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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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칭호== | ||
− | 서태후(西太后)라는 호칭은 사실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다.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황후 | + | 서태후(西太后)라는 호칭은 사실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다.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황후 뉴고록씨(鈕鈷祿氏)에게는 아들이 없어 서태후의 아들이 [[동치제]]에 즉위하였다. 이에 그녀와 함품황제의 황후 뉴고록씨(鈕鈷祿氏)는 황태후로 추대되어, 자희(慈禧)와 자안(慈安)이라는 휘호를 받았고, 세상 사람들은 서태후를 자금성 서쪽에 산다고 하여 서태후(西太后), 자안태후를 자금성 동쪽에 산다고 하여 동태후(東太后)라 불렀다. 이 문서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서태후’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
==생애== | ==생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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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시절=== | ===후궁 시절=== | ||
− | 1852년 봄, 청 황실의 정기적인 전국 규모 궁녀 간택에서 당시 16세였던 서태후는 황제의 눈에 들어 궁녀로 뽑혔다. 하지만 그녀는 후궁이었고, 아주 낮은 등급에 머물렀다. 황실의 비빈에게는 8단계의 계급 체제가 있었는데, 서태후는 하위 그룹(6~8)인 6급에 속했다. 새 황후는 정(貞)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는데, 그녀는 5급에서 출발하여 넉 달도 안 되어 1급, 즉 황후로 올라섰다. 이 황후가 바로 동태후이다. 사실 후궁 시절 서태후는 | + | 1852년 봄, 청 황실의 정기적인 전국 규모 궁녀 간택에서 당시 16세였던 서태후는 황제의 눈에 들어 궁녀로 뽑혔다. 하지만 그녀는 후궁이었고, 아주 낮은 등급에 머물렀다. 황실의 비빈에게는 8단계의 계급 체제가 있었는데, 서태후는 하위 그룹(6~8)인 6급에 속했다. 새 황후는 정(貞)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는데, 그녀는 5급에서 출발하여 넉 달도 안 되어 1급, 즉 황후로 올라섰다. 이 황후가 황후 뉴고록씨(鈕鈷祿氏), 바로 동태후이다. 사실 후궁 시절 서태후는 [[함풍제]]의 그렇다 할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서태후가 [[함풍제]]의 근심거리에 동참하고 조언을 행했기 때문이다. 청 황실은 오래된 정통에 따라 궁중의 비빈들이 국사에 참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해왔다. [[함풍제]]는 서태후의 조언이 ‘건방지고 교활하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1856년 4월 27일, 서태후는 아들을 낳았고 이후 그녀는 1급으로 승급되어 하급의 후궁 생활을 정리했다. |
− | === | + | ===집권 시절=== |
− | 1861년 | + | 1861년 [[함풍제]]가 죽고 아들 동치제가 황위에 올랐지만 서태후는 정치적 실권이 없었다. 그녀는 먼저 귀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태후라는 칭호를 얻었고,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함풍제]]의 유언에 따라 8명의 고명대신들로 구성된 섭정단(攝政團)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실질적인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다. |
− | 1873년 | + | 1873년 [[동치제]]가 공식적으로 황위에 오름으로써 서태후는 물러나는 듯 보였으나, 2년만에 [[동치제]]가 사망함<ref name="추가적설명">동치제의 죽음에는 서태후의 독살, 매독, 천연두 등 여러 설이 있다. </ref>으로써 다시 권력을 잡는다. 특히 그녀는 후사가 없는 [[동치제]]의 후계자를 정할 때 자신이 할머니로 승격되어 제국을 통치할 구실이 없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세 살 난 조카를 입양한 뒤 황제로 삼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그렇다 할 애정을 주지 않았고, 그가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권력을 더 유지하기 위해 그의 결혼을 미루는 등 [[광서제]]와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18세가 된 [[광서제]]는 친정을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서태후에게 있는 것과 다름없었고, 둘의 관계는 계속해서 나빠졌다. 1898년, [[광서제]]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시행했지만 서태후의 반대로 실패하게 되었고, 서태후는 이 일을 계기로 [[광서제]]를 궁중에 유폐한 뒤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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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화의 첫걸음(1861~1869)==== | ||
