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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민과 이건성은 왕권을 두고 서로 첨예하게 다투었는데 이건성은 이원길과 손을 잡고 이세민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세민이 이건성 자신과 세력이 비슷하여 장안 일대에 튼튼한 기반을 다져놓은 이건성으로서도 제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이세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건성과 원길은 갖은 방안을 다하는데, 예를 들면 군사를 움직일 기회만 있으면 무조건 이세민의 심복 부장들을 내보내서 이세민의 군력을 약화시켰다. 세민은 경사(京師)에서 나날이 압박 당하자 낙양에서 동방을 경영할 생각으로 626년에 장양(張亮)을 낙양에 보내 산동 호걸들과 손을 잡고 때를 기다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건성 등이 세민의 낙양 진출을 반대하여 뜻이 무산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세민은 최후의 수단으로 정변을 택하기에 이르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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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무문은 장안 태극궁성의 북문인데 그 곳은 궁정위군 사령부의 소재지로서 견고한 공사로 이루어졌고, 또 많은 병력이 집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곳을 차지하여 그의 병력을 잘 운용하면 궁성과 수도 전체를 쉽사리 장악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현무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세력은 수도를 지키고 있는 군사력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세민]]은 현무문의 지세를 이용하여 먼저 건성과 원길을 없애고 그 다음 이 곳의 수비군을 이용하여 동궁과 제왕부의 군대를 막는 데 성공했다. 이세민이 이렇게 쉽게 현무문을 점거할 수 있었던 것은 현무문의 주둔장군들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변 때 현무문의 장군들은 이미 세민에게 매수당했거나 세민의 일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 ||
+ | ==현무문의 변== | ||
+ | 626년 7월 1일에 세민은 고조에게 건성과 원길이 후궁에 들어가 음란한 짓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고조에게 전한다. 또한 이 두사람이 서로 해를 가하려 한다는 사정을 설명하자 고조는 이 일을 그 다음 날 처리하겠다고 회답하였다. 그 다음날인 7월 2일, 세민과 그의 처형인 장손무기(長孫無忌)와 그 부하 9명은 현무문 안에 매복하고 있다가 건성과 원길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이들을 습격하였다. 그날 원길은 건성에게 들어가지 말고 군대를 거느린 채 동정을 살피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건성은 대동한 군사들이 강하고 또한 현무문의 장수들이 모두 그의 옛 부하들이라 들어간다 하더라도 별일이 없으려니 생각하고 들어가기로 하였다. 두 사람이 현무문에 들어가 임호전(臨湖殿) 옆에 다달았을 때 비로소 변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세민이 뒤에서 습격하여 원길과 활로 싸우고 건성은 먼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를 바로 현무문의 변이라 이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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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가== | ||
+ | 현무문의 변은 실제로 세민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다. 이 정변의 과정으로 그의 뛰어난 용감성과 참을성을 알 수 있고 이로 인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나, 후세에는 좋지 못한 영향을 가져왔다. 당황실은 골육의 싸움이 없는 대가 없는 형편이므로 세민이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은 분명하다. 이후 당황실의 여러 차례의 정변 가운데에 그 성패는 여전히 현무문을 차지하느냐 잃느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 ||
+ | ==참고자료== | ||
+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 | ||
+ | [[분류:당나라| ]] |
2016년 6월 22일 (수) 16:10 기준 최신판
배경
이세민과 이건성은 왕권을 두고 서로 첨예하게 다투었는데 이건성은 이원길과 손을 잡고 이세민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세민이 이건성 자신과 세력이 비슷하여 장안 일대에 튼튼한 기반을 다져놓은 이건성으로서도 제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이세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건성과 원길은 갖은 방안을 다하는데, 예를 들면 군사를 움직일 기회만 있으면 무조건 이세민의 심복 부장들을 내보내서 이세민의 군력을 약화시켰다. 세민은 경사(京師)에서 나날이 압박 당하자 낙양에서 동방을 경영할 생각으로 626년에 장양(張亮)을 낙양에 보내 산동 호걸들과 손을 잡고 때를 기다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건성 등이 세민의 낙양 진출을 반대하여 뜻이 무산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세민은 최후의 수단으로 정변을 택하기에 이르렀다.
현무문
현무문은 장안 태극궁성의 북문인데 그 곳은 궁정위군 사령부의 소재지로서 견고한 공사로 이루어졌고, 또 많은 병력이 집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곳을 차지하여 그의 병력을 잘 운용하면 궁성과 수도 전체를 쉽사리 장악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현무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세력은 수도를 지키고 있는 군사력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세민은 현무문의 지세를 이용하여 먼저 건성과 원길을 없애고 그 다음 이 곳의 수비군을 이용하여 동궁과 제왕부의 군대를 막는 데 성공했다. 이세민이 이렇게 쉽게 현무문을 점거할 수 있었던 것은 현무문의 주둔장군들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변 때 현무문의 장군들은 이미 세민에게 매수당했거나 세민의 일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현무문의 변
626년 7월 1일에 세민은 고조에게 건성과 원길이 후궁에 들어가 음란한 짓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고조에게 전한다. 또한 이 두사람이 서로 해를 가하려 한다는 사정을 설명하자 고조는 이 일을 그 다음 날 처리하겠다고 회답하였다. 그 다음날인 7월 2일, 세민과 그의 처형인 장손무기(長孫無忌)와 그 부하 9명은 현무문 안에 매복하고 있다가 건성과 원길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이들을 습격하였다. 그날 원길은 건성에게 들어가지 말고 군대를 거느린 채 동정을 살피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건성은 대동한 군사들이 강하고 또한 현무문의 장수들이 모두 그의 옛 부하들이라 들어간다 하더라도 별일이 없으려니 생각하고 들어가기로 하였다. 두 사람이 현무문에 들어가 임호전(臨湖殿) 옆에 다달았을 때 비로소 변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세민이 뒤에서 습격하여 원길과 활로 싸우고 건성은 먼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를 바로 현무문의 변이라 이른다.
평가
현무문의 변은 실제로 세민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다. 이 정변의 과정으로 그의 뛰어난 용감성과 참을성을 알 수 있고 이로 인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나, 후세에는 좋지 못한 영향을 가져왔다. 당황실은 골육의 싸움이 없는 대가 없는 형편이므로 세민이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은 분명하다. 이후 당황실의 여러 차례의 정변 가운데에 그 성패는 여전히 현무문을 차지하느냐 잃느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참고자료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