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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1일 (화) 23:20 기준 최신판
1차 당고사건
후한 말에 탁류파와 청류파의 대립이 발생했다. 중앙에서 청류파의 세론을 대표한 것은 태학생(太學生)이었다. 무제 때에 50명으로 시작한 태학생은 전한 말에 1천 명으로 증원되었고, 후한 질제 무렵에는 3만 명을 넘었다, 이 태학생과 지식인들이 연합하여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당시 집권하고 있던 세력이 환관이었기 때문에 외척과 호족들도 태학생과 지식인들을 지원하였다. 태학생들은 태위(太尉) 진번(陳蕃)과 사예교위(司隷校尉) 이응(李膺)등을 영수로 했고, 환관에 반대하던 외척 두무(竇武)도 이들과 통했다. 환관 측은 이응 등이 학생들과 함께 조정을 비난하고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166년에 이응과 지지자 2백여 명을 체포했고 당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투옥했다. 다음 해 그들은 향리로 돌아와 종신 금고형에 쳐해졌는데, 이것이 제 1차 당고사건이다.
2차 당고사건
환제가 죽고 두무 등에 의해 영제가 옹립되자 당고되었던 인사들은 조정에 복귀했다. 168년에 두무는 관료 호족 집단의 우두머리인 진번(陳蕃)으로 환관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환관 측은 두무와 진번 등을 살해하였고, 그들의 제자, 관리, 부자 형제 등을 모두 관직에서 면직시키고 금고형에 처했다. 다음 해 환관들은 전국적으로 사인(士人)에 대한 일대검거를 시행하였고, 이로 인해 이응, 두밀(杜密)등 100여 명이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태학생도 1천여 명이나 체포되었으며, 약 600~700명에 이르는 명사(名士)가 처벌을 받았다. 이것이 제2차 당고사건이다.
당고사건이 미친 영향
2차에 걸친 탄압은 지조와 절개를 존중하는 지식인들을 살해하거나 금고에 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지식인층은 한왕조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고 정치에 대한 지향을 끊고 고고한 삶을 추구하는 은둔자로서의 행동방식을 찾아갔다. 이는 사회의 원기를 크게 떨어뜨려 동한의 멸망을 부채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