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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사망일 = 220(출생 ?) |
− | | | + | |출생지 = 산시성 원청현 |
− | 시호 | + | |자 = 운장(雲長), 장생(長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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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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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복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 | 삼계복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 | ||
(三界伏魔大帝神位 願天尊關聖帝君) | (三界伏魔大帝神位 願天尊關聖帝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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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람보살(불교) | + | |별명 = 미염공 |
+ | |신호 = 협천대제관성제군(도교), 가람보살(불교), 문형성제(유교)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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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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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字)는 운장(雲長,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繆侯, 壯穆侯라고도 쓴다)이다. 오래전부터 중국의 민간에서 충의(忠義)와 무용(武勇)의 상징으로 여겨져 무성(武聖)이나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제성군(關帝聖君) 등으로 숭배되었고, 줄여서 관성제, 관제군, 관제, 성제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지연의》에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劉備)]]·[[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미염공(美髯公)이나 관이야(關二爺) 등으로도 불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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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애== | ||
+ | ===유비를 섬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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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사에서는 관우의 초창기 행적이 잘 기록되어있지 않다. 관우전에 의하면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관우는 의용군을 이끌던 [[유비]], [[장비]]와 접촉해 [[장비]]와 함께 [[유비]]의 호위관을 맡았다. 유비가 평원의 상이 되자 관우는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었다. 장비전을 보면 이때 [[유비]]는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로 형제의 연을 맺었으며 관우가 [[장비]]보다 연상인 이유로 형님으로 여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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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우의 초기 군사적 업적 또한 많이 남겨져 있지 않다. [[조조]]가 관우를 자신의 장수로 삼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 [[유비]]가 방랑하던 시절, [[동탁]]토벌전, [[공손찬]] 아래에 서주에 있었을 때 등 [[유비]]의 세력은 높은 평가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관우 또한 많은 업적이 있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 초창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은 불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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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의를 일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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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안 5년 [[유비]]가 [[조조]]에게 패배해서 [[원소]]에게 달아났고, 관우는 그 전쟁에 의해 [[조조]]의 포로가 된다. [[조조]]는 앞서 언급하듯 관우를 자신의 장수로 삼기 위해 좋은 대접을 하는 등의 많은 노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관우가 자신의 밑에 머무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우는 [[유비]]를 배신할 생각이 없으며 [[조조]]에 극진한 대접에 보답이 끝나면 떠날 의사를 표현하였다. 이후 관우는 은혜를 갚기 위해 [[조조]]가 [[원소]]와의 전쟁을 시작했을 때 [[원소]]의 맹장인 [[안량]]을 죽이고 그의 목을 조조에게 주었다. 이후 [[안량]]을 무찌른 공을 세웠기 때문에 관우는 [[유비]]의 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큰 상을 주어 한 번 더 짐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관우는 이를 받지 않고 조조에게 편지로 이별의 의사를 표시한 뒤 다시 [[유비]]의 곁으로 떠난다. [[조조]]는 그 의협심에 감탄해서 관우를 추격하려는 부하들을 말렸다고 전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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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주를 맡다=== | ||
