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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5일 (일) 00:43 판
목차
개요
- 이 문서에서 다루는 것은 모든 몽골 울루스의 역사가 아닌, 중국과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칸 울루스, 대원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다. 칸 울루스와 대원 성립 이전의 역사는 예케 몽골 울루스 - 대몽골국 문서를 참조할 것
몽골인의 입장에서 본 대원 울루스
사회
문화
사회‧문화
쿠빌라이 칸과 원대 국제적 문화 교류
사회적 배경
- 쿠빌라이 칸은 금나라와 남송을 몰아내고 중원 대륙에 원나라를 세웠다. 연이어 그는 베트남‧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와 대만‧오키나와‧고려 등을 장악했다. 13세기 초에 건설된 몽골 제국은 이러한 쿠빌라이칸 시대에 접어들며, 건국 이후 70여년 만에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중국 역대 수많은 왕조가 수도로 택했던 중원지방을 차지하며 원대로 들어서자, 몽골 제국은 광대한 토지‧방대한 인구‧풍부한 물산으로 제국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드넓은 영토와 방대한 자원, 그리고 몽골제국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과 더불어 동‧서는 역사상 전례 없는 광역적인 교통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였고,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문물을 교류하고 융합하는 거대한 경제‧문화권이 조성되었다.
-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관리한 해답은 ‘역참제’이다. 몽골족은 제국의 교통을 위해 도로가 아니라 역참을 건설하였다. 몽골족은 칭기스 칸 시대 때부터 새로운 정복지가 생겨날 때마다 몇 킬로미터에 하나씩 역을 만들고 그 사이를 말들이 달리게 했는데, 이는 칸의 명령‧보고 사항들을 역에서 역으로 연결하여 신속하게 광활한 대지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몽골족은 기동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목민이었기에, 말을 활용하여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교통 네트워크를 창출‧운영했던 것이다. 몽골제국 당시 중국 안에 두어진 역참의 숫자는 1519개소에 이르렀고, 5만여 마리의 말‧노새, 9천여 마리의 소, 6천여 척의 배가 존재했다. 역참 네트워크는 황실의 정치‧재정을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일반인이나 상인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토대로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교통망을 확립하였고, 이는 분명 동‧서 교류의 밑받침이 되었다.
- 이러한 효율적인 영토 교통망뿐만 아니라, 제국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도 국제교류를 한층 촉진시켰다. 몽골 제국의 대규모 정복전으로 인해 수많은 민족과 문화가 뒤섞이게 되었는데, 몽골족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복속민족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속주의(本俗主義)를 기반으로 한 유연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특히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을 한화(漢化)시킨 인물이다. 그는 원나라를 건립하면서 중국 땅으로 수도(대도-지금의 베이징)를 옮기고 대운하 확장공사를 하는 등 중국식 전제 국가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행정 및 중앙 관제도 중국 전통을 많이 따랐다. 그런데 쿠빌라이 칸은 늘 성 밖에 겔을 치고 그 속에서 잠을 잤는데, 이는 유목과 농경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해 몽골 제국의 뿌리를 생산성이 뛰어난 농경지대로 옮기고, 그러면서도 농경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유목민의 정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서방에서 건너온 색목인들에게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중국 문화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한인 지식인들을 기용하여 그들의 견해를 경청했다. 즉, 단일한 민족과 문화를 고집하지 않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각자의 고유한 풍습과 문화를 보장하면서 제국의 통치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넓게 열어 준 것이다. 또한 쿠빌라이 칸은 1265년 파스파문자라는 공용 몽골어를 제정하긴 했지만, 서로 다른 수많은 언어가 존재했기에 광범위하게 통역‧번역사를 두었다. 이는 몽골의 다언어·다문화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또 한편으로 몽골 제국은 한족에 대한 보수적인 대항의식을 보였다. 원 지배하의 인민을 4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몽골족 1등급, 아랍이나 투르크 등 서방민족인 색목인이 2등급으로서 지배층을 형성했고, 옛 금조 치하의 유민은 3등급인 한인(漢人), 남송 치하의 유민은 4등급인 남인(南人)으로서 피지배층을 구성했다. 이러한 비교적 차등대우의 기준은 대외정복전쟁시의 협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 것인데, 정복왕조로서 원나라가 갖는 독특한 특성이었다. 또한 쿠빌라이 칸은 중국 사상을 공부하면서도 끝내 한문과 중국어를 배우지 않았고, 한인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를 끝내 실시하지 않았다.(원대 말기에 이르러, 과거제가 서서히 실시되었다.) 이 또한 정복왕조로서 원나라가 한인 관료들이 중앙정부를 장악하는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 이렇듯, 쿠빌라이 칸으로 대표되는 원나라(몽골제국)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던 진보세력과, ‘몽골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정복왕조의 특징을 보여주던 보수세력이 함께 공존하던 마치 현대국가와 같은 다이내믹한 사회였다. 이러한 역동적인 사회분위기가 원활한 국제적 교류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활발한 동서 국제 교류
