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주주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개요) |
|||
(사용자 3명의 중간 판 19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개요== | ==개요== | ||
− | |||
− | |||
− | |||
− | == | + | [[파일:신민주주의론.jpg|오른쪽]] |
− | + | ===개요=== | |
+ | 신민주주의론은 모택동이 1940년경부터 제창하여 이론화한 중공혁명의 지도이론으로 마오이즘의 과도기적 이념이기도 하다.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이라는 논문에서 “중국혁명의 역사적 과정은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두 단계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지들이 지도하는 낡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하여 지도되는 새로운 신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그의 논문을 통해 1840년 아편전쟁부터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중국-프랑스전쟁, 중 ·일전쟁, 무술정변(戊戌政變), [[신해혁명]](辛亥革命)을 낡은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았다. 하지만 러시아 10월 혁명과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중국의 혁명도 이전의 낡은 민주주의 혁명과 다른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고 주창하는데, 그 효시가 바로 [[5.4 운동]]이다. 즉 5.4 운동을 기점으로 중국의 혁명의 유형은 여전히 자산계급 민주혁명 내의 것이지만, 혁명의 최종 목표가 자산계급 영도 사회에서 새로운 무산계급 영도 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투쟁만이 신민주주의 혁명이 된다고 말하였다. 이 신민주주의 이론은 중국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점령한 초기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의 정신으로 표현되어, 노동계급 ·농민계급 ·소(小)부르주아지 ·민족부르주아지 및 기타 애국적 민주분자들을 망라하였다는 인민민주통일전선으로 나타났다. | ||
− | === | + | ===형성 배경=== |
− | + | 기존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된 후에 공산당과 노동자가 주축이 되어 사회주의 체제를 성립시키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 외의 계층이 상당부분 소외되거나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시키기에는 노동자의 수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모택동은 기존의 [[공산주의]]에 있던 인민혁명 노선을 일부 수정하여 중국의 현실에 맞추게 되고,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시키려면 광범위한 통일노선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 뿐만 아니라 지식인, 소부르주아, 민족부르주아, 애국적 민주분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하였다. 이는 기존의 공산주의 혁명가와는 매우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 | ==== | + | ==주요 내용== |
− | + | 신민주주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 | *신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은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일반적인 구식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특수한 신식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전자의 목표가 자산계급에 의하여 영도되는 자본주의사회 및 자산계급독재의 국가를 건립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목표는 신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각 혁명적 계급(프롤레타리아트, 농민, 지식분자와 기타 소자산계급) 간의 연합독재의 국가를 창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때 민족자산 계급은 제국주의와 결탁할 수 있는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혁명적 계급 연합독재를 영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즉, 무산계급이 되어야 한다. | ||
+ | *쑨원이 초기 [[삼민주의]]를 수정,보완하여 다시 제창한 신삼민주의는 신민주주의 혁명 단계의 목표와 일치하기 때문에 통일 전선을 공고히 해야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삼민주의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므로 모순면도 보아야 한다. 신삼민주의에는 8시간 노동제와 철저한 토지혁명 강령, 사회주의 혁명 단계도 없으며 세계관 또한 다르고 혁명의 철저성도 없다. | ||
+ | *신민주주의는 자본을 통제하고 평등한 토지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대은행, 대공업, 대상업은 공화국의 국가소유로 삼고, 필요한 수단을 통해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토지는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구호대로 "경자유전"을 실현한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을 몰수하지 않으며 민생을 조종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을 금하지 않는다. 이는 중국의 경제가 아직 매우 낙후하기 때문이다. | ||
+ | *마오쩌둥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신민주주의 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났으나-혹은 벗어나고자 하나- 최종 목표 단계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국할 여건을 충족하지 못한 국가들이 취할 수 있는 과도적인 국가형태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몇 개의 계급들이 연합하여 공동으로 독재한다. | ||
+ | *신민주주의는 중국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해당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세계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에 있다. 제국주의 하에서는 제국주의와 피침략국가간의 투쟁이 주요모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
− | + | 이러한 신민주주의공화국은 구민주주의공화국과 같은 낡은 형태의, 구미식의, 자산계급독재의 자본주의공화국과는 다르다. (…) | |
− | 일정한 | + | 한편으로 그것은 소련식이나 무산계급의 사회주의공화국과도 다르다. (…) 그러나 이러한 공화국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
