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문화재 |명칭 = 중화문 |한자 = 中华門 |그림 = |그림설명 = |분류 = 성문 |소재지 = 남경 |면적 = 높이 14~25m /길이 24km |개방시간 = |입장...) |
Chenglong123 (토론 | 기여) (→답사다녀온 감상) |
||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6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3번째 줄: | 13번째 줄: | ||
}} | }} | ||
+ | -상위 문서:[[2015년 답사]] | ||
==중화문== | ==중화문== | ||
21번째 줄: | 22번째 줄: | ||
:명도성(明都城)의 남문(南门)으로, 명청(明淸) 양대에는 쥐바오먼[聚宝门]이라고 불렸던 난징[南京] 성문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규모를 갖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복잡하게 설계되었다. 모두 4개의 아치형 문과 3개의 옹성(瓮城), 그리고 27개의 장병동(藏兵洞)이 있다. 또한 마도(马道)가 있어서, 말을 타고 성 위로 올라갈 수 있다. | :명도성(明都城)의 남문(南门)으로, 명청(明淸) 양대에는 쥐바오먼[聚宝门]이라고 불렸던 난징[南京] 성문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규모를 갖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복잡하게 설계되었다. 모두 4개의 아치형 문과 3개의 옹성(瓮城), 그리고 27개의 장병동(藏兵洞)이 있다. 또한 마도(马道)가 있어서, 말을 타고 성 위로 올라갈 수 있다. | ||
− | + | ==중화문의 특징<ref>송재소, [중국 인문 기행] , 창비, 2015 </ref>== | |
− | + | 중화문은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이 건설한 남경성의 문 중 하나이다. 본래 남경성은 안쪽 문이 13개, 바깥쪽 문이 18개 있었으나 현재는 바깥문은 모두 사라졌고 안쪽문은 5개만 남아있다. 안쪽 13개 문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중화문이다. 중화문은 1366년부터 1386년까지 총 21년이 걸린 대공사를 통해 세워졌다. 중화문은 문이 4개나 있어서 위에서 보면 목目자의 모양을 띄고 있다. 벽돌은 각 지방에서 공출받아 사용하였는데 벽돌 실명제를 이용해 벽돌 책임자를 만들어 관리를 소홀히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벽돌에 문제가 있을 경우 책임자를 참수시켰다고 한다. 중화문은 원래 취보문(聚靌門)이라고 불렸으나 1931년 부터 중화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성문의 현판은 장개석이 직접 썻다. | |
− | |||
− | |||
− | + | 중화문은 난징 대학살의 배경이 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점령을 위해 상하이를 먼저 점령한 뒤 난징으로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1937년 12월 10일, 난징을 향해 일본의 맹공격이 시작되자 10만 중국군이 반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12일 오후 2시 일본군은 난징의 상징인 중화문을 폭격했고 13일에 중국의 수도를 장악했다. 점령 6주동안 일본군은 30만명의 중국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2만명의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대참극을 벌였다. 중화문은 이때 폭격으로 인해 많은 손상을 입었다. 본래 중화문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맨 위인 적루는 난징 대학살 사건 당시 파손되어 1995년 재건되었다. | |
− | + | 중화문의 눈에 띄는 특징은 첫 번째로 마도, 두 번째는 장병동이다. 마도(馬道)란 군수 물자를 실은 말을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이는 전시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장병동은 중화문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장병동은 반원형의 동굴로 평상시 병사들의 휴식처나 무기 저장소로 쓰였다. 전쟁 시에는 병사들을 숨기는 대기소로 사용하였다. 총 27개의 장병동이 있으며 장병 3천명까지 수용가능했다고 한다. 현재 장병동은 전시실과 기념품 판매점으로 쓰이고 있다. | |
− | |||
− | == | + | ==중화문에 얽힌 일화<ref>송재소, [중국 인문 기행] , 창비, 2015</ref>== |
− | + | 당시 강남의 갑부였던 심만삼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제보다도 재력이 뛰어날 정도였다.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초기, 재정적으로 부족할때 심만삼에게 재정적 도움을 부탁했다. 심만삼과 주원장은 각각 반절씩 중화문을 짓기로 하였다. 주원장보다 심만삼이 3일이나 빨리 중화문의 반절을 완성했다. 주원장은 그에게 민심을 빼앗기거나 자신의 지위에 도전할까 두려워했다. 주원장은 심만삼을 죽이기로 결심하나 마황후의 간언으로 인해 심만삼은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 |
+ | |||
+ | 중화문은 취보문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심만삼과 관련이 있다. 주원장이 중화문을 쌓을 때 자꾸만 기울어 게속 다시 쌓아야만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심만삼이 금은보화가 끊임없이 나오는 취보분이라는 요술 항아리를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주원장이 이를 성밑에 묻었다. 항아리를 묻자 신기하게도 성문이 기울어지지 않았고 중화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일 뿐이다. 사실 취보산 밑에 중화문이 있어 취보문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 ||
+ | |||
+ | ==다녀온 감상== | ||
+ | |||
+ | |||
+ | 조사했던 곳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 엄청난 경험이었다. 난징성의 문들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성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장병동을 직접 들어가자 높이와 깊이가 생각보다 훨씬 높고 깊어서 놀랐다. 기념관과 장병동 그리고 마도를 돌아보며 주원장이 건설하고자 했던 명나라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늦게 갔음에도 불구하고 조명을 잘 켜줘서 관람하기 수월했다. | ||
