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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楚의 갑골문은 가득 자란 가시덤불(세 줄기 가시가 있는 식물)의 국가에 발길이 닿은 것(走)을 나타낸다. 이는 초나라가 상(商),주(周)시대 때 곳곳이 가시나무였고, 그래서 호남, 호북 일대에 위치한 가시 국가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楚의 금문과 소전은 “가시나무 숲”을 밝은 “발”을 나타낸다. 즉, “楚”의 본래 의미는 “가시나무”임을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苦痛, 苦楚의 뜻이 파생되었다. | + | 楚는 상고시대에 가시덤불이 우거진 거친 땅이었다. 그래서 楚의 갑골문은 가득 자란 가시덤불(세 줄기 가시가 있는 식물)의 국가에 발길이 닿은 것(走)을 나타낸다. 이는 초나라가 상(商),주(周)시대 때 곳곳이 가시나무였고, 그래서 호남, 호북 일대에 위치한 가시 국가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楚의 금문과 소전은 “가시나무 숲”을 밝은 “발”을 나타낸다. 즉, “楚”의 본래 의미는 “가시나무”임을 알 수 있다. <설문>: "楚는 수풀과 나무이다. 일명, 굴사리이다." 고대에는 "牡荊(가시나무의 일종)"이라 불렸고, 학생을 꾸짖고 때리는 회초리의 주 재료가 되어 가시나무에서 苦痛, 苦楚의 뜻이 파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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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面楚歌]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 | [四面楚歌]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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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轅適楚] 나릇을 북쪽으로 향하게 해 놓고 남쪽인 초나라로 가려한다는 뜻으로, 의도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서로 어긋남을 비유해 이르는 말 | [北轅適楚] 나릇을 북쪽으로 향하게 해 놓고 남쪽인 초나라로 가려한다는 뜻으로, 의도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서로 어긋남을 비유해 이르는 말 | ||
− | + | <ref>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p.35.</ref> | |
== 【文化】 == | == 【文化】 == | ||
− | 초나라는 장강의 남쪽 일대에 자리 잡고 있어 자연 환경이 북방과는 아주 달랐다. 풀, 나무, 새, 짐승들까지도 달랐으며, 특히 이 일대의 언어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더욱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남북의 음이 잘 통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ref> 이수웅(2010), | + | "楚"는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오늘날 후베이 일대에 있다. 초나라는 장강의 남쪽 일대에 자리 잡고 있어 자연 환경이 북방과는 아주 달랐다. 갑골문에서 가시덤불을 형상화한만큼 환경이 척박했다. 풀, 나무, 새, 짐승들까지도 달랐으며, 특히 이 일대의 언어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더욱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남북의 음이 잘 통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ref> 이수웅(2010), 『중국문학사』, 다락원</ref> 이렇게 변방의 무시 받던 가시국은 주나라의 권위가 무너진 춘추시대에 크게 성장했다. 당시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패자가 등장해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춘추 5패’로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을 일컫는 말이다. 이 중 초나라의 장왕은 군대를 정돈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부국강병을 이루자 중원의 제후국들과 패권을 다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후 장왕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정나라를 함락하고 기원전 593년 송나라까지 항복시키면서 패주가 되었다.<ref> 풍국초(2005),『중국상하오천년사1』, 신원문화사</ref> |
2020년 12월 21일 (월) 19:58 기준 최신판
楚
【語源】
楚는 상고시대에 가시덤불이 우거진 거친 땅이었다. 그래서 楚의 갑골문은 가득 자란 가시덤불(세 줄기 가시가 있는 식물)의 국가에 발길이 닿은 것(走)을 나타낸다. 이는 초나라가 상(商),주(周)시대 때 곳곳이 가시나무였고, 그래서 호남, 호북 일대에 위치한 가시 국가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楚의 금문과 소전은 “가시나무 숲”을 밝은 “발”을 나타낸다. 즉, “楚”의 본래 의미는 “가시나무”임을 알 수 있다. <설문>: "楚는 수풀과 나무이다. 일명, 굴사리이다." 고대에는 "牡荊(가시나무의 일종)"이라 불렸고, 학생을 꾸짖고 때리는 회초리의 주 재료가 되어 가시나무에서 苦痛, 苦楚의 뜻이 파생되었다.
[四面楚歌]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
[楚越] 초나라와 월나라라는 뜻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 상관이 없음을 이르는 말
[北轅適楚] 나릇을 북쪽으로 향하게 해 놓고 남쪽인 초나라로 가려한다는 뜻으로, 의도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서로 어긋남을 비유해 이르는 말 [1]
【文化】
"楚"는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오늘날 후베이 일대에 있다. 초나라는 장강의 남쪽 일대에 자리 잡고 있어 자연 환경이 북방과는 아주 달랐다. 갑골문에서 가시덤불을 형상화한만큼 환경이 척박했다. 풀, 나무, 새, 짐승들까지도 달랐으며, 특히 이 일대의 언어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더욱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남북의 음이 잘 통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2] 이렇게 변방의 무시 받던 가시국은 주나라의 권위가 무너진 춘추시대에 크게 성장했다. 당시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패자가 등장해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춘추 5패’로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을 일컫는 말이다. 이 중 초나라의 장왕은 군대를 정돈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부국강병을 이루자 중원의 제후국들과 패권을 다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후 장왕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정나라를 함락하고 기원전 593년 송나라까지 항복시키면서 패주가 되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