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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대 영화=== | ===6세대 영화=== |
2016년 6월 24일 (금) 22:22 판
목차
커커시리(可可西里)
커커시리 자연보호구역(可可西里自然保护区)
커커시리는 몽골어로 "아름다운 여인"이란 뜻이다. 커커시리는 칭하이성 서남부 위수(玉樹)장족자치주에 속해 있는 국가급 자연 보호 구역이다. 이 지역의 면적은 4만 5,000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며 , 해발고도가 4,700여미터로 티베트 영양과 야크, 티베트 나귀 등 희귀동물이 사는 생태 구역으로 인간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다.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이지만 수많은 늪이 있어서 물을 저장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 물은 칭하이성의 저지대로 흘러들어 중국을 대표하는 장강과 황하의 발원지가 된다. 1954년에 칭하이성의 시닝과 티베트의 라싸를 잇는 "칭짱공로(靑藏公路)"가 개통되어 이곳을 지나가지만, 도로를 벗어나서 이 구역으로 진입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커커시리는 땅 위로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천지창조 이후 인간 최초의 발자국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최근 급속한 사막화의 영향으로 자고 나면 길이 없어지고 방향을 알 수 없게 되는 척박한 곳으로 변해버렸다. 영화 커커시리는 이곳에서 발생했던 티베트 영양 밀렵꾼들과 순찰대원 사이에 벌어졌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논픽션은 아니지만 다큐멘터리 기법을 사용해 촬영하고 있다.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를 줄곧 일정하게 유지함으로써 객관적인 시선을 학보하려 했다. 또한 인물에 대한 성격묘사가 극히 제한적이고 일반 영화의 서사법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은 묘한 긴장감과 불편함을 자아내는 주요 원인이다.
영화 커커시리
루추안 감독
루추안(陆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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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
1971년 2월 8일 신장위구르자치구 |
사망 |
? |
생존시기 | 현대 |
주요 작품 | 사라진 총, 커커시리 |
관련 활동 | 제 25회 홍콩금상영화제 아시아영화상, 제 41회 대만 금마장 작품상, 활영상 |
한족 6세대 영화 감독이다. 6세대라는 모호한 명명법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의 영화 대학 석사 졸업논문은 "제제 안의 작가 : 신 할리우드 배경 하의 코폴라 연구"이다. 프란시스포드 코폴라는 헐리우드 영화 체제 안에서 조화롭게 타협하면서 예술성과 상업성을 적절히 배합한 성공적인 창작자이다. 코폴라는 헐리우드 영화의 규범과 체제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조율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내었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중국 정부의 영화 산업에서의 제작과 통제방식은 단순히 시장 규율에 읳새 운행되지 않고 공산당과 정부의 검열을 통해서 조정된다. 당국의 검열을 통과한 영화만이 존폐의 위기를 면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적 과제나 요구에 직면할 때마다 정부의 지도방침을 각종 조례나 통지, 지도부의 강화를 통해서 영화 산업의 구체적인 실천 방향이 전해진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나 예술성과 거리가 있으며, 오락성이 적은 주선율 영화의 제작과 배급은 쉬운 반면, 반체제적인 사상이나 표현이 드러난 전위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촬영 자체가 어렵고 배급 역시 그러하다. 6세대 감독이 양상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다. 첫째, 주류시스템과 영화심사체제와는 거리가 있는 작가로서, 스스로 자금을 구하거나, 서구영화제에 입상함으로써 생기는 서구자본에 의해서 영화를 만드는 부류인데 대표적 작가로는 짱위엔과 지아장커를 들 수 있다. 둘째는 체제 안의 작가로서, 체제와 타협하면서 자신의 예술성을 조율하는 작가들로, 90년대 초의 후슈예양, 아니옌 등과 2000년 이후 활동한 루추안 자신이 있다. 세 번째는 상업적 영화를 추구하는 부류이다. 이들은 저예산 상업영화를 찍은 부류로, 짱양, 스룬지우 등이 있으며, 네 번째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의 '신기록영화(新纪录电影)'를 제작하는 부류로 우원꽝 등이 있다. 루추안 영화의 서사방식은 기존의 다른 6세대 감독들과는 매우 다른 면들을 보여준다. 루추안은 이전 6세대 감독들과 달리 처음부터 너무 사인화(私人化)된 언어나 전위적이거나 체제 밖에서의 영화 예술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체제를 존중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였다.