+ | 서태후는 서구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그녀는 과도하게 외국인을 증오했던 [[함풍제]]와는 다르게 나라를 외부 세계에 개방할 용의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녀는 중국인 관리들 사이에서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해관의 총세무사로 북아일랜드 출신 로버트 하트를 임명했다. 하트의 지휘 아래 중국 세관은 노후하고 부패한 조직에서 잘 정비된 근대적 기관으로 탈바꿈하여 중국 경제에 큰 기여했다. 하트 외에도 여러 고용된 외국인들은 당시 청나라 상황에 대해 종종 날카로운 비판과 노골적인 진언을 했는데, 서태후는 그들에게 반감을 품지 않고 오히려 지적과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비록 조상 묘와 관련해서 지하자원 개발에 있어서는 근대화 사업들을 거부했지만, 근대식 군대와 산업 육성에는 노력했다.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외국 장교들을 채용했고 무기 제조법을 가르치기 위해 외국 엔지니어들을 고용했으며, 기술과 장비를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또한 중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동문관(同文館)이 서태후 집권한 직후인 1862년에 설립되었고, 해외에 시찰단도 보냈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1』, pp. 95-116 참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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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다(1875~1889)==== | ||
+ | 이 무렵 [[이홍장]]은 중국 개혁파의 영수가 되어 있었고, [[공친왕]]과 더불어 서태후의 근대화 추진 사업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1875년, 곽숭도를 런던 공사로 보냄으로써 더 이상 시찰단이 아닌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보냈고 이후 여러 국가에 공사를 파견함으로써 해외에 있는 중국인 이민자 보호에 힘썼다. 또한 지속적으로 신식 군대 양성에 힘썼으며 1888년에는 서구식 해군 규정을 승인하였다. 한편, 기존에 기피되었던 탄광업 개발이 시작되었고, 전기가 도입되었으며, 은괴를 동전으로 교체하는 조폐사업도 실시되었다. 하지만 철도 사업에 있어서는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는데 이는 전국에 산재하는 무수한 조상들의 뫼 때문이었다. 이처럼 서태후가 통치하는 중국의 산업화는 불도저로 마구 밀어붙여 모든 전통을 파괴하는 그런 식의 산업화가 아니었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1』, pp. 186-201 참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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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년의 개혁(1898)==== | ||
+ | 1895년부터 지속되었던 유럽 열강의 침탈에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1898년 서태후의 지시에 따라 [[광서제]]가 전하고 옹동화가 작성한 '국가 근본 정책 발표' 칙명이 선포된다. 개혁의 내용을 보자면 먼저, 과거에서 난해한 과목이 전부 폐지 되고 그 자리에 시사 정세와 경제학 시험이 들어섰으며 서양식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가 전국에 설립되었다. 또한 현대식 농업 방식, 서양식 상업, 새로운 출판과 기술혁신 등도 개혁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강유위]]와의 마찰로 정치적 혼선을 빚게 된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2』, pp. 337-355 참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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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태후의 개혁, [[新政]](1902-1908)==== | ||
+ | 의화단사건 이후 서태후는 변화를 맹세한다. 1901년, 그녀는 새로운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칙명을 선포하는데 이 칙명의 본질은 '서양으로부터 배우자'는 것이었다. 이후 1902년 초 북경으로 돌아와 1908년 말 사망할 때 까지 약 7년 동안 서태후는 일련의 개혁을 수행한다. 일련의 개혁 중에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통혼 금지 철폐, 전족 금지를 통한 여성 해방, 과거 제도 폐지, 아편 수입 중단 등 혁신적인 내용이 많았으며, 청나라 사람들은 첫 거리 조명, 첫 수돗물, 첫 전화, 첫 서양식 의과 대학들, 첫 스포츠 대회, 첫 극장, 첫 동물원과 공원, 첫 정부 운영 시험 농장 등 일상생활에서 '처음'에 해당하는 많은 것들을 누렸다. 또한 서태후는 정치 참여의 문도 열었는데, 유구한 중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사람들은 '국민'이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태후가 바랬던 입헌군주제의 도입은 청나라에서 이뤄지지 못했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2』, pp.497-526 참조) | ||
===말년=== | ===말년=== | ||
− | 광서제 유폐 이후 그녀는 삶을 마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권력은 쓰러져 가는 청 왕조에서의 권력이었을 뿐, 청은 이미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여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서안으로 몽진을 갔다가 1902년 초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일련의 개혁을 진행한다. 그녀의 개혁에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통혼 금지 철폐, 전족의 철폐, 과거제 폐지, 신식 군대 확충 | + | [[광서제]] 유폐 이후 그녀는 삶을 마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권력은 쓰러져 가는 청 왕조에서의 권력이었을 뿐, 청은 이미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여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서안으로 몽진을 갔다가 1902년 초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일련의 개혁을 진행한다. 그녀의 개혁에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통혼 금지 철폐, 전족의 철폐, 과거제 폐지, 신식 군대 확충 등이 있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크게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혁명운동 및 입헌운동 고조의 분위기 속에서 청은 결국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
