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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는 [[유가]]의 시조이다. [[춘추]]시대 말기에 활동한 사상가이며 제자들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다.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기원전 479년 고향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전해진다. 그는 키가 2미터나 되는 장신으로 전해지는데 다소 과장된 감이 있다. 공자의 대표적 서적은 [[논어]]이다. 논어는 공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공자가 한 말을 옮겨 적은 언행록이다. 논어는 개인의 사상을 다룬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한나라]] 이후 유교가 국가의 중심 국교로 채택되었기에 논어는 중국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공자('''孔子)는 [[유가]]의 시조이다. [[춘추]]시대 말기에 활동한 사상가이며 제자들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다.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기원전 479년 고향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전해진다. 그는 키가 2미터나 되는 장신으로 전해지는데 다소 과장된 감이 있다. 공자의 대표적 서적은 [[논어]]이다. 논어는 공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공자가 한 말을 옮겨 적은 언행록이다. 논어는 개인의 사상을 다룬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한나라]] 이후 유교가 국가의 중심 국교로 채택되었기에 논어는 중국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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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유년시절==
공자는 노나라 추읍에서 태어났다. 현재 산둥성 서남부의 취푸시 부근이다. 공자의 가계는 불확실하다. 그가 [[상]](商)왕조 출신이라는 이야기, 고아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모든 설들은 문헌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공자는 자신을 두고 ‘나는 젊었을 때 미천한 사람이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교육을 못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말단 벼슬아치로 서기 같은 일을 하면서 학문 뿐만 아니라 음악, 궁술과 같은 기예를 익혔다. 또 창고지기나 목장관리직처럼 비교적 사회적 신분이 낮은 직책을 맡았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백성 중심의 유교적 사고를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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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노나라 추읍에서 태어났다. 현재 산둥성 서남부의 취푸시 부근이다. 공자의 가계는 불확실하다. 그가 [[상]](商)왕조 출신이라는 이야기, 고아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모든 설들은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공자는 자신을 두고 ‘나는 젊었을 때 미천한 사람이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그가 교육을 못 받았던 것은 아니다. 공자는 젊은 시절에, 말단 벼슬아치로 서기 같은 일을 하면서 학문 뿐만 아니라 음악, 궁술과 같은 기예를 익혔다. 또 창고지기나 목장관리직처럼 비교적 사회적 신분이 낮은 직책을 맡았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백성 중심의 유교적 사고를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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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성격==
그는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실제로 한때 그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정치 권력에 도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치는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권모술수에 끼어드는 일을 질색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어울리는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천성적으로 아첨도 못하였기 때문에, 높은 관료에 올라 가지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하대부의 자리에 오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출세하지는 못한다. 공자는 '쓰임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60에 가까운 나이에 노(魯)나라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훗날 그가 철학자와 교사로서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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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실제로 한때 그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정치 권력에 도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치는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권모술수에 끼어드는 일을 질색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어울리는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천성적으로 아첨도 못하였기 때문에, 높은 관료에 올라 가지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하대부의 자리에 오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출세하지는 못한다. 공자는 '쓰임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60에 가까운 나이에 노(魯)나라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훗날 그가 철학자와 교사로서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과 학문에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학자였다. 그는 자신과 의견이 달라도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는 정치적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누구를 원망 하지도 않았다. 세간의 평가에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거짓으로 그를 위대하게 높이려 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비교적 솔직한 편이었다. 그의 성품은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마구간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온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는가를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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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자신의 사상과 학문에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학자였다. 그는 자신과 의견이 달라도 남의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는 정치적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누구를 원망 하지도 않았다. 세간의 평가에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거짓으로 자신을 위대하게 높이려 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비교적 솔직한 편이었다. 공자의 성품은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마구간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온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는가를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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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제자들==
 
