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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7일 (목) 23:13 기준 최신판

측천무후
則天武后

본명 무조(武曌)
출생 산서성 문수(文水)
별칭 아명(兒名)은 무미랑(武媚娘), 무조(武照)
종교 불교

개요

측천무후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의 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를 무측천이라 부르기도 한다.(이하, 무측천) 무측천은 황제의 권력을 쥐기 위해 자신의 권력과 지위가 갖고 있는 힘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였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새로운 인재 등용, 문학과 사회적 안정, 불교의 진흥, 유교적 제도 전복과 같은 업적을 세웠다. 무측천 집권 당시 정치적으로는 피바람이 불었으나 백성들의 삶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무측천은 살아서는 큰 권력을 지닌 강인한 여성 황제였고, 죽은 뒤에도 가장 관심을 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인물 생애

입궁

무조는 보잘것없는 출신인 목재상 아버지 밑에서 나고 자랐다. [1] 40살이 넘은 당태종은 외모가 빼어난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 때 무조의 나이 14살이었다. 그는 후궁인 재인(才人)[2]에 책봉되었다.

권력으로의 발걸음

649년 태종의 병이 날로 악화되어가던 어느 날, 황태자 이치(李治)는 태종이 와병중인 취미궁(翠微宮)으로 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취미궁으로 든 태자는 태종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아리따운 궁녀 무조의 모습에 눈길이 멎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무후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였다. 고종(高宗)으로 즉위한 황태자 이치는 즉시 무조를 불러들였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그는 소의(昭義) [3]의 자리에 올랐다가 소숙비, 왕황후를 차례로 누명을 씌워 살해한 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가 655년으로 그의 나이 32살 때의 일이었다[4]고종은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반대가 있자 반대하는 이들을 죽이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운다.

황제로 가는 길

황후의 자리에 오른 무측천은 자신의 파벌을 만들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그는 고종과 함께 수렴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황태자는 유씨 소생의 이충이었으나, 무측천은 그를 폐하고 자신이 낳은 이홍(李弘)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 뒤 자신의 마음대로 황태자를 몇 번이나 교체한 뒤, 결국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기 때문이다.

674년 무측천은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황제, 황후의 칭호를 천황, 천후로 고쳤다.

그로부터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中宗)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위씨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시어머니 무측천이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 그의 자리를 늘 선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하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한 종실 제왕 및 대신들의 반대를 무측천은 혹리의 임용과 엄형준법으로 탄압한다.

무주의 치(武周之治)

690년 무측천은 예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 국호를 주(周)로 바꾼 뒤 동도인 낙양을 신도(新都)로 삼았다. 이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그는 자신을 신성황제(神聖皇帝)라 일컫고 예종에게 자신의 성인 무씨(武氏)를 내리고 황사(皇嗣)로 정했다. 이를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 부른다. 무측천의 통치 시기는 당 태종의 통치 시기인 정관의 치와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으며, 무주의 치라고 불린다.

말년

705년 무측천의 병세가 악화되자 당시의 재상 장간지는 친위군 사령관과 공모해 친위군 5백명을 동원해 내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궁중에 난입했다. 이 반란세력은 와병중인 무측천을 협박해 퇴위시키고 그를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겼다. [5] 그 해 겨울, 무측천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자신에게서 황제의 칭호를 거두라 하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등의 유언을 남겼다.

무측천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이 8년 만에 황제의 자리로 복권했고, 주의 국호를 폐하고 의 국호를 회복했다. 위씨 또한 황후로 복위되었다.

업적

무측천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사실상 유일한 여성 황제이다. 한의 여후(呂后)나 청의 서태후(西太后)처럼 황제의 실권을 차지했던 여성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계속 황후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에 비해 무측천은 제1의 실권자 자리를 차지하고 스스로 황제자리에 군림했다. 또한 그의 통치기간은 태종이 통치하던 정권의 치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의 치 라고 불리며, 이후 당의 전성기인 현종 때의 개원의 치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재등용과 황권강화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던 무측천은 자신의 파벌을 형성하기 위해 신흥 귀족을 대거 양성했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권력으로 자신에게 반대하던 장손무기, 저수량 등의 대신들을 변방으로 쫓아냈는데, 이는 사회 발달 저해의 원인이었던 관농 귀족들을 당의 정치무대에서 내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과거제도를 정비하여 훨씬 더 능력 있는 인재들을 정치무대로 끌어들였다.
한 예로, 무측천이 시행한 과거제에서 27명의 사람이 등용되었는데 그 중 단 3명만이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과거제가 얼마나 공정히 이루어졌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대동안 유일하게 여성도 과거제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공적인 기능을 확대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신의 정치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그 과정에서 공포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잔인한 통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문화적 발전

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중에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무측천은 일찍이 周茂思, 范履冰등과 같은 문학대신들을 불러모아 《요람(要览)》, 《(자해)字海》, 《(낙서요록)乐书要录》과 같은 책을 편찬하였다. 현재 소실된 《字海》는 무측천이 창시한 모든 측천문자를 수록한 책이며, 《乐书要录》는 당대(唐代)의 높은 사료적 가치와 학술적가치를 가진 악률 문헌을 갖고 있다. 몇몇 이전시대의 것들을 그대로 인용한 것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것들은 실행적 의의(实践意义)를 갖고 있어 중국 고대음악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책 전체는 10권이지만 현재 5, 6, 7권밖에 남지 않았다. [6]

또한 불교의 통치철학과 진흥책을 펼쳐 중국 불교 문화의 꽃을 피워 문화적으로도 큰 발전을 보여주었다.

