변 등 반공폭동이 계속 일어나는 와중에도 국민당에 대한 양보 정책을 취하며 국공합작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27년 7월 우한 정부마저 분공을 결정, 국공결렬이 확정되자, 결국 코민테른으로부터 "혁명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일관했다"는 이유로 비판당했다. 이후 7월 12일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지시에 따라 공산당 지도부가 개조되자, 7월 14일 잠적하였고 7월 15일 총서기 사퇴 의사를 밝혔다. 난창 폭동 직후에 일어난 8.7 긴급회의에서는 기존 노선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추궁 당했고, 취임한지 6년만에 총서기직을 박탈 당했다. 이후 1929년 11월 중국 공산당의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책임을 지고 당적까지 제명 당했다.
이후에는 트로츠키주의에 관심을 가져 중국좌익반대파의 총서기로 취임했으나, 1932년 국민당에게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붕괴되었다. 1937년 출옥한 이후에는 무산계급 혁명에 회의를 느끼고 민주주의자로 다시 전향하였다. 만년에는 충칭 인근에서 저술에 힘쓰다가 1942년 병사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무르던 저우언라이가 중병에 걸린 입원한 천두슈를 문병오기도 했다.
혁명운동 참가
1901년부터 당시 청조정부에 위해 장려해온 일보에 유학을 응해 신주쿠의 成城(성성)학교에 유학을 간다. 일본에서는 유핵생들 사이에서 만주족의 청나라를 타도한다는 민족주의혁명의 시조가 높아지고 그도 그 시조에 영향을 받는다. 귀국하자 고향에서 安徽愛國會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나 "安徽俗话报"라는 잡지를 출판하고나 岳王会라는 비밀결사적인 혁명운동의 조직을 설립하고나 활동을 했으나 모두 중간에 실패하고나 좌절했다. 신해혁명에서 1912년 중화민국이 설립하고 안후이 성에서 都督府秘書長라는 요직을 오르다. 하지만 적대적 세력을 배제하는 자세를 강하게 했기 때문에 진독수고 사직하고 일본에 망명했다.
"신청년"과 신문화운동
중국의 현실에 절망한 진독수는 일본에서 "국민의 유일한 희망은 외국인을 위한 분할뿐이다" 등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문장을 쓰고 있었지만 이것에 대해 우인의 리다자오(李大釗)가 사랑하는 모국을 추구하는 것을 그만둬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진독수는 1915년 귀국하여 9월 상하이에서 "청년잡지"(현"신청년")을 창간한다. 신청년에서 진독수는 전통적인 문화나 사회 체제가 중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원인으로서 철저하게 비판하고 중국을 멸망 시키지 않게 현대사회의 안올리는 유고나 가족제도를 페절하여 "민주", "과학" 등 서양 문화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받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단순명쾌한 과격한 주장은 신해혁명후 정치 정세에 페한감을 느끼고 있던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세 큰 공감을 얻어 일약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된다. "신청년"의 활동은 역사상 "신문화운동"이라고 불리고 호적이나 루신 등 근대중국사상 유명한 작가나 학자를 산출했다. 젊은 날의 마오쩌둥도 "신청년"에 투고하고 진독수를 사상계의 명성이라고 평가했다.
5・4운동~공산당 설립
계기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 강화 회의었다. 서양주위자인 진독수는 의장인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세계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절찬헤 회의를 세계 평화를 이루는 계기리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회의에서 대화21개조 요구로 독일부터 일본에 양도 받은 산동 반도의 권익이 그대로 유지됨 등 이상보다 걸맞지 않는 현살에 "윌슨은 거짓말쟁이다"라고 깊이 실망했다. 5월4일에 베이징 천안문앞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산동 반도의 중국 반환을 인정하지 않는 파리 강화 조약에 부조인을 원하는 민중데모(5・4운동)가 일으켜 수많은 시민을 끌어넣은 민중운덩에 발전한다. 이 민중의 힘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이 길거리에서 "베이징시민선언"이라는 전단을 도르다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동안 옥중 생활을 보냈다. 보석 후는 도시 노동자의 운동 이론으로 마으크스주의에 급속히 경도한다. 1921년에 소련 코민테른 지도하에 상하이에서 리다자오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을 설립, 초대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가족관계
본처와는 4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맞아들 천옌녠(1898-1927)과 둘째 아들 첸자오녠(1902-1928)은 공산당원으로서 4.12 상하이 쿠데타이후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현재 공산당에서는 열사로 기념하고 있다. [1] 세째아들 천광메이(1907-1999)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살아갔으며, 네째아들 첸쑹녠 (1910-1990) 은 안후이성의 관리를 지냈다. 애인이 낳은 자식은 둘이 있는데 모두 중국을 떠나 망명, 미국 홍콩에 살았다. 이렇게 자녀 둘이 공산당을 위해 활동하다 처형되었기 때문에, 중공정권에서 본인의 평가가 그다지 박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평가
전향자이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그래도 당 시조로서 어느 정도는 평가받고 있다. 고향에 동상과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다만 그와 별개로 중공 공식 역사상에서는 여전히 제명된 당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2001년 편찬된 역사서에 '우경기회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다만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짤막하게 서술된 것이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의 유일한 재평가이다.
지독수는 중국공산단의 창립자고 마오쩌동, 손문, 장제스 등 근대중국 역사상에 중요인물 중 그와 관계가 없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신문화운동, 5・4운동, 국민혁명등 1910년대부터 20년대에 중롸민국사의 흐름의 중심으로 늘 있었다. 역사상 중요인물이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유명하지 않고 그 평가도 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 하나로 국민혁명의 실패와 토로츠키스트에 전향에서 중국공산당의 공식서관애소 비판적으로 평가를 받아 온 것과 또 하나는 사상 자체가 서양의 표면적 사상을 그대로 갖어 온 것이고 독자성이 없었기 때문에 연구대상으로 매력이 없었다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