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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 = 레이쥔[ 雷军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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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일 = 1969년 12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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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적 = 중국 | ||
+ | |학력 = 우한대학교 (컴퓨터공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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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소개'''''</big>== | ==<big>'''''소개'''''</big>== | ||
− | + | 레이쥔은 1969년 12월 16일 출생으로 마흔 살에 [[샤오미]]를 창립한 사업가이다. [[샤오미]] 창립 전에는 여러 회사에 몸을 담으며 소프트웨어 업계에서의 지위를 쌓아나갔다. 회사 퇴직 후에는 엔젤 투자자로서 여러 벤처기업에 투자를 하며 여러 회사들의 경영업에 참여했다. 2010년 [[샤오미]] 창업 후 2011년 9월 샤오미 M1을, 2012년 10월 샤오미 2세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성공신화를 계속해서 써내려가고 있다. 한 때는 중국 내 스마트폰 1위, 세계 스마트폰 4위를 기록하면서 기업 가치를 높여나갔다. 참고로 창업 8년차 샤오미의 2017년 시기의 매출액은 약 17조로 놀라운 실적을 거두었는데 이는 세계 최고의 IT기업들이 창업 후 17조원 규모의 매출을 기록하기 위해 걸린 시간을 보면(애플 20년, [[알리바바]] 17년, 페이스북 12년 등) LTE급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big>'''''생애'''''</big>== | ==<big>'''''생애'''''</big>== | ||
===학창시절=== | ===학창시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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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년 12월 16일 후베이 성 셴타오 시 출생으로 쟈오완 촌에서 9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창의력이 뛰어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곧잘 생각해 냈고 발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홉 살이 되던 해 레이쥔의 집은 시내로 이사를 갔다. 젠써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멘양 사범부속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지역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멘양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87년 7월 레이쥔은 대학입학 시험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두고 [[우한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을 제공했다고 한 <실리콘밸리의 불>을 접했다. 이 책에서 잡스에게서 많은 것을 느끼고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레이쥔은 초중고 학창시절과 같이 대학에서 역시 총명하고 능동적이고 우수한 학생으로 교수님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2년 만에 졸업에 필요한 대학 4년의 전 과정을 마치고 2학년 때에는 이미 백신 전문가로 유명하여 후베이 성 공안국에 초빙되어 강의를 하기도 했다. 또, 2학년 때부터 우한 전자상가에서 현장 실무자들과 기술 교류를 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 있어 많은 도움을 준 시기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전자상가에서 만난 훗날 [[킹소프트]]의 부회장이 되는 왕촨궈와 리루슝과 함께 중국어 입력시스템인 진산 한카를 모방한 제품을 발명해 싼써라는 회사를 창업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망한다. 레이쥔은 한 인터뷰에서 그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헛되이 보내지 않은 시기라고 말했다. | ||
===샤오미 창업 이전=== | ===샤오미 창업 이전=== | ||
− | + |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프로그래머로서의 꿈’을 위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과학연구소를 떠나 킹소프트에 입사한다. 오랫동안 킹소프트에 몸 담아 일하며 베이징 [[킹소프트]] 연구개발부의 최고책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킹소프트의 상장에 크게 기여해 2007년 [[킹소프트]]에서 가장 빛나는 한 해를 맞이했지만, 오히려 회사를 떠나는 선택을 했다. 퇴사 이후 그는 엔젤투자자로 활동한다. 사실 그는 퇴사 전, 2004년 제 3자 지불 플랫폼으로 사업을 시작한 [[라카라]]에 처음으로 투자를 했다. 그 이후 리쉐링이 창업한 뒤완이라는 기업에 개인 명의로 10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는 그가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한 사업이다. 퇴사 직전 2006년에는 렌샹 투자회사 부회장 위융푸의 추천으로 UCWeb에 투자했다. 퇴사 후에는 UCWeb의 CEO를 맡기도 했다. 위의 회사들 이외에도 여러 회사에 투자를 하며 엔젤투자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모바일 의료 서비스 어플리케이션 하오다이푸, 비즈니스네트워크 서비스 따지에왕, 모바일 회사 예커, 신발 쇼핑몰 러타오 등등 그가 투자한 기업 모두 몇 년간의 발전을 거쳐 성공적인 기업이 되었다. | |
===샤오미 창업=== | ===샤오미 창업=== | ||