− | 1908년, | + | 1908년, [[광서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서태후는 두 살 난 [[부의(溥儀)]]를 황제로 지명하고 생을 마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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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가== | ||
+ | 일반적으로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녀에 대해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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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녀의 화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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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의 여제 서태후, 권력과 욕망의 화신이 청조를 기울게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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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태후는 세기의 악녀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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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는 날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탐욕의 화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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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역사의 치욕이 된 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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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욕이 강한 여인으로 묘사>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황후를 모함하는 일도 잦아졌다. 그러자 함풍제는 난아의 행패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다. - 『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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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탕한 여인으로 묘사> •‘난아는 일개 환관인 이연영이 자신을 애무하는데도 가만히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난아는 음탕한 여인이었다. 환관은 비록 남성을 거세당한 남자라고 해도 황궁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다. 난아는 일찍부터 권력을 장악하려면 환관들을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환관들을 장악하는 방법은 뇌물을 주거나 자신의 몸을 맡기는 일이다. - 『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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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치스러운 여인으로 묘사> •‘서태후는 사치를 일삼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루에 식사를 네 번씩 했고, 돈으로 환산하면 100만 냥어치였으니 당시 농민들의 1년 식사 값에 맞먹었다. 서태후는 피부를 매끄럽게 만들어준다고 알려진 귀한 진주가루를 십여 년간 복용했고, 비취 구슬<ref name="추가적인설명">서태후는 온갖 휘황찬란한 보석 중에서도 특히 비취에 대한 사랑은 거의 열병 수준이었다. 식탁이나 식기도 비취로 만든 것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손톱 끝에는 75밀리미터 길이의 비취 장식을 달았고, 화장 전에는 비취 막대기로 얼굴을 마사지했다. 서태후에게는 최상급 다이아몬드도 비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양 특사가 바친 최상급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돌려보낸 적도 있는 반면, 아주 작더라도 비취를 상납하는 사람에게는 기뻐하며 큰 선물을 안겨 보냈다. </ref> 과 진주를 매단 옷이 3천 상자가 넘었으며, 그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었다고 한다. 궁궐에서의 사치도 모자라 자신의 무덤까지 초호화판으로 지어 사후를 대비한 것은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린 청일전쟁 중에는 함대를 만들 돈 은전 3천만 냥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의 복구와 확장에 사용했다.’-『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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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정한 여인으로 묘사> • 서태후는 황후 아로특씨(동치제의 정비)를 미워했다. 하루는 동치 황제와 황후 아로특씨가 사석에서 하는 말을 엿들은 서태후가 노기등등하여 불쑥 들어와 한 손으로 황후 아로특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손으로 마구 때렸다. 또한 서태후는 내정에 곤장을 준비하고 대기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동치 황제는 너무 놀라 기절했다. - 『황후삼국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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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뛰어난 여걸=== | ||
