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운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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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공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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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과도기의 총 노선]]의 실현을 목표로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공업화 경험이 부족한 농업국가였고,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소련에 기대어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소련식 모델은 관료주의 문제를 수반했다. 인민을 대표해야 하는 당원들이 특권의식을 내세우는 엘리트 계층을 형성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지식인과 민주당파를 이용해 당내 관료들을 비판하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을 주도한다. 처음에는 관료층이 특권화되는 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시정하게 만들어 당 내의 단결을 의도했지만, 비판이 점점 폭력성을 띠게 되고 당 내부의 갈등 또한 심해지자 이에 다시 [[반우파투쟁]]을 통해 당 내부 우경주의자들을 숙청하였다. 반우파투쟁을 통하여 중국공산당의 독재 및 당 내부에서의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절대적 권력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에 도전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
: 1953년 [[과도기의 총 노선]]의 실현을 목표로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공업화 경험이 부족한 농업국가였고,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소련에 기대어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소련식 모델은 관료주의 문제를 수반했다. 인민을 대표해야 하는 당원들이 특권의식을 내세우는 엘리트 계층을 형성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지식인과 민주당파를 이용해 당내 관료들을 비판하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비판이 점점 폭력성을 띠게 되자 다시 [[반우파투쟁]]을 통해 우파 세력을 탄압하였고, 마오쩌둥은 이 과정에서 획득한 절대적 권력을 기반으로 대약진운동을 주도하였다.
 
 
 
====연속혁명 사상====
 
: 제1차 5개년계획 공업화의 결과로 경제적인 발전에는 성공했으나 사회적 불평등, 도농격차, 이데올로기의 쇠퇴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도시의 공업화를 통해 경제적 낙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 건설과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다음 단계의 혁명으로 중단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58년 1월 28일 최고국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의 사상적 기원이 되는 [[연속혁명론]]을 제창하면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혁명인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소련식 모델 포기====
 
====소련식 모델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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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스탈린 사후, 중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중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력갱생 노선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한 소련식 발전모델은 농촌과 농민을 착취하는 모델이었다. 빠른 공업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집단화된 농민들에게서 뽑아내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러시아보다 훨씬 더 열악한 경제적 위치에 있었으며, 중국의 농민 역시 더 힘든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이 소련 모델을 계속 추구하려면 더 억압적이고 더 착취적인 농업정책이 필요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소련 모델을 포기하고, 농공업이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 1953년 스탈린 사후, 중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중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력갱생 노선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한 소련식 발전모델은 농촌과 농민을 착취하는 모델이었다. 빠른 공업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집단화된 농민들에게서 뽑아내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러시아보다 훨씬 더 열악한 경제적 위치에 있었으며, 중국의 농민 역시 더 힘든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이 소련 모델을 계속 추구하려면 더 억압적이고 더 착취적인 농업정책이 필요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소련 모델을 포기하고, 농공업이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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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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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5개년계획 공업화의 결과로 경제적인 발전에는 성공했으나 사회적 불평등, 도농격차, 이데올로기의 쇠퇴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도시의 공업화를 통해 경제적 낙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 건설과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8년 1월 28일 최고국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의 사상적 기원이 되는 [[연속혁명론]]을 제창하면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혁명인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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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혁명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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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1958년 1월 28일 최고국무회의에서 행한 비공개연설에서 처음 언급한 사상으로서, 모든 혁명과정은 공산주의가 실현될 때까지 끝없는 사회적 모순과 투쟁의 연속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사회적 모순과 투쟁은 기존의 현실을 혁명적으로 타파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급속한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급진적으로 진행해야만 잠재하는 대중의 생산능력을 완전히 발휘시킬 수 있고, 자본주의로의 후퇴 위험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발전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혁명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관계, 정치형태, 사상의식과 같은 상부구조의 변화가 가능한 한 빨리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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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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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인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되어 중국을 이상적인 나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견해의 전제에는 이런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인간의 의식과 의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올바른 생각과 도덕적 가치에 의해 일어선 인민은 혁명 이후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따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공산주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객관적인 경제적 조건들이 중국에 결여되어 있지만, 올바른 혁명정신과 의지, 지도자로 무장된 인민을 동원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을 인민이 가진 사회주의를 향한 열정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사람은 기계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슬로건은 정신적으로 개조된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마오주의적 세계관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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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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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혁명’사상이 담고 있는 중요한 점은 혁명적 창조력의 근원은 농촌에 있다는 인민주의적 신념이었다. 1958년에도 ‘인민’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농민대중으로 정의되고 있었다. 혁명 이후 사회경제적 발전에 대한 마오쩌둥의 전략은 강력하게 농업 지향적이었으며, 진보와 쇄신의 원천으로서 농촌에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혁명정신을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은 도시주민이 아니라 ‘선진적인 농민’에게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임무는 농촌의 인민공사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대약진운동 기간 농촌의 인민공사는 소련식 발전으로 인해 생겨난 도시와 농촌, 농민과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없애는 매개체로 비쳐지며 대약진운동의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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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성우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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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다른 모든 특징을 차치하고 6억의 중국인은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가난하고, 둘째 그들은 백지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좋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하기 원하며, 혁명을 원한다. 얼룩이 없는 깨끗한 백지에는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글자가 쓰일 수 있으며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ref>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 p.282.</ref>|1958년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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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서 후진성의 이점을 칭송하는 경향은 1958년 4월 마오쩌둥이 주장하기 시작한 ‘빈곤과 백지’ 개념에 정식화되어 나타났다. 마오쩌둥은 빈곤과 백지상태라는 중국의 독특한 혁명적 미덕을 선포하면서 산업화 이전 단계에 있는 중국이 보편적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미래로 향한 길을 개척하고 있다고 보았다. 중국인민이 빈곤과 백지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향한 연속혁명을 필요로 하며, 공동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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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이 전반적으로 빈곤과 백지상태에 있다고 했을 때, 이 두 가지 미덕은 농민과 청년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농민이었으며, 가장 백지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청년이었다. 가난한 농민이 혁명을 원했다면, 청년은 새로운 사상과 학파를 받아들여 이데올로기와 정신을 올바르게 전환시키는 데 빨랐다. 마오쩌둥은 후진성의 이점을 찬양하며 특권층이 된 관료나 교조주의자들을 대신하여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내용==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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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8회 전국대회 제 2회 회의에서 급진적인 사회주의화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건설의 총 노선'이 채택되면서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ref>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임상범 역, 서울: 일조각, 2016, p.69.</ref>
 
