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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66년 | |출생일 = 1866년 | ||
|출생지 = 강소성 화이안시(淮安市) | |출생지 = 강소성 화이안시(淮安市) | ||
− | |사망일 = | + | |사망일 = 1940년 5월 |
− | |생존시기 = 청나라 ~ | + | |생존시기 = 청나라 ~ 중화민국 |
|관련 활동 = 갑골학, 농학 | |관련 활동 = 갑골학, 농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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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 ||
===초기=== | ===초기=== | ||
− | 나진옥은 청나라 동치(同治) 5년(1866)에 지금의 강소성 화이안시(淮安市)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언(叔言)이고 호는 설당(雪堂) 혹은 정송노인(貞松老人)으로, 젊어서 몇 차례 향시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나진옥은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금석학을 비롯한 역사와 고전 등의 국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나진옥이 회안에 머물던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참패하자 나진옥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패전의 근본 원인이 실용을 도외시한 경서와 사기를 중심의 이학(理學)에 치중한 중국의 학풍 때문이라 판단하고, 서양의 실용학문 특히 농학과 수리학 등을 진작시켜 국력을 증강시켜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1896년 장맥부(蔣伯斧)와 함께 상해에 농학사(農學社)와 농학관(農學館)을 설립하고 | + | 나진옥은 청나라 동치(同治) 5년(1866)에 지금의 강소성 화이안시(淮安市)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언(叔言)이고 호는 설당(雪堂) 혹은 정송노인(貞松老人)으로, 젊어서 몇 차례 향시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나진옥은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금석학을 비롯한 역사와 고전 등의 국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br> |
+ | 나진옥이 회안에 머물던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참패하자 나진옥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패전의 근본 원인이 실용을 도외시한 경서와 사기를 중심의 이학(理學)에 치중한 중국의 학풍 때문이라 판단하고, 서양의 실용학문 특히 농학과 수리학 등을 진작시켜 국력을 증강시켜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1896년 장맥부(蔣伯斧)와 함께 상해에 농학사(農學社)와 농학관(農學館)을 설립하고 『農學報(농교보)』를 창간하여 일본과 서양의 농업서적을 구입해 번역, 소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서양서적은 물론 일본서적을 번역할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한 인물이 많지 않았다. 나진옥은 일본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98년에 동문학사(東文學社)를 세워 농업서적을 비롯한 일본의 과학기술 서적을 번역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였는데, 널리 알려진 심굉(沈肱), 번소천(樊少泉), [[왕국유]](王国維) 등이 동문학사 출신이다. 『농학보』 발간과 동문학사 운영이 계기가 되어 그는 1900년에 호광총독(湖廣總督)인 장지동(張之洞)의 초빙으로 호북농무국총리(湖北農務局總理) 겸 농모학당(農務學堂)의 감독을 맡았고, 이듬해 일본을 방문하여 그곳의 교육현황을 살펴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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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찰=== | ===일본 시찰=== | ||
− | 나진옥은 일본 시찰 과정에서 일본의 선진 학술사조와 교육행정을 실견하였고, 재일 중국유학생들이 | + | 나진옥은 일본 시찰 과정에서 일본의 선진 학술사조와 교육행정을 실견하였고, 재일 중국유학생들이 동맹회(同盟會)를 비롯한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혁명을 주창하는 모습들을 목도하였다. 게다가 중국의 개혁을 부르짖는 유학생들은 중국의 고유한 전통과 사상을 버리고 오로지 서양의 과학문명에 기대어 중국을 개혁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 | 귀국 후 | + | <br> |