==공자와 제자들==
공자의 첫 제자들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유가학단’도 비공식적인 토론회였다. 공자의 제자들이 3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문헌(논어, [[맹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제자 수는 22명에서 많아 봤자 70명 정도다. 제자들은 대부분 노(魯)나라 사람이고 일부만 인접국 출신이었다고 알려진다. 공자는 빈부의 차 없이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는 학생이면 누구든지 받아들였다. 그의 제자 중 특히 알려진 자들로는 재여, 자로, 자공, 안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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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첫 제자들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유가학단’도 비공식적인 토론회였다. 공자의 제자들이 3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문헌(논어, [[맹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제자 수는 22명에서 많아 봤자 70명 정도다. 제자들은 대부분 노(魯)나라 사람이고 일부만 인접국 출신이었다고 알려진다. 공자는 빈부와 상관없이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는 학생이면 누구든지 받아들였다. 그의 제자 중 특히 알려진 자들로는 재여, 자로, 자공, 안회 등이 있다.  
<br>수업은 주로 토론식으로 이루어졌다. 공자와 제자들은 올바른 정치에 대해서, 올바른 정치적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치열한 토론을 하며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워갔다. 공자와 제자들은 명령-복종의 관계가 아니었다. 제자가 반박하고 공자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전쟁이 평화, 행복으로 대체되는 세상’을 말했으며, 이를 위해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수양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정치 원리, 철학 뿐만 아니라 기술도 가르쳤다. 그는 제자들의 비판과 의문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관대하고 칭찬만 하던 스승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하거나 공부를 소홀히 한다고 생각하면, 냉철하게 꾸짖고 심할 때는 “야만스럽다” 와 같은 경멸하는 말까지 퍼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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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수업은 주로 토론식으로 이루어졌다. 공자와 제자들은 올바른 정치에 대해서, 올바른 정치적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치열한 토론을 하며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워갔다. 공자와 제자들은 명령-복종의 관계가 아니었다. 제자은 공자의 가르침에 때로는 반박하기도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전쟁이 평화, 행복으로 대체되는 세상’을 말했으며, 이를 위해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수양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정치 원리, 철학 뿐만 아니라 기술도 가르쳤다. 그는 제자들의 비판과 의문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관대하고 칭찬만 하던 스승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하거나 공부를 소홀히 한다고 생각하면, 냉철하게 꾸짖고 심할 때는 “야만스럽다” 와 같은 경멸하는 말까지 퍼붓기도 했기 때문이다.
 
<br>공자에게 제자들이 몰렸던 것은 공자가 학식이 뛰어나고 배울 점이 많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밑에서 배우면 정치 길에 빨리 오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공자는 “물질적인 보답을 염두에 두지 않고 3년 동안 공부하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br>공자에게 제자들이 몰렸던 것은 공자가 학식이 뛰어나고 배울 점이 많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밑에서 배우면 정치 길에 빨리 오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공자는 “물질적인 보답을 염두에 두지 않고 3년 동안 공부하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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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사상==
 
==중심사상==
공자의 중심 사상은 인(仁)과 예(禮)다. 공자의 인은 인간애, 자애로운 마음을 가르킨다. 공자의 인은 모든 덕을 포함하고 있다. 예는 공동체나 사회가 마땅히 따라야하는 습관과 규칙이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써 ‘효제(孝悌)’를 제시하고 효제를 온 세상에 펼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禮)를 존중하였다. 예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는 신분 질서와 사회 질서의 유지를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효제와 충서의 인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엄격한 구분인 예가 전제된 것이다. 이것은 유교 사상의 봉건성과 보수성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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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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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의 인은 인간애, 자애로운 마음을 가르킨다. 공자의 인은 모든 덕을 포함하고 있다. 인(仁)이라 함은 자신을 대하듯 타자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단지 추상적 개념이 아닌 인간관계를 맺으며 나오는 실체적 원리이고, 인간에 대한 신뢰가 선행되야 실천 가능한 덕목이다.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체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한다. 이렇듯 인(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상이다. 실제로 공자는 인간을 배제한 하늘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이러한 인(仁)을 토대로 17세기에 나왔던 자유와 평등, 박애의 개념들이 파생된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써 ‘효제(孝悌)’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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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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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예는 공동체나 사회가 마땅히 따라야하는 습관과 규칙이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써 ‘효제(孝悌)’를 제시하고 효제를 온 세상에 펼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禮)를 존중하였다. 예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는 신분 질서와 사회 질서의 유지를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효제와 충서의 인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엄격한 구분인 예가 전제된 것이다. 이것은 유교 사상의 봉건성과 보수성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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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극기복례(克己復禮)
 
<br>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주장했다. 극기복례란 나를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나를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을 인으로 생각했다. 극기복례가 덕으로 가는 방법이며 공자 사상의 기반이다.  
 