"만약 한 작가가 체제와 대화 가운데 자신의 예쑬 경향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고, 영화 창작 속에 표현할 수 있다면, 그는 체제 안의 작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체제 안의 작가'라는 것은 창작 과정 중에 체제(대중)에 대한 존중을 견지한 자로서, 체제 내에서 제공한 자원(영화 시스템)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동시에 시스템에 대한 존중을 작가의 자격으로 바꿀 수 있으며, 끊임없는 표현 가운데 문화적 명제들에 관하여 시종일관 관심을 질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체제란 다의적이다. 영화 산업 시스템(제작사 및 제작자 시스템, 스타 고용 등) 및 영화 생산, 발행, 방영 부분의 규범과 관례에 의한 것이며, 시나리오구조, 서사책략, 공간 및 인물처리 등에서의 규범을 말한다. <커커시리>에서는 제작자의 상업적 의도와 본인의 예술적 의도에서의 줄다리기에서 자신의 의면을 견지하였는데, 본래의 시나리오에서 과장된 민속적 요소와 지나친 감정적 서술을 배제하고 다큐멘터리 형식을 고집하였다. 산악 경비대 대장의 죽음이 결말도 본래 해피엔딩을 마무리된 시나리오와는 달라 심지어는 제작자들의 재촬영 요구가 있었으나 루추안은 끝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였고, 마지막 결말 부분의 자막에 있어서 약간의 수정 작업이 있었을 뿐이다. 루추안은 정부의 검열과 제작사 등과 부딪혀서 생산되는 문제들과 직접 부딪쳐서 대화하며 해결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체제 안의 작가'이며, 체제 안의 작가라 함은 자신의 고유한 '독창성'과 '예술성'을 잃지 않으면서 시장 시스템이나 국가권력과이ㅡ 조율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감독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줄거리
영화의 서술자인 가위는 베이징에서 커커시리 자연보호구역 순찰대의 상황을 취재하러 온 기자다. 그가 도착하고 평온한 한 발의 총성은 그를 순식간에 커커시리의 처절한 생존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티베트 영양 보호구역의 순찰대원이 밀렵꾼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자신의 부하를 잃은 순찰대장 르타이는 이번에는 반드시 밀렵꾼들을 소탕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커커시리 초원지대로 들어간다. 칠흑 같은 밤도 가족들의 걱정 어린 눈빛도 그를 만류하지 못한다. 그러나 밀렵꾼들의 총적은 찾을 길이 없고, 어렵게 발견한 것은 버려진 수많은 영양들의 시체뿐이다. 밀렵꾼들은 이미 밀렵을 마치고 그곳을 떠난 후이다.순찰대원들은 천신만고 끝에 고비 사막을 지나는 밀렵꾼들을 발견하고 격투 끝에 그들을 잡아 영양의 모피를 압수하는 데 성공하지만, 르타이는 밀렵꾼 우두머리를 끝가지 쫓기로 결심하고 대원들을 데리고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계속되는 험난한 날씨와 차량 고장, 연료 고장, 식량부족은 대원들을 하나씩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더 이상 버틸 자원이 없고 부상당한 대원들을 치료할 돈도 없는 르타이는 압수한 모피를 팔아 부족한 돈을 충당한다. 가위와 르타이는 밀렵꾼 우두머리의 거부함으로서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된다. 가위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르타이의 시체를 이끌고 마을로 돌아온다. 그 후, 베이징으로 돌아가 자신이 본 사건을 기사화하고 이 기사는 중국 인민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켜 마침내 커커시리는 국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는다.