− | + | 이후 [[유비]]는 [[원소]]를 떠나 형주의 [[유표]]에게로 갔다. 관우 역시 유비와 동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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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하지만 곧 [[유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기회를 틈타 [[조조]]가 형주로 침공해왔다. 이 때 [[유비]]는 수세의 불리함을 알고 본인은 퇴각하였으며, 관우에게 수백 척의 선단으로 구성된 별동대를 이끌라고 지휘하였다. 퇴각 중 장판의 당양에서 조조군의 추격을 받아 유비는 샛길을 이용한 길을 사용하여 한진으로 달아났고, 관우의 별동대와 합류하여 달아나 함께 하구로 향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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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손권과의 충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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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건안 20년 형주 영유를 둘러싼 분쟁이 해결되지 않아 속이 끓는 [[손권]]의 명령으로 [[여몽]] 등이 장사, 계양, 영릉 세 군을 습격하여 관우는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익양에서 포진하였다. 유비도 대군을 이끌고 관우의 조력으로 향하여 한 때는 유,손 동맹의 붕괴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관우와 통한 장사의 안성, 유, 다릉 세 현과 양주, 여흥의 영신현의 관리 등이 계양의 음산성에서 모반을 일으켰고 이어서 중랑장인 원룡, 안성의 현장 오탕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해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는 등, 이와 같은 것들이 양 진영에 화평을 맺도록 초래하여, 관우와 노숙의 대담이 실현되었다. 회담은 손권측의 노숙의 페이스로 진행하였고, 관우는 계속 재고 있었다. 결국 상수를 경계선으로 하여 장사, 강하, 계양은 손권의 땅으로하고 남군, 무릉, 그리고 한 번 빼앗겼었던 영릉이 유비의 땅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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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건안 22년 노숙의 사후 육구에 부임한 [[여몽]]은 관우를 공격하여 멸하려고 하는 계획을 몰래 세우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보다 그 이상으로 관우와 친밀히 접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형주에서 통치 방식은 은덕과 위신이 잘 퍼져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이후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과 손권의 자식과의 혼인 신청을 걸어왔을 때 관우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어찌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보낼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거절하여 손권을 화나게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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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번성의 전투와 죽음=== | |
− | + | 건안 23년 관우 등 [[유비]]의 측근들이 유비를 한중왕으로 추대했다.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게 되면서 관우는 전장군, 가절로 임명되었다. 그 후 관우는 수륙 양군을 인솔하고, 자식인 [[관평]] 등과 함께 번성을 막는 [[조인]]을 공격하였다. 조인의 원군으로 [[우금]]이 달려갔으나 대홍수가 일어나 우금의 배가 수몰되었다. 관우는 선단을 이끌고 공격을 하여 우금과 그가 이끌던 3만의 군사를 항복시켜 [[방덕]]을 베었다. 또한 이 때 형주자사인 호수, 남향태수인 부방 등이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관우는 번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별장을 파견하여 여상이 막는 양양까지 포위하였다. 이후 관우는 사방에 인수를 뿌려 양, 겹, 육혼과 같은 조조 영내의 도둑떼 등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업에서는 승상연인 위풍까지도 관우를 통하여 반역을 일으켜 중원은 흔들렸다. 조조는 이에 당황하여 수도를 천도하는 것 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조조의 군사인 사마의가 손권을 이용하여 장강 남쪽을 영유하는 조건으로 관우를 배후에서 공격하는 방안을 제안하여 조조는 손권과 밀약을 맺었다. 한편, 서황을 파견하여 조인을 구원하도록 하여 관우는 [[조조]]와 [[손권]]의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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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관우는 손권에 대한 대비를 처음에는 게을리 하지 않고 수비를 철저히 했으나 [[여몽]]이 병을 핑계로 전선을 떠났고 또한 후임으로 육구에 파견 나온 [[육손]]을 얕보아서 강릉, 공안에서 많은 병사와 군수품을 전선으로 보냈다. 이에 따라 관우는 양양과 번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서황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이후 손권은 관우군의 치중을 빼앗았늗네 그것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철수하였다. 관우는 사자를 몇 번이나 여몽의 곁으로 보내 연락하려 했으나 여몽은 그 때마다 관우와 관우의 부하의 처자를 생포하고 후대하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 사자를 통해 알렸다. 사자의 입으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관우의 부하들은 적대심을 잃었고, 이윽고 관우의 군은 대부분 손권군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관우는 당양으로 갔고 손권이 강릉에서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쪽의 맥성에 머물렀다. 이후 관우는 상용의 [[유봉]], [[맹달]]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삼국지 촉지 유봉전) 관우의 어려운 상황을 눈치 챈 손권은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관우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219년 12월 임저에서 관우는 관평 등과 함께 추격당하여 포로가 되고 참수당하였다. 이후 관우의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으며 조조는 관우에게 예를 표하며 그를 매장해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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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력== | ||
+ | ===무력=== | ||
+ | *청룡언월도 | ||
+ | 폭이 넓은 박도인 청룡도를 언월도 형태로 만든 물건을 뜻하며, 관우가 사용함으로써 유명해진 무기이다. | ||