− | + |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실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이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 |
− | + | 있어서 취할 국가형태는 오직 세번째 형태, 즉 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형태일 수밖에 없다. | |
− | |||
+ | ==폐기와 급진주의 형성의 원인 == | ||
+ | ===이론적 제약:스탈린 모델의 영향=== | ||
+ | 1950년대 초반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건설과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었던 유일한 모델은 스탈린 모델이었다. 신민주주의론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문제는 신민주주의가 과도기가 아니라 독립적인 국가형태, 사회형태로 성립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건설 이론에서는 신민주주의 사회를 독립된 사회형태로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 신민주주의론을 계속 견지했던 것은 중국과 같이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바로 사회주의로 진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민주혁명이 성공한 이후 바로 사회주의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활용해 생산력 발전을 추구하는 과정, 즉 신민주주의 사회라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어느 정도까지, 언제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관적 기준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신민주주의론 폐기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 중 하나는 생산력 발전, 특히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지나치게 빠르게 사유제를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생산력 발전을 더욱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생산관계의 개조를 통해 생산력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논리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자본주의적 생산을 유지시켜야한다는 논리를 압도했고, 대약진운동 시기 극단적인 형태로 실천되었다. 그리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과 생산력 발전 사이의 선순환을 실현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 ||
+ | ===중공업우선발전전략=== | ||
+ | 중공은 건국 직후 오랜 항일전쟁과 내전으로 피폐된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농업, 경공업, 중공업"으로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경제복구도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이를 기초로 1952년 초 1차 5년 계획 수립에 착수하였으며, 곧 1952년 12월 "1953년 계획 및 장기계획 강요 작성에 관한 지시"를 통해 중공업우선발전전략을 결정했다. 당시 중국이 공업적 기초가 여전히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중공업 우선발전전략을 채택한 이유는 세가지가 있었다. 첫째, 높은 중공업 발전수준이 현대화된 공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고 추격전략을 위해서 둘째, 자립적 공업체계의 구축을 위해서, 그리고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신민주주의론이 강조한 다양한 소유제의 공존이라는 미시적 경제체제와 서로 조응하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 ||
+ | ===계급투쟁과 급진주의적 기층간부=== | ||
+ | 아래로부터의 압력, 특히 농촌에서 계속 치열해진 계급투쟁도 신민주주의론 폐기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건국 이후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빈농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부농은 물론이고 일부 부유한 중농의 토지도 몰수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다. 신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부농경제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했으나, 일부 지방에서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고는 빈농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다는 주장에 따라 특수 지역에서는 부농의 토지를 몰수할 수 있다는 규정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농촌에서는 중국공산당이 기층 단위까지 침투하는 과정에서 주로 빈농계층을 간부로 충원했다. 반면 지식인의 경우는 사상개조운동 거치면서 중공에 통제되었다. 류샤오치는 이러한 계급관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신민주주의론의 당초 취지를 계속 유지하고자 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신민주주의론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 ||
==평가== | ==평가== | ||
− | + | 1954년 9월 중국공산당이 정식으로 헌법을 채택하였을 때에는 민족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를 포섭대상에서 제외하여 투쟁대상으로 전환시킨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제기함으로써, 신민주주의 단계는 끝났음을 선포하였다. 결국 신민주주의는 중국공산당의 힘이 부족하자 중립적인 인사들을 포섭하여 중국국민당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이었다. | |
− | + | 하지만 전문가들은 신민주주의론의 폐기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진총지는 신민주주의론의 폐기가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니며 신 중국 건립 이후 사회주의 공유제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는 객관적 추세를 반영한 필연적 결과이고 그 전환이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위광위엔은 신민주주의론의 폐기에 대해 마오의 독창적 부분이지만 지나치게 빨리 폐기한 것이 사회생산력과 사회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부조화를 초래하고 사회경제발전이 중단되는 결과가 초래했다고 주장하며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위광위엔의 문제제기 이후 신민주주의 폐기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더욱 활발하기 진행되기도 했었는데, 특히 이 중 린윈휘이는 마오쩌둥 등이 이 시기 주요 모순에 대해 잘못 판단한 것, 양극분화에 대한 우려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모순을 주요모순으로 간주한 것이 신민주주의론의 폐기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하였다.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
