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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묘란?=== | ===부자묘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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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묘(夫子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일반적으로는 공묘(孔廟)라고도 한다. 이는 남경(南京)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자 사당으로, 공자를 존경하는 의미의 '공부자(孔夫子)'에서 이름이 유래 됐다. 간단히는 문묘나 문선왕묘라고도 불리는 부자묘는 중국의 4대 문묘중 하나이며 남경에서 어머니의 강이라고 불리는 진회하(秦淮河)의 내진회의 중심이다. 부자묘의 내부는 크게 쿵먀오(孔廟), 쉐궁(學宮), 장난궁위안(江南貢院)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전역의 공자묘 중에서는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지만 강남(江南)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오늘날에는 남경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손꼽힌다. 또한 중국의 가장 큰 시가(市街)이며 상하이청황먀오(上海城隍廟), 수조우쉬엔먀오관(苏州玄妙观), 베이징톈치아오(北京天桥)와 함께 중국의 사대(四大) 번화 시가로 불린다. | :부자묘(夫子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일반적으로는 공묘(孔廟)라고도 한다. 이는 남경(南京)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자 사당으로, 공자를 존경하는 의미의 '공부자(孔夫子)'에서 이름이 유래 됐다. 간단히는 문묘나 문선왕묘라고도 불리는 부자묘는 중국의 4대 문묘중 하나이며 남경에서 어머니의 강이라고 불리는 진회하(秦淮河)의 내진회의 중심이다. 부자묘의 내부는 크게 쿵먀오(孔廟), 쉐궁(學宮), 장난궁위안(江南貢院)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전역의 공자묘 중에서는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지만 강남(江南)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오늘날에는 남경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손꼽힌다. 또한 중국의 가장 큰 시가(市街)이며 상하이청황먀오(上海城隍廟), 수조우쉬엔먀오관(苏州玄妙观), 베이징톈치아오(北京天桥)와 함께 중국의 사대(四大) 번화 시가로 불린다. | ||
− | ===부자묘의 역사<ref>【百度】南京夫子庙=== | + | ===부자묘의 역사<ref>【百度】南京夫子庙</ref>=== |
남경 부자묘는 고대 강남의 지도리이며, 금릉역사문인의 주축이다. 지금도 부자묘가 위치한 곳은 남경의 번화가이지만 특히나 내진회의 왼쪽인 십리진회는 육조시대와 명,청 시대에 극도의 화려함을 이루었던 곳이다. 남경이 무려 11번에 걸쳐 수도가 되었기 때문에 육조시대에 부자묘 지역은 상당히 번화가였다. 처음 부자묘는 송 대 1034년으로 동진궁 옛터에 세워졌다. 부자묘는 명,청 시대 남경의 뮨교(文桥)중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남쪽의 각 성의 중심에 해당하는 문교 건축군이기도 하다. 사당 앞의 진회하에 맞대어 조벽을 조성했는데 부자묘의 조벽은 중국 조벽 중 최고로 일컬어 진다. 예전에 공묘는 배치형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벽-영성문-동서패방'으로 사당앞의 광장을 이루는 요소들이 존재헀고, 영성문 앞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부자묘의 반지와이다. 반지(泮沚)는 명대 1575년에 건축되었으며 기원을 주례(周禮)에 둔다. 옛날에는 입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자를 받들어야했기에 각지에 공묘가 있었으며 국가 사전 중 하나에 속하였다. 그렇기에 공묘의 특징은 사당에 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경 교육의 성지인 학궁(學宮)은 원래는 동진 함강(咸康) 3년(337년) 진회 남안에 태학(太學)을 세웠다가 북송 경우 (北宋 景祐) 원년 1034년에 지금의 이 자리로 학궁과 공묘를 옮겨 온 것이다. 명대에 부자묘는 국자감 과거 고사장으로 고생들이 운집하기도 하였으며 잠시 명 말, 청 초 강남의 상업 거리 풍모를 잃은 적도 있었으나 남경시와 인민정부에 의해 그 모습을 회복하였다. | 남경 부자묘는 고대 강남의 지도리이며, 금릉역사문인의 주축이다. 지금도 부자묘가 위치한 곳은 남경의 번화가이지만 특히나 내진회의 왼쪽인 십리진회는 육조시대와 명,청 시대에 극도의 화려함을 이루었던 곳이다. 남경이 무려 11번에 걸쳐 수도가 되었기 때문에 육조시대에 부자묘 지역은 상당히 번화가였다. 처음 부자묘는 송 대 1034년으로 동진궁 옛터에 세워졌다. 부자묘는 명,청 시대 남경의 뮨교(文桥)중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남쪽의 각 성의 중심에 해당하는 문교 건축군이기도 하다. 