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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토벌에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워 B.C.129년 관내후(關內侯)를 거쳐 B.C.127년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br> | 흉노 토벌에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워 B.C.129년 관내후(關內侯)를 거쳐 B.C.127년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br> | ||
B.C.119 대장군(大將軍)으로 [[곽거병]](霍去病)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흉노의 주력을 궤멸시켰다. 이후 7차례에 걸쳐 흉노를 정벌하여 더 이상 한나라의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했다. 후에 [[곽거병]]과 함께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br> | B.C.119 대장군(大將軍)으로 [[곽거병]](霍去病)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흉노의 주력을 궤멸시켰다. 이후 7차례에 걸쳐 흉노를 정벌하여 더 이상 한나라의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했다. 후에 [[곽거병]]과 함께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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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ISBN 9788981074654 |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ISBN 9788981074654 |
2016년 6월 21일 (화) 23:48 기준 최신판
생애 및 업적
위청(衛靑)(B.C. ? ~ B.C. 106년)은 하동(河東) 평양(平陽)(지금의 산서성 임분)사람으로 자는 중경(仲卿)이고, 시호는 열(烈)이다. 그의 아버지 정계(鄭季)가 첩인 평양후(平陽侯)와 사이에서 낳았는데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그의 누이인 위자부(衛子夫)가 한 무제의 총희(寵姬)였으므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중대부(大中大夫)가 되고 후에 거기(車騎)장군이 되었다.
흉노 토벌에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워 B.C.129년 관내후(關內侯)를 거쳐 B.C.127년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B.C.119 대장군(大將軍)으로 곽거병(霍去病)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흉노의 주력을 궤멸시켰다. 이후 7차례에 걸쳐 흉노를 정벌하여 더 이상 한나라의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했다. 후에 곽거병과 함께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위청과 곽거병을 병칭하여 ‘위곽(衛霍)’이라 한다.
참고문헌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ISBN 9788981074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