− | + | 레이쥔은 2007년 퇴사 후 일상이 한가해지고 앞으로의 방향을 잃어버리며 방황했다. 그에게 이른 은퇴로 인한 한가한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UCWeb의 CEO 요청에 응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이 계속되던 중 2009년 12월 16일 레이쥔은 베이징의 한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그는 이 자리를 빌어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자신의 처지를 모두 털어놓고 그날 밤 생각해보며 스스로를 격려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찾게 되는 발판을 마련한다. 즉, 중국 스마트폰 시장을 뒤흔드는 비즈니스 청사진을 위한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것이다. | |
− | 레이쥔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마트폰으로 정한 후 그 사업을 위해 능력 있는 멤버들을 찾아 총 7명으로 구성된 관리팀을 꾸렸다. 그는 스마트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 샤오미만의 특성을 갖춘 MIUI(안드로이드에 기반한 변형 운영체제)와 미랴오(모바일 SNS 플랫폼)를 개발해 모바일 인터넷 분야에 진출하는 데 두 개의 중요한 수단을 마련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스마트폰은 사실상 레이쥔이 모바일 인터넷 분야로 진출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2011년 8월 16일 샤오미 스마트폰을 정식으로 발표하고, 2012년 5월 18일 샤오미 청춘판 스마트폰, 2012년 10월 샤오미 2세대를 차례로 발표하며 샤오미의 영향력을 펼쳐나갔다. 스마트폰을 시작으로 샤오미가 넓혀나간 분야 및 발전 등은 뒤에서 자세히 알아보겠다. | + | |
+ | 레이쥔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마트폰으로 정한 후 그 사업을 위해 능력 있는 멤버들을 찾아 총 7명으로 구성된 관리팀을 꾸렸다. 그는 스마트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 샤오미만의 특성을 갖춘 [[MIUI]](안드로이드에 기반한 변형 운영체제)와 미랴오(모바일 SNS 플랫폼)를 개발해 모바일 인터넷 분야에 진출하는 데 두 개의 중요한 수단을 마련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스마트폰은 사실상 레이쥔이 모바일 인터넷 분야로 진출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2011년 8월 16일 샤오미 스마트폰을 정식으로 발표하고, 2012년 5월 18일 샤오미 청춘판 스마트폰, 2012년 10월 샤오미 2세대를 차례로 발표하며 샤오미의 영향력을 펼쳐나갔다. 스마트폰을 시작으로 샤오미가 넓혀나간 분야 및 발전 등은 뒤에서 자세히 알아보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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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샤오미 로고의 ‘Mi’는 ‘Mobile Internet’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의미로 ‘Mission Imposibe’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샤오미가 창립 초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많은 도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 |
− | + | [[샤오미]]는 ‘모두를 위한 혁신’이라는 비전을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고품질의 제품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또 [[샤오미]] 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제품 개발에 있어 샤오미 팬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다는 것이다. 팬들의 피드백을 제품 영역에 적용시켜 제품들을 출시한다. [[샤오미]]를 대표하는 문장 또한 ‘Just for fans’일 만큼 모든 과정을 샤오미 팬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중요시 한다. 실제로 [[샤오미]]의 많은 직원들은 입사하기 전 샤오미의 팬들이었고 그들 모두 한 팀으로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며 지속적으로 제품을 개선하고 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 |
===샤오미가 추구하는 방향=== | ===샤오미가 추구하는 방향=== | ||
− | + | [[샤오미]]가 생각하는 미래는 샤오미허즈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샤오미허즈는 OTT TV의 하나로 텔레비전을 이용해 인터넷 콘텐츠의 수신과 방송을 구현하는 셋톱박스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PC와 텔레비전을 연결해 텔레비전이 모니터 역할을 하게 한다. 여러 기기들 및 여러 회사의 컨텐츠 등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점을 통해 샤오미허즈가 레이쥔이 구상하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인터넷 서비스로 구성된 샤오미 생태계를 실현할 연결고리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
− | + | 샤오미 생태계 구축을 위한 밑그림으로 택한 그의 전략은 바로 ‘레이쥔계 기업’이다. ‘레이쥔계 기업’은 레이쥔이 몇 년에 걸쳐 키워온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계열사들을 말한다. 샤오미 스마트폰을 켜면 레이쥔계 기업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종류의 컨텐츠들을 접할 수 있다. 기업들은 손쉽게 마케팅을 진행할 수 있고 사용자는 인터넷 접속, 쇼핑, 오락 등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언론, 쇼핑몰, 모바일 인터넷, 인터넷 통신, 커뮤니티, 소프트웨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레이쥔계 기업이 포진하고 있다. 이는 다른 인터넷 대기업들이 갖추지 못한 훌륭한 네트워크이다. | |