===목적===
 
===목적===
 
소련식 공업화가 초래한 도농불균형 현상과 도시의 실업, 농촌의 불완전고용 문제 등의 사회∙경제문제를 새로운 경제전략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새로운 경제전략이란 바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던 농민대중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철강, 화학, 기계제조 같은 자본집중적 공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 발전하는 것이 대약진 운동의 목표였다.
 
소련식 공업화가 초래한 도농불균형 현상과 도시의 실업, 농촌의 불완전고용 문제 등의 사회∙경제문제를 새로운 경제전략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새로운 경제전략이란 바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던 농민대중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철강, 화학, 기계제조 같은 자본집중적 공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 발전하는 것이 대약진 운동의 목표였다.
  
[[파일:토법로.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center><big>'''전국 각지에 설치된 토법로'''</big></center>]]
 
 
===전개===
 
===전개===
 
====경제====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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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운동 시기동안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많은 권력을 넘겨주었다. 지방정부는 중앙으로부터 일부 기업에 대한 계획 관리권과 기본건설항목 심사권, 재정세수 관리권, 노동관리권 등을 이양받았고 전체기업이윤의 20%를 소유하게 되었다.
 
대약진운동 시기동안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많은 권력을 넘겨주었다. 지방정부는 중앙으로부터 일부 기업에 대한 계획 관리권과 기본건설항목 심사권, 재정세수 관리권, 노동관리권 등을 이양받았고 전체기업이윤의 20%를 소유하게 되었다.
 
*'''철강증산운동'''<br>
 
*'''철강증산운동'''<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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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토법로.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center><big>'''전국 각지에 설치된 토법로'''</big></center>]]
 
1957년 중국의 철 생산량은 534만 톤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시기에 생산량의 두 배를 증산하여 1,070만 톤을 생산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도시∙농촌 전 지역에 약 60만 개의 토법로가 설치되었으며 9,000만여 명이 철을 제련했다. 집집마다 철제 솥이나 철문을 녹였으며, 아이들은 폐철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또한 토법로를 가동하기 위해 엄청난 벌목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산림이 파괴되었다.  
 
