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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마오쩌둥의 비판에 부응해 일어난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핵심운동. 장부, 창고, 자재, 노동점수 면에서 간부의 부정이 없었는지를 심사하는 운동이다. 즉, 기본적으로 기층관료들에 대한 정풍운동이었다. 농촌 인민공사에서 점차 도시의 기업으로 확대되었다. 상부에서 당조직이 공작조를 파견하여 간부를 심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위로부터의 정풍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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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마오쩌둥]]의 비판에 부응해 일어난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핵심운동. 장부, 창고, 자재, 노동점수 면에서 간부의 부정이 없었는지를 심사하는 운동이다. 즉, 기본적으로 기층관료들에 대한 정풍운동이었다. 농촌 [[인민공사]]에서 점차 도시의 기업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는 마오를 중심으로 한 마오주의자들과 류샤오치를 중심으로 하는 당 지도부들 간의 정치투쟁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마오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실시하며「전10조前十條」를 통해 '''인민공사를 사회경제적 단위로 기능하도록 재확립하여 농촌지역에서 집단주의를 회복하고 당내의 부패와 관료엘리트 주의를 깨끗이 쓸어버리는'''운동을 개시한다. 사청운동은 단순한 부패행위 척결이 아닌 당과 부농 사이의 은밀한 공모와 이들이 농촌인구 대다수를 착취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류샤오치를 위시한 당 지도부에게 있어서 인민대중을 동원하고 계급투쟁을 강화하자는 마오주의적 호소는 농업생산성의 유지와 중국 공산당의 조직적 생명, 그리고 당과 국가기구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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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지도부는 바로 반격에 나선다. 1963년 9월, 당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이 「후10조后十条 초안」을 쓰고, 뒤이어 1964년 9월, 류샤오치가 <후10조后十条 수정초안>을 발표힌다. 두 개의 문건은 마오의 전 10조에서 제기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하 구체적인 지침을 담고 있었는데 실제 목적은 운동의 급진적 경향을 누그러뜨리고 그 규모를 제한하며 더 중요하게는 운동을 당 중앙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었다. 특히, 두 문건은 모두 「전10조前十條」에서 강조했던 농민조직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주도권은 류사오치 쪽이 갖게 된다. 사청운동은 마오쩌둥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지만, 추후 이것을 주도한 것은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한 당조직이었다. 이후, 사청운동은 상부에서 당조직이 공작조를 파견하여 간부를 심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위로부터의 [[정풍운동]]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1964년 전국 1/3의 기층단위 지도권이 공산당에 있지 않고 적과 적의 동맹자들에게 있다고 하면서, 그들로부터 권력탈취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지도권의 1/3이 공산당에 있지 않다는 주장은 류샤오치의 주장을 마오쩌둥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 따라 확대된 사청운동은 1966년 상반기까지 전국의 약 1/3에 해당하는 694개 현·시와 약 3.9%의 국영 공업 및 교통 관련 단위에서 진행되었다. 사청운동은 중앙 또는 상급 기관에서 공작조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전국적으로 약 156만 명이 참가했다. 사청운동 과정에서 지방간부들에 대한 직위 박탈, 구타, 감금 등의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그에 따라 자살하거나 도망하는 자도 있었다. 또한 사청운동 과정에서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 새로운 자본가계급 등의 '모자 씌우기'도 이루어졌다. <br><br> 한편, 사청운동의 진행과정에서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의견 분열이 심화되었다. 1964년 말 마오쩌둥은 사청운동의 중점 대상이 '주자파'라고 주장함으로써, 류샤오치를 위시한 당 고위간부들과의 이견을 표출했다. 이러한 이견 표출은 1963년 이후의 농업·외교·교육·문화 정책에 대한 비판과 병행되었으며, 그 결과 마오쩌둥은 1965년 1월 중국에 수정주의가 출현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러한 와중에 [[양상쿤]] 사건과 [[뤄루이칭]] 비판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또한 1965년 11월 10일에는 [[야오원위안]]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이 상하이의 『문회보』에 발표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공중앙 선전부와 베이징시당위원회에 대한 마오쩌둥과 급진파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문혁을 촉발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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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5개년 계획이 진행되고 농촌의 소유제가 집체소유로 전환되었다.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대로라면 계급이 이제 소멸된 것이므로 다음 과제는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집체소유로 계급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모순은 항상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의 모순을 해결하면 또 하나의 모순이 제기되며, 따라서 혁명은 계속해서 영역을 바꿔가며 전개되어야 한다는 '부단혁명론'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치혁명, 그 다음 토지혁명, 그 다음 소유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혁명을 달성했지만, 혁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치와 사상전선, 그리고 기술전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지다.  <br> 마오쩌둥은 1957년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 이후 적대적 계급이 소멸되었지만 중국 사회의 모순은 이제 인민내부의 모순이라는 형태로 새로이 전환됐으며, 인민내부의 모순의 핵심은 곧 '3대 차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싸움은 종결되지 않았으며, 이 탓에 인민내부의 모순은 언제든지 우리 편의 모순에서 적대적 모순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가능성을 부단혁명을 통해 차단해야한다는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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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5개년 계획]]이 진행되고 농촌의 소유제가 집체소유로 전환되었다.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대로라면 계급이 이제 소멸된 것이므로 다음 과제는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집체소유로 계급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모순은 항상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의 모순을 해결하면 또 하나의 모순이 제기되며, 따라서 혁명은 계속해서 영역을 바꿔가며 전개되어야 한다는 '[[부단혁명론]]'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치혁명, 그 다음 토지혁명, 그 다음 소유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혁명을 달성했지만, 혁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치와 사상전선, 그리고 기술전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지다.  <br><br> 마오쩌둥은 1957년 [[「인민내부 모순의 올바른 처리 문제에 관하여」]]에서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 이후 적대적 계급이 소멸되었지만 중국 사회의 모순은 이제 인민내부의 모순이라는 형태로 새로이 전환됐으며, 인민내부의 모순의 핵심은 곧 '[[3대 차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싸움은 종결되지 않았으며, 이 탓에 인민내부의 모순은 언제든지 우리 편의 모순에서 적대적 모순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가능성을 부단혁명을 통해 차단해야한다는 것이다. <br><br> 하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은 일선에서 물러나 류사오치에게 주요한 일들을 넘기게 된다. 이에 1960년대 초부터 중국 사회는 '조정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마오쩌둥이 언급했던 '3대 차이'의 문제가 심화되었다. 농촌과 도시, 농민과 노동자의 격차는 확대됐고, 노동자와 간부,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격차도 커졌다. 고정공과 농촌출신 임시 노동자 사이의 격차도 확대됐다. 간부들은 관료로서 힘을 키웠고, 이전에 부각되었던 관료적 위계질서의 강화라는 문제가 다시 부각됐다. 이에 1963년 마오쩌둥은 조정기의 노선에 반대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두 가지 노선이 존재한다는 비판을 제기했고, 이 비판에 부응해 [[5반운동]](오직절도, 투기매점, 겉치레 낭비, 분산주의, 관료주의에 반대)과 4청운동이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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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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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4청운동은 자연스럽게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고, 이 둘을 잘 이어서 진행하라는 지시도 하달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4청운동 시기에 진행되었던 위로부터의 정풍과 문화대혁명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모호했다. 문화대혁명의 초기 전개 양상이 4청운동과 유사한 양상을 띠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듯 초기 문혁은 내용과 형태 면에서 사청운동의 연속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문혁의 최대 피해자로 아려진 류샤오치가 사실은 초기 문혁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는 견해가 최근 연구에서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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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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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백승욱, 살림지식총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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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시대의 탄생』, 안치영, 서남동양학술총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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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2019년 5월 19일 (일) 14:50 기준 최신판

