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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는 제사를 뜻하는 [[示]]와 예도, 절, 인사 례(豊)로 구성된 글자이다. 豊의 윗부분은 [[玉]]이고, 아랫부분은 술이 달린 북([[鼓]])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북은 제사나 제의 등에서 신령을 경건하게 모시기 위해 사용되었고, 옥은 제사 등을 모실 때 쓰던 예옥(禮玉)을 의미한다. 석기시대 유적지에서 흙으로 만든 북을 비롯해서 대량의 옥이 출토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렇듯 豊은 옥과 북 등을 동원해서 경건하게 신을 모시던 행위를 일컫는 것으로부터 '예도'나 '절'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br> | 禮는 제사를 뜻하는 [[示]]와 예도, 절, 인사 례(豊)로 구성된 글자이다. 豊의 윗부분은 [[玉]]이고, 아랫부분은 술이 달린 북([[鼓]])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북은 제사나 제의 등에서 신령을 경건하게 모시기 위해 사용되었고, 옥은 제사 등을 모실 때 쓰던 예옥(禮玉)을 의미한다. 석기시대 유적지에서 흙으로 만든 북을 비롯해서 대량의 옥이 출토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렇듯 豊은 옥과 북 등을 동원해서 경건하게 신을 모시던 행위를 일컫는 것으로부터 '예도'나 '절'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br> | ||
− | 예자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조상의 위패를 의미하며 또 하나는 두 개의 옥기 꾸러미라고 생각되는 제물을 담은 그릇이다. 이 글자의 모습은 예가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라는 것을 알기쉬운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ref>우홍(巫鴻), 『순간과 영원-중국고대의 미술과 건축』, 아카넷, p.74</ref> | + | |
+ | 예자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조상의 위패를 의미하며 또 하나는 두 개의 옥기 꾸러미라고 생각되는 제물을 담은 그릇이다. 이 글자의 모습은 예가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라는 것을 알기쉬운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ref>우홍(巫鴻), 『순간과 영원-중국고대의 미술과 건축』, 아카넷, p.74</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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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자들은 아랫부분을 북이 아니라 그릇([[豆]])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릇이 제사에 사용되었던 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禮의 기본적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ref> 하영삼, 『문화로 읽는 한자』, 동방미디어, 1998, pp.154-155</ref> | 어떤 학자들은 아랫부분을 북이 아니라 그릇([[豆]])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릇이 제사에 사용되었던 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禮의 기본적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ref> 하영삼, 『문화로 읽는 한자』, 동방미디어, 1998, pp.154-155</ref> | ||
2021년 3월 30일 (화) 16:28 판
語源
禮는 제사를 뜻하는 示와 예도, 절, 인사 례(豊)로 구성된 글자이다. 豊의 윗부분은 玉이고, 아랫부분은 술이 달린 북(鼓)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북은 제사나 제의 등에서 신령을 경건하게 모시기 위해 사용되었고, 옥은 제사 등을 모실 때 쓰던 예옥(禮玉)을 의미한다. 석기시대 유적지에서 흙으로 만든 북을 비롯해서 대량의 옥이 출토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렇듯 豊은 옥과 북 등을 동원해서 경건하게 신을 모시던 행위를 일컫는 것으로부터 '예도'나 '절'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예자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조상의 위패를 의미하며 또 하나는 두 개의 옥기 꾸러미라고 생각되는 제물을 담은 그릇이다. 이 글자의 모습은 예가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라는 것을 알기쉬운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아랫부분을 북이 아니라 그릇(豆)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릇이 제사에 사용되었던 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禮의 기본적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2]
文化
禮는 인간이 신에게 제사 드릴 때 행하던 의식, 즉 제의(祭儀)에서 그 의미의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갖추어야 했던 예절이 이후에는 인간과 인간, 나아가서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등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덕목으로 확정되었으며, 이로부터 각종 제도나 규칙 등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다섯 가지 중요한 예는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등인데 이는 각각 제사, 장례, 열병, 손님 접대, 혼인 등에 관련된 예를 뜻한다.
또한 공자의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예(禮)이다. 공자는 사람이나 국가, 사회가 반드시 지켜야하는 법도로 禮를 설정했다. 유가사상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자, 예는 대단히 복잡다단한 예절 형식이나 제도를 규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이를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 국가 제도에 관한 예를 『주례』에, 개인의 생사나 결혼 등에 관한 예를 『의례』에, 예에 관한 의식이나 관념 등을 『예기』에 분리하여 규정해 두었다. 사실 우리의 인식 속에 남아있는 예절은 '번거롭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원래는 인간이 신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경건한' 마음가짐이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