실화
985년 이전 이 지역에서는 100만 마리 이상의 티베트 영양이 서식하고 있었지만 모피의 수가 증가하고 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밀렵이 성행해 현재는 2만 마리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1993년부터 주변 지역의 장족과 한족들이 자율적으로 티베트 영향 보호 순찰대를 조직해 반수렵활동을 펴왔으나 밀렵꾼들과의 끊이지 않는 충돌로 순찰대장을 비롯해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졔쌍 소난다졔(杰桑素南达杰)는 1994년 1월 이곳 커커시리에서 티베트 영양을 밀렵하는 밀렵꾼들을 막기 위해 활동하다가 밀렵꾼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다. 그는즈둬현(治多县)의 서기였는데 1992년 자발적으로 무장 보호대를 만들어 티베트 영양 보호에 앞장섰다. 이곳에는 원래 100만 마리나 되는 티베트 영양들이 살고 있었으나 밀렵꾼들 때문에 1990년대 들어서면서 겨우 1만 마리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중국 정부의 관리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밀렵꾼들은 모피를 얻기 위해 수많은 동물을 살해했다. 그것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소난다졔는 무장보호대를 결성해 커커시리를 지키기로 했고, 그때부터 밀렵꾼과 무장 보호대의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졌다. 그날도 소난다졔와 그의 동료들은 밀렵꾼들을 붙잡아 거얼무로 보내고 남자들을 데리고 오다 사고가 난 것이다. 영하 40도의 날씨에 그들을 그곳에 묶어 두면 얼어 죽게 되어 트럭에 태우고 돌아오던 중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사이 밀렵꾼들이 트럭을 장악하여 그들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소난다졔는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소난다졔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중국 정부가 나섰고, 여론이 형성되어 마침내 1997년 커커시리는 국가급 자연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커커시리에는 졔쌍 소난다졔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지나가는 방문객들이 이 기념비 앞에서 종종 묵념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평가
- 긍정적 평가 : 중국 사회는 <커커시리> 이후 명몽적으로만 이어져 오던 야생 동물 보호에 대한 조치를 넘어서, 티벳 영양 생태계를 보호하는 일에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는 영화적 영향력의 확산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커커시리>는 '소수민족'의 삶과 수려한 풍경이라는 지역적(local) 특수성과 영양의 보호라는 환경적 가치의 보편성을 결합하여,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성의 문제로 재가치화 했다. 이를 표상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사건의 탐구에 집요한 정신을 발휘하는 '기자' 형상의 창조와 다큐멘터리 기법의 활용, 그리고 재난영화와 추격영화의 장르적 특성까지 아우름으로써 대내외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6세대 영화
6세대는 1960년대생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 사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활동을 시작한 젊은 영화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1989년 천안문 운동을 직접 경험한 세대로 상업주의 문화, 탈이념화, 탈정치화 조류 속에서 개인의 생존 체험과 불안정한 심리 상황에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제도권 밖에서 작업하는 '지하영화' 혹은 5세대에 맞서는 6세대 감독으로 불렸다 이후 상당수가 제도권으로 편입되었고, 최근에는 '포스트 천안문 세대' 혹은 '신생대(新生代)'라고 불린다.대표적 감독으로는 장위엔(張元), 왕샤오솨이(王小帥), 로우예(婁燁), 루쉬에창(路學長), 지아장커(賈樟柯)등이 있다.<커커시리>는 6세대 한족 루추안 감독의 영화이다. 영화 <커커시리>에도 곳곳에 6세대 영화로서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롱테이크 기법의 사용
롱테이크(long take) 기법이라는 것은, 하나의 쇼트를 길게 촬영하는 것이다. 롱 테이크는 하나의 쇼트를 길게 촬영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쇼트는 10초 내외인데 비해 1~2분 이상의 쇼트가 편집 없이 진행되는 것을 롱 테이크라고 한다.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이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의 방식을 보여주는 기법이며, 끊지 않고 긴 호흡으로 사실감 있게 표현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보여주는 영화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법으로 촬영하는 것이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6세대 감독들의 구호인 "나의 카메라는 거짓말하지 않는다.(我的摄影机不敢慌)"이라는 구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커커시리>역시 이러한 기법을 채택하여 수비대들이 밀렵꾼들을 쫓는 일상적인 생활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장면들의 배제
흔히 전통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5세대 감독들이 "어떻게 하면 타인들이 중국을 아름답게 볼 것인가"라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면, 6세대 감독들은 그들이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추함과 지저분함이 진실을 반영할 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환기시킬 수 있다고 본다. 즉, 이들은 "아름다운 것이 진실(以美为真)"이 아니라 "진실이 아름다운 것(以真为美)"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혹자는 6세대 감독들을 가리켜 "중국을 아름답지 않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커커시리>에는 전통적인 자연 배경들이 곳곳에 배경으로 존재하지만 이는 커커시리의 천헤의 자연이 수비대들의 일상 속에서 자연히 드러난 것일 뿐 영화 속에는 고의적으로 아름다운 사실이나 장면을 배치하지는 않았다.
