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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語源== 500픽셀|오른쪽 장할 장 <ref> 랴오원하오, 『한자수』, 아템포, 2013, p.93</ref> 장할 장 <ref>[http://www.zdic.net/z/17/sw/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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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할 장 <ref> 랴오원하오, 『한자수』, 아템포, 2013, p.9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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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할 장 <ref>[http://www.zdic.net/z/17/sw/5956.htm 설문해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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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壯)은 손에 큰 도끼를 든 판사(士)가 긴 나무의자(爿)위에 앉아있는 것이다.<ref> 랴오원하오, 『한자수』, 아템포, 2013, p.94</ref> <br>혹은 큰 것이다(大也). 사士의 뜻과 장爿의 성을 따온 형성자이다. 방언이며, 무릇 사람이 큰 것을 일컬어 奘 혹은 壯라고 하였다. 설문해자에서 찾아 예를 들자면 큰 선비를 이르가도 한다. 따라서 아래에 선비에서 뜻을 따왔다고 한 것이다.<ref>[http://www.zdic.net/z/17/sw/58EF.htm 설문해자]</ref>
장할 장 <ref>허진웅, 『중국고대사회 - 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영남대 중국문학연구실, 1993, p.7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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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수에서는 장할 장壯을 다음과 같이 권위있는 심판관으로 설명한다.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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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壮”의 본래 의미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심판관(판사)으로, 威猛용맹스럽다는 의미로 파생되었으며, 관련 용어로는 强壮건장하다,壮士장사 등이 있다. 고대의 남자들은 30세가 넘으면 장년이라고 불렸다.''<ref> 랴오원하오, 『한자수』, 아템포, 2013, p.94</ref>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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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위있는 심판관'을 설명하기 위해 한자수는 장할 장壯의 부수가 되는 선비 사士자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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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선비 사)는 손에 청동 큰 도끼를 든 심판관을 의미한다. 고요皋陶(소호의 후손으로, 순임금 때 법관)는 중국 역사상 제 1의 심판관(판사)으로, 넘치게 지혜로웠으며, 논리적 추리를 통해서 교활한 불법적 사건을 밝혀내는데 능했다. <<상서>>에는 순임금이 고요에게 이렇게 분부하여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요, 그대가 士가 되어라.”서한(西漢)의 경학자(유학을 연구하는 학문) 공안국은 말했다. ; “士란, 관리이다.”이로 보건대, 士란 바로“관리”이다. 또한 바로 형사(刑事)안건을 담당하는 심판관(판사)이다. 덧붙여서 청동 도끼는 심판관의 권력을 상징한다. 금문의 (그림)士의 모습은 王자와 상당히 비슷한, 도끼의 날이 아래를 향해 있는 청동 도끼이다. 청동도끼는 군왕의 상징으로, 가장 높은 심판권의 소유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왕도 목을 베는 형벌을 상징하는 도끼를 심판관에게 부여하여 줄 수 있다. 그러므로 한자 王으로부터 士가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士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심판관이며, 각 급의 관료, 학자들로 파생된다.관련용어로는 鄕士향사(향촌의 선비), 學士학자, 男士신사 등이 있다. 고대의 “士農工商”네 직업군에서, 士는 관리가 되었거나 책을 읽는데에 힘써 관리가 되는 것을 준비하는 사람을 이른다.''<ref> 랴오원하오, 『한자수』, 아템포, 2013, p.94</ref><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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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한자수』의 설명에 의거했을 때, 왕王자와 사士자는 도끼의 형상을 따온 것으로 권위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국고대사회 - 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는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王이 왕관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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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최고의 정치권력을 지닌 사람을 왕(王)이라 불렀다. 현재의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왕이라는 명칭은 상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용했으나, 그 명칭은 하나라에서 물려받은 것 같다. 왕권은 추상적인 개념이기는 하나 조직사회에서는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사람들은 왕의 권위와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문자로써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러한 개념은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말과 같은 발음을 지닌 다른 글자를 빌리거나, 왕권과 연관이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글자를 만듦으로써 전달될 수 있었다. 만일 후자라면 어떤 사물을 택했을까? 그것들은 당시 사회구조와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 이러한 것들이 다음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문제들이다. (중략)왕을 나타내는 갑골문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간단한 문자이지만, 그 의미를 결정하기는 다소 어렵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불’, ‘남자의 성기’, ‘도끼’ ,‘똑바로 앉아있는 왕’또는 ‘왕관’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각각의 의미는 모두 당시 왕의 권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문자의 형태를 유사한 의미와 형태를 지닌 다른 글자와 비교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해석이 더 적당한 것인지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략) 신화적 인물인 동왕공과 서왕모도 이 시기의 부조석에 나타나는데, 세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다. 이는 모두 기본적으로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서 ‘왕’자의 형태와 유사하다. 특히 세번째 형태는 횡선의 옥장식을 빼버리면 갑골문 王자와 완전히 일치한다. 한나라 사람들은 고대의 통치자들이 부조석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왕관이나 모자를 썼다고 여겼으며...(후략)''<ref>허진웅, 『중국고대사회 - 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영남대 중국문학연구실, 1993, p.37-3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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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자어원문화사전]]