내용

1963년 마오쩌둥의 비판에 부응해 일어난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핵심운동. 장부, 창고, 자재, 노동점수 면에서 간부의 부정이 없었는지를 심사하는 운동이다. 즉, 기본적으로 기층관료들에 대한 정풍운동이었다. 농촌 인민공사에서 점차 도시의 기업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는 마오를 중심으로 한 마오주의자들과 류샤오치를 중심으로 하는 당 지도부들 간의 정치투쟁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마오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실시하며「전10조前十條」를 통해 인민공사를 사회경제적 단위로 기능하도록 재확립하여 농촌지역에서 집단주의를 회복하고 당내의 부패와 관료엘리트 주의를 깨끗이 쓸어버리는운동을 개시한다. 사청운동은 단순한 부패행위 척결이 아닌 당과 부농 사이의 은밀한 공모와 이들이 농촌인구 대다수를 착취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류샤오치를 위시한 당 지도부에게 있어서 인민대중을 동원하고 계급투쟁을 강화하자는 마오주의적 호소는 농업생산성의 유지와 중국 공산당의 조직적 생명, 그리고 당과 국가기구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당 지도부는 바로 반격에 나선다. 1963년 9월, 당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이 「후10조后十条 초안」을 쓰고, 뒤이어 1964년 9월, 류샤오치가 <후10조后十条 수정초안>을 발표힌다. 두 개의 문건은 마오의 전 10조에서 제기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하 구체적인 지침을 담고 있었는데 실제 목적은 운동의 급진적 경향을 누그러뜨리고 그 규모를 제한하며 더 중요하게는 운동을 당 중앙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었다. 특히, 두 문건은 모두 「전10조前十條」에서 강조했던 농민조직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주도권은 류사오치 쪽이 갖게 된다. 사청운동은 마오쩌둥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지만, 추후 이것을 주도한 것은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한 당조직이었다. 이후, 사청운동은 상부에서 당조직이 공작조를 파견하여 간부를 심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위로부터의 정풍운동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1964년 전국 1/3의 기층단위 지도권이 공산당에 있지 않고 적과 적의 동맹자들에게 있다고 하면서, 그들로부터 권력탈취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지도권의 1/3이 공산당에 있지 않다는 주장은 류샤오치의 주장을 마오쩌둥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 따라 확대된 사청운동은 1966년 상반기까지 전국의 약 1/3에 해당하는 694개 현·시와 약 3.9%의 국영 공업 및 교통 관련 단위에서 진행되었다. 사청운동은 중앙 또는 상급 기관에서 공작조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전국적으로 약 156만 명이 참가했다. 사청운동 과정에서 지방간부들에 대한 직위 박탈, 구타, 감금 등의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그에 따라 자살하거나 도망하는 자도 있었다. 또한 사청운동 과정에서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 새로운 자본가계급 등의 '모자 씌우기'도 이루어졌다.