− | + | 이런 점에서 [[샤오미]]가 사물인터넷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샤오미를 통해 모든 삶이 연결되고 더욱 스마트한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샤오미]]의 미래 전략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샤오미의 팬, [[미펀]]이다. 그들의 입소문을 통해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졌고, 그들의 피드백을 통해 더 나은 질의 제품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레이쥔은 미펀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힘을 알기에 회사의 실적보다도 사용자 즉 미펀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가장 중요시한다. 현재 샤오미는 스마트폰, 샤오미허즈 이외에도 헬스 케어, 웨어러블, 스마트자동차, 스마트홈 등 우리 생활과 관련된 전 분야로 그 영역을 신속히 확장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샤오미를 통해 우리의 모든 생활이 스마트하게 되도록 한다는 레이쥔의 전체 그림의 과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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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폰 판매 현황 | * 스마트폰 판매 현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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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40억 달러 | 2018년 540억 달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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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3일 (월) 21:29 기준 최신판
레이쥔[ 雷军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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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9년 12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 성 셴타오 시 |
국적 | 중국 |
학력 | 우한대학교 (컴퓨터공학) |
소개
레이쥔은 1969년 12월 16일 출생으로 마흔 살에 샤오미를 창립한 사업가이다. 샤오미 창립 전에는 여러 회사에 몸을 담으며 소프트웨어 업계에서의 지위를 쌓아나갔다. 회사 퇴직 후에는 엔젤 투자자로서 여러 벤처기업에 투자를 하며 여러 회사들의 경영업에 참여했다. 2010년 샤오미 창업 후 2011년 9월 샤오미 M1을, 2012년 10월 샤오미 2세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성공신화를 계속해서 써내려가고 있다. 한 때는 중국 내 스마트폰 1위, 세계 스마트폰 4위를 기록하면서 기업 가치를 높여나갔다. 참고로 창업 8년차 샤오미의 2017년 시기의 매출액은 약 17조로 놀라운 실적을 거두었는데 이는 세계 최고의 IT기업들이 창업 후 17조원 규모의 매출을 기록하기 위해 걸린 시간을 보면(애플 20년, 알리바바 17년, 페이스북 12년 등) LTE급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애
학창시절
1969년 12월 16일 후베이 성 셴타오 시 출생으로 쟈오완 촌에서 9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창의력이 뛰어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곧잘 생각해 냈고 발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홉 살이 되던 해 레이쥔의 집은 시내로 이사를 갔다. 젠써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멘양 사범부속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지역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멘양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87년 7월 레이쥔은 대학입학 시험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두고 우한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을 제공했다고 한 <실리콘밸리의 불>을 접했다. 이 책에서 잡스에게서 많은 것을 느끼고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레이쥔은 초중고 학창시절과 같이 대학에서 역시 총명하고 능동적이고 우수한 학생으로 교수님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2년 만에 졸업에 필요한 대학 4년의 전 과정을 마치고 2학년 때에는 이미 백신 전문가로 유명하여 후베이 성 공안국에 초빙되어 강의를 하기도 했다. 또, 2학년 때부터 우한 전자상가에서 현장 실무자들과 기술 교류를 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 있어 많은 도움을 준 시기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전자상가에서 만난 훗날 킹소프트의 부회장이 되는 왕촨궈와 리루슝과 함께 중국어 입력시스템인 진산 한카를 모방한 제품을 발명해 싼써라는 회사를 창업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망한다. 레이쥔은 한 인터뷰에서 그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헛되이 보내지 않은 시기라고 말했다.
샤오미 창업 이전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프로그래머로서의 꿈’을 위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과학연구소를 떠나 킹소프트에 입사한다. 오랫동안 킹소프트에 몸 담아 일하며 베이징 킹소프트 연구개발부의 최고책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킹소프트의 상장에 크게 기여해 2007년 킹소프트에서 가장 빛나는 한 해를 맞이했지만, 오히려 회사를 떠나는 선택을 했다. 퇴사 이후 그는 엔젤투자자로 활동한다. 사실 그는 퇴사 전, 2004년 제 3자 지불 플랫폼으로 사업을 시작한 라카라에 처음으로 투자를 했다. 그 이후 리쉐링이 창업한 뒤완이라는 기업에 개인 명의로 10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는 그가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한 사업이다. 퇴사 직전 2006년에는 렌샹 투자회사 부회장 위융푸의 추천으로 UCWeb에 투자했다. 퇴사 후에는 UCWeb의 CEO를 맡기도 했다. 위의 회사들 이외에도 여러 회사에 투자를 하며 엔젤투자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모바일 의료 서비스 어플리케이션 하오다이푸, 비즈니스네트워크 서비스 따지에왕, 모바일 회사 예커, 신발 쇼핑몰 러타오 등등 그가 투자한 기업 모두 몇 년간의 발전을 거쳐 성공적인 기업이 되었다.