+ | 삼국지연의에서는 도원결의 직후 의용병을 일으킬 때 쌍고검, 장팔사모와 대장간에서 함께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무게는 82근이며 냉염거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관우가 사용했으며 관우가 죽은 후에는 오나라의 장수 반장이 사용했다. 후에 관우의 차남 관흥이 반장을 죽이고 아버지의 청룡언월도를 되찾아 사용하게 된다. 관흥이 죽은 후에는 언급이 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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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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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하를 가로챈 [[동탁]]의 횡포에 반대하여 원소를 맹주로 18제후의 연합군이 뭉쳤다. 동탁 다토를 위해 낙양으로 진격하자 동탁은 낙양의 관문 격인 호뢰관에 화웅을 보내 지키게 한다. 연합군은 동탁군의 용장 화웅의 출중한 무예에 네 명의 대장을 잃고 동등하던 기세가 꺾인다. 강동의 맹호라는 손견마저도 패하고 화웅의 무서운 위세에 눌린 연합군은 진퇴양난에 처한다. 이 때 유비를 엄호하던 관우가 나타나 화웅의 목을 베어 바치겠노라고 한다. 원소와 원술은 기세등등한 관우가 일개 현령인 유비 휘하의 마궁수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관우를 꾸짖으며 출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웅 조조가 보는 눈이 있어 그들을 진정시키고 출진에 앞서 뜨거운 전별주를 따라준다. 관우는 술잔을 맡겨두고 손살 같이 말을 몰고 나가 신들린 솜씨로 화웅의 목을 베어 연합군의 진영에 바친다. 그리고 맡겨두었던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시고는 술이 따뜻해서 좋다며 대답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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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마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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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우는 [[여포]]의 항장인 장료와 함께 백마현을 공격하던 원소의 장수인 안량 공격을 조조로부터 명받았다. 관우는 안량의 기인과 덮개를 보고 말에 채찍질하여 돌격해 대군의 한복판에서 안량을 찔러 죽이고 안량의 목을 가져갔다. 이 때 원소군 제장에서 상대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조는 즉각 상을 표하고 관우를 한수정후로 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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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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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우가 독화살을 맞았을 때 뼈까지 독이 스며들어 명의 [[화타]]가 그의 팔꿈치를 절개하여 독이 스며든 부분을 파낸 적이 있다. 그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옆의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를 먹으며 옆의 사람과 태연히 담소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 ||
+ | 또한 손권이 관우에게 관우의 딸과 [[손권]]의 자식과의 혼인 신청을 걸어왔을 때 관우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어찌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보낼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거절하여 손권을 화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화들을 보았을 때 그의 성격은 자존심이 강하며 오만한 기질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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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연의]]에서 관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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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신장 9척, 2척의 수염, 대추빛의 얼굴색을 지니고 82근에 달하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며 적토마를 타는 인물로 그려진다. 주인공적 존재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활약상을 매우 두드러지게 표현해놓았다. 그 예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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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탁]] 부하인 맹장 화웅을 조조가 권하는 술이 식기 전에 베어낸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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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조]]의 곁을 떠날 때 조조군의 검문에 있는 6명의 장군을 베면서 돌파한 오관돌파의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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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손권]]군에서 처형된 뒤 [[여몽]]을 재앙으로 죽인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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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의 야담이나 원곡, 경곡 등의 창작에서 그의 이야기가 적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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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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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우와 땅을 나눠 접경하고 있었는데, 관우가 매섭과 빼어난데다(후략) - 여몽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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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우는 용맹하여 전쟁을 잘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입니다. - 온회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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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략) 관우와 장비는 삼군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후략) - 유엽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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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촉나라는 작은 나라일 뿐이며, 명장으로는 오직 관우만 있었습니다. - 유엽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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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웁니다. - 곽가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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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략) 관우가 자신의 용맹함과 명성에 기대어 병사를 인솔하는 정확한 법칙이 없었으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돌발적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앞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병사들을 잃게 된 것입니다. - 요립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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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 | ||