1957년 중국의 철 생산량은 534만 톤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시기에 생산량의 두 배를 증산하여 1,070만 톤을 생산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도시∙농촌 전 지역에 약 60만 개의 토법로가 설치되었으며 9,000만여 명이 철을 제련했다. 집집마다 철제 솥이나 철문을 녹였으며, 아이들은 폐철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또한 토법로를 가동하기 위해 엄청난 벌목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산림이 파괴되었다.  
 
*'''수리건설운동'''<br>[[파일:renmingongshe.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center><big>'''인민공사'''</big></center>]]
 
*'''수리건설운동'''<br>[[파일:renmingongshe.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center><big>'''인민공사'''</big></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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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
 
*'''인민공사화운동'''<br>[[파일:maque.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center><big>'''참새 잡기 운동'''</big></center>]]
 
*'''인민공사화운동'''<br>[[파일:maque.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center><big>'''참새 잡기 운동'''</big></center>]]
1958년 8월 마오쩌둥이 허난성에서 시행되고 있던 [[인민공사]]를 시찰하고 난 뒤, 베이따이허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인민공사 설립을 결의하여 전국적으로 인민공사화가 진행되었다. 인민공사는 기존의 농업합작사를 더 큰 규모로 개조시킨 것이다. 인민공사는 하나의 말단 지방정부와 같이 농공업∙교육∙사회복지∙공공사업∙군사방위 다양한 기능을 인민공사 내에서 수행하였다. 농민들의 토지, 가축, 가옥, 농기구 그리고 합작사에 대한 지분까지 모두 공동소유가 되었고, 농민들은 의식주와 더불어 의료와 교육을 보상 받았다. 1959년 봄까지 26.000개의 인민공사가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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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8월 마오쩌둥이 허난성에서 시행되고 있던 [[인민공사]]를 시찰한 뒤, "인민공사는 대단하다(人民公社好)"라고 말한 것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8월 말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베이따이허 회의)에서 「인민공사 건설의 결의」가 채택되면서 전국적으로 인민공사화가 진행되었다.<ref>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임상범 역, 서울: 일조각, 2016, p.71.</ref> 인민공사는 기존의 농업합작사를 더 큰 규모로 개조시킨 것이다. 하나의 말단 지방정부처럼 농공업∙교육∙사회복지∙공공사업∙군사방위 등의 다양한 기능을 인민공사 내에서 수행하였으며, 중국에서는 이를 공산주의의 기층 단위로 간주하였다. 농민들의 토지, 가축, 가옥, 농기구 그리고 합작사에 대한 지분까지 모두 공동소유가 되었고, 농민들은 의식주와 더불어 의료와 교육을 보장 받았다. 1959년 봄까지 26.000개의 인민공사가 건설되었다.
 
*'''참새잡기운동'''
 
*'''참새잡기운동'''
마오쩌둥은 1957년 10월 1차 회의에서 중국의 토지에서 파리, 모리, 쥐, 참새를 네 가지 해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국민 참새 잡기 날이 생기고, 300만명이 동원되어 하루에 8만 3,000마리를 소탕했다. 조류학자와 동물학자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고, 마오쩌둥도 결국 명령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이미 1960년에 이르렀고, 참새가 사라진 대신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 농촌이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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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1957년 10월 1차 회의에서 파리, 모기, 쥐, 참새를 네 가지 해악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토지에서 이를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국민 참새 잡기 날이 지정되었고, 300만명이 동원되어 하루에 8만 3,000마리를 소탕했다. 조류학자와 동물학자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고, 마오쩌둥도 결국 명령을 취소하고 외국에서 참새를 수입하였다. 그러나 이미 1960년에 이르렀고, 참새가 사라진 자리에는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 농촌이 큰 피해를 입었다.
  
 
====교육====
 
====교육====
 
*'''농촌교육제도'''<br>
 
*'''농촌교육제도'''<br>
농촌의 새로운 교육정책은 농촌공업화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교육정책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교육과 생산의 결합’이 주요 원칙이었다. 인민공사화와 함께 지방에서 관리하는 시간제 교육시설을 설립하고자 했으며, 일하면서 배우기(半工半讀)계획이 실시되었다. 교육의 목적은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기술지식과 문자해독능력을 가르쳐서, 지방의 농촌 공업기업을 운영하도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장래 근대적인 농업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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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새로운 교육정책은 농촌공업화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교육정책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교육과 생산의 결합’이 주요 원칙이었다. 인민공사화와 함께 지방에서 관리하는 시간제 교육시설을 설립하고자 했으며, 일하면서 배우기(半工半讀)계획이 실시되었다. 교육의 목적은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기술지식과 문자해독능력을 가르쳐서, 지방의 농촌 공업기업을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장래 근대적인 농업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계와 결과===
 