<br>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주장했다. 극기복례란 나를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나를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을 인으로 생각했다. 극기복례가 덕으로 가는 방법이며 공자 사상의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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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명(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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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는 천(天)을 비인격적 존재로 보았다.천(天)은 종교적인 천이 아닌 도덕적 힘의 원천으로써의 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은 군자에 덕행에 따라 상벌을 내리지도 않는다. 천(天)에 대한 공자의 기본입장은 '외천명(畏天命)'이라고도 표현된다. 이는 우주의 기본원리를 도덕의 궁극적인 근거로 보는 자세를 말한다. <논어>에 나오는 제사 이야기는 단지 사회적 행위로서의 효용을 말한 것 뿐이다. 또한 명(命)에 관련해서는, 공자는 이를 운명의 개념이 아닌 그저 수명이나 생명의 의미로 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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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에게는 세 가지 두려움이 있다. 천명과 대인(大人:덕명이 높은 사람), 성인지언(成人之言)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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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지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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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백성들을 의롭게 만드는 데 힘쓰고, 귀신을 경원(경원敬遠 : 공경하면서도 멀리함)하면 가히 ‘지’라 할 수 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와 신을 받드는 제사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는 이러한 분리를 ‘지’라 칭한다. 즉 ‘지’는 종교와 정치, 학문, 예술 등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지’는 ‘가지(可知)’와 ‘불가지(不可知)’를 구분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기지’를 바탕으로 ‘미지’를 예견하고, ‘가지’를 바탕으로 ‘불가지’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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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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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공자의 제자) : “감히 죽음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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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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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위의 대화를 보면, ‘인’은 초인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분하는 ‘지’에서부터 나옴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이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를 기본으로 하여 ‘인’의 사상을 말한다. ‘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인’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즉 ‘지’는 ‘인’에 이르는 대전제이다. 이렇듯 ‘인’과 ‘지’는 분리된 두개의 개념이 아닌, 연결된 하나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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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는 ‘인지합일’에 이르기 위해서는 ‘호학(好學)’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때 ‘학’은 ‘사(思)’와 연결되어야 한다. 인지합일의 경지에 이르면 ‘극기복례’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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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정치사상==
 
==정치사상==
공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의한 덕치주의(德治主義) 정치를 주장한다. 예를 익히고 인을 행하여 자신을 수양한 군자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백성을 교화한다. 군자는 사리사욕에 빠지지 않고 백성을 교화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한다. 덕치란 인의 정신을 예의 방법으로 개인에서 국가로 넓혀나가는 것과 같다. 개인 인간 도덕을 정치 이념으로 넓혀나간 것이 덕치주의다. 하지만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은 춘추전국이라는 혼란의 시기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힘들었다. 너무 이상적이고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1. 덕의 정치
 
1. 덕의 정치
 
<br>공자가 꿈꿨던 이상적 정치는 ‘덕’으로써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천자가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백성이 이에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형태가 아닌, 정치 행위자의 인격과 행위로서 드러나는 적극적 상호성의 사양 원칙이 존재해야 했다. 그는 순(舜)임금이 정치 권력을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하지 않은 것을 보고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렸던 사람은 순이라!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쪽을 향했을 뿐이다!”라고 칭찬했다. 이 말은 왕은 단순히 다스리는 능력 뿐만 아니라 사양하는 능력, 즉 다른 사람들과 정치 권력을 나눌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천자는 덕을 갖춰야 하며, 덕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의논하고 나누기 때문에 함께 정치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치 권력자는 자신이 다스리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사랑해야 했다.  
 
<br>공자가 꿈꿨던 이상적 정치는 ‘덕’으로써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천자가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백성이 이에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형태가 아닌, 정치 행위자의 인격과 행위로서 드러나는 적극적 상호성의 사양 원칙이 존재해야 했다. 그는 순(舜)임금이 정치 권력을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하지 않은 것을 보고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렸던 사람은 순이라!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쪽을 향했을 뿐이다!”라고 칭찬했다. 이 말은 왕은 단순히 다스리는 능력 뿐만 아니라 사양하는 능력, 즉 다른 사람들과 정치 권력을 나눌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천자는 덕을 갖춰야 하며, 덕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의논하고 나누기 때문에 함께 정치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치 권력자는 자신이 다스리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사랑해야 했다.  
 
  “새와 짐승과는 더불어 같은 무리를 지을 수 없으니, 내가 이 사람의 무리와 더불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하겠는가?”
 