− | 그는 중국의 고유문화를 발양할 수 있는 교육을 건의했으나, 청나라 정부는 이미 무기력해 그러한 건의를 수용하고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나진옥은 자신이 직접 국학 보전과 발양을 위해 서적과 유물을 적극적으로 수집, 정리,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종전의 직책을 사임하고 광동으로 내려가 남양공학(南洋公學) 감독을 맡았고, 1903년에 남양감독(两廣總督) 잠춘훤(岑春煊)의 교육고문으로 초빙되었으며, 1904년에 蘇州에 강소사범학당을 세우고 초대 감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 張之洞의 추천으로 북경 청나라 정부에 들어가 학부 참사관(學部 參事官)과 이어서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농과 감독을 맡았다. | + | 귀국 후 그는 중국의 고유문화를 발양할 수 있는 교육을 건의했으나, 청나라 정부는 이미 무기력해 그러한 건의를 수용하고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나진옥은 자신이 직접 국학 보전과 발양을 위해 서적과 유물을 적극적으로 수집, 정리,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종전의 직책을 사임하고 광동으로 내려가 남양공학(南洋公學) 감독을 맡았고, 1903년에 남양감독(两廣總督) 잠춘훤(岑春煊)의 교육고문으로 초빙되었으며, 1904년에 蘇州에 강소사범학당을 세우고 초대 감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 張之洞의 추천으로 북경 청나라 정부에 들어가 학부 참사관(學部 參事官)과 이어서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농과 감독을 맡았다. <br> |
− | 나진옥은 청나라 정부에 봉직하는 동안 신교육제도 도입 와중에 제기된 國子監 폐지론을 적극 반대해 무산시켰고, 폐기처분하려는 내각대사(內閣大庫)의 명·청시대 귀중한 문서와 전적들을 학부로 옮겨 보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외로 유출될 위기에 처한 돈황문서 약 8,000점을 북경으로 옮겨오는데 앞장섰고, 당시 학계에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은나라의 시절(殷代)의 갑골 2만여 점을 수집, 정리하여 갑골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 + | 나진옥은 청나라 정부에 봉직하는 동안 신교육제도 도입 와중에 제기된 國子監 폐지론을 적극 반대해 무산시켰고, 폐기처분하려는 내각대사(內閣大庫)의 명·청시대 귀중한 문서와 전적들을 학부로 옮겨 보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외로 유출될 위기에 처한 돈황문서 약 8,000점을 북경으로 옮겨오는데 앞장섰고, 당시 학계에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은나라의 시절(殷代)의 갑골 2만여 점을 수집, 정리하여 갑골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br> |
− | 1911년에 | + | |
+ |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신해혁명 발발 당시 나진옥은 북경에서 청조의 경사대학당 농과 감독을 맡고 있었다. 청나라 조정은 [[북양군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원세개]](袁世凱)를 기용하여 혁명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원세개는 혁명군과 전투를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고 영국의 중재로 화평을 추진하며 지지부진하였다. 나진옥이 혁명군의 위험이 점점 닥쳐오는 것을 직감하고 있을 때, 일본 本願寺 사주 大谷光瑞와 경도제국대학 교수 內藤虎次郞 등이 일본에 와서 머물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 ||
===일본 망명=== | ===일본 망명=== | ||
망설이던 나진옥은 그해 10월에 [[왕국유]](王國維), [[유철운]](劉鐵雲)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京都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경도에 가족을 옮긴 후 순국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왕국유와 함께 다시 북경에 돌아갔으나, 당시로서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후 약 8년간 일본에 머물렀다. 나진옥은 1915년에 일시 귀국하여 하남성 안양(安養)과 [[낙양]]洛陽 일대의 유적을 둘러보았고 1918년에는 화북지방의 수재민을 진휼하는 등 몇 차례 중국을 왕래했으나, 망명기간 대부분을 경도에서 보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는 경도 淨土寺町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곁에 大雲書庫를 지어 경도제국대학에 임시로 맡겨두었던 자신의 장서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후 세상과 담을 쌓다시피 하고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선통]](宣統) 초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하여 신해혁명으로 중단된 국학진흥잡지 『國學叢刊』을 속간하고, 『殷墟書契』, 『殷墟書契考釋』, 『流沙墜簡考釋』, 『明器圖錄』, 『芒洛冢墓遺文』, 『襄陽冢墓遺文』, 『海外貞珉錄』, 『徐俟齋年譜』, 『日本古寫本悉曇子記』, 『北宋本天竺字源』, 『六朝墓誌精英』을 비롯한 수많은 저술을 집필하였다. | 망설이던 나진옥은 그해 10월에 [[왕국유]](王國維), [[유철운]](劉鐵雲)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京都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경도에 가족을 옮긴 후 순국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왕국유와 함께 다시 북경에 돌아갔으나, 당시로서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후 약 8년간 일본에 머물렀다. 