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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웨이징성은 해외에서 계속해서 중국 정부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해왔다. 아래의 사건을 통해 웨이징성이 중국 정부의 체제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을 | + | 웨이징성은 해외에서 계속해서 중국 정부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해왔다. 아래의 사건을 통해 웨이징성이 중국 정부의 체제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그의 중국 정부에 대한 의견은 미국의 언론이나 한국의 언론에 자주 언급된다. 웨이징성과 같은 반체제 인사들의 의견이 미국과 한국으로 전해져 중국의 독재,부패,비민주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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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중국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발 | *2003년 중국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발 | ||
− | 2003년 중국 광동성에서 사스(SARS)가 발생해 전세계로 확산되어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더 크게 이슈가 되었던 것은 중국 정부의 대처 방식이었다. 중국 보건당국은 사스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고 있다가 더 큰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보건 당국은 2003년 4월 5일 정식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WHO와 협력해 광동지역 역학조사에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사스로인해 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5000명 이상(2003년 4월 27일 기준)감염되는 등 비상사태였다. 웨이징성은 당시 인터네셔널 해럴드 트리뷴지에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지기까지는 당지도부의 사스에 관한 은폐로 인한 것이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사스와 같은 큰 문제에 대한 정보를 감춘 것은 당 지도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으로 하급 관리들이 사퇴한 것을 들어 비판했다. | + | 2003년 중국 광동성에서 사스(SARS)가 발생해 전세계로 확산되어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더 크게 이슈가 되었던 것은 중국 정부의 대처 방식이었다. 중국 보건당국은 사스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고 있다가 더 큰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보건 당국은 2003년 4월 5일 정식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WHO와 협력해 광동지역 역학조사에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사스로인해 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5000명 이상(2003년 4월 27일 기준)감염되는 등 국가적 비상사태였다. 웨이징성은 당시 인터네셔널 해럴드 트리뷴지에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지기까지는 당지도부의 사스에 관한 은폐로 인한 것이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사스와 같은 큰 문제에 대한 정보를 감춘 것은 당 지도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으로 하급 관리들이 사퇴한 것을 들어 비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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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모옌(莫言 본명管謨業)의 노벨문학상 수상 | *2012년 모옌(莫言 본명管謨業)의 노벨문학상 수상 | ||
2012년 중국 소설가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웨이징성과 같은 반체제인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반체제 작가 위제(余杰)는 모옌은 '중립적인 작가가 아닌 공산당에 아첨하는 어용 문인'이라 했고,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는 '정부의 봉'이라며 비꼬았다. 웨이징성은 AFP통신 인터뷰에서 노벨위원회가 중국 정부를 기쁘게하기 위하는 것 뿐이라며 노벨위원회를 비판했다. 모옌은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국작가협회의 부주석이기때문에 반체제 인사들의 비판을 한몸에 받았다. | 2012년 중국 소설가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웨이징성과 같은 반체제인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반체제 작가 위제(余杰)는 모옌은 '중립적인 작가가 아닌 공산당에 아첨하는 어용 문인'이라 했고,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는 '정부의 봉'이라며 비꼬았다. 웨이징성은 AFP통신 인터뷰에서 노벨위원회가 중국 정부를 기쁘게하기 위하는 것 뿐이라며 노벨위원회를 비판했다. 모옌은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국작가협회의 부주석이기때문에 반체제 인사들의 비판을 한몸에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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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쿤밍테러 | *2014년 쿤밍테러 | ||
− | 2014년 쿤밍 철도역에서 위구르족의 테러로 17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에 시진핑 주석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개회식에서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테러에 결연히 대처하겠다고 전했다. 테러 이후 위구르족에 대한 감시, 감독이 철저해졌다. 웨이징성은 이 사건에 대해 위구르족은 한족과 같은 일반적인 민족이고 이들과 테러조직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중국 언론이 차이점을 인식해 대중들이 쉽게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인식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전했다. | + | 2014년 쿤밍 철도역에서 위구르족의 테러로 17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에 시진핑 주석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개회식에서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테러에 결연히 대처하겠다고 전했다. 실제로 테러 이후 위구르족에 대한 감시, 감독이 철저해졌다. 웨이징성은 이 사건에 대해 위구르족은 한족과 같은 일반적인 민족이고 이들과 테러조직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중국 언론이 차이점을 인식해 대중들이 쉽게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인식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전했다. |
==주요 저서== | ==주요 저서== |
2016년 7월 26일 (화) 17:23 기준 최신판
웨이징성 (魏京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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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0년 5월 20일 베이징 |
주요 작품 | 제5의 현대화 : 민주주의《第五个现代化:民主与其它》 |
관련 활동 | 작가, 인권 운동가, 전 홍위병, 전기 기술자 등 |
목차
개요
웨이징성(Wèi Jīngshēng, 위경생) 1978년 중국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민주인사이다. 1978년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를 개시하였고, 잡지 탐색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는 서구 자유주의적 민주에 대해 역설했지만 1979년 반체제 인사로 옥살이를 하고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현재까지 중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며 활동 중이다.