  “새와 짐승과는 더불어 같은 무리를 지을 수 없으니, 내가 이 사람의 무리와 더불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하겠는가?”
<br>이와 더불어 공자는 같이 정치를 할 좋은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스스로도 관찰해야 하는데 마치 재판을 치루는 것처럼 원고, 피고, 재판관이 스스로의 의견을 말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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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의한 덕치주의(德治主義) 정치를 주장한다. 예를 익히고 인을 행하여 자신을 수양한 군자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백성을 교화한다. 군자는 사리사욕에 빠지지 않고 백성을 교화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한다. 덕치란 인의 정신을 예의 방법으로 개인에서 국가로 넓혀나가는 것과 같다. 개인 인간 도덕을 정치 이념으로 넓혀나간 것이 덕치주의다. 하지만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은 춘추전국이라는 혼란의 시기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힘들었다. 너무 이상적이고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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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이와 더불어 공자는 같이 정치를 할 좋은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스스로도 관찰해야 하는데 이는 마치 재판을 치루는 것처럼 원고, 피고, 재판관이 스스로의 의견을 말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2. 중용의 자세와 정치와 타 영역의 구분
 
2. 중용의 자세와 정치와 타 영역의 구분
<br>공자는 정치란 ‘중용’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산술적으로 딱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의 중(中)은 평형인 동시에 꼭 맞는다는 말이다. 정치가는 만약 두 개의 의견 중 맞는 의견이 없으면 ‘맞는’ 제 3의 의견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자는 정치적 동반자는 형제와는 다르기 때문에 비판할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엄격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정치영역과 사회 영역과의 구분도 주장하였다. 사회적 영역에서는 노인을 공경하며 그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 하지만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비판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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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는 정치란 ‘중용’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산술적으로 딱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의 중(中)은 평형인 동시에 꼭 맞는다는 말이다. 정치가는 만약 두 개의 의견 중 맞는 의견이 없으면 맞는 제 3의 의견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자는 정치적 동반자는 형제와 다르기 때문에 비판할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엄격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정치영역과 사회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회적 영역에서는 노인을 공경하며 그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 하지만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비판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3. 충실성
 
3. 충실성
<br>공자는 군주에 대한 충실성은 정의의 원칙으로 규정된다고 보았다. 신하는 자신이 섬기는 군주나 대부에게 충실해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정의의 원칙 안에서의 충실이었다.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을 만나면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군주와 신하는 종속적이 관계가 아니었다. 군주와 신하는 정의를 매개로 상호 관계를 맺었고, 신하는 군주가 잘못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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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는 군주에 대한 충실성은 정의의 원칙으로 규정된다고 보았다. 신하는 자신이 섬기는 군주나 대부에게 충실해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정의의 원칙 안에서의 충실이었다.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을 만나면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군주와 신하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군주와 신하는 정의를 매개로 상호 관계를 맺고, 신하는 군주가 잘못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어야 했다.  
  
 
4. 삼년상의 정치적 의미
 
4. 삼년상의 정치적 의미
<br>공자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3년간 받은 사랑을,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삼년상으로써 되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공자의 제자였던 재여, [[묵자]]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반박을 당한다. 삼 년간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상만 치르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이는 잘못 알려진 부분이다. 공자는 단순히 모든 백성들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3년간 상을 치르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사실 삼년상은 그보다 정치적 부분에 더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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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3년간 받은 사랑을,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삼년상으로써 되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이 삼년상은 공자의 제자였던 재여, [[묵자]]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반박을 당한 주장이기도 하다. 삼 년간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상만 치르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이는 학자들이 공자가 말하는 바를 잘못 알아들은 데서 기인한다. 공자는 단순히 모든 백성들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3년간 상을 치르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삼년상은 그보다는 정치적 부분에 더 관련이 있다.  
<br>공자는 왕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총재가 왕을 대신해 정치를 수행한다고 보았다. 이 기간동안 총재는 정치를 수행하지만 결코 왕이 되지 않으며, 왕은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어진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를 통해 정치 권력을 분배할 수 있으며, 공동체가 더 잘 유지된다고 하였다.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려고 하면 다른 사람도 세워주어야 한다.” 또는 “자신을 죽여 어짊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삼년상에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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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는 왕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총재가 왕을 대신해 정치를 수행한다고 보았다. 이 기간동안 총재는 정치를 수행하지만 결코 왕이 되지 않으며, 왕은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어진 왕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공자는 이를 통해 정치 권력을 분배할 수 있으며, 공동체가 더 잘 유지된다고 하였다.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려고 하면 다른 사람도 세워주어야 한다.” 또는 “자신을 죽여 어짊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삼년상에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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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치행위자의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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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공자는 정치 공동체에서 정치적 능력이란 ‘그 사람됨(=인격)’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행위자의 인격을 관찰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때 이 인격을 판단하는 구성원의 숫자보다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평가하느냐가 중요했다. 공자는 정치행위자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다수의 의견이 아닌 자신이 관찰한 모습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판단의 기준은 ‘공익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였다. 정치 행위자는 미워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을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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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임태홍 역, 무우수, 2007 ISBN 978-89-91334-12-0
 