사당 앞의 진회하에 맞대어 조벽을 조성했는데 부자묘의 조벽은 중국 조벽 중 최고로 일컬어 진다. 예전에 공묘는 배치형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벽-영성문-동서패방'으로 사당앞의 광장을 이루는 요소들이 존재헀고, 영성문 앞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부자묘의 반지와이다. 반지(泮沚)는 명대 1575년에 건축되었으며 기원을 주례(周禮)에 둔다. 옛날에는 입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자를 받들어야했기에 각지에 공묘가 있었으며 국가 사전 중 하나에 속하였다. 그렇기에 공묘의 특징은 사당에 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경 교육의 성지인 학궁(學宮)은 원래는 동진 함강(咸康) 3년(337년) 진회 남안에 태학(太學)을 세웠다가 북송 경우 (北宋 景祐) 원년 1034년에 지금의 이 자리로 학궁과 공묘를 옮겨 온 것이다. 명대에 부자묘는 국자감 과거 고사장으로 고생들이 운집하기도 하였으며 잠시 명 말, 청 초 강남의 상업 거리 풍모를 잃은 적도 있었으나 남경시와 인민정부에 의해 그 모습을 회복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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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럼 당시의 많은 문인들이 부자묘의 아름다운 정경에 취해 수많은 명작들을 창작했었다. | 이 처럼 당시의 많은 문인들이 부자묘의 아름다운 정경에 취해 수많은 명작들을 창작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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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지식백과] | ||
+ | 푸쯔먀오 [Nanjing Confucius Temple, 夫子庙]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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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의 부자묘는 1034년에 처음 세워졌지만 전쟁과 화재로 몇 차례 소실되어 두 차례 중건되었다. 특히 1984년에는 고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역사 전문가들이 재건 작업에 참여하였다. 부자묘 주변 지역은 모든 건물이 전통 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남경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앞을 흐르는 진회하(秦淮河)와 야시장이 그 운치를 더한다. 매년 음력 5월 초에는 보름에 걸쳐 '금릉등회'라는 행사가 열려 거리가 등불로 장식되고, 시민들은 금릉서화와 무술기공, 민간공예, 전통 풍속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한다. 부자묘 주변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언제든 도시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현재까지 약 8,0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1991년 중국 40대 여행 성지 중 하나로 지정된 남경여행의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다. | 남경의 부자묘는 1034년에 처음 세워졌지만 전쟁과 화재로 몇 차례 소실되어 두 차례 중건되었다. 특히 1984년에는 고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역사 전문가들이 재건 작업에 참여하였다. 부자묘 주변 지역은 모든 건물이 전통 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남경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앞을 흐르는 진회하(秦淮河)와 야시장이 그 운치를 더한다. 매년 음력 5월 초에는 보름에 걸쳐 '금릉등회'라는 행사가 열려 거리가 등불로 장식되고, 시민들은 금릉서화와 무술기공, 민간공예, 전통 풍속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한다. 부자묘 주변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언제든 도시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현재까지 약 8,0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1991년 중국 40대 여행 성지 중 하나로 지정된 남경여행의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다. |
2015년 11월 30일 (월) 21:36 기준 최신판
부자묘
남경부자묘 南京夫子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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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문화거리 |
소재지 | 남경 |
관람시간 | 약 3~4시간 |
입장료 | 무료 |
-상위 문서:2015년 답사
부자묘란?