− | + | 이남주, "마오쩌둥 시기 급진주의의 기원.동향과 전망, 215-249<br> | |
− | + | 마오쩌둥, 《실천론 모순론 외》, 김승일 역, 범우사 2011<br> | |
− | + | 마오쩌둥, 《모택동 선집2》, 김승일 역, 범우사 2017<br> | |
− | |||
− | |||
− |
2018년 12월 15일 (토) 19:03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개요
신민주주의론은 모택동이 1940년경부터 제창하여 이론화한 중공혁명의 지도이론으로 마오이즘의 과도기적 이념이기도 하다.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이라는 논문에서 “중국혁명의 역사적 과정은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두 단계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지들이 지도하는 낡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하여 지도되는 새로운 신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그의 논문을 통해 1840년 아편전쟁부터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중국-프랑스전쟁, 중 ·일전쟁, 무술정변(戊戌政變), 신해혁명(辛亥革命)을 낡은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았다. 하지만 러시아 10월 혁명과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중국의 혁명도 이전의 낡은 민주주의 혁명과 다른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고 주창하는데, 그 효시가 바로 5.4 운동이다. 즉 5.4 운동을 기점으로 중국의 혁명의 유형은 여전히 자산계급 민주혁명 내의 것이지만, 혁명의 최종 목표가 자산계급 영도 사회에서 새로운 무산계급 영도 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투쟁만이 신민주주의 혁명이 된다고 말하였다. 이 신민주주의 이론은 중국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점령한 초기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의 정신으로 표현되어, 노동계급 ·농민계급 ·소(小)부르주아지 ·민족부르주아지 및 기타 애국적 민주분자들을 망라하였다는 인민민주통일전선으로 나타났다.
형성 배경
기존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된 후에 공산당과 노동자가 주축이 되어 사회주의 체제를 성립시키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 외의 계층이 상당부분 소외되거나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시키기에는 노동자의 수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모택동은 기존의 공산주의에 있던 인민혁명 노선을 일부 수정하여 중국의 현실에 맞추게 되고,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시키려면 광범위한 통일노선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 뿐만 아니라 지식인, 소부르주아, 민족부르주아, 애국적 민주분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하였다. 이는 기존의 공산주의 혁명가와는 매우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내용
신민주주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신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은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일반적인 구식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특수한 신식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전자의 목표가 자산계급에 의하여 영도되는 자본주의사회 및 자산계급독재의 국가를 건립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목표는 신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각 혁명적 계급(프롤레타리아트, 농민, 지식분자와 기타 소자산계급) 간의 연합독재의 국가를 창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때 민족자산 계급은 제국주의와 결탁할 수 있는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혁명적 계급 연합독재를 영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즉, 무산계급이 되어야 한다.
- 쑨원이 초기 삼민주의를 수정,보완하여 다시 제창한 신삼민주의는 신민주주의 혁명 단계의 목표와 일치하기 때문에 통일 전선을 공고히 해야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삼민주의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므로 모순면도 보아야 한다. 신삼민주의에는 8시간 노동제와 철저한 토지혁명 강령, 사회주의 혁명 단계도 없으며 세계관 또한 다르고 혁명의 철저성도 없다.
- 신민주주의는 자본을 통제하고 평등한 토지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대은행, 대공업, 대상업은 공화국의 국가소유로 삼고, 필요한 수단을 통해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토지는 경작하는 자에게라는 구호대로 "경자유전"을 실현한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을 몰수하지 않으며 민생을 조종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을 금하지 않는다. 이는 중국의 경제가 아직 매우 낙후하기 때문이다.
- 마오쩌둥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신민주주의 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났으나-혹은 벗어나고자 하나- 최종 목표 단계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국할 여건을 충족하지 못한 국가들이 취할 수 있는 과도적인 국가형태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몇 개의 계급들이 연합하여 공동으로 독재한다.
- 신민주주의는 중국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해당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세계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에 있다. 제국주의 하에서는 제국주의와 피침략국가간의 투쟁이 주요모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민주주의공화국은 구민주주의공화국과 같은 낡은 형태의, 구미식의, 자산계급독재의 자본주의공화국과는 다르다. (…) 한편으로 그것은 소련식이나 무산계급의 사회주의공화국과도 다르다. (…) 그러나 이러한 공화국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실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이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취할 국가형태는 오직 세번째 형태, 즉 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형태일 수밖에 없다.