===한계와 결과===
철강증산운동이나 수리건설운동에 노동력이 투입되면서 농업 생산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식량생산량이 목표액에 미치지 못했다. 성급하게 퍼져나간 인민공사화운동 역시 1958년 늦가을이 되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복잡한 재정업무나 새로운 형태의 생활∙노동방식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만한 숙련된 인력이 부족했다. 또한 공동시설의 비효율적 운영, 경제적 평등화, 수단의 공유화 등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이는 생산의욕의 저하로 이어져 농업생산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동안 연속 재해까지 겹쳐 수천 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중국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과 대중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마오쩌둥은 스스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책임지고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다. 국가 주석직을 물려받은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조정정책]]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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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운동은 인간의 정신력과 집단의 힘에 의지하여 대규모 수리, 관개공사 등 이제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많은 건설사업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각각의 객관적 조건과 역량 및 상호간의 균형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진행 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곧 심각한 왜곡 현상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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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증산운동으로 증산 목표는 달성했지만, 비전문적인 제조 기술 때문에 총량의 30%에 가까운 300만 톤은 조악해서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철강증산운동과 수리, 관개 건설운동에 노동력이 투입되면서 농업생산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였고, 식량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 성급하게 퍼져나간 인민공사화운동 역시 1958년 늦가을이 되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더구나 인민공사에서는 “일하든 일하지 않든 똑같다(一平二調)”라는 왜곡된 평등주의와 위로부터 이루어진 명령주의와 조달주의 때문에 농민의 생산 의욕이 대폭 저하되는 현상이 확산되었다. 또한 ‘자유롭게 식사하는’ 공공식당과 같은 ‘공산풍(共産風)’ 때문에 식량과 자재를 낭비하는 현상도 발생하였다.<ref>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임상범 역, 서울: 일조각, 2016, p.72.</ref> 게다가 1960년 4월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양국의 적대감이 커졌다. 1960년 여름 소련이 중국기업체에서 일하고 있던 1,400명의 소련 과학자와 공업전문가들을 갑자기 소환하며 기술원조가 중단되자 중국경제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농업생산량이 떨어지는 와중에 1959년부터 이어져오던 자연재해까지 겹쳐 수천 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중국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대중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마오쩌둥은 스스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책임지고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으며, 국가 주석직을 물려받은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조정정책]]을 실시한다.
  
 
==평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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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산 회의]]의 공식성명===
 
===[[루산 회의]]의 공식성명===
1959년 8월 26일 장시성 루산(慮山)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회의에서는 공식적으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했다. 1958년의 생산증가가 잘못된 계산으로 인해 과장된 결과임을 인정하고, 3억 7,500만 톤으로 기록되어있던 곡물생산량을 2억 5천만 톤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그러나 인민공사가 유명무실화 된 것은 성과는 과소평가하고, 실패만을 과장한 우경기회주의자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대약진운동의 부활을 결의하였다. <ref>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 p.32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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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8월 26일 장시성 루산(慮山)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했다. 1958년의 생산 증가가 잘못된 계산으로 인해 과장된 결과임을 인정하고, 3억 7,500만 톤으로 기록되어있던 곡물생산량을 2억 5천만 톤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그러나 인민공사가 유명무실화 된 것은 성과는 과소평가하고 실패만을 과장한 우경기회주의자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대약진운동의 부활을 결의하였다. <ref>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 p.325.</ref>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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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br>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br>
 
#첸리쥔,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 연광석 역, 파주: 한울, 2012.<br>
 
#첸리쥔,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 연광석 역, 파주: 한울, 2012.<br>
 
+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임상범 역, 서울: 일조각, 2016.<br>
  
 
[[분류:사회]] [[분류:중국의 역사]]
 
[[분류:사회]] [[분류:중국의 역사]]

2018년 6월 22일 (금) 13:56 기준 최신판

개요

대약진운동은 1958~1960년 마오쩌둥이 소련식 공업화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한 생산력 증대 운동이다.