+ | |||
+ | 또한 가이드분이 중화문을 지을 때 벽돌이 충분히 튼튼하지 못하면 그 벽돌을 만든 사람과 그 벽돌을 검사한 사람 모두를 죽였다고 했는데, 이는 어찌보면 너무 가혹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성벽이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엄벌에 처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
==주석== | ==주석== | ||
<references group="주"/> | <references group="주"/> |
2015년 11월 26일 (목) 14:25 기준 최신판
중화문 中华門 | |
---|---|
분류 | 성문 |
면적 | 높이 14~25m /길이 24km |
소재지 | 남경 |
관람시간 | 약 1-2시간 |
추천관람시기 | 3-4월 |
-상위 문서:2015년 답사
중화문
중화문이란?[1]
- 명도성(明都城)의 남문(南门)으로, 명청(明淸) 양대에는 쥐바오먼[聚宝门]이라고 불렸던 난징[南京] 성문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규모를 갖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복잡하게 설계되었다. 모두 4개의 아치형 문과 3개의 옹성(瓮城), 그리고 27개의 장병동(藏兵洞)이 있다. 또한 마도(马道)가 있어서, 말을 타고 성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중화문의 특징[2]
중화문은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이 건설한 남경성의 문 중 하나이다. 본래 남경성은 안쪽 문이 13개, 바깥쪽 문이 18개 있었으나 현재는 바깥문은 모두 사라졌고 안쪽문은 5개만 남아있다. 안쪽 13개 문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중화문이다. 중화문은 1366년부터 1386년까지 총 21년이 걸린 대공사를 통해 세워졌다. 중화문은 문이 4개나 있어서 위에서 보면 목目자의 모양을 띄고 있다. 벽돌은 각 지방에서 공출받아 사용하였는데 벽돌 실명제를 이용해 벽돌 책임자를 만들어 관리를 소홀히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벽돌에 문제가 있을 경우 책임자를 참수시켰다고 한다. 중화문은 원래 취보문(聚靌門)이라고 불렸으나 1931년 부터 중화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성문의 현판은 장개석이 직접 썻다.
중화문은 난징 대학살의 배경이 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점령을 위해 상하이를 먼저 점령한 뒤 난징으로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1937년 12월 10일, 난징을 향해 일본의 맹공격이 시작되자 10만 중국군이 반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12일 오후 2시 일본군은 난징의 상징인 중화문을 폭격했고 13일에 중국의 수도를 장악했다. 점령 6주동안 일본군은 30만명의 중국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2만명의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대참극을 벌였다. 중화문은 이때 폭격으로 인해 많은 손상을 입었다. 본래 중화문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맨 위인 적루는 난징 대학살 사건 당시 파손되어 1995년 재건되었다.
중화문의 눈에 띄는 특징은 첫 번째로 마도, 두 번째는 장병동이다. 마도(馬道)란 군수 물자를 실은 말을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이는 전시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장병동은 중화문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장병동은 반원형의 동굴로 평상시 병사들의 휴식처나 무기 저장소로 쓰였다. 전쟁 시에는 병사들을 숨기는 대기소로 사용하였다. 총 27개의 장병동이 있으며 장병 3천명까지 수용가능했다고 한다. 현재 장병동은 전시실과 기념품 판매점으로 쓰이고 있다.
중화문에 얽힌 일화[3]
당시 강남의 갑부였던 심만삼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제보다도 재력이 뛰어날 정도였다.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초기, 재정적으로 부족할때 심만삼에게 재정적 도움을 부탁했다. 심만삼과 주원장은 각각 반절씩 중화문을 짓기로 하였다. 주원장보다 심만삼이 3일이나 빨리 중화문의 반절을 완성했다. 주원장은 그에게 민심을 빼앗기거나 자신의 지위에 도전할까 두려워했다. 주원장은 심만삼을 죽이기로 결심하나 마황후의 간언으로 인해 심만삼은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중화문은 취보문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심만삼과 관련이 있다. 주원장이 중화문을 쌓을 때 자꾸만 기울어 게속 다시 쌓아야만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심만삼이 금은보화가 끊임없이 나오는 취보분이라는 요술 항아리를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주원장이 이를 성밑에 묻었다. 항아리를 묻자 신기하게도 성문이 기울어지지 않았고 중화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일 뿐이다. 사실 취보산 밑에 중화문이 있어 취보문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다녀온 감상
조사했던 곳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 엄청난 경험이었다. 난징성의 문들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성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장병동을 직접 들어가자 높이와 깊이가 생각보다 훨씬 높고 깊어서 놀랐다. 기념관과 장병동 그리고 마도를 돌아보며 주원장이 건설하고자 했던 명나라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늦게 갔음에도 불구하고 조명을 잘 켜줘서 관람하기 수월했다.
또한 가이드분이 중화문을 지을 때 벽돌이 충분히 튼튼하지 못하면 그 벽돌을 만든 사람과 그 벽돌을 검사한 사람 모두를 죽였다고 했는데, 이는 어찌보면 너무 가혹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성벽이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엄벌에 처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