나진옥은 1915년에 일시 귀국하여 하남성 안양(安養)과 [[낙양]]洛陽 일대의 유적을 둘러보았고 1918년에는 화북지방의 수재민을 진휼하는 등 몇 차례 중국을 왕래했으나, 망명기간 대부분을 경도에서 보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는 경도 淨土寺町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곁에 大雲書庫를 지어 경도제국대학에 임시로 맡겨두었던 자신의 장서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후 세상과 담을 쌓다시피 하고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선통]](宣統) 초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하여 신해혁명으로 중단된 국학진흥잡지 『國學叢刊』을 속간하고, 『殷墟書契』, 『殷墟書契考釋』, 『流沙墜簡考釋』, 『明器圖錄』, 『芒洛冢墓遺文』, 『襄陽冢墓遺文』, 『海外貞珉錄』, 『徐俟齋年譜』, 『日本古寫本悉曇子記』, 『北宋本天竺字源』, 『六朝墓誌精英』을 비롯한 수많은 저술을 집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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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 | ===회향=== | ||
1916년 6월 신해혁명 후 정국을 이끌던 원세개가 병으로 죽자 군벌들이 할거하였다. 이에 청조의 유신(遺臣)인 가봉순(柯鳳蓀)이 나진옥에게 서신을 보내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고, 이어서 일본 각지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마침내 귀국을 결심하고 1919년 3월에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조정의 많은 유신들은 신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혹은 [[톈진]](天津)과 상해 등지의 외국 조계지로 옮겨가 청나라 재건, 곧 [[복벽운동]](復辟運動)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후에 만주국 건국과 운영에 대거 참여했거니와, 나진옥도 그러한 부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상해를 거쳐 천진에 안착한 나진옥은 곧장 청의 雍正帝를 비롯한 네 임금의 陵寢인 西陵을 참배하고 청나라 조정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을 목도하고 자신의 소장 유물 수백 점을 팔고 또 별도로 기금을 모아 경기생계유지회(京旗生計維持會)를 결성하여 박애공장(博愛工廠)을 비롯한 여러 공장을 짓고 동화은행(東華銀行)을 설립해 10여년간 빈민 구휼과 실업자 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전적 수집과 정리, 고증, 연구, 편찬을 꾸준히 진행하여 『海外吉金錄』, 『宋元釋藏考本』, 『道德經考異』, 『蒿里遺文目錄』 등을 찬술하였다. | 1916년 6월 신해혁명 후 정국을 이끌던 원세개가 병으로 죽자 군벌들이 할거하였다. 이에 청조의 유신(遺臣)인 가봉순(柯鳳蓀)이 나진옥에게 서신을 보내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고, 이어서 일본 각지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마침내 귀국을 결심하고 1919년 3월에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조정의 많은 유신들은 신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혹은 [[톈진]](天津)과 상해 등지의 외국 조계지로 옮겨가 청나라 재건, 곧 [[복벽운동]](復辟運動)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후에 만주국 건국과 운영에 대거 참여했거니와, 나진옥도 그러한 부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상해를 거쳐 천진에 안착한 나진옥은 곧장 청의 雍正帝를 비롯한 네 임금의 陵寢인 西陵을 참배하고 청나라 조정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을 목도하고 자신의 소장 유물 수백 점을 팔고 또 별도로 기금을 모아 경기생계유지회(京旗生計維持會)를 결성하여 박애공장(博愛工廠)을 비롯한 여러 공장을 짓고 동화은행(東華銀行)을 설립해 10여년간 빈민 구휼과 실업자 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전적 수집과 정리, 고증, 연구, 편찬을 꾸준히 진행하여 『海外吉金錄』, 『宋元釋藏考本』, 『道德經考異』, 『蒿里遺文目錄』 등을 찬술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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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나진옥은 일본의 內藤虎次郞, 水野梅曉 등과 함께 만일문화협회(滿日文化協會)를 조직하여 상임이사와 회장을 연이어 맡아, 청나라 역조황제실록(歷朝皇帝實錄)과 歷代刻絲刺繡美術品을 영인해 간행하였다. 그리고 1934년 만주국이 집정제에서 帝制로 바뀌어 부의가 황제로 등극할 때 나진옥은 대전주비위원회(大典籌備委員會) 위원으로 추대되었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만주국 감찰국장과 만일문화협회 이사 및 회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나진옥은 1937년 건강이 악화되어 공직을 사임하고 여순으로 퇴거하였다. 