+ | {{인용문|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장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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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들이 사랑했던 그녀> • ‘서태후의 백성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중략)… 농부들과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녀를 숭배했다. 서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겁을 먹었다. ‘이젠 누가 우리를 돌봐준단 말인가?’ 그들은 울면서 말했다.’ – 펄 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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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세에 맞서 싸운 군주> • 남편 [[함풍제]]가 외세의 강압 때문에 죽은 것을 지켜보았던 서태후는 反외세만 외칠 뿐 중국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8명의 고명대신을 축출한다. 또한 1860년대와 70년대에 서양식 무기와 전함을 제조할 공장과 조선소를 세우는 등 동치 연간의 [[양무운동]]과 자강 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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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하들을 잘 다룰 줄 아는 뛰어난 영도자> • 중국 고위 관리들을 유럽으로 보내 서양 문물을 보고 배우게 했으며, 미국인 로버트 하트를 총 세무사로 임명하여 국고를 단단하게 쌓아 올렸다. 황권을 굳건하게 확립했기에 밖에서는 [[이홍장]]과 [[좌종당]]이, 안에서는 [[공친왕]]과 [[순친왕]]이 아무리 힘을 축적했어도 그녀에게 순종하고 감사하며 배신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최소한 대내적으로는 청조의 황권을 단단하게 틀어쥘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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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태후는 청을 근대로 이끌었다. 그녀의 지도력 아래 청은 실제로 모든 근대국가의 특성을 얻기 시작했다. …(중략)… 과거제도가 폐기 되고, 서양식 학교와 대학이 자리 잡았다. 또한 그녀는 [[전족]]을 금지시킴으로써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도 싸웠다. …(중략)…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서태후는 폭군이 아니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약40년 동안, 정당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책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서태후의 정적 살해는 수십 명도 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들 중 대다수가 그녀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맞대응으로 살해된 것이었다. 서태후는 천성적으로 잔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임종 때에도, 그녀는 내전과 만주족 학살을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했다. 그녀는 제국을 희생하는 것으로 만주족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했다. …(중략)… 신기원을 이룬 성취, 정치적인 성실, 개인적인 용기라는 측면에서 서태후는 비교되기 힘든 기준을 세웠다. 그녀는 노쇠, 가난, 야만, 절대 권력을 대체하기 위해 근대화 사업을 도입했고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인도적인 처우, 편견 없는 개방성 그리고 자유를 선보였다. 거기다 서태후는 양심적이었다. 서태후는 비록 일부 흠결이 있기는 했지만 이 놀라운 정치적 수완의 여성 지도자를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2』(위의 세 항목 포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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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희태후는 중국역사에서 장기 집권으로 손꼽는 여성으로 정치 수완이 노련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황족과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 권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능했으며,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함으로써 청조는 그녀의 능력으로 몇 십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자희가 권력을 잡은 시기에는 청 조정의 중앙집권 및 중국 주권이 대내외적으로 각종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청 제국의 권위를 수호하고 본인 권력의 입장에서 시행한 각종 조치들이 비록 성공했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평하자면 대부분은 합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희가 [[이홍장]], 장지동 등 한족 권신을 중용하고 [[양무운동]]을 시행한 것은 중국 근대화 공업 발전의 시작이다. [[양무운동]] 성과의 지지하에 청 조정은 내부 반란 세력을 진압할 수 있었고, 제국 체제하에 중국을 상대적으로 안정된 국면을 맞게 하였다. 