샤오미 창업
레이쥔은 2007년 퇴사 후 일상이 한가해지고 앞으로의 방향을 잃어버리며 방황했다. 그에게 이른 은퇴로 인한 한가한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UCWeb의 CEO 요청에 응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이 계속되던 중 2009년 12월 16일 레이쥔은 베이징의 한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그는 이 자리를 빌어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자신의 처지를 모두 털어놓고 그날 밤 생각해보며 스스로를 격려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찾게 되는 발판을 마련한다. 즉, 중국 스마트폰 시장을 뒤흔드는 비즈니스 청사진을 위한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것이다.
레이쥔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마트폰으로 정한 후 그 사업을 위해 능력 있는 멤버들을 찾아 총 7명으로 구성된 관리팀을 꾸렸다. 그는 스마트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 샤오미만의 특성을 갖춘 MIUI(안드로이드에 기반한 변형 운영체제)와 미랴오(모바일 SNS 플랫폼)를 개발해 모바일 인터넷 분야에 진출하는 데 두 개의 중요한 수단을 마련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스마트폰은 사실상 레이쥔이 모바일 인터넷 분야로 진출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2011년 8월 16일 샤오미 스마트폰을 정식으로 발표하고, 2012년 5월 18일 샤오미 청춘판 스마트폰, 2012년 10월 샤오미 2세대를 차례로 발표하며 샤오미의 영향력을 펼쳐나갔다. 스마트폰을 시작으로 샤오미가 넓혀나간 분야 및 발전 등은 뒤에서 자세히 알아보겠다.
샤오미
소개
샤오미 로고의 ‘Mi’는 ‘Mobile Internet’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의미로 ‘Mission Imposibe’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샤오미가 창립 초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많은 도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샤오미는 ‘모두를 위한 혁신’이라는 비전을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고품질의 제품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또 샤오미 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제품 개발에 있어 샤오미 팬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다는 것이다. 팬들의 피드백을 제품 영역에 적용시켜 제품들을 출시한다. 샤오미를 대표하는 문장 또한 ‘Just for fans’일 만큼 모든 과정을 샤오미 팬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중요시 한다. 실제로 샤오미의 많은 직원들은 입사하기 전 샤오미의 팬들이었고 그들 모두 한 팀으로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며 지속적으로 제품을 개선하고 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샤오미가 추구하는 방향
샤오미가 생각하는 미래는 샤오미허즈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샤오미허즈는 OTT TV의 하나로 텔레비전을 이용해 인터넷 콘텐츠의 수신과 방송을 구현하는 셋톱박스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PC와 텔레비전을 연결해 텔레비전이 모니터 역할을 하게 한다. 여러 기기들 및 여러 회사의 컨텐츠 등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점을 통해 샤오미허즈가 레이쥔이 구상하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인터넷 서비스로 구성된 샤오미 생태계를 실현할 연결고리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샤오미 생태계 구축을 위한 밑그림으로 택한 그의 전략은 바로 ‘레이쥔계 기업’이다. ‘레이쥔계 기업’은 레이쥔이 몇 년에 걸쳐 키워온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계열사들을 말한다. 샤오미 스마트폰을 켜면 레이쥔계 기업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종류의 컨텐츠들을 접할 수 있다. 기업들은 손쉽게 마케팅을 진행할 수 있고 사용자는 인터넷 접속, 쇼핑, 오락 등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언론, 쇼핑몰, 모바일 인터넷, 인터넷 통신, 커뮤니티, 소프트웨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레이쥔계 기업이 포진하고 있다. 이는 다른 인터넷 대기업들이 갖추지 못한 훌륭한 네트워크이다.
이런 점에서 샤오미가 사물인터넷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샤오미를 통해 모든 삶이 연결되고 더욱 스마트한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샤오미의 미래 전략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샤오미의 팬, 미펀이다. 그들의 입소문을 통해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졌고, 그들의 피드백을 통해 더 나은 질의 제품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레이쥔은 미펀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힘을 알기에 회사의 실적보다도 사용자 즉 미펀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가장 중요시한다. 현재 샤오미는 스마트폰, 샤오미허즈 이외에도 헬스 케어, 웨어러블, 스마트자동차, 스마트홈 등 우리 생활과 관련된 전 분야로 그 영역을 신속히 확장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샤오미를 통해 우리의 모든 생활이 스마트하게 되도록 한다는 레이쥔의 전체 그림의 과정이다.
샤오미 실적(현황)
- 스마트폰 판매 현황
2011년 30만 대
2012년 719만 대
2013년 1,870만 대
2014년 6,112만 대
2015년 7,000만 대
.
.
2018년 1억 1,900만 대
- 기업가치
2010년 2억 5,000만 달러
2011년 10억 달러
2012년 40억 달러
2013년 100억 달러
2014년 450억 달러
.
.
2018년 540억 달러
참고 문헌
1) 천룬, 샤오미 쇼크, 레이쥔, 보아스(2015)
2) 허옌, 샤오미 insight, 예문(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