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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장(票庄) 또는 회태장(汇兑庄)이라고도 불리며, 청나라 시기부터 전문적으로 | + | 표장(票庄) 또는 회태장(汇兑庄)이라고도 불리며, 청나라 시기부터 전문적으로 송금업무를 담당했던 금융기구이다. 표호를 처음으로 만든 곳이 산서(山西)성의 상인들이었다. 때문에 표호를 지칭할 때, 산서표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표호의 성장과 더불어 전장(錢莊) 또한 발달하였는데, 주로 환업무를 담당하였고, 표호와 비교했을때 규모면에서도 작았다. 현대의 은행과 비교하자면 표호는 각 주요도시에 위치한 자본금이 풍부한 은행이라 말할 수 있으며, 전장은 각 지역에서 표호의 자본을 통해 간단한 환 업무를 맡는 은행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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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풍부한 물자=== | ===비교적 풍부한 물자=== | ||
− | + | 건륭제 시기때, 산서지역에 부유한 자본가들이 수두룩하였다. 거대한 자본가와 상인들의 출현은 자본조달과 환 업무에 관한 서비스업이 필요로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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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상인의 상점은 전국각지에 분포했고, 이는 일정 규묘의 상업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각지에 있는 상점의 이익은 산서에 있는 본점으로 돌아오고, 계속 영업을 위해 분점으로 자본의 조달이 발생하였다. 과거에는 표행(镖行)이라는 기구가 안전하게 자본조달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건륭제 이후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표행은 자기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본조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표행이 했던 역할을 점차 표호가 맡기 시작하였다. | 산서상인의 상점은 전국각지에 분포했고, 이는 일정 규묘의 상업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각지에 있는 상점의 이익은 산서에 있는 본점으로 돌아오고, 계속 영업을 위해 분점으로 자본의 조달이 발생하였다. 과거에는 표행(镖行)이라는 기구가 안전하게 자본조달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건륭제 이후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표행은 자기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본조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표행이 했던 역할을 점차 표호가 맡기 시작하였다. | ||
+ | ==주요업무== | ||
+ | ===규모가 큰 예금과 대출=== | ||
+ | 표호는 개인과 거래를 하기보다는 큰 상점 또는 전장과의 예금, 대출활동을 통해 그들의 경영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아래는 1852년에 표호가 상점과 전장에 대출해주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 ||
+ | -郁丰号에 은 500냥을 월 7%에 빌려줌<br> | ||
+ | -丰兴典에 은 4000냥을 연 7%에 빌려줌<br> | ||
+ | -裕泰典에 은 1000냥을 월 6%에 빌려줌<br> | ||
+ | -德馨堂에 은 2000냥을 월 8%에 빌려줌<br> | ||
− | + | 이렇게 환업무를 주로 하는 전장과 산서표호는 일종의 상업적 관계였다. 초창기에 전장은 자본력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주로 표호에게 자금을 빌려왔다. 표호 또한 전장을 통해 각지의 공금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전장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표호와 전장의 성질, 조직 그리고 경영범위는 달랐지만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 |
− | == | + | ===구제 기금=== |
+ | -광서제 18년시기에 산서성에서 큰 가뭄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산서표호는 장수성에서 은 1만냥을 빌려와 산서성으로 보내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였다.<br> | ||
+ | -광서제 12년에 하북성에 있는 즈리(直隶)지역에 홍수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지역이 침수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산서표호는 광동에서 은 22209냥을 빌려와 재해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였다.<br> | ||
− | == | + | ===해군방어경비와 철로경비의 조달=== |
− | + | 동치제와 광서제 시기에 청 정부는 양무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군사력, 특히 해군의 힘을 키울 필요성을 느낀 정부는 이에 따라 군함을 구매하기 시작하였다. 철도건설 또한 양무운동의 중요 핵심사업 중 하나였으며, 이러한 거금이 필요한 상황 속에서 정부는 각 성에 있는 표호와 전장의 협력을 통하여 필요자금을 수혈하였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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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 ==영향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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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 ===경제위기=== | ||
− | + | 1870년대부터 서양물품 유입은 중국 물가를 낮추게 하였고, 여러 상점 관리자들의 부실한 경영이 겹쳐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이러한 상점들의 도산은 금융업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금융업에서 가장 중요한 신용이 더 이상 제 구실을 못하게 되자, 예금자들은 너도나도 표호나 전장에서 돈을 빼왔고, 이는 표호가 문을 닫아야만 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 |
===강력한 경쟁상대=== | ===강력한 경쟁상대=== | ||
+ | 청말시기에 여러 은행들이 성립되었다. 관영합작의 호조은행과 교통은행, 그리고 각 성에서 만든 거대한 은행들은 표호에 큰 위협이 되었다. 특히 호조은행은 산서표호의 핵심이었던 왕조와의 거래를 가져왔다. 게다가 호조은행은 산서표호보다 더 낮은 이자율을 고객들에게 제시하였기 때문에, 표호는 자연히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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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
+ | * 로이드E.이스트만,『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 돌베개, 1999.<br> | ||
+ | * 百度百科'票号[http://baike.baidu.com/link?url=qReeaETfQiTi_FPszyFD5qLUvEaljja9hpobLFu0v6tlQW_togANu2mkOQy5AxKOlP-oLCgsxRAMyK8aO6p8-_Z9q0OaFi2c63LsrlM_8kK]' | ||
+ | [[분류:중국의 역사]] | ||
+ | * 百度百科'山西票号[http://baike.baidu.com/link?url=FDMeE1g77gIDKsodjY_UiDRjOKwTNAx-GcbU_QGBh778SyY6ZtTai4Mm8MAx-hWQ#5]‘ |
2016년 6월 23일 (목) 22:56 기준 최신판
목차
표호와 전장
표장(票庄) 또는 회태장(汇兑庄)이라고도 불리며, 청나라 시기부터 전문적으로 송금업무를 담당했던 금융기구이다. 표호를 처음으로 만든 곳이 산서(山西)성의 상인들이었다. 때문에 표호를 지칭할 때, 산서표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표호의 성장과 더불어 전장(錢莊) 또한 발달하였는데, 주로 환업무를 담당하였고, 표호와 비교했을때 규모면에서도 작았다. 현대의 은행과 비교하자면 표호는 각 주요도시에 위치한 자본금이 풍부한 은행이라 말할 수 있으며, 전장은 각 지역에서 표호의 자본을 통해 간단한 환 업무를 맡는 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산서지역에서 표호가 만들어졌던 배경
비교적 풍부한 물자
건륭제 시기때, 산서지역에 부유한 자본가들이 수두룩하였다. 거대한 자본가와 상인들의 출현은 자본조달과 환 업무에 관한 서비스업이 필요로 했다.