폐기와 급진주의 형성의 원인
이론적 제약:스탈린 모델의 영향
1950년대 초반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건설과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었던 유일한 모델은 스탈린 모델이었다. 신민주주의론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문제는 신민주주의가 과도기가 아니라 독립적인 국가형태, 사회형태로 성립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건설 이론에서는 신민주주의 사회를 독립된 사회형태로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 신민주주의론을 계속 견지했던 것은 중국과 같이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바로 사회주의로 진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민주혁명이 성공한 이후 바로 사회주의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활용해 생산력 발전을 추구하는 과정, 즉 신민주주의 사회라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어느 정도까지, 언제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관적 기준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신민주주의론 폐기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 중 하나는 생산력 발전, 특히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지나치게 빠르게 사유제를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생산력 발전을 더욱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생산관계의 개조를 통해 생산력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논리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자본주의적 생산을 유지시켜야한다는 논리를 압도했고, 대약진운동 시기 극단적인 형태로 실천되었다. 그리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과 생산력 발전 사이의 선순환을 실현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중공업우선발전전략
중공은 건국 직후 오랜 항일전쟁과 내전으로 피폐된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농업, 경공업, 중공업"으로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경제복구도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이를 기초로 1952년 초 1차 5년 계획 수립에 착수하였으며, 곧 1952년 12월 "1953년 계획 및 장기계획 강요 작성에 관한 지시"를 통해 중공업우선발전전략을 결정했다. 당시 중국이 공업적 기초가 여전히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중공업 우선발전전략을 채택한 이유는 세가지가 있었다. 첫째, 높은 중공업 발전수준이 현대화된 공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고 추격전략을 위해서 둘째, 자립적 공업체계의 구축을 위해서, 그리고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신민주주의론이 강조한 다양한 소유제의 공존이라는 미시적 경제체제와 서로 조응하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계급투쟁과 급진주의적 기층간부
아래로부터의 압력, 특히 농촌에서 계속 치열해진 계급투쟁도 신민주주의론 폐기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건국 이후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빈농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부농은 물론이고 일부 부유한 중농의 토지도 몰수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다. 신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부농경제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했으나, 일부 지방에서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고는 빈농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다는 주장에 따라 특수 지역에서는 부농의 토지를 몰수할 수 있다는 규정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농촌에서는 중국공산당이 기층 단위까지 침투하는 과정에서 주로 빈농계층을 간부로 충원했다. 반면 지식인의 경우는 사상개조운동 거치면서 중공에 통제되었다. 류샤오치는 이러한 계급관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신민주주의론의 당초 취지를 계속 유지하고자 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신민주주의론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평가
1954년 9월 중국공산당이 정식으로 헌법을 채택하였을 때에는 민족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를 포섭대상에서 제외하여 투쟁대상으로 전환시킨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제기함으로써, 신민주주의 단계는 끝났음을 선포하였다. 결국 신민주주의는 중국공산당의 힘이 부족하자 중립적인 인사들을 포섭하여 중국국민당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신민주주의론의 폐기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진총지는 신민주주의론의 폐기가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니며 신 중국 건립 이후 사회주의 공유제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는 객관적 추세를 반영한 필연적 결과이고 그 전환이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위광위엔은 신민주주의론의 폐기에 대해 마오의 독창적 부분이지만 지나치게 빨리 폐기한 것이 사회생산력과 사회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부조화를 초래하고 사회경제발전이 중단되는 결과가 초래했다고 주장하며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위광위엔의 문제제기 이후 신민주주의 폐기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더욱 활발하기 진행되기도 했었는데, 특히 이 중 린윈휘이는 마오쩌둥 등이 이 시기 주요 모순에 대해 잘못 판단한 것, 양극분화에 대한 우려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모순을 주요모순으로 간주한 것이 신민주주의론의 폐기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이남주, "마오쩌둥 시기 급진주의의 기원.동향과 전망, 215-249
마오쩌둥, 《실천론 모순론 외》, 김승일 역, 범우사 2011
마오쩌둥, 《모택동 선집2》, 김승일 역, 범우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