+ | 관우가 죽고나서 수 천년간 사람들은 관우의 의리와 충성심을 높히 기려 중국의 가장 만연한 민간신앙으로 [[관공신앙]]이 자리잡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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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 관우의 영웅적 면모는 [[삼합회]]가 숭배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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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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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우(영웅을 넘어 신이 된 사람), 남덕현 저, 현자의마을, 2014. 03. 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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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우, 이마이즈미 준노스케 저, 이만옥 역, 예담, 2002. 06. 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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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산백과 - 관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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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위키백과 - 관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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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공신앙]] 참고하기 | + | [[관공신앙]] [[삼합회]] 참고하기 |
[[분류:인물]] | [[분류:인물]] |
2017년 6월 25일 (일) 23:46 기준 최신판
관우(劉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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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산시성 원청현 |
사망 |
220(출생 ?) |
별칭 | 미염공 |
시호 |
장목후(壯繆侯),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國忠義大帝)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 삼계복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 (三界伏魔大帝神位 願天尊關聖帝君) |
목차
개요
자(字)는 운장(雲長,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繆侯, 壯穆侯라고도 쓴다)이다. 오래전부터 중국의 민간에서 충의(忠義)와 무용(武勇)의 상징으로 여겨져 무성(武聖)이나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제성군(關帝聖君) 등으로 숭배되었고, 줄여서 관성제, 관제군, 관제, 성제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지연의》에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劉備)·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미염공(美髯公)이나 관이야(關二爺) 등으로도 불린다.
생애
유비를 섬기다
정사에서는 관우의 초창기 행적이 잘 기록되어있지 않다. 관우전에 의하면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관우는 의용군을 이끌던 유비, 장비와 접촉해 장비와 함께 유비의 호위관을 맡았다. 유비가 평원의 상이 되자 관우는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었다. 장비전을 보면 이때 유비는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로 형제의 연을 맺었으며 관우가 장비보다 연상인 이유로 형님으로 여겼다.
관우의 초기 군사적 업적 또한 많이 남겨져 있지 않다. 조조가 관우를 자신의 장수로 삼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 유비가 방랑하던 시절, 동탁토벌전, 공손찬 아래에 서주에 있었을 때 등 유비의 세력은 높은 평가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관우 또한 많은 업적이 있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 초창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은 불가하다.
충의를 일관하다
건안 5년 유비가 조조에게 패배해서 원소에게 달아났고, 관우는 그 전쟁에 의해 조조의 포로가 된다. 조조는 앞서 언급하듯 관우를 자신의 장수로 삼기 위해 좋은 대접을 하는 등의 많은 노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관우가 자신의 밑에 머무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우는 유비를 배신할 생각이 없으며 조조에 극진한 대접에 보답이 끝나면 떠날 의사를 표현하였다. 이후 관우는 은혜를 갚기 위해 조조가 원소와의 전쟁을 시작했을 때 원소의 맹장인 안량을 죽이고 그의 목을 조조에게 주었다. 이후 안량을 무찌른 공을 세웠기 때문에 관우는 유비의 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큰 상을 주어 한 번 더 짐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관우는 이를 받지 않고 조조에게 편지로 이별의 의사를 표시한 뒤 다시 유비의 곁으로 떠난다. 조조는 그 의협심에 감탄해서 관우를 추격하려는 부하들을 말렸다고 전해진다.
형주를 맡다
이후 유비는 원소를 떠나 형주의 유표에게로 갔다. 관우 역시 유비와 동행하였다.
하지만 곧 유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기회를 틈타 조조가 형주로 침공해왔다. 이 때 유비는 수세의 불리함을 알고 본인은 퇴각하였으며, 관우에게 수백 척의 선단으로 구성된 별동대를 이끌라고 지휘하였다. 퇴각 중 장판의 당양에서 조조군의 추격을 받아 유비는 샛길을 이용한 길을 사용하여 한진으로 달아났고, 관우의 별동대와 합류하여 달아나 함께 하구로 향하였다.