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임태홍 역, 무우수, 2007 ISBN 978-89-91334-12-0
 
<br>임건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ISBN 978-89-74836-80-1
 
<br>임건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ISBN 978-89-74836-80-1
<br>H.G.크릴, <<孔子 인간과 신화>>, 이성규 역,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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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H.G.크릴, 이성규 역, <<孔子>>, 지식산업사, 2015
<br>김성희, <<공자, 제자들에게 정치를 묻다>>, 프로네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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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김성희, <<공자, 제자들에게 정치를 묻다>>, 프로네시스, 2008
<br>신동준, <<공자와 그의 제자들1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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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신동준, <<공자와 그의 제자들1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한길사, 2007
<br>안핑 친, <<공자 평전>>, 김기협 역, 이광호 감수,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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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안핑 친, 김기협 역, 이광호 감수, <<공자 평전>>, 돌베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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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6일 (화) 23:39 기준 최신판

공자

출생 B.C 551
사망 B.C479
생존시기 춘추시대 말기
주요 작품 논어
관련 활동 유가철학


공자(孔子)는 유가의 시조이다. 춘추시대 말기에 활동한 사상가이며 제자들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다.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기원전 479년 고향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전해진다. 그는 키가 2미터나 되는 장신으로 전해지는데 다소 과장된 감이 있다. 공자의 대표적 서적은 논어이다. 논어는 공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공자가 한 말을 옮겨 적은 언행록이다. 논어는 개인의 사상을 다룬 서적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한나라 이후 유교가 국가의 중심 국교로 채택되었기에 논어는 중국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유년시절

공자는 노나라 추읍에서 태어났다. 현재 산둥성 서남부의 취푸시 부근이다. 공자의 가계는 불확실하다. 그가 (商)왕조 출신이라는 이야기, 고아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모든 설들은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공자는 자신을 두고 ‘나는 젊었을 때 미천한 사람이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그가 교육을 못 받았던 것은 아니다. 공자는 젊은 시절에, 말단 벼슬아치로 서기 같은 일을 하면서 학문 뿐만 아니라 음악, 궁술과 같은 기예를 익혔다. 또 창고지기나 목장관리직처럼 비교적 사회적 신분이 낮은 직책을 맡았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백성 중심의 유교적 사고를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성격

공자는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실제로 한때 그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정치 권력에 도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치는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권모술수에 끼어드는 일을 질색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어울리는 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천성적으로 아첨도 못하였기 때문에, 높은 관료에 올라 가지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하대부의 자리에 오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출세하지는 못한다. 공자는 '쓰임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60에 가까운 나이에 노(魯)나라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훗날 그가 철학자와 교사로서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과 학문에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학자였다. 그는 자신과 의견이 달라도 남의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는 정치적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누구를 원망 하지도 않았다. 세간의 평가에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거짓으로 자신을 위대하게 높이려 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비교적 솔직한 편이었다. 공자의 성품은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마구간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온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는가를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공자와 제자들