여순에 우거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전적과 기물을 정리하고 연구하던 나진옥은 1940년 5월에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 그즈음 나진옥은 일본의 內藤虎次郞, 水野梅曉 등과 함께 만일문화협회(滿日文化協會)를 조직하여 상임이사와 회장을 연이어 맡아, 청나라 역조황제실록(歷朝皇帝實錄)과 歷代刻絲刺繡美術品을 영인해 간행하였다. 그리고 1934년 만주국이 집정제에서 帝制로 바뀌어 부의가 황제로 등극할 때 나진옥은 대전주비위원회(大典籌備委員會) 위원으로 추대되었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만주국 감찰국장과 만일문화협회 이사 및 회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나진옥은 1937년 건강이 악화되어 공직을 사임하고 여순으로 퇴거하였다. 여순에 우거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전적과 기물을 정리하고 연구하던 나진옥은 1940년 5월에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 ||
− | ==저서== | + | ==주요 저서== |
===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藩閥誌存)=== | ===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藩閥誌存)=== | ||
7세기 중엽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당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확립하였다. 그 과정에 수많은 백제와 고구려인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하여 당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양국의 왕족과 유력 가문 구성원들이 대거 당으로 사천되어 不歸의 혼이 되었는데, 『당대해동번벌지존』은 바로 중국에서 발견된 이들의 墓誌를 소개, 판독, 고증한 저술이다. | 7세기 중엽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당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확립하였다. 그 과정에 수많은 백제와 고구려인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하여 당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양국의 왕족과 유력 가문 구성원들이 대거 당으로 사천되어 不歸의 혼이 되었는데, 『당대해동번벌지존』은 바로 중국에서 발견된 이들의 墓誌를 소개, 판독, 고증한 저술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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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허서계청화(殷墟書契菁華)=== | ||
+ | 나진옥은 골동상인으로부터 1만점이 넘는 [[갑골문|갑골]]을 구입하여 1913년 <은허서계전편(殷墟書契前編)> 20권을 간행했다. 이것은 그가 구입한 갑골 가운데 아름답고 학술적 가치도 높은 2000여점을 골라 탁본 인쇄한 것이다. 유악(劉鶚)의 <철운장귀(鐵雲藏龜)>가 단순히 탁본들을 나열해 놓은 것에 비해, 나진옥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갑골을 분류하고 정리하였다. 1914년 나진옥은 다시 <전편> 가운데 최상품 68점을 골라 사진제판이라는 당시 최고의 기술을 사용하여 <은허서계청화(殷墟書契菁華)>라는 탁본 인쇄본을 일본에서 간행하였다. | ||
==평가== | ==평가== | ||
− | 나진옥은 청말 민국초에 활동한 저명한 금석학자이고 교감학자이며, 갑골학자이고 돈황학자이다. 그는 일생동안 340여 종의 저술을 남겼고, 640여 종 1,589권의 희귀서적을 간행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특히 그는 금석문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각종 금석문을 수집, 정리, 교감하여 다양한 금석문 관련 저술을 간행하였다. 그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1937년에 저술한 『唐代海東藩閥誌存』이다. 나진옥은 이 저술에서 泉男生과 扶餘隆을 비롯한 고구려와 백제 유민 7명의 묘지를 소개하고 고증하였거니와, 그의 정확한 판독과 치밀한 고증은 8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학문수준으로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이다. | + | 나진옥은 청말 민국초에 활동한 저명한 금석학자이고 교감학자이며, 갑골학자이고 돈황학자이다. 그는 일생동안 340여 종의 저술을 남겼고, 640여 종 1,589권의 희귀서적을 간행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특히 그는 금석문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각종 금석문을 수집, 정리, 교감하여 다양한 금석문 관련 저술을 간행하였다. 그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1937년에 저술한 『唐代海東藩閥誌存』이다. 나진옥은 이 저술에서 泉男生과 扶餘隆을 비롯한 고구려와 백제 유민 7명의 묘지를 소개하고 고증하였거니와, 그의 정확한 판독과 치밀한 고증은 8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학문수준으로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이다.<br> |