손권과의 충돌
건안 20년 형주 영유를 둘러싼 분쟁이 해결되지 않아 속이 끓는 손권의 명령으로 여몽 등이 장사, 계양, 영릉 세 군을 습격하여 관우는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익양에서 포진하였다. 유비도 대군을 이끌고 관우의 조력으로 향하여 한 때는 유,손 동맹의 붕괴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관우와 통한 장사의 안성, 유, 다릉 세 현과 양주, 여흥의 영신현의 관리 등이 계양의 음산성에서 모반을 일으켰고 이어서 중랑장인 원룡, 안성의 현장 오탕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해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는 등, 이와 같은 것들이 양 진영에 화평을 맺도록 초래하여, 관우와 노숙의 대담이 실현되었다. 회담은 손권측의 노숙의 페이스로 진행하였고, 관우는 계속 재고 있었다. 결국 상수를 경계선으로 하여 장사, 강하, 계양은 손권의 땅으로하고 남군, 무릉, 그리고 한 번 빼앗겼었던 영릉이 유비의 땅이 되었다.
건안 22년 노숙의 사후 육구에 부임한 여몽은 관우를 공격하여 멸하려고 하는 계획을 몰래 세우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보다 그 이상으로 관우와 친밀히 접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형주에서 통치 방식은 은덕과 위신이 잘 퍼져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이후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과 손권의 자식과의 혼인 신청을 걸어왔을 때 관우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어찌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보낼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거절하여 손권을 화나게 하였다.
번성의 전투와 죽음
건안 23년 관우 등 유비의 측근들이 유비를 한중왕으로 추대했다.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게 되면서 관우는 전장군, 가절로 임명되었다. 그 후 관우는 수륙 양군을 인솔하고, 자식인 관평 등과 함께 번성을 막는 조인을 공격하였다. 조인의 원군으로 우금이 달려갔으나 대홍수가 일어나 우금의 배가 수몰되었다. 관우는 선단을 이끌고 공격을 하여 우금과 그가 이끌던 3만의 군사를 항복시켜 방덕을 베었다. 또한 이 때 형주자사인 호수, 남향태수인 부방 등이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관우는 번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별장을 파견하여 여상이 막는 양양까지 포위하였다. 이후 관우는 사방에 인수를 뿌려 양, 겹, 육혼과 같은 조조 영내의 도둑떼 등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업에서는 승상연인 위풍까지도 관우를 통하여 반역을 일으켜 중원은 흔들렸다. 조조는 이에 당황하여 수도를 천도하는 것 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조조의 군사인 사마의가 손권을 이용하여 장강 남쪽을 영유하는 조건으로 관우를 배후에서 공격하는 방안을 제안하여 조조는 손권과 밀약을 맺었다. 한편, 서황을 파견하여 조인을 구원하도록 하여 관우는 조조와 손권의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관우는 손권에 대한 대비를 처음에는 게을리 하지 않고 수비를 철저히 했으나 여몽이 병을 핑계로 전선을 떠났고 또한 후임으로 육구에 파견 나온 육손을 얕보아서 강릉, 공안에서 많은 병사와 군수품을 전선으로 보냈다. 이에 따라 관우는 양양과 번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서황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이후 손권은 관우군의 치중을 빼앗았늗네 그것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철수하였다. 관우는 사자를 몇 번이나 여몽의 곁으로 보내 연락하려 했으나 여몽은 그 때마다 관우와 관우의 부하의 처자를 생포하고 후대하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 사자를 통해 알렸다. 사자의 입으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관우의 부하들은 적대심을 잃었고, 이윽고 관우의 군은 대부분 손권군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관우는 당양으로 갔고 손권이 강릉에서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쪽의 맥성에 머물렀다. 이후 관우는 상용의 유봉, 맹달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삼국지 촉지 유봉전) 관우의 어려운 상황을 눈치 챈 손권은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관우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219년 12월 임저에서 관우는 관평 등과 함께 추격당하여 포로가 되고 참수당하였다. 이후 관우의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으며 조조는 관우에게 예를 표하며 그를 매장해주었다.
능력
무력
- 청룡언월도
폭이 넓은 박도인 청룡도를 언월도 형태로 만든 물건을 뜻하며, 관우가 사용함으로써 유명해진 무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도원결의 직후 의용병을 일으킬 때 쌍고검, 장팔사모와 대장간에서 함께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무게는 82근이며 냉염거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관우가 사용했으며 관우가 죽은 후에는 오나라의 장수 반장이 사용했다. 후에 관우의 차남 관흥이 반장을 죽이고 아버지의 청룡언월도를 되찾아 사용하게 된다. 관흥이 죽은 후에는 언급이 되지 않았다.