자본의 운영활동 필요
산서상인들은 장거리 물건판매에 종사하는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들은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사회에서 돈을 끌어다 모았다. 예를 들면, 복건성의 무이차(武夷茶), 안휘성의 곽산차(霍山茶) 등의 상품을 수로를 거쳐 북쪽지역까지 운송판매를 맡았다. 수천 리나 되는 운송 거리와 엄청난 자본물량, 느린 자본회전속도, 엄청난 물건값 등의 상황에서 산서상인들은 상업의 효율성과 편리성을 위해 처음에는 장국(账局)을 설립하여 기본적인 예금업무를 관리하였다. 이는 나중에 표호의 토대가 되었다.
상점 간의 필요
산서상인의 상점은 전국각지에 분포했고, 이는 일정 규묘의 상업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각지에 있는 상점의 이익은 산서에 있는 본점으로 돌아오고, 계속 영업을 위해 분점으로 자본의 조달이 발생하였다. 과거에는 표행(镖行)이라는 기구가 안전하게 자본조달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건륭제 이후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표행은 자기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본조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표행이 했던 역할을 점차 표호가 맡기 시작하였다.
주요업무
규모가 큰 예금과 대출
표호는 개인과 거래를 하기보다는 큰 상점 또는 전장과의 예금, 대출활동을 통해 그들의 경영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아래는 1852년에 표호가 상점과 전장에 대출해주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郁丰号에 은 500냥을 월 7%에 빌려줌
-丰兴典에 은 4000냥을 연 7%에 빌려줌
-裕泰典에 은 1000냥을 월 6%에 빌려줌
-德馨堂에 은 2000냥을 월 8%에 빌려줌
이렇게 환업무를 주로 하는 전장과 산서표호는 일종의 상업적 관계였다. 초창기에 전장은 자본력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주로 표호에게 자금을 빌려왔다. 표호 또한 전장을 통해 각지의 공금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전장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표호와 전장의 성질, 조직 그리고 경영범위는 달랐지만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구제 기금
-광서제 18년시기에 산서성에서 큰 가뭄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산서표호는 장수성에서 은 1만냥을 빌려와 산서성으로 보내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였다.
-광서제 12년에 하북성에 있는 즈리(直隶)지역에 홍수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지역이 침수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산서표호는 광동에서 은 22209냥을 빌려와 재해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였다.
해군방어경비와 철로경비의 조달
동치제와 광서제 시기에 청 정부는 양무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군사력, 특히 해군의 힘을 키울 필요성을 느낀 정부는 이에 따라 군함을 구매하기 시작하였다. 철도건설 또한 양무운동의 중요 핵심사업 중 하나였으며, 이러한 거금이 필요한 상황 속에서 정부는 각 성에 있는 표호와 전장의 협력을 통하여 필요자금을 수혈하였다.
영향력
11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표호는 중국의 전통은행기구의 신용수준과 품질의 정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산서표호의 북경분점의 관리자였던 李宏龄는 "표호의 분점은 나라 곳곳에 분포에 있었으며, 표호의 명예는 중국상업의 번성함에서 드러났다"라고 말했다. 표호의 핵심이었던 신용제도는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익보다는 우정을 위해 대부한다”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신용을 최우선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호가 1890년대까지 중국 전체 금융의 반 이상을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다.
쇠퇴
경제위기
1870년대부터 서양물품 유입은 중국 물가를 낮추게 하였고, 여러 상점 관리자들의 부실한 경영이 겹쳐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이러한 상점들의 도산은 금융업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금융업에서 가장 중요한 신용이 더 이상 제 구실을 못하게 되자, 예금자들은 너도나도 표호나 전장에서 돈을 빼왔고, 이는 표호가 문을 닫아야만 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강력한 경쟁상대
청말시기에 여러 은행들이 성립되었다. 관영합작의 호조은행과 교통은행, 그리고 각 성에서 만든 거대한 은행들은 표호에 큰 위협이 되었다. 특히 호조은행은 산서표호의 핵심이었던 왕조와의 거래를 가져왔다. 게다가 호조은행은 산서표호보다 더 낮은 이자율을 고객들에게 제시하였기 때문에, 표호는 자연히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