시대적 배경

Dayuejin.jpg
연도 사건
1953-1957 제1차 5개년계획
1953.3.5 스탈린 사망
1956-1960 중소분쟁
1956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
1957 반우파투쟁
1958-1960 대약진운동
1953년 과도기의 총 노선의 실현을 목표로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공업화 경험이 부족한 농업국가였고,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소련에 기대어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소련식 모델은 관료주의 문제를 수반했다. 인민을 대표해야 하는 당원들이 특권의식을 내세우는 엘리트 계층을 형성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지식인과 민주당파를 이용해 당내 관료들을 비판하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을 주도한다. 처음에는 관료층이 특권화되는 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시정하게 만들어 당 내의 단결을 의도했지만, 비판이 점점 폭력성을 띠게 되고 당 내부의 갈등 또한 심해지자 이에 다시 반우파투쟁을 통해 당 내부 우경주의자들을 숙청하였다. 반우파투쟁을 통하여 중국공산당의 독재 및 당 내부에서의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절대적 권력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에 도전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

소련식 모델 포기

자력갱생을 위주로 하고, 외국원조를 부차적인 것으로 얻어내며, 미신을 타파하고, 독립자주적으로 공업과 농업 그리고 기술혁명과 문화혁명을 하며, 노예사상을 타도하고, 교조주의를 매장하며, 진지하게 외국의 좋은 경험을 학습하고, 반드시 외국의 나쁜 경험을 연구하여 조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노선이다.[1]

 
— 1958년 마오쩌둥
1953년 스탈린 사후, 중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중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력갱생 노선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한 소련식 발전모델은 농촌과 농민을 착취하는 모델이었다. 빠른 공업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집단화된 농민들에게서 뽑아내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러시아보다 훨씬 더 열악한 경제적 위치에 있었으며, 중국의 농민 역시 더 힘든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이 소련 모델을 계속 추구하려면 더 억압적이고 더 착취적인 농업정책이 필요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소련 모델을 포기하고, 농공업이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사상적 배경

제1차 5개년계획 공업화의 결과로 경제적인 발전에는 성공했으나 사회적 불평등, 도농격차, 이데올로기의 쇠퇴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도시의 공업화를 통해 경제적 낙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 건설과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8년 1월 28일 최고국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의 사상적 기원이 되는 연속혁명론을 제창하면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혁명인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연속혁명 사상

마오쩌둥이 1958년 1월 28일 최고국무회의에서 행한 비공개연설에서 처음 언급한 사상으로서, 모든 혁명과정은 공산주의가 실현될 때까지 끝없는 사회적 모순과 투쟁의 연속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사회적 모순과 투쟁은 기존의 현실을 혁명적으로 타파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급속한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급진적으로 진행해야만 잠재하는 대중의 생산능력을 완전히 발휘시킬 수 있고, 자본주의로의 후퇴 위험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발전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혁명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관계, 정치형태, 사상의식과 같은 상부구조의 변화가 가능한 한 빨리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의주의

혁명적인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되어 중국을 이상적인 나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견해의 전제에는 이런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인간의 의식과 의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올바른 생각과 도덕적 가치에 의해 일어선 인민은 혁명 이후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따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공산주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객관적인 경제적 조건들이 중국에 결여되어 있지만, 올바른 혁명정신과 의지, 지도자로 무장된 인민을 동원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을 인민이 가진 사회주의를 향한 열정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사람은 기계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슬로건은 정신적으로 개조된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마오주의적 세계관에 따른 것이었다.

인민주의

‘연속혁명’사상이 담고 있는 중요한 점은 혁명적 창조력의 근원은 농촌에 있다는 인민주의적 신념이었다. 1958년에도 ‘인민’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농민대중으로 정의되고 있었다. 혁명 이후 사회경제적 발전에 대한 마오쩌둥의 전략은 강력하게 농업 지향적이었으며, 진보와 쇄신의 원천으로서 농촌에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혁명정신을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은 도시주민이 아니라 ‘선진적인 농민’에게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임무는 농촌의 인민공사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대약진운동 기간 농촌의 인민공사는 소련식 발전으로 인해 생겨난 도시와 농촌, 농민과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없애는 매개체로 비쳐지며 대약진운동의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후진성우위론

다른 모든 특징을 차치하고 6억의 중국인은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가난하고, 둘째 그들은 백지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좋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하기 원하며, 혁명을 원한다. 얼룩이 없는 깨끗한 백지에는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글자가 쓰일 수 있으며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2]