-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
천하를 가로챈 동탁의 횡포에 반대하여 원소를 맹주로 18제후의 연합군이 뭉쳤다. 동탁 다토를 위해 낙양으로 진격하자 동탁은 낙양의 관문 격인 호뢰관에 화웅을 보내 지키게 한다. 연합군은 동탁군의 용장 화웅의 출중한 무예에 네 명의 대장을 잃고 동등하던 기세가 꺾인다. 강동의 맹호라는 손견마저도 패하고 화웅의 무서운 위세에 눌린 연합군은 진퇴양난에 처한다. 이 때 유비를 엄호하던 관우가 나타나 화웅의 목을 베어 바치겠노라고 한다. 원소와 원술은 기세등등한 관우가 일개 현령인 유비 휘하의 마궁수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관우를 꾸짖으며 출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웅 조조가 보는 눈이 있어 그들을 진정시키고 출진에 앞서 뜨거운 전별주를 따라준다. 관우는 술잔을 맡겨두고 손살 같이 말을 몰고 나가 신들린 솜씨로 화웅의 목을 베어 연합군의 진영에 바친다. 그리고 맡겨두었던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시고는 술이 따뜻해서 좋다며 대답했다고 한다.
- 백마전투
관우는 여포의 항장인 장료와 함께 백마현을 공격하던 원소의 장수인 안량 공격을 조조로부터 명받았다. 관우는 안량의 기인과 덮개를 보고 말에 채찍질하여 돌격해 대군의 한복판에서 안량을 찔러 죽이고 안량의 목을 가져갔다. 이 때 원소군 제장에서 상대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조는 즉각 상을 표하고 관우를 한수정후로 봉하였다.
성격
관우가 독화살을 맞았을 때 뼈까지 독이 스며들어 명의 화타가 그의 팔꿈치를 절개하여 독이 스며든 부분을 파낸 적이 있다. 그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옆의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를 먹으며 옆의 사람과 태연히 담소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손권이 관우에게 관우의 딸과 손권의 자식과의 혼인 신청을 걸어왔을 때 관우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어찌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보낼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거절하여 손권을 화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화들을 보았을 때 그의 성격은 자존심이 강하며 오만한 기질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신장 9척, 2척의 수염, 대추빛의 얼굴색을 지니고 82근에 달하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하며 적토마를 타는 인물로 그려진다. 주인공적 존재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활약상을 매우 두드러지게 표현해놓았다. 그 예로
- 동탁 부하인 맹장 화웅을 조조가 권하는 술이 식기 전에 베어낸 이야기
- 조조의 곁을 떠날 때 조조군의 검문에 있는 6명의 장군을 베면서 돌파한 오관돌파의 이야기
등의 야담이나 원곡, 경곡 등의 창작에서 그의 이야기가 적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평가
관우와 땅을 나눠 접경하고 있었는데, 관우가 매섭과 빼어난데다(후략) - 여몽전
관우는 용맹하여 전쟁을 잘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입니다. - 온회전
(전략) 관우와 장비는 삼군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후략) - 유엽전
촉나라는 작은 나라일 뿐이며, 명장으로는 오직 관우만 있었습니다. - 유엽전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웁니다. - 곽가전
(전략) 관우가 자신의 용맹함과 명성에 기대어 병사를 인솔하는 정확한 법칙이 없었으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돌발적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앞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병사들을 잃게 된 것입니다. - 요립전
신앙
관우가 죽고나서 수 천년간 사람들은 관우의 의리와 충성심을 높히 기려 중국의 가장 만연한 민간신앙으로 관공신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관우의 영웅적 면모는 삼합회가 숭배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관우(영웅을 넘어 신이 된 사람), 남덕현 저, 현자의마을, 2014. 03. 15.
관우, 이마이즈미 준노스케 저, 이만옥 역, 예담, 2002. 06. 17.
두산백과 - 관우
중국 위키백과 - 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