생애
출생과 유년시절
웨이징성은 1950년 5월 20일에 중국인민해방군 총병참부 직을 맡았던 간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北京育鹏小学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인민대학부속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에 다니던 1966년, 웨이징성은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에 가담해 수도홍위병연합행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68년 이후 군대가 홍위병의 활동을 제한하였고 웨이징성이 속한 수도홍위병연합행동위원회의 활동도 금지되었다. 웨이징성은 다시 홍위병합창단에 참가해 광저우에서 합창을 준비하던 중 홍콩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그의 소식이 알려져 전국 대수색 때 잡혀 상산하향으로 아버지의 고향인 안후이성 진자이현(安徽省 金寨县)에서 일하게 되었다. 상산하향 때 웨이징성은 대약진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아사해 황폐해진 농촌을 보고 마오쩌둥과 인민민주독재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1969년 웨이징성은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1973년에 제대했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베이징 동물원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며 역사와 정치공부를 계속해 진정한 민주와 평등을 쟁취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민주화운동
- 배경
문화대혁명 이후 1976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저우언라이의 사망을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천안문에 화환을 놓는 등의 행위를 하며 1차 천안문사건가 벌어졌다. 이때 덩샤오핑이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정치권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1978년 1차 천안문사건이 혁명사건으로 재조명되어 덩샤오핑이 정계에 다시 복귀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탈문혁노선을 확정하며 개혁개방 노선을 주도한다. 한편 문화대혁명시기에 핍박받았던 지식인(知靑:지식청년)들은 상흔문학, 상흔 담론을 기반으로 사회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신계몽주의 시대를 열며 이 시기를 제2의 5·4운동이라 칭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정권초반에는 지식인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했다. 그래서 1970년대 말에는 인민의 자유와 민주를 강조하고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자유가 부여되는 베이징의 봄이 찾아왔다. 또한 덩샤오핑은 미국과 수교를 맺어 서양에 대한 개방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사상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8년 베이징 시단(西单)에 웨이징성과 같은 여러 인사들이 대자보를 붙여 민주자유를 선전했다. 시단은 중국 고위급 간부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 민주의 벽운동(民主墙运动)은 웨이징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다. 웨이징성은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으로 활동했지만 상산하향의 경험으로 마오쩌둥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서구 자유주의적 민주에 대해 열망했다.
- 전개
당시 사회 통제가 완화되면서 지식인들의 민주화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비공식적인 잡지를 간행하거나 학회를 만들어 참여하고 대자보를 벽에 붙였다. 특히 대자보는 자유롭게 붙이고 자유롭게 볼 수 있어 내용이 쉽게 확산되었고 대자보를 통해 대중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웨이징성도 대자보를 통해 서구식 개념인 개인의 권리와 평등을 추구하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요구했다. 12월 5일 웨이징성은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 민주주의(《第五个现代化:民主与其它》)라는 이름의 대자보를 붙였다. 제5의 현대화 대자보의 주요 내용은 덩샤오핑이 주장한 네 가지 현대화(공업, 농업, 과학기술, 국방)에 민주를 넣어 5개의 현대화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시기의 마오쩌둥의 독재에 대해 비판하고 공업의 발전보다는 중국인민의 민주와 사회제도의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는 중국인권운동의 역사의 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웨이징성은 뜻을 같이하는 양광(杨光), 루린(路林), 리우징성(刘京生) 등과 탐색(《探索》)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웨이징성은 탐색의 편집자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대중들과 정부에까지 관심을 받았다. 웨이징성은 탐색을 통해 대중들에게 서구식 개념의 민주에 대해 설명하였다. 하지만 민주의 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정부의 예상 밖의 과격한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특히 독재정권에 대한 거부가 강력하게 나타났다. 1979년 3월 25일 웨이징성은 다시 한번 《要民主还是要新的独裁》라는 대자보를 써붙였다. 《要民主还是要新的独裁》내용 중에는 "인민을 위한 영도자에게는 인민들은 믿음을 보내지만 인민에게 손해를 끼치는 영도자에게는 인민들이 응당 반대할 것이고, 어떤 권위라도 인민의 반대에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라 하며 덩샤오핑은 독재의 길을 자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이러한 민주화운동은 대중들 사이에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정부는 이를 정부의 권위와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 웨이징성을 체포했다.