사실 자희의 개혁 수단은 매우 뛰어나다. 백일유신([[무술변법]]을 가리킴)의 개혁 속도는 지나치게 빨라서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경자년(1900년)에 매우 큰 재앙(8개 연합국의 베이징 점령)을 겪은 후 자희황태후는 시국이 더 이상 군주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것을 의식하였고, 이에 청 조정이 새로운 정책(신정)을 펼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경자년 후 신정은 많은 방면에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 굵직한 것만 꼽자면: 관제개정, 입헌준비, 과거제 폐지, 여성[[전족]]금지, 여학교 및 신학교 창설 등이 있다'<ref name="추가적설명번역">'慈禧太后是中国历史中,少数长期当政的女性,政治手腕堪称干练,尤其擅长操弄亲贵朝臣之间的权力平衡,以维系自身的绝对权威,清朝因为她的能力而续命数十年。慈禧当权时期,清廷的中央集权以及中国主权面临来自内部及外国的种种威胁,她从捍卫清帝国权威及其本身权力的立场出发,所作之举措收效虽不尽成功,但放在历史脉络下做持平之论,多数允称合理。… 慈禧重用李鸿章、张之洞等汉族重臣,开办洋务运动,是中国发展近代化工业的开始。在洋务自强运动成果的支持下,清廷得以弭平内部反叛势力,在帝国体制下维系中国相对稳定的局面。慈禧的改革手段其实非常高明,百日维新改革速度过快,根本只是一场闹剧,不可能成功。在庚子年一场大祸之后,慈禧皇太后意识到时局已不容她坚持帝制传统,乃容许清廷推展多种新政措施。庚子后新政牵涉多端,其中荦荦大者包括:官制改定、准备立宪、废科举制度、禁止妇女缠足、兴办女学、新学等。' </ref>. - 『慈禧-正面评价,百度百科』일부 생략 | ||
==기타==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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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 ===일상=== | ||
− | + | · 미신을 믿고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만주족의 샤머니즘을 맹신했다.‘천우신조’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고 마음이 복잡할 때면 손에 상주문을 들고 반나절을 정좌했다. | |
+ | |||
+ | · 아름다움을 매우 중시해 손수 고안해서 화장품을 만들기도 하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일정 시간대에 화장대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지저분한 모습을 싫어하여 머리를 빗어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고, 항상 뜨거운 물로 손 관리를 하여 매끄러움을 유지했다. | ||
− | + | · 서태후의 식사 때는 매번 120가지 넘는 요리가 올라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같은 음식을 세 숟가락 이상 뜨지 않았고, 다음 날에도 절대 먹지 않아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사실 이런 습관은 서태후의 개인적인 식습관이라기 보다는 음독의 해를 입지 않도록 선대부터 내려온 일종의 궁중 규범이었다고 한다. | |
− | + | · 담배 피우는 것을 즐겼고 특히 물 담배를 좋아했다.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는 우유였고 차에도 섞어 마셨다. | |
− | + | ===능묘 도굴 사건=== | |
+ | 1928년, 제멋대로인 군인들이 부장한 보석들을 약탈하기 위해 그녀의 능묘로 침입했다. 장교와 병사들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벽에 구멍을 내고 들어간 뒤 서태후의 관을 총검과 쇠막대기로 강제 개봉했다. 서태후 주변의 보석들을 강탈한 뒤에도 그들은 그녀의 옷을 찢고 치아를 뽑아내는 등 숨겨진 보물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녀의 유해는 노출된 채로 방치되었다.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는 이런 불경스러운 소식을 들은 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훗날 부의는 서태후의 입안에 있던 진주가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의 신발 장식이 되었다는 널리 퍼진 풍문을 듣고서 지독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때문에 [[부의]]가 일본의 만주국 설립에 강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
− | 1) | + | 1) 장융 저, 이종인 옮김,『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1,2』, 책과함께, 2015 <br> 2) 진이•선이링 저, 룽얼 구술,『서태후와 궁녀들』, 글항아리, 2012 <br> 3) 刘奇 저,『眞實的慈禧』, 中国社会出版社, 2011 <br> 4) 편집부 저,『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황매희, 2010 <br> 5) 윤성원 저,『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시그마북스, 2015 <br> 6) 김석준 저,『중국을 움직인 13인의 여인들』, 내외신서, 2013 <br> 7) 이수광 저,『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일송북, 2002 |
+ | |||
+ |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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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erence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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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부링크== | ||
+ | * [http://baike.baidu.com/link?url=3xtLlOZA58r5ys79L8mVSVHzbdafqe_OUbJyDAf0-4Qfq8Q0HEcqcK5O4musAhc2riBQ4NwZ6IllXzc_8TUYkyrEtYe-UzSA8UsSigwHE6