− | + | 중국 근대 역사학의 발전 과정에 많은 영향을 준내각대고당안은 청대 내각에서 생산한 공문서로 명청시대 중앙정부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내각대고당안은 청정부와 북양정부에서 제대로 보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왕조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인 1909년과 1921년에 소각되거나 판매되어 사라질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지만 나진옥(羅振玉)등의 노력으로 보존되었다.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
− | 권덕영 (2018). 羅振玉의 금석학과 『唐代海東藩閥誌存』. 한국고대사연구,(91), 273-300. | + | ===학술논문=== |
− | 김지훈 (2016). 중화민국시기 근대 역사학과 공문서 정리. 역사와 세계, 49, 129-159 | + | 권덕영 (2018). 羅振玉의 금석학과 『唐代海東藩閥誌存』. 한국고대사연구,(91), 273-300. <br> |
+ | 김지훈 (2016). 중화민국시기 근대 역사학과 공문서 정리. 역사와 세계, 49, 129-159<br> | ||
+ | 지관순. (2015). 新文化運動期 王國維의 現實認識과 指向. 중국근현대사연구, 67(), 113-155. | ||
+ | [[분류:중국문자]] |
2021년 2월 16일 (화) 01:10 기준 최신판
나진옥(羅振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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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6년 강소성 화이안시(淮安市) |
사망 |
1940년 5월 |
생존시기 | 청나라 ~ 중화민국 |
관련 활동 | 갑골학, 농학 |
목차
생애
초기
나진옥은 청나라 동치(同治) 5년(1866)에 지금의 강소성 화이안시(淮安市)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언(叔言)이고 호는 설당(雪堂) 혹은 정송노인(貞松老人)으로, 젊어서 몇 차례 향시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나진옥은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금석학을 비롯한 역사와 고전 등의 국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나진옥이 회안에 머물던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참패하자 나진옥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패전의 근본 원인이 실용을 도외시한 경서와 사기를 중심의 이학(理學)에 치중한 중국의 학풍 때문이라 판단하고, 서양의 실용학문 특히 농학과 수리학 등을 진작시켜 국력을 증강시켜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1896년 장맥부(蔣伯斧)와 함께 상해에 농학사(農學社)와 농학관(農學館)을 설립하고 『農學報(농교보)』를 창간하여 일본과 서양의 농업서적을 구입해 번역, 소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서양서적은 물론 일본서적을 번역할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한 인물이 많지 않았다. 나진옥은 일본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98년에 동문학사(東文學社)를 세워 농업서적을 비롯한 일본의 과학기술 서적을 번역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였는데, 널리 알려진 심굉(沈肱), 번소천(樊少泉), 왕국유(王国維) 등이 동문학사 출신이다. 『농학보』 발간과 동문학사 운영이 계기가 되어 그는 1900년에 호광총독(湖廣總督)인 장지동(張之洞)의 초빙으로 호북농무국총리(湖北農務局總理) 겸 농모학당(農務學堂)의 감독을 맡았고, 이듬해 일본을 방문하여 그곳의 교육현황을 살펴보았다.
일본 시찰
나진옥은 일본 시찰 과정에서 일본의 선진 학술사조와 교육행정을 실견하였고, 재일 중국유학생들이 동맹회(同盟會)를 비롯한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혁명을 주창하는 모습들을 목도하였다. 게다가 중국의 개혁을 부르짖는 유학생들은 중국의 고유한 전통과 사상을 버리고 오로지 서양의 과학문명에 기대어 중국을 개혁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중국의 고유문화를 발양할 수 있는 교육을 건의했으나, 청나라 정부는 이미 무기력해 그러한 건의를 수용하고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나진옥은 자신이 직접 국학 보전과 발양을 위해 서적과 유물을 적극적으로 수집, 정리,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종전의 직책을 사임하고 광동으로 내려가 남양공학(南洋公學) 감독을 맡았고, 1903년에 남양감독(两廣總督) 잠춘훤(岑春煊)의 교육고문으로 초빙되었으며, 1904년에 蘇州에 강소사범학당을 세우고 초대 감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 張之洞의 추천으로 북경 청나라 정부에 들어가 학부 참사관(學部 參事官)과 이어서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농과 감독을 맡았다.
