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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ux, Alain, 『20세기 중국사 : 제국의 몰락에서 강대국의 탄생까지』, 책과함께(2010)  
 
  Roux, Alain, 『20세기 중국사 : 제국의 몰락에서 강대국의 탄생까지』, 책과함께(2010)  
 
  모준영(2016),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의 對한반도 정책 비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모준영(2016),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의 對한반도 정책 비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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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5일 (금) 23:47 기준 최신판

장개석(장제스)

본명 중정(中正)
출생 1887년
절강성(浙江省) 봉화현(奉化縣)
사망 1975년
직업 정치가

개요

중국의 정치가. 이름은 중정(中正). 1906년 보정(保定)군관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음해 일본에 유학했다. 11년 신해혁명에 참가, 그 후 주로 군사 분야에서 활동했다. 24년 황포(黃埔)군관학교 교장, 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 북벌(北伐)을 시작했다. 27년 국공합작을 깨고 상해 쿠데타를 일으켜 중국공산당을 탄압했으며, 28년 북경을 점령했다. 남경(南京)에 국민정부를 세우고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이 되었으며, 30년부터 5회에 걸쳐 대규모의 공산당 포위전을 벌였다.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는 내정안정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세워 국내통일을 추진하다가 36년 <서안사건>을 겪고, 다음해 국공 합작에 응해 전면적인 항일전을 개시했다. 일본 항복 후 중국공산당과 내전을 재개한 끝에 49년 12월 완전히 패퇴하여 대만(타이완)으로 옮겨갔다.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중화민국 총통·국민당 총재로 중화민국을 지배했다. 저서로 <장중정전집> <장총통 언론휘편(將總統言論彙編)> 등이 있다.

생애 초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근대교육을 받은 장제스는 일본 제국군관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자격 미달로 실패한 후, 도쿄에 머물다 천치메이를 만나 그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일본군 야전부대에서 이등병으로 1년간 근무하며 일분 육군의 강·약점을 익혔으나 1911년 발발한 신해혁명 때문에 사관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귀국했다. 쑨원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무장봉기에 참여했으나 봉기는 실패하고 천치메이는 암살돼 장제스는 그 충격으로 한동안 방황하고 투기, 여자놀음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 1923년 이후 다시 목적을 찾고 쑨원에 의해 모스크바 사절단의 우두머리로 파견되고 그 다음 해에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국민당 내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중산함 사건

1926년 장제스가 공산당원 중산함의 함장 리즈룽을 포함한 공산당원 60명을 체포하고 중산함을 탈취했다. 당시 국문당은 왕징웨이가 장제스를 블라디보스톡으로 납치할 목적으로 중산함을 파견했다고 주장했으나 여전히 사건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고 이는 1925년 쑨원의 죽음 이후 벌어진 권력투쟁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유력한 분석은 우연히 중산함이 미심쩍은 상황에 강 위를 오갔고 국민당과 군관학교 우파세력이 이를 과대포장해 장제스의 위기의식을 자극했고 그는 이에 넘어갔다는 주장이다.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국민당의 실력자가 되었고 또한 이는 제1차 국공합작의 균열을 가져왔다.

북벌 선언과 청당 작업

1926년 장제스는 중국 통일을 목표로 북벌을 선언했고, 공산당은 민중운동과 연대한 광범한 민족혁명 운동을 전개한다는 조건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쑨원 때부터 공산당원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 입당이 가능했기 때문에 국민당 내에 많은 공산당원이 있었고, 또한 북벌이 진행됨에 따라 장제스의 권세를 우려한 중국공산당과 좌파 지도자들은 그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왕징웨이를 불러들였고 국민당 내의 균열이 심해졌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장제스는 당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청당 작업을 실시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게릴라군에 대한 토벌을 시작했으며 이는 완전한 제1차 국공합작의 붕괴를 가져왔고 국공내전을 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1928년 장쭤린을 베이징에서 몰아냄으로써 북벌을 달성했고 난징 정부와 함께 형식적이지만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만주사변

1931년 일본은 만주 침략을 목표로 한 관동군이 일으킨 류타오후 폭파 자작극으로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고, 국제연맹은 일본에 대해 기한부 철병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부결됐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로 인해 항일운동이 격렬해졌으나 장제스의 전략은 ‘안내양외’로 국내를 먼저 평정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는 것은 그 다음으로 했기 때문에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33년 장제스는“오늘 우리는 밖에서 뿐 아니라 안에서 꿈틀대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일본인의 침략 야욕은 밖으로 온 것이나 이는 병으로 치자면 피부병과 같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공산당 일당은 우리 몸에 생긴 심장병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피부병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심장병부터 치료해야 한다. 피부병을 치료하지 않는다고 죽지는 않으나 심장병은 그냥 두면 환자가 죽기 때문이다."라고 연설하며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시안 사건

1936년 시안에서 동북군(만주군)의 지휘관인 장쉐량이 공산국 토벌을 격려하러온 장제스를 인질로 잡고 감금해 내전 종식과 항일 투쟁을 요구했다. 이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그만두고 용공항일을 약속해 장쉐량의 호송을 받아 난징으로 귀환함으로써 평화로운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는 중국이 내전을 멈추고 일치 항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사전편찬회,『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구보 도루, 『중국근현대사2,3,4』, 삼천리(2013) 
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푸른역사(2009) 
신동준,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인간사랑(2011)
Roux, Alain, 『20세기 중국사 : 제국의 몰락에서 강대국의 탄생까지』, 책과함께(2010) 
모준영(2016),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의 對한반도 정책 비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