감성적인 서사의 거부
6세대 영화에는 5세대 영화처럼 감동적인 드라마나 감성에 호소하는 장면들이 없다. 6세대 감독들은 스토리를 약화시키거나 고의로 은폐함으로써 관중을 영화의 중심에 서게 하고, 이를 통해 관중들이 영화의 창조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할리우드 영화는 사람들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함꼐 꿈을 꾸게 만듦으로써 현실로부터 관중들을 멀어지게 만드는 데에 비해, 6세대 감독들은 '지루함'과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관중들이 느끼게 함으로써 현실, 환상이 아닌 진실에 가까이 가도록 한다. <커커시리> 속에는 그저 이러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수비대원들의 일상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티베트 영양(藏羚羊)
티베트 영양은 매년 12월에 교배해 다음해 5월 말에서 6월 초에 새끼를 낳기 위해 줘나이후(卓乃湖)로 떠나 새끼를 낳는다.영화 속에도 등장한 이 호수는 커커시리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이다. 이곳에는 7월이 되면 약 2만여마리이 영양이 모여 새끼를 낳기 때문이다. 새끼를 데리고 원래 서식지로 돌아와 수컷과 합류한다. 티베트 영양은 출산을 위해 평균 약 600km의 거리를 이동한다 영양의 모피는 그 값이 매우 비싸서 밀렵꾼들에 의해 매우 고가에 거래된다. 처음에는 100만여마리에 육박하던 영양이 불과 몇 년 사이 1만여마리로 줄어든다. 이 영양을 지키기 위해서 원주민들과 근처에 거주하는 한족인들이 자발적으로 수비대를 조직하여 보호하고자 한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영양을 보호하던 수비대 역시 이 모피를 파는 이중적인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칭하이성에 위치한 커커시리 원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수비대원들은 대부분 남성 원주민으로 이루어져 있고 장정들임에도 불구하고 교육 수준이 낮으며 변변한 직업도 없다. 잠깐 마을에서 나타난 여자 역시도 외부의 관광객들을 접대하는 유흥업에 종사한다. 이는 티벳 원주민들의 낮은 교육 수준과 불법적인 모피 매매가 아니면 수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해 준다.
이러한 영양을 보호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양은 티베트인들의 고유한 존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티베트 사회의 외부의 가치관들이 계속 유입되고 외부의 힘에 의해 사회가 재단되는 현실에서, 티베트 영양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한 존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소수 민족 문제
소수 민족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소수 민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민족지적 관점이고 그들의 독립을 지지해야 한다는 민족적 관점이며 평등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민중적 관점이다.
티벳의 독립
현재 티베트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존재한다. 민중적 관점과 민족적 관점이다. 민족적 관점에서는 독립을 중요시한다. 역사적으로 티벳을 바라보는 문제에 있어서는 ‘민족적 관점’이 대세였다. 역사 내에서 티벳과 중국의 관계는 서로 다른 민족성이 얽힌 관계이며 민족이 중국과의 역사 속에서 어떠한 지위를 차지했는지를 중심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으로부터 티벳이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와달리 민중적 관점이라는 것은 티벳 문제를 계급투쟁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티벳은 중국 정부가 시행한 '라싸 사건'을 거치며 50, 60년대에 사회주의 사회로 거듭났다. 계급투쟁이 강조되었고 사회주의 아래에서 어떤 민족이건 간에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정치적 주체성이 형성되었다. 59년에 실시된 티벳 봉기의 반란 진압을 통해,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급 정치를 중심으로 농노제도를 철저히 뿌리 뽑았으며 이 때 사회주의 아래에서 모두 평등한 인민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었다. 80년대 개혁 개방 이후로는 인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한 사회라는 이상이 희석된다. 시장화 개혁은 중국 대륙 뿐만 아니라 티벳 사회 내에서도 경제와 시장화의 도입을 불러왔으며 동시에 사회주의 시기의 가치 체계를 훼손을 촉발했다. 이러한 세속화 과정은 종교 확장에 토대를 제공했다. 시장화 과정이 공민의 거리를 넓힘에 따라 사회 각 영역에 침투할 가능성을 제공했다. 라마교는 점차 티베트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주된 근거가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두 과정은 보편 신분을 창조하던 사회주의 시기 정치의 퇴화와 실패에 수반한 것임이 분명하다. 50,60년대 개혁이 대다수 티베트인에게 이점이었던 것과 달리, 80년대 이후의 발전은 경제성장을 촉진함과 동시에 티베트 지역의 도시와 농촌, 중심과 주변 지역, 서로 다른 계층, 티베트와 내지의 격차를 더욱 벌렸음. 국가가 티베트 지역에 경제적 지원을 했으나, 티베트 입장에서는 이 투자 과정도 한족 선진지역이 티베트에 침투하고 조정하는 과정이었음. 계속되는 시위는 정치적 투쟁이라기보다 사회적 보복 형식의 폭발이고, 이런 조건에서는 모든 영역의 위기가 민족의 문제로 바뀔 수 있다. 티베트 사회는 티벳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민중’들이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중국의 보편적인 위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