나진옥은 청나라 정부에 봉직하는 동안 신교육제도 도입 와중에 제기된 國子監 폐지론을 적극 반대해 무산시켰고, 폐기처분하려는 내각대사(內閣大庫)의 명·청시대 귀중한 문서와 전적들을 학부로 옮겨 보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외로 유출될 위기에 처한 돈황문서 약 8,000점을 북경으로 옮겨오는데 앞장섰고, 당시 학계에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은나라의 시절(殷代)의 갑골 2만여 점을 수집, 정리하여 갑골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신해혁명 발발 당시 나진옥은 북경에서 청조의 경사대학당 농과 감독을 맡고 있었다. 청나라 조정은 북양군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원세개(袁世凱)를 기용하여 혁명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원세개는 혁명군과 전투를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고 영국의 중재로 화평을 추진하며 지지부진하였다. 나진옥이 혁명군의 위험이 점점 닥쳐오는 것을 직감하고 있을 때, 일본 本願寺 사주 大谷光瑞와 경도제국대학 교수 內藤虎次郞 등이 일본에 와서 머물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일본 망명
망설이던 나진옥은 그해 10월에 왕국유(王國維), 유철운(劉鐵雲)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京都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경도에 가족을 옮긴 후 순국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왕국유와 함께 다시 북경에 돌아갔으나, 당시로서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후 약 8년간 일본에 머물렀다. 나진옥은 1915년에 일시 귀국하여 하남성 안양(安養)과 낙양洛陽 일대의 유적을 둘러보았고 1918년에는 화북지방의 수재민을 진휼하는 등 몇 차례 중국을 왕래했으나, 망명기간 대부분을 경도에서 보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는 경도 淨土寺町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곁에 大雲書庫를 지어 경도제국대학에 임시로 맡겨두었던 자신의 장서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후 세상과 담을 쌓다시피 하고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선통(宣統) 초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하여 신해혁명으로 중단된 국학진흥잡지 『國學叢刊』을 속간하고, 『殷墟書契』, 『殷墟書契考釋』, 『流沙墜簡考釋』, 『明器圖錄』, 『芒洛冢墓遺文』, 『襄陽冢墓遺文』, 『海外貞珉錄』, 『徐俟齋年譜』, 『日本古寫本悉曇子記』, 『北宋本天竺字源』, 『六朝墓誌精英』을 비롯한 수많은 저술을 집필하였다.
회향
1916년 6월 신해혁명 후 정국을 이끌던 원세개가 병으로 죽자 군벌들이 할거하였다. 이에 청조의 유신(遺臣)인 가봉순(柯鳳蓀)이 나진옥에게 서신을 보내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고, 이어서 일본 각지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마침내 귀국을 결심하고 1919년 3월에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조정의 많은 유신들은 신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혹은 톈진(天津)과 상해 등지의 외국 조계지로 옮겨가 청나라 재건, 곧 복벽운동(復辟運動)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후에 만주국 건국과 운영에 대거 참여했거니와, 나진옥도 그러한 부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상해를 거쳐 천진에 안착한 나진옥은 곧장 청의 雍正帝를 비롯한 네 임금의 陵寢인 西陵을 참배하고 청나라 조정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을 목도하고 자신의 소장 유물 수백 점을 팔고 또 별도로 기금을 모아 경기생계유지회(京旗生計維持會)를 결성하여 박애공장(博愛工廠)을 비롯한 여러 공장을 짓고 동화은행(東華銀行)을 설립해 10여년간 빈민 구휼과 실업자 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전적 수집과 정리, 고증, 연구, 편찬을 꾸준히 진행하여 『海外吉金錄』, 『宋元釋藏考本』, 『道德經考異』, 『蒿里遺文目錄』 등을 찬술하였다. 나진옥은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매년 정월에 푸이(溥儀)를 찾아가 생일을 경하하고 청나라 유신으로서의 예를 다하였다. 그러던 중 1924년에 서북군벌 풍옥상(馮玉祥)이 북경경비사령관 손악(孫岳)과 결탁하여 북경으로 진입해 이른바 ‘북경정변(北京政變)’을 일으켜 총통 조곤曹錕을 물러나게 하고 청나라 폐제 푸이를 출궁시켰다. 나진옥은 황실선후위원회(皇室善後委員會) 위원 자격으로 푸이의 출궁을 막고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무위로 끝나자, 하는 수 없이 다음해 2월 일본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진보침(陳寶琛)과 함께 몰래 푸이를 데리고 천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나진옥은 약 4년 동안 升允, 鐵良, 袁大化 등과 함께 폐제의 고문으로서 곁을 지켰다. 천진에 머물며 폐제를 도와 청나라 개건을 자신의 직무로 여기던 나진옥은 1928년에 고문의 직책을 사임하고 여순(旅順)으로 이사하였다. 여순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 나진옥은 일본 관동군의 도움으로 장군산 기슭의 후소조(扶桑町)에 사택과 대운서고를 짓고 그동안 다소 소홀했던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청나라 재건에도 마음을 기울여 만주의 유지들뿐만 아니라 일본 관동군 지휘부와도 왕래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곧이어 만주국이 건국되었거니와, 나진옥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봉천, 길림, 천진을 여러 차례 왕래하며 건국 사업에 진력하였다.