2017년 7월 3일 (월) 14:32 기준 최신판

語源

장할 장.PNG

장(壯)은 손에 큰 도끼를 든 판사(士)가 긴 나무의자(爿)위에 앉아있는 것이다.[1]
혹은 큰 것이다(大也). 사士의 뜻과 장爿의 성을 따온 형성자이다. 방언이며, 무릇 사람이 큰 것을 일컬어 奘 혹은 壯라고 하였다. 설문해자에서 찾아 예를 들자면 큰 선비를 이르가도 한다. 따라서 아래에 선비에서 뜻을 따왔다고 한 것이다.[2]


文化

한자수에서는 장할 장壯을 다음과 같이 권위있는 심판관으로 설명한다.

“壮”의 본래 의미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심판관(판사)으로, 威猛용맹스럽다는 의미로 파생되었으며, 관련 용어로는 强壮건장하다,壮士장사 등이 있다. 고대의 남자들은 30세가 넘으면 장년이라고 불렸다.[3]

그러나 '권위있는 심판관'을 설명하기 위해 한자수는 장할 장壯의 부수가 되는 선비 사士자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士(선비 사)는 손에 청동 큰 도끼를 든 심판관을 의미한다. 고요皋陶(소호의 후손으로, 순임금 때 법관)는 중국 역사상 제 1의 심판관(판사)으로, 넘치게 지혜로웠으며, 논리적 추리를 통해서 교활한 불법적 사건을 밝혀내는데 능했다. <<상서>>에는 순임금이 고요에게 이렇게 분부하여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요, 그대가 士가 되어라.”서한(西漢)의 경학자(유학을 연구하는 학문) 공안국은 말했다. ; “士란, 관리이다.”이로 보건대, 士란 바로“관리”이다. 또한 바로 형사(刑事)안건을 담당하는 심판관(판사)이다. 덧붙여서 청동 도끼는 심판관의 권력을 상징한다. 금문의 (그림)士의 모습은 王자와 상당히 비슷한, 도끼의 날이 아래를 향해 있는 청동 도끼이다. 청동도끼는 군왕의 상징으로, 가장 높은 심판권의 소유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왕도 목을 베는 형벌을 상징하는 도끼를 심판관에게 부여하여 줄 수 있다. 그러므로 한자 王으로부터 士가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士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심판관이며, 각 급의 관료, 학자들로 파생된다.관련용어로는 鄕士향사(향촌의 선비), 學士학자, 男士신사 등이 있다. 고대의 “士農工商”네 직업군에서, 士는 관리가 되었거나 책을 읽는데에 힘써 관리가 되는 것을 준비하는 사람을 이른다.[4]

위와 같은 『한자수』의 설명에 의거했을 때, 왕王자와 사士자는 도끼의 형상을 따온 것으로 권위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국고대사회 - 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는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王이 왕관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시기에는 최고의 정치권력을 지닌 사람을 왕(王)이라 불렀다. 현재의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왕이라는 명칭은 상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용했으나, 그 명칭은 하나라에서 물려받은 것 같다. 왕권은 추상적인 개념이기는 하나 조직사회에서는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사람들은 왕의 권위와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문자로써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러한 개념은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말과 같은 발음을 지닌 다른 글자를 빌리거나, 왕권과 연관이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글자를 만듦으로써 전달될 수 있었다. 만일 후자라면 어떤 사물을 택했을까? 그것들은 당시 사회구조와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 이러한 것들이 다음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문제들이다. (중략)왕을 나타내는 갑골문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간단한 문자이지만, 그 의미를 결정하기는 다소 어렵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불’, ‘남자의 성기’, ‘도끼’ ,‘똑바로 앉아있는 왕’또는 ‘왕관’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각각의 의미는 모두 당시 왕의 권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문자의 형태를 유사한 의미와 형태를 지닌 다른 글자와 비교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해석이 더 적당한 것인지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략) 신화적 인물인 동왕공과 서왕모도 이 시기의 부조석에 나타나는데, 세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다. 이는 모두 기본적으로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서 ‘왕’자의 형태와 유사하다. 특히 세번째 형태는 횡선의 옥장식을 빼버리면 갑골문 王자와 완전히 일치한다. 한나라 사람들은 고대의 통치자들이 부조석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왕관이나 모자를 썼다고 여겼으며...(후략)[5]

  1. 랴오원하오, 『한자수』, 아템포, 2013, p.94
  2. 설문해자
  3. 랴오원하오, 『한자수』, 아템포, 2013, p.94
  4. 랴오원하오, 『한자수』, 아템포, 2013, p.94
  5. 허진웅, 『중국고대사회 - 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영남대 중국문학연구실, 1993, p.3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