- 결과
《要民主还是要新的独裁》 대자보가 붙은지 이틀만에 웨이징성은 체포되었다. 그의 죄목은 당시 중국-베트남전쟁에 외국인에게 군사 기밀을 유출하고 잡지 탐색을 발간해 반동적인 글을 썼다는 것이었다.이후 반혁명죄로 15년 구형을 받았다. 옥중에서 그는 덩샤오핑에게 많은 편지를 썼고 후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1992년 10월 5일 덩샤오핑에게 보낸 시장(西藏)의 미래에 대한 의견(对西藏前途的看法)이라는 편지가 유명하다. 그는 1993년 9월14일에 가석방되었다가 1994년 4월 1일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공안은 웨이징성이 보호관찰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영장 발부없이도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중국의 법이다. 1995년 12월 13일 법원은 웨이징성에게 정부전복음모죄로 징역 14년과 참정권 박탈 3년을 구형했다. 그가 옥중에 있었던 1996년 반체제인사인 웨이징성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오르며 중국의 정치 체제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다. 이후 꾸준히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이런 외부의 시선이 작용한 탓인지 이후 1997년 11월 16일 그는 건강상의 문제로 석방되었고, 바로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미국 망명
웨이징성은 미국으로 강제 추방된 이후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대학에 초청되어 중국과 관련된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의 부진한 성과로 인해 2001년 6월 콜롬비아 대학이 웨이징성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미국 대통령 부시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민주인사 다섯 명을 백악관에 초청하였다. 민주인사 5인은 웨이징성을 포함해 우홍다(吴弘达), 레비야 카디르(Rabiye Qadir), 공샤오시아(龚小夏)와 보시치우(傅希秋)였다. 이날 부시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영도자에게 자유의 메세지를 전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부시의 발언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해 갈등이 있었다.
이후 주요활동
웨이징성은 해외에서 계속해서 중국 정부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해왔다. 아래의 사건을 통해 웨이징성이 중국 정부의 체제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그의 중국 정부에 대한 의견은 미국의 언론이나 한국의 언론에 자주 언급된다. 웨이징성과 같은 반체제 인사들의 의견이 미국과 한국으로 전해져 중국의 독재,부패,비민주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한다.
- 2003년 중국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발
2003년 중국 광동성에서 사스(SARS)가 발생해 전세계로 확산되어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더 크게 이슈가 되었던 것은 중국 정부의 대처 방식이었다. 중국 보건당국은 사스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고 있다가 더 큰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보건 당국은 2003년 4월 5일 정식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WHO와 협력해 광동지역 역학조사에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사스로인해 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5000명 이상(2003년 4월 27일 기준)감염되는 등 국가적 비상사태였다. 웨이징성은 당시 인터네셔널 해럴드 트리뷴지에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지기까지는 당지도부의 사스에 관한 은폐로 인한 것이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사스와 같은 큰 문제에 대한 정보를 감춘 것은 당 지도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으로 하급 관리들이 사퇴한 것을 들어 비판했다.
- 2012년 모옌(莫言 본명管謨業)의 노벨문학상 수상
2012년 중국 소설가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웨이징성과 같은 반체제인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반체제 작가 위제(余杰)는 모옌은 '중립적인 작가가 아닌 공산당에 아첨하는 어용 문인'이라 했고,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는 '정부의 봉'이라며 비꼬았다. 웨이징성은 AFP통신 인터뷰에서 노벨위원회가 중국 정부를 기쁘게하기 위하는 것 뿐이라며 노벨위원회를 비판했다. 모옌은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국작가협회의 부주석이기때문에 반체제 인사들의 비판을 한몸에 받았다.
- 2014년 쿤밍테러
2014년 쿤밍 철도역에서 위구르족의 테러로 17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에 시진핑 주석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개회식에서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테러에 결연히 대처하겠다고 전했다. 실제로 테러 이후 위구르족에 대한 감시, 감독이 철저해졌다. 웨이징성은 이 사건에 대해 위구르족은 한족과 같은 일반적인 민족이고 이들과 테러조직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중국 언론이 차이점을 인식해 대중들이 쉽게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인식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전했다.
주요 저서
《肯定自由,肯定民主》대만 1979년
《北京之春诗文选》홍콩 1980년
《魏京生狱中书信集》대만 1997년
수상 내역
1994년 올로프 팔메상
1994년 로버트 F.케네디 인권상
1996년 사하로프 상
1997년 전미민주주의 기금상
평가
바이두와 위키백과 비교
인물에 대한 초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바이두백과나 위키백과를 주로 이용한다. 웨이징성같은 경우는 현재까지 진행되는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바이두 백과의 내용이 다소 검열을 거쳤다고 생각한다. 바이두 백과는 웨이징성이 감옥에 가기 전까지의 행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웨이징성이 왜 감옥에 갔는지, 미국에서 연구 성과가 좋지 않았다는 점이 부각되어있다. 구글을 통해 들어간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그의 출생부터 현재가 비교적 상세히 나와있고 수많은 수상내역을 기재해놓았다. 이를 통해 중국 정부에서 웨이징성에 대한 언급을 꺼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魏京生 facebook
위키백과 魏京生
바이두백과 魏京生
第五个现代化전문
김민정, 웨이징성의 탐색을 중심으로 본 덩샤오핑 정부 초기의 '민주'의 의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4
모리스 마이스너 저,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 이산, 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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