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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유학]] |
2016년 5월 15일 (일) 13:42 기준 최신판
경학이란 유학의 경전과 전적에 대한 학문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경서의 수집과정에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금문학파란 한초까지 살아남은 일부 유생의 구술에 의거해 당시의 문자인 예서체(隸書體)로 정리된 경전을 기반으로 해석 및 연구를 하던 학파를 말한다. 그리고 고문학파란 경제 때 공자의 옛 집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춘추·전국시대의 문자로 쓰여진 경전을 기반으로 하던 학파를 가리킨다. 동중서의 제안으로 관학화된, 『춘추공양전』 등을 근거로 한 금문학파는 주로 지구의 해석이나 천인상관설에 바탕한 정치론으로서, 군주권의 정당화나 참위설을 내세우는 등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반면 『춘추좌씨전』 등을 근거로 한 고문학파는 전한까지 위서(僞書)라 여겨져 인정받지 못하다가 전한 말 유흠(劉歆)에 의해 정리되면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유흠이 정리한 고문학파의 이론은 왕망의 권위와 정당성 확립에 이용되어 신정권에서 관학화했다. 후한에 들어서면서 경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논쟁이 벌어졌다. 후한 장제(章帝)는 백호관(白虎觀)에서 경서 해석을 둘러싼 토론회를 열었고, 그 과정이 『백호통의(白虎通義)』로 집약되기도 했다. 후한 말에 정현(鄭玄)은 고문경과 금문경을 비교해 통일적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경학의 전적 해석은 고문설을 위주로 했고 집대성은 금문설을 위주로 작업했는데, 학문적 방법으로 글자의 음이나 뜻을 연구했기 때문에 이를 훈고학(訓詁學)이라 부른다. 금문학파에서 뚜렷이 드러나듯 이 시대의 경학에는 도참이나 참위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이거나 주술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에 대해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실증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후한의 왕충(王充)이 그러한 인물로서, 그는 『논형(論衡)』에서 모든 존재가 기(氣)로 이루어지며, 기의 전개에 따라 자연현상, 사회현상,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주장해 인간과 자연이 교감한다는 천인감응론을 부정했다. 후한 말의 중장통(仲長統)에 이르면 인격신인 천의 관념을 부정하고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이해해, 인사(人事)중시의 관점에서 정치나 사회를 비판했다. 이들은 후한의 경학의 풍조 속에서도 우주의 생성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토대로 인사인 사회모순이나 정치적 부패에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