공자의 첫 제자들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유가학단’도 비공식적인 토론회였다. 공자의 제자들이 3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문헌(논어, 맹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제자 수는 22명에서 많아 봤자 70명 정도다. 제자들은 대부분 노(魯)나라 사람이고 일부만 인접국 출신이었다고 알려진다. 공자는 빈부와 상관없이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는 학생이면 누구든지 받아들였다. 그의 제자 중 특히 알려진 자들로는 재여, 자로, 자공, 안회 등이 있다.
수업은 주로 토론식으로 이루어졌다. 공자와 제자들은 올바른 정치에 대해서, 올바른 정치적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치열한 토론을 하며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워갔다. 공자와 제자들은 명령-복종의 관계가 아니었다. 제자은 공자의 가르침에 때로는 반박하기도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전쟁이 평화, 행복으로 대체되는 세상’을 말했으며, 이를 위해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수양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정치 원리, 철학 뿐만 아니라 기술도 가르쳤다. 그는 제자들의 비판과 의문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관대하고 칭찬만 하던 스승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하거나 공부를 소홀히 한다고 생각하면, 냉철하게 꾸짖고 심할 때는 “야만스럽다” 와 같은 경멸하는 말까지 퍼붓기도 했기 때문이다.
공자에게 제자들이 몰렸던 것은 공자가 학식이 뛰어나고 배울 점이 많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밑에서 배우면 정치 길에 빨리 오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공자는 “물질적인 보답을 염두에 두지 않고 3년 동안 공부하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중심사상

1. 인(仁)
공자의 인은 인간애, 자애로운 마음을 가르킨다. 공자의 인은 모든 덕을 포함하고 있다. 인(仁)이라 함은 자신을 대하듯 타자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단지 추상적 개념이 아닌 인간관계를 맺으며 나오는 실체적 원리이고, 인간에 대한 신뢰가 선행되야 실천 가능한 덕목이다.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체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한다. 이렇듯 인(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상이다. 실제로 공자는 인간을 배제한 하늘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이러한 인(仁)을 토대로 17세기에 나왔던 자유와 평등, 박애의 개념들이 파생된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써 ‘효제(孝悌)’를 제시하였다.

2. 예(禮)
예는 공동체나 사회가 마땅히 따라야하는 습관과 규칙이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써 ‘효제(孝悌)’를 제시하고 효제를 온 세상에 펼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禮)를 존중하였다. 예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는 신분 질서와 사회 질서의 유지를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효제와 충서의 인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엄격한 구분인 예가 전제된 것이다. 이것은 유교 사상의 봉건성과 보수성을 잘 보여준다.

3. 극기복례(克己復禮)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주장했다. 극기복례란 나를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나를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을 인으로 생각했다. 극기복례가 덕으로 가는 방법이며 공자 사상의 기반이다.

4. 천명(天命)
공자는 천(天)을 비인격적 존재로 보았다.천(天)은 종교적인 천이 아닌 도덕적 힘의 원천으로써의 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은 군자에 덕행에 따라 상벌을 내리지도 않는다. 천(天)에 대한 공자의 기본입장은 '외천명(畏天命)'이라고도 표현된다. 이는 우주의 기본원리를 도덕의 궁극적인 근거로 보는 자세를 말한다. <논어>에 나오는 제사 이야기는 단지 사회적 행위로서의 효용을 말한 것 뿐이다. 또한 명(命)에 관련해서는, 공자는 이를 운명의 개념이 아닌 그저 수명이나 생명의 의미로 썼을 뿐이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두려움이 있다. 천명과 대인(大人:덕명이 높은 사람), 성인지언(成人之言)이 그것이다."

5. 인지합일
“백성들을 의롭게 만드는 데 힘쓰고, 귀신을 경원(경원敬遠 : 공경하면서도 멀리함)하면 가히 ‘지’라 할 수 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와 신을 받드는 제사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는 이러한 분리를 ‘지’라 칭한다. 즉 ‘지’는 종교와 정치, 학문, 예술 등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지’는 ‘가지(可知)’와 ‘불가지(不可知)’를 구분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기지’를 바탕으로 ‘미지’를 예견하고, ‘가지’를 바탕으로 ‘불가지’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자 :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자로(공자의 제자) : “감히 죽음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공자 :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위의 대화를 보면, ‘인’은 초인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분하는 ‘지’에서부터 나옴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이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를 기본으로 하여 ‘인’의 사상을 말한다. ‘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인’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즉 ‘지’는 ‘인’에 이르는 대전제이다. 이렇듯 ‘인’과 ‘지’는 분리된 두개의 개념이 아닌, 연결된 하나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인지합일’에 이르기 위해서는 ‘호학(好學)’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때 ‘학’은 ‘사(思)’와 연결되어야 한다. 인지합일의 경지에 이르면 ‘극기복례’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정치사상