한편, 사청운동의 진행과정에서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의견 분열이 심화되었다. 1964년 말 마오쩌둥은 사청운동의 중점 대상이 '주자파'라고 주장함으로써, 류샤오치를 위시한 당 고위간부들과의 이견을 표출했다. 이러한 이견 표출은 1963년 이후의 농업·외교·교육·문화 정책에 대한 비판과 병행되었으며, 그 결과 마오쩌둥은 1965년 1월 중국에 수정주의가 출현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러한 와중에 양상쿤 사건과 뤄루이칭 비판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또한 1965년 11월 10일에는 야오원위안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이 상하이의 『문회보』에 발표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공중앙 선전부와 베이징시당위원회에 대한 마오쩌둥과 급진파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문혁을 촉발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배경

제1차 5개년 계획이 진행되고 농촌의 소유제가 집체소유로 전환되었다.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대로라면 계급이 이제 소멸된 것이므로 다음 과제는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집체소유로 계급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모순은 항상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의 모순을 해결하면 또 하나의 모순이 제기되며, 따라서 혁명은 계속해서 영역을 바꿔가며 전개되어야 한다는 '부단혁명론'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치혁명, 그 다음 토지혁명, 그 다음 소유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혁명을 달성했지만, 혁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치와 사상전선, 그리고 기술전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지다.

마오쩌둥은 1957년 「인민내부 모순의 올바른 처리 문제에 관하여」에서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 이후 적대적 계급이 소멸되었지만 중국 사회의 모순은 이제 인민내부의 모순이라는 형태로 새로이 전환됐으며, 인민내부의 모순의 핵심은 곧 '3대 차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싸움은 종결되지 않았으며, 이 탓에 인민내부의 모순은 언제든지 우리 편의 모순에서 적대적 모순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가능성을 부단혁명을 통해 차단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은 일선에서 물러나 류사오치에게 주요한 일들을 넘기게 된다. 이에 1960년대 초부터 중국 사회는 '조정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마오쩌둥이 언급했던 '3대 차이'의 문제가 심화되었다. 농촌과 도시, 농민과 노동자의 격차는 확대됐고, 노동자와 간부,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격차도 커졌다. 고정공과 농촌출신 임시 노동자 사이의 격차도 확대됐다. 간부들은 관료로서 힘을 키웠고, 이전에 부각되었던 관료적 위계질서의 강화라는 문제가 다시 부각됐다. 이에 1963년 마오쩌둥은 조정기의 노선에 반대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두 가지 노선이 존재한다는 비판을 제기했고, 이 비판에 부응해 5반운동(오직절도, 투기매점, 겉치레 낭비, 분산주의, 관료주의에 반대)과 4청운동이 전개됐다.

의의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4청운동은 자연스럽게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고, 이 둘을 잘 이어서 진행하라는 지시도 하달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4청운동 시기에 진행되었던 위로부터의 정풍과 문화대혁명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모호했다. 문화대혁명의 초기 전개 양상이 4청운동과 유사한 양상을 띠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듯 초기 문혁은 내용과 형태 면에서 사청운동의 연속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문혁의 최대 피해자로 아려진 류샤오치가 사실은 초기 문혁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는 견해가 최근 연구에서 제기되고 있다.

참고자료

『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백승욱, 살림지식총서
『덩샤오핑 시대의 탄생』, 안치영, 서남동양학술총서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