만주국 시기
1932년 3월 1일 창춘시(長春市)에서 푸이를 집정(執政)으로 한 만주국이 정식으로 출범하자, 나진옥은 집정 취임식에 참석하여 푸이를 대신해 외빈들에게 답사를 하였고 참의부(參議府) 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진옥은 참의를 사임하고 자문직에 머물다 얼마 후 임시진무독판(臨時賑務督辦)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6월 감찰원 원장에 취임하였다. 그즈음 나진옥은 일본의 內藤虎次郞, 水野梅曉 등과 함께 만일문화협회(滿日文化協會)를 조직하여 상임이사와 회장을 연이어 맡아, 청나라 역조황제실록(歷朝皇帝實錄)과 歷代刻絲刺繡美術品을 영인해 간행하였다. 그리고 1934년 만주국이 집정제에서 帝制로 바뀌어 부의가 황제로 등극할 때 나진옥은 대전주비위원회(大典籌備委員會) 위원으로 추대되었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만주국 감찰국장과 만일문화협회 이사 및 회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나진옥은 1937년 건강이 악화되어 공직을 사임하고 여순으로 퇴거하였다. 여순에 우거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전적과 기물을 정리하고 연구하던 나진옥은 1940년 5월에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주요 저서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藩閥誌存)
7세기 중엽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당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확립하였다. 그 과정에 수많은 백제와 고구려인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하여 당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양국의 왕족과 유력 가문 구성원들이 대거 당으로 사천되어 不歸의 혼이 되었는데, 『당대해동번벌지존』은 바로 중국에서 발견된 이들의 墓誌를 소개, 판독, 고증한 저술이다.
은허서계청화(殷墟書契菁華)
나진옥은 골동상인으로부터 1만점이 넘는 갑골을 구입하여 1913년 <은허서계전편(殷墟書契前編)> 20권을 간행했다. 이것은 그가 구입한 갑골 가운데 아름답고 학술적 가치도 높은 2000여점을 골라 탁본 인쇄한 것이다. 유악(劉鶚)의 <철운장귀(鐵雲藏龜)>가 단순히 탁본들을 나열해 놓은 것에 비해, 나진옥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갑골을 분류하고 정리하였다. 1914년 나진옥은 다시 <전편> 가운데 최상품 68점을 골라 사진제판이라는 당시 최고의 기술을 사용하여 <은허서계청화(殷墟書契菁華)>라는 탁본 인쇄본을 일본에서 간행하였다.
평가
나진옥은 청말 민국초에 활동한 저명한 금석학자이고 교감학자이며, 갑골학자이고 돈황학자이다. 그는 일생동안 340여 종의 저술을 남겼고, 640여 종 1,589권의 희귀서적을 간행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특히 그는 금석문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각종 금석문을 수집, 정리, 교감하여 다양한 금석문 관련 저술을 간행하였다. 그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1937년에 저술한 『唐代海東藩閥誌存』이다. 나진옥은 이 저술에서 泉男生과 扶餘隆을 비롯한 고구려와 백제 유민 7명의 묘지를 소개하고 고증하였거니와, 그의 정확한 판독과 치밀한 고증은 8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학문수준으로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이다.
중국 근대 역사학의 발전 과정에 많은 영향을 준내각대고당안은 청대 내각에서 생산한 공문서로 명청시대 중앙정부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내각대고당안은 청정부와 북양정부에서 제대로 보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왕조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인 1909년과 1921년에 소각되거나 판매되어 사라질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지만 나진옥(羅振玉)등의 노력으로 보존되었다.
참고자료
학술논문
권덕영 (2018). 羅振玉의 금석학과 『唐代海東藩閥誌存』. 한국고대사연구,(91), 273-300.
김지훈 (2016). 중화민국시기 근대 역사학과 공문서 정리. 역사와 세계, 49, 129-159
지관순. (2015). 新文化運動期 王國維의 現實認識과 指向. 중국근현대사연구, 67(), 113-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