1. 덕의 정치
공자가 꿈꿨던 이상적 정치는 ‘덕’으로써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천자가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백성이 이에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형태가 아닌, 정치 행위자의 인격과 행위로서 드러나는 적극적 상호성의 사양 원칙이 존재해야 했다. 그는 순(舜)임금이 정치 권력을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하지 않은 것을 보고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렸던 사람은 순이라!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쪽을 향했을 뿐이다!”라고 칭찬했다. 이 말은 왕은 단순히 다스리는 능력 뿐만 아니라 사양하는 능력, 즉 다른 사람들과 정치 권력을 나눌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천자는 덕을 갖춰야 하며, 덕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의논하고 나누기 때문에 함께 정치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치 권력자는 자신이 다스리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사랑해야 했다.

“새와 짐승과는 더불어 같은 무리를 지을 수 없으니, 내가 이 사람의 무리와 더불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하겠는가?”


공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의한 덕치주의(德治主義) 정치를 주장한다. 예를 익히고 인을 행하여 자신을 수양한 군자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백성을 교화한다. 군자는 사리사욕에 빠지지 않고 백성을 교화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한다. 덕치란 인의 정신을 예의 방법으로 개인에서 국가로 넓혀나가는 것과 같다. 개인 인간 도덕을 정치 이념으로 넓혀나간 것이 덕치주의다. 하지만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은 춘추전국이라는 혼란의 시기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힘들었다. 너무 이상적이고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공자는 같이 정치를 할 좋은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스스로도 관찰해야 하는데 이는 마치 재판을 치루는 것처럼 원고, 피고, 재판관이 스스로의 의견을 말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2. 중용의 자세와 정치와 타 영역의 구분
공자는 정치란 ‘중용’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산술적으로 딱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의 중(中)은 평형인 동시에 꼭 맞는다는 말이다. 정치가는 만약 두 개의 의견 중 맞는 의견이 없으면 맞는 제 3의 의견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자는 정치적 동반자는 형제와 다르기 때문에 비판할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엄격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정치영역과 사회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회적 영역에서는 노인을 공경하며 그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 하지만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비판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3. 충실성
공자는 군주에 대한 충실성은 정의의 원칙으로 규정된다고 보았다. 신하는 자신이 섬기는 군주나 대부에게 충실해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정의의 원칙 안에서의 충실이었다.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을 만나면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군주와 신하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군주와 신하는 정의를 매개로 상호 관계를 맺고, 신하는 군주가 잘못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어야 했다.

4. 삼년상의 정치적 의미
공자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3년간 받은 사랑을,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삼년상으로써 되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이 삼년상은 공자의 제자였던 재여, 묵자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반박을 당한 주장이기도 하다. 삼 년간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상만 치르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이는 학자들이 공자가 말하는 바를 잘못 알아들은 데서 기인한다. 공자는 단순히 모든 백성들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3년간 상을 치르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삼년상은 그보다는 정치적 부분에 더 관련이 있다.
공자는 왕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총재가 왕을 대신해 정치를 수행한다고 보았다. 이 기간동안 총재는 정치를 수행하지만 결코 왕이 되지 않으며, 왕은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어진 왕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공자는 이를 통해 정치 권력을 분배할 수 있으며, 공동체가 더 잘 유지된다고 하였다.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려고 하면 다른 사람도 세워주어야 한다.” 또는 “자신을 죽여 어짊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삼년상에 적용되는 것이다.

5. 정치행위자의 관찰
공자는 정치 공동체에서 정치적 능력이란 ‘그 사람됨(=인격)’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행위자의 인격을 관찰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때 이 인격을 판단하는 구성원의 숫자보다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평가하느냐가 중요했다. 공자는 정치행위자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다수의 의견이 아닌 자신이 관찰한 모습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판단의 기준은 ‘공익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였다. 정치 행위자는 미워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을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참고문헌

종청한, <<50인으로 읽는 중국사상>>, 임태홍 역, 무우수, 2007 ISBN 978-89-91334-12-0
임건순,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서해문집, 2014 ISBN 978-89-74836-80-1
H.G.크릴, 이성규 역, <<孔子>>, 지식산업사, 2015
김성희, <<공자, 제자들에게 정치를 묻다>>, 프로네시스, 2008
신동준, <<공자와 그의 제자들1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한길사, 2007
안핑 친, 김기협 역, 이광호 감수, <<공자 평전>>, 돌베개,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