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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的,青年的魂灵屹立在我眼前,他们已经粗暴了,或者将要粗暴了,然而我爱这些流血和隐痛的魂灵,因为他使我觉得是在人间,是在人间活着。 | 是的,青年的魂灵屹立在我眼前,他们已经粗暴了,或者将要粗暴了,然而我爱这些流血和隐痛的魂灵,因为他使我觉得是在人间,是在人间活着。 | ||
在编校中夕阳居然西下,灯火给我接续的光。各样的青春在眼前一一驰去了,身外但有昏黄环绕。我疲劳着,捏着纸烟,在无名的思想中静静地合了眼睛,看见很长的梦。忽而惊觉⒄,身外也还是环绕着昏黄;烟篆在不动的空气中飞升,如几片小小夏云,徐徐幻出难以指名的形象。 | 在编校中夕阳居然西下,灯火给我接续的光。各样的青春在眼前一一驰去了,身外但有昏黄环绕。我疲劳着,捏着纸烟,在无名的思想中静静地合了眼睛,看见很长的梦。忽而惊觉⒄,身外也还是环绕着昏黄;烟篆在不动的空气中飞升,如几片小小夏云,徐徐幻出难以指名的形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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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성」은 1926년 4월 18일 주간지『위쓰』 제 75호에 처음 실렸으며,이 작품이 쓰이기 직전 [[3.18사태]]가 있었다. 또한 이는 「[[흐릿한 핏자국 속에서]]」가 쓰인 바로 이틀 후 쓰였다. <br> | ||
+ | 한편 원제로 쓰인 ‘一覺’은 ‘잠에서 깨어남, 깨달음, 잠’ 등의 중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때 어떠한 의미가 루쉰의 의도에 부합하는지를 확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 작품 제목인 ‘一覺’은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깨어남, 깨달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해석된다. <br> | ||
+ | 피 흘리며 달려가는 청년들의 영혼을 통하여 ‘나’는 더 이상 실존적 고뇌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한다. ‘나’는 피곤하고,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여전히 희미한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깨어난다. 이는 루쉰 자신이 실존적 고뇌에 사로잡혀 있던 시간을 뒤로하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피흘리는 세상에 충실한 ‘역할’로 되돌아 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는 불굴의 저항의지로 평가되는 위대한 루쉰 정신을 잘 보여주는 근거가 되고 있으며 또한 이 작품은 『야초』의 끝이자, 새로운 싸움의 시작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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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3일 (금) 22:58 기준 최신판
원문
飞机负了掷下炸弹的使命,象学校的上课似的,每日上午在北京城上飞行。每听得机件搏击空气的声音,我常觉到一种轻微的紧张,宛然目睹了“死”的袭来,但同时也深切地感着“生”的存在。 隐约听到一二爆发声以后,飞机嗡嗡地叫着,冉冉地飞去了。也许有人死伤了罢,然而天下却似乎更显得太平。窗外的白杨的嫩叶,在日光下发乌金光;榆叶梅也比昨日开得更烂漫。收拾了散乱满床的日报,拂去昨夜聚在书桌上的苍白的微尘,我的四方的小书斋,今日也依然是所谓“窗明几净”。 因为或一种原因,我开手编校那历来积压在我这里的青年作者的文稿了;我要全都给一个清理。我照作品的年月看下去,这些不肯涂脂抹粉的青年们的魂灵便依次屹立在我眼前。他们是绰约的,是纯真的,——呵,然而他们苦恼了,呻吟了,愤怒了,而且终于粗暴了,我的可爱的青年们。 魂灵被风沙打击得粗暴,因为这是人的魂灵,我爱这样的魂灵;我愿意在无形无色的鲜血淋漓的粗暴上接吻。漂渺的名园中,奇花盛开着,红颜的静女正在超然无事地逍遥,鹤唳一声,白云郁然而起……。这自然使人神往的罢,然而我总记得我活在人间。 我忽然记起一件事:两三年前,我在北京大学的教员预备室里,看见进来一个并不熟悉的青年,默默地给我一包书,便出去了,打开看时,是一本《浅草》。就在这默默中,使我懂得了许多话。阿,这赠品是多么丰饶呵!可惜那《浅草》不再出版了,似乎只成了《沉钟》的前身。那《沉钟》就在这风沙澒洞中,深深地在人海的底里寂寞地鸣动。 野蓟经了几乎致命的摧折,还要开一朵小花,我记得托尔斯泰曾受了很大的感动,因此写出一篇小说来。但是,草木在旱干的沙漠中间,拼命伸长他的根,吸取深地中的水泉,来造成碧绿的林莽,自然是为了自己的“生”的,然而使疲劳枯渴的旅人,一见就怡然觉得遇到了暂时息肩之所,这是如何的可以感激,而且可以悲哀的事?! 《沉钟》的《无题》——代启事——说:“有人说:我们的社会是一片沙漠。 ——如果当真是一片沙漠,这虽然荒漠一点也还静肃;虽然寂寞一点也还会使你感觉苍茫。何至于象这样的混沌,这样的阴沉,而且这样的离奇变幻!” 是的,青年的魂灵屹立在我眼前,他们已经粗暴了,或者将要粗暴了,然而我爱这些流血和隐痛的魂灵,因为他使我觉得是在人间,是在人间活着。 在编校中夕阳居然西下,灯火给我接续的光。各样的青春在眼前一一驰去了,身外但有昏黄环绕。我疲劳着,捏着纸烟,在无名的思想中静静地合了眼睛,看见很长的梦。忽而惊觉⒄,身外也还是环绕着昏黄;烟篆在不动的空气中飞升,如几片小小夏云,徐徐幻出难以指名的形象。
해제
「각성」은 1926년 4월 18일 주간지『위쓰』 제 75호에 처음 실렸으며,이 작품이 쓰이기 직전 3.18사태가 있었다. 또한 이는 「흐릿한 핏자국 속에서」가 쓰인 바로 이틀 후 쓰였다.
한편 원제로 쓰인 ‘一覺’은 ‘잠에서 깨어남, 깨달음, 잠’ 등의 중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때 어떠한 의미가 루쉰의 의도에 부합하는지를 확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 작품 제목인 ‘一覺’은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깨어남, 깨달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해석된다.
피 흘리며 달려가는 청년들의 영혼을 통하여 ‘나’는 더 이상 실존적 고뇌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한다. ‘나’는 피곤하고,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여전히 희미한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깨어난다. 이는 루쉰 자신이 실존적 고뇌에 사로잡혀 있던 시간을 뒤로하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피흘리는 세상에 충실한 ‘역할’로 되돌아 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는 불굴의 저항의지로 평가되는 위대한 루쉰 정신을 잘 보여주는 근거가 되고 있으며 또한 이 작품은 『야초』의 끝이자, 새로운 싸움의 시작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야초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