- 이와 같이, 광활한 영토와 방대한 자원, 효율적 교통시스템, 그리고 다양성이 존재함과 동시에 진보‧보수 세력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역동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쿠빌라이 칸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국제적 문물 교류가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융성했다. 많은 유럽인과 아라비아인이 육로‧해로를 통해 중국에 찾아와 자신들의 학술과 종교를 전했다. 몽골족의 종교에 대한 관대한 태도 덕택에 서방의 종교,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였다. 이 중 원대 조정에서 가장 크게 세력을 떨친 것은 라마교이다. 당시 우수한 문화수준을 지니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은 천문과 역법 및 자연과학 방면에서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은 우수한 이슬람 문화를 종합하여 새로운 천문관측기, 역법, 지도, 대포 등 새로운 수준을 개척하였다. 희곡문화 등 예술적 발전도 물론 있었다. 또한 역으로 동방을 서방으로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여행기는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렸다는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이다. 또한 이븐 바투타와 같이 아랍 출신의 여행가도 중국을 방문했으며, 교황의 특사로 칸을 알현한 카르피니는 쿠릴타이에 참관하여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의 특산물 역시 교류되었는데, 도자기가 가장 유명해 당시 서방 세계로 많은 양이 수출되었으며, 중국의 4대 발명품 가운데 나침반‧화약‧인쇄술 역시 서방세계에 전해졌다. 이러한 활발한 교류와 더불어 원나라는 지폐를 발달시켜 전 제국에 걸쳐 강력하게 유통시켰는데, 이는 거대한 경제권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는 용맹한 몽골인 장군, 박식한 중국인 유학자, 티베트의 라마승, 이슬람 상인, 중앙아시아에서 온 천문학자, 유럽의 가톨릭 선교사 등으로 북적거리는 세계정부의 모습을 띠었으며, 이러한 ‘팍스 몽골리카(몽골족 지배 아래의 평화)’ 아래 정치‧경제‧문화‧종교 등 다방면을 아우르는 거대한 국제교류로 전 지구권이 소통할 수 있었고, 비약적인 인류발전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서양의 ‘대항해시대’의 길을 열어주었다.
원대의 문학
- 원대에는 과거제가 거의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한족 지식인들은 거의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리고 유생 역시 가장 천시 받는 존재였다. 결국 지식인들은 문학 창작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금나라에서 생기기 시작한 곡을 이어받아 새로운 문학으로 발전시킨다. 본래 중국의 전해지던 민간 가요에 가사를 섞어 부르는 설창 혹은 강창의 형식이 금대와 원대에 계속해서 발전했다. 마침내 원대 들어서 정립된 새로운 형식의 시인 산곡과 새로운 형식의 희곡인 잡극이 성행했다. 산곡과 잡극의 경우 음악적인 성격 면에서 유사하지만, 산곡은 서정적인 짧은 노래 중심이라면, 잡극은 여러 곡의 산곡이 모여 이루어진 투수로 일정한 이야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원곡의 대표적인 작가들은 대부분 대도를 중심으로 한 북방 사람들로써, 관한경, 백박, 마치원 등의 인물들이 있다.
인물
칭기스 일족의 주요 인물 계보도
- 칭기스 칸(太祖, 1206-1227)
- 우구데이 (太宗, 1229-1241)
- 구육 (定宗, 1246-1248)
- 뭉케 (憲宗, 1251-1259)
- 쿠빌라이 (世祖, 세첸 카안, 1260-1294)
- 티무르 (成宗, 울제이투 카안, 1294-1307)
- 카이샹 (武宗, 쿨룩 카안, 1307-1311)
- 아유르바르와다 (仁宗, 부얀투 카안, 1311-1320)
- 시데발라 (英宗, 게겐 카안, 1320-1323)
- 이순 티무르 (泰政帝, 1323-1328)
- 아라기박 (1328)
- 코실라 (明宗, 쿠툭투 카안, 1329)
- 툭 티무르 (文宗, 자야투 카안, 1328-1332)
- 이린지발 (寧宗, 1332)
- 토곤 티무르 (順帝, 우하투 카안, 1333-1370)
- 아유르시리다라 (1370-1378)
- 투쿠스 티무르 (1379-1388)
참고도서
-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토마스 바필드, 위태로운 변경,
-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궁리
-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 『몽골』, (주)엑셈
-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꿈엔들
- 박한제 외 3명,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사계절
- 김학주, 중국 문학사
- 데이비드 O.모건, 『몽골족의 역사』, 권용철 역, 모노그래프, 2012.
- 라시드 앗 딘, 『칸의 후예들』, 김호동 역, (주)사계절,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