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의 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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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원구지방(산동성)의 소금 밀매업자의 두령인 황소가 난을 일으켜 왕선지와 합류하였다. 왕선지와 황소는 하남성과 산동성 일대를 점령하였고 점점 그 기세가 높아갔다. 왕선지와 황소는 도중에 의견차이로 분열했는데 얼마 못 가 왕선지는 살해당하고 말았다. 왕선지가 황매(호북성)에서 관군에게 죽은 후 황소는 반란군의 충천대장군이 되었다. 허난 산둥 및 장시 푸젠 광둥 ·광시, 후난 ·후베이로 대이동을 전개하며 880년 60만 대군으로 불어난 황소의 군대는 뤄양에 이어 장안 등을 함락하였고 황제 희종은 쓰촨으로 달아났다. 희종이 망명한 뒤, 황소는 장안으로 들어가서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에게 항복한 군인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사실상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또한 황소군은 원래가 하층출신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치에는 문외한이라 여전히 무차별적인 약탈과 살육을 반복했다. 또 황소 자신도 당나라의 관리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등 악정을 펼쳤기에 민심은 점차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황소의 세력은 단지 장안 근교밖에 그 세력이 미치치 못하였으며, 결국 황소의 군대는 이극용에게 계속해 공격을 당해 장안을 버리고 후퇴했다. 그 후 황소는 몇 번이나 재기를 시도했지만 884년 5월에 왕만도(王滿渡)의 결전에서 패배하여 완전히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황소는 동시에 부하였던 상양(尙讓)의 배신으로 고향근처인 태산의 낭호곡(狼虎谷)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황소는 더 이상 자신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음을 한탄하면서 조카였던 임언(林言)에게 자신의 목을 쳐달라고 부탁하고 죽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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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2일 (일) 00:41 판
배경
당나라 말기 희종의 건부∼중화 연간에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 안사의 난이 평정된 이후 지방 절도사들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이들 번진의 세력이 늘어나고 중앙관리의 당쟁과 환관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조정의 지배력이 흔들리고, 백성에 대한 수탈도 강화되어 토호나 상인층도 당왕조에 심각한 불만을 품게되었다. 이런 상황은 저장의 구보의 반란과 쉬저우의 군인 방훈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건부연간에는 전국에 기근이 내습하여 사회적 불안은 절정에 달하였다. 당시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수입이었는데 재정이 악화되면서 소금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이에 반해 소금 밀매업자들은 싼 가격으로 팔아도 거액의 이익을 남겼으며 비싼 관부의 소금보다 저렴하여 민중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소금밀매가 성행하게 되었고 밀매를 위한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재정악화로 소금값을 조정이 대거 인상하면서 밀매업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자 이 사태에 복주지방(하남성)소금밀매업의 대상이던 왕선지는 874년 민중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각지의 소금 밀매업자들이 동참하여 대규모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당나라 조정은 이들을 염적(塩賊 - 소금도둑)으로 규정하고 토벌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경과
원구지방(산동성)의 소금 밀매업자의 두령인 황소가 난을 일으켜 왕선지와 합류하였다. 왕선지와 황소는 하남성과 산동성 일대를 점령하였고 점점 그 기세가 높아갔다. 왕선지와 황소는 도중에 의견차이로 분열했는데 얼마 못 가 왕선지는 살해당하고 말았다. 왕선지가 황매(호북성)에서 관군에게 죽은 후 황소는 반란군의 충천대장군이 되었다. 허난 산둥 및 장시 푸젠 광둥 ·광시, 후난 ·후베이로 대이동을 전개하며 880년 60만 대군으로 불어난 황소의 군대는 뤄양에 이어 장안 등을 함락하였고 황제 희종은 쓰촨으로 달아났다. 희종이 망명한 뒤, 황소는 장안으로 들어가서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에게 항복한 군인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사실상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또한 황소군은 원래가 하층출신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치에는 문외한이라 여전히 무차별적인 약탈과 살육을 반복했다. 또 황소 자신도 당나라의 관리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등 악정을 펼쳤기에 민심은 점차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황소의 세력은 단지 장안 근교밖에 그 세력이 미치치 못하였으며, 결국 황소의 군대는 이극용에게 계속해 공격을 당해 장안을 버리고 후퇴했다. 그 후 황소는 몇 번이나 재기를 시도했지만 884년 5월에 왕만도(王滿渡)의 결전에서 패배하여 완전히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황소는 동시에 부하였던 상양(尙讓)의 배신으로 고향근처인 태산의 낭호곡(狼虎谷)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황소는 더 이상 자신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음을 한탄하면서 조카였던 임언(林言)에게 자신의 목을 쳐달라고 부탁하고 죽었다.
결과
이 난으로 당나라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23년간 명맥만 유지하게 되며 실질적으로 당이 멸망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