- 부자묘(夫子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일반적으로는 공묘(孔廟)라고도 한다. 이는 남경(南京)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자 사당으로, 공자를 존경하는 의미의 '공부자(孔夫子)'에서 이름이 유래 됐다. 간단히는 문묘나 문선왕묘라고도 불리는 부자묘는 중국의 4대 문묘중 하나이며 남경에서 어머니의 강이라고 불리는 진회하(秦淮河)의 내진회의 중심이다. 부자묘의 내부는 크게 쿵먀오(孔廟), 쉐궁(學宮), 장난궁위안(江南貢院)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전역의 공자묘 중에서는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지만 강남(江南)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오늘날에는 남경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손꼽힌다. 또한 중국의 가장 큰 시가(市街)이며 상하이청황먀오(上海城隍廟), 수조우쉬엔먀오관(苏州玄妙观), 베이징톈치아오(北京天桥)와 함께 중국의 사대(四大) 번화 시가로 불린다.
부자묘의 역사[1]
남경 부자묘는 고대 강남의 지도리이며, 금릉역사문인의 주축이다. 지금도 부자묘가 위치한 곳은 남경의 번화가이지만 특히나 내진회의 왼쪽인 십리진회는 육조시대와 명,청 시대에 극도의 화려함을 이루었던 곳이다. 남경이 무려 11번에 걸쳐 수도가 되었기 때문에 육조시대에 부자묘 지역은 상당히 번화가였다. 처음 부자묘는 송 대 1034년으로 동진궁 옛터에 세워졌다. 부자묘는 명,청 시대 남경의 뮨교(文桥)중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남쪽의 각 성의 중심에 해당하는 문교 건축군이기도 하다. 사당 앞의 진회하에 맞대어 조벽을 조성했는데 부자묘의 조벽은 중국 조벽 중 최고로 일컬어 진다. 예전에 공묘는 배치형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벽-영성문-동서패방'으로 사당앞의 광장을 이루는 요소들이 존재헀고, 영성문 앞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부자묘의 반지와이다. 반지(泮沚)는 명대 1575년에 건축되었으며 기원을 주례(周禮)에 둔다. 옛날에는 입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자를 받들어야했기에 각지에 공묘가 있었으며 국가 사전 중 하나에 속하였다. 그렇기에 공묘의 특징은 사당에 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경 교육의 성지인 학궁(學宮)은 원래는 동진 함강(咸康) 3년(337년) 진회 남안에 태학(太學)을 세웠다가 북송 경우 (北宋 景祐) 원년 1034년에 지금의 이 자리로 학궁과 공묘를 옮겨 온 것이다. 명대에 부자묘는 국자감 과거 고사장으로 고생들이 운집하기도 하였으며 잠시 명 말, 청 초 강남의 상업 거리 풍모를 잃은 적도 있었으나 남경시와 인민정부에 의해 그 모습을 회복하였다.
문교(文敎)중심 부자묘
부자묘는 명청시기 남경의 문교(文敎) 중심지로써 많은 유명인 들이 이곳에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작품들을 창작했다. 대표적으로 조우위(周瑜), 왕다오(王导), 쎼안(谢安), 리바이(李白), 뚜무(杜牧), 우징즈(吴敬梓)등의 백인의 저명한 군사가(軍事家), 정치가, 문학가들이 이곳에서 불후한 업적을 남겼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중하나로 뚜무(杜牧)의 <박진회>라는 시를 보자.
泊秦淮 (杜牧) 烟笼寒水月笼沙, 夜泊秦淮近酒家。 商女不知亡国恨, 隔江犹唱后庭花。
이 처럼 당시의 많은 문인들이 부자묘의 아름다운 정경에 취해 수많은 명작들을 창작했었다.
현재의 부자묘[2]
남경의 부자묘는 1034년에 처음 세워졌지만 전쟁과 화재로 몇 차례 소실되어 두 차례 중건되었다. 특히 1984년에는 고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역사 전문가들이 재건 작업에 참여하였다. 부자묘 주변 지역은 모든 건물이 전통 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남경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앞을 흐르는 진회하(秦淮河)와 야시장이 그 운치를 더한다. 매년 음력 5월 초에는 보름에 걸쳐 '금릉등회'라는 행사가 열려 거리가 등불로 장식되고, 시민들은 금릉서화와 무술기공, 민간공예, 전통 풍속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한다. 부자묘 주변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언제든 도시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현재까지 약 8,0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1991년 중국 40대 여행 성지 중 하나로 지정된 남경여행의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