경제적 발전

무측천은 직접 집필한 『건언 십이사』 중 ‘권농상, 박부역(劝农桑,薄赋役)’을 제의했다. 또한 무측천은 지방 관리를 중시하며 지방 관언의 감찰을 강화했다. 또한 토지를 불법으로 차지하고 도망가는 농민에 대해 너그러운 관용을 취하였다. 따라서 무측천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사회는 상당히 안정되었으며, 농업, 수공업 또는 상업이 크게 발전했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380만호였던 인구가 615만호로 증가하였는데, 평균적으로 매년 9.1%의 증가를 보이는 비약적인 수준이 발전이었다. [7]

하지만 도망가는 농민은, 정부의 수세의 손실을 야기했으며 사회 불안정 증가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무측천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불교를 숭상했다. 불당을 대거 수리하고 규모가 큰 명당(明堂)과 천당(天堂)을 건축하며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8]

유가적 가부장제 관례 전복

그는 당나라 남자 가계의 왕족을 대부분 제거하고 그 자신에서 시작되는 모계 왕조사람들로 대체했다. 당시 무측천의 네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이미 죽고, 셋째 아들인 중종은 유배당했으며 막내아들 예종은 허울뿐인 허수아비였다. 무측천의 권위에 위협을 줄 만한 이씨 성을 가진 황족 세력은 거의 제거된 상태였던 것이다.
또한 종손자를 동부 돌궐 가한의 딸과 결혼시키는 인질 신랑으로 삼아 쫓아 보낸 일이었을 것이다. 한나라 때부터 이제까지 해온 대로 공주를 보내지 않은 것이다. 이 전통적 성(性)정치상의 반전은 남자 대신들이 연대 상소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남성 대신들은 즉시 변경 수비대로 쫓겨나는 결과밖에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남성 첩을 들이기도 했다. [9]

평가

  • 진문앵: 무측천은 음탕하고 간악하여 황위를 찬탈한 요녀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이라는 칭송을 동시에 받고 있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태종이나 현종 같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 평가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기인하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의 통치는 너무나 잔인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활이 너무 음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잔인하지 않은 황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의 잔인함은 훨씬 더 부각되었다. 음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여자와 만 잠을 잔 황제가 얼마나 있단 말인가? 음란함 역시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서 섣불리 부정적인 평가들을 내리기 전에 그런 부정적 평가들이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송경령: 무측천은 봉건시대 걸출한 여성정치인이다. 하지만 가정에서 그의 역할에 대해 말하자면 무측천이 좋은 아내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0]
  • 마오쩌둥: 무측천은 치국(治國)에 있어서 특출 난 인재임이 틀림없다. 그는 다른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도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알아보는 데에 지혜를, 사람을 다루는데 기술을 가졌다. 그는 적지 않은 사람을 발탁해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발탁한 뒤 바로 죽인 사람도 적지 않다. [11]
  • 서중면(岑仲勉): “무측천은 정사를 제 멋대로 다루어, 선악을 정할 수 없다. 끝내 그가 조정에 나오게 된 날, 이미 임명했던 재상의 수가 73이나 되었다.” 《수당사》무측천이 임명한 재상의 수는 당태종 시기 임용했던 재상의 수의 약 세 배 가까이 되었다. (당태종은 그의 재임 기간동안 모두 25명의 재상을 임용했다.) 재상을 뽑는데 이렇게 마음대로 구는데, 재상 밑의 다른 관료들을 등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2]
  • 노종도(鲁宗道): 唐之罪人也,几危社稷。《송사(宋史)》 당의 죄인(무측천을 칭함)이 하마터면 사직을 위기에 빠트리게 할 뻔했다. [13]

각주

  1. 무조 입궁 후 태종때 예부상서까지 지냈다.
  2. 정 5품에 해당
  3. 정 2품에 해당
  4. 조관희, 《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중국사》, 청아출판사, p.642
  5. 조관희, p.645
  6. 바이두백과<무측천>
  7. 진문앵, 한국 선덕여왕과 중국 측천여황제의 정치적 면모와 인간상 비교 연구, 부산외국어대학교, 2011, p. 39
  8. 바이두백과<무측천>
  9. 줄리아 로벨,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김병화, 웅진지식하우스, 2006, pp.194-195
  10. 바이두백과 <무측천>
  11. 바이두백과<무측천>
  12. 인민왕(人们王)
  13. 바이두백과<무측천>

참고자료

1. 조관희, 《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중국사》, 청아출판사
2. 줄리아 로벨,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김병화, 웅진지식하우스, 2006,
3. 진문앵, <한국 선덕여왕과 중국 측천여황제의 정치적 면모와 인간상 비교 연구>, 부산외국어대학교, 2011
4. 바이두백과<무측천>,http: // baike.baidu.com/item/%E6%AD%A6%E5%88%99%E5%A4%A9/61872, (2018.6.25)
5. 인민왕(人们王), http: //theory.people.com.cn/GB/49157/49163/5112683.html, (2018.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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