 
— 1958년 마오쩌둥
혁명에서 후진성의 이점을 칭송하는 경향은 1958년 4월 마오쩌둥이 주장하기 시작한 ‘빈곤과 백지’ 개념에 정식화되어 나타났다. 마오쩌둥은 빈곤과 백지상태라는 중국의 독특한 혁명적 미덕을 선포하면서 산업화 이전 단계에 있는 중국이 보편적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미래로 향한 길을 개척하고 있다고 보았다. 중국인민이 빈곤과 백지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향한 연속혁명을 필요로 하며, 공동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민이 전반적으로 빈곤과 백지상태에 있다고 했을 때, 이 두 가지 미덕은 농민과 청년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농민이었으며, 가장 백지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청년이었다. 가난한 농민이 혁명을 원했다면, 청년은 새로운 사상과 학파를 받아들여 이데올로기와 정신을 올바르게 전환시키는 데 빨랐다. 마오쩌둥은 후진성의 이점을 찬양하며 특권층이 된 관료나 교조주의자들을 대신하여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내용

1958년 5월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8회 전국대회 제 2회 회의에서 급진적인 사회주의화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건설의 총 노선'이 채택되면서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3]

목적

소련식 공업화가 초래한 도농불균형 현상과 도시의 실업, 농촌의 불완전고용 문제 등의 사회∙경제문제를 새로운 경제전략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새로운 경제전략이란 바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던 농민대중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철강, 화학, 기계제조 같은 자본집중적 공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 발전하는 것이 대약진 운동의 목표였다.

전개

경제

  • 권력하방정책

대약진운동 시기동안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많은 권력을 넘겨주었다. 지방정부는 중앙으로부터 일부 기업에 대한 계획 관리권과 기본건설항목 심사권, 재정세수 관리권, 노동관리권 등을 이양받았고 전체기업이윤의 20%를 소유하게 되었다.

  • 철강증산운동
전국 각지에 설치된 토법로

1957년 중국의 철 생산량은 534만 톤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시기에 생산량의 두 배를 증산하여 1,070만 톤을 생산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도시∙농촌 전 지역에 약 60만 개의 토법로가 설치되었으며 9,000만여 명이 철을 제련했다. 집집마다 철제 솥이나 철문을 녹였으며, 아이들은 폐철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또한 토법로를 가동하기 위해 엄청난 벌목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산림이 파괴되었다.

  • 수리건설운동
    인민공사

1957년 가을부터 6천만~7천만 명이 동원되어 농촌에 댐을 건설하였다. 대규모 관개수리시설을 건설하면서 여러 마을의 농민들이 하나의 생산대와 생산대대로 조직되었다, 한 마을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한 생산대를 이루고, 10개의 생산대가 모여 하나의 대규모 생산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엄격한 규율과 근대적 공장의 노동조직과 보상제도에 기초해서 작업하였고, 생산대대 간의 작업을 자치적으로 정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자족적인 경제∙사회∙정치적 단위인 인민공사의 성격을 지녔다.

사회

  • 인민공사화운동
    참새 잡기 운동

1958년 8월 마오쩌둥이 허난성에서 시행되고 있던 인민공사를 시찰한 뒤, "인민공사는 대단하다(人民公社好)"라고 말한 것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8월 말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베이따이허 회의)에서 「인민공사 건설의 결의」가 채택되면서 전국적으로 인민공사화가 진행되었다.[4] 인민공사는 기존의 농업합작사를 더 큰 규모로 개조시킨 것이다. 하나의 말단 지방정부처럼 농공업∙교육∙사회복지∙공공사업∙군사방위 등의 다양한 기능을 인민공사 내에서 수행하였으며, 중국에서는 이를 공산주의의 기층 단위로 간주하였다. 농민들의 토지, 가축, 가옥, 농기구 그리고 합작사에 대한 지분까지 모두 공동소유가 되었고, 농민들은 의식주와 더불어 의료와 교육을 보장 받았다. 1959년 봄까지 26.000개의 인민공사가 건설되었다.

  • 참새잡기운동

마오쩌둥은 1957년 10월 1차 회의에서 파리, 모기, 쥐, 참새를 네 가지 해악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토지에서 이를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국민 참새 잡기 날이 지정되었고, 300만명이 동원되어 하루에 8만 3,000마리를 소탕했다. 조류학자와 동물학자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고, 마오쩌둥도 결국 명령을 취소하고 외국에서 참새를 수입하였다. 그러나 이미 1960년에 이르렀고, 참새가 사라진 자리에는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 농촌이 큰 피해를 입었다.

교육

  • 농촌교육제도

농촌의 새로운 교육정책은 농촌공업화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교육정책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교육과 생산의 결합’이 주요 원칙이었다. 인민공사화와 함께 지방에서 관리하는 시간제 교육시설을 설립하고자 했으며, 일하면서 배우기(半工半讀)계획이 실시되었다. 교육의 목적은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기술지식과 문자해독능력을 가르쳐서, 지방의 농촌 공업기업을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장래 근대적인 농업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계와 결과

대약진운동은 인간의 정신력과 집단의 힘에 의지하여 대규모 수리, 관개공사 등 이제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많은 건설사업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각각의 객관적 조건과 역량 및 상호간의 균형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진행 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곧 심각한 왜곡 현상을 드러냈다. 철강증산운동으로 증산 목표는 달성했지만, 비전문적인 제조 기술 때문에 총량의 30%에 가까운 300만 톤은 조악해서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철강증산운동과 수리, 관개 건설운동에 노동력이 투입되면서 농업생산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였고, 식량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 성급하게 퍼져나간 인민공사화운동 역시 1958년 늦가을이 되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더구나 인민공사에서는 “일하든 일하지 않든 똑같다(一平二調)”라는 왜곡된 평등주의와 위로부터 이루어진 명령주의와 조달주의 때문에 농민의 생산 의욕이 대폭 저하되는 현상이 확산되었다. 또한 ‘자유롭게 식사하는’ 공공식당과 같은 ‘공산풍(共産風)’ 때문에 식량과 자재를 낭비하는 현상도 발생하였다.[5] 게다가 1960년 4월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양국의 적대감이 커졌다. 1960년 여름 소련이 중국기업체에서 일하고 있던 1,400명의 소련 과학자와 공업전문가들을 갑자기 소환하며 기술원조가 중단되자 중국경제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농업생산량이 떨어지는 와중에 1959년부터 이어져오던 자연재해까지 겹쳐 수천 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중국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대중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마오쩌둥은 스스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책임지고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으며, 국가 주석직을 물려받은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조정정책을 실시한다.

평가

수정주의자

류사오치덩샤오핑 등의 수정주의자들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근본 방침이나 방향의 잘못으로 보고, 중국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 활동을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나 이익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6]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1959년 7월 23일에 있었던 한 연설에서 중국 사회에 엄청난 재앙을 일으키고 인민공사화를 성급하게 밀어붙인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그러나 인민공사 자체에 대한 후회와 비판은 없었고, 오히려 농민들 사이에는 인민공사화에 대한 열정이 아직 남아있다며 인민공사화의 부활을 요구하였다. 또한 공자나 마르크스 역시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은근슬쩍 덮어버리려 했다.[7]

루산 회의의 공식성명

1959년 8월 26일 장시성 루산(慮山)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했다. 1958년의 생산 증가가 잘못된 계산으로 인해 과장된 결과임을 인정하고, 3억 7,500만 톤으로 기록되어있던 곡물생산량을 2억 5천만 톤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그러나 인민공사가 유명무실화 된 것은 성과는 과소평가하고 실패만을 과장한 우경기회주의자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대약진운동의 부활을 결의하였다. [8]

참고문헌

  1.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파주: 서해문집, 2004.
  2. 장병옥 외, 『중국학개론』, 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2.
  3.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
  4. 첸리쥔,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 연광석 역, 파주: 한울, 2012.
  5.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임상범 역, 서울: 일조각, 2016.
    1. 첸리쥔,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 연광석 역, 파주: 한울, 2012, p.289. ( 毛澤東,「關於向軍委會議印發李富春第二個五年計劃要點報告的批語」(1958.6.17)『建國以來毛澤東文稿』第7冊,p.273)
    2.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 p.282.
    3.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임상범 역, 서울: 일조각, 2016, p.69.
    4.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임상범 역, 서울: 일조각, 2016, p.71.
    5.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임상범 역, 서울: 일조각, 2016, p.72.
    6. 장병옥 외, 『중국학개론』, 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2, p.32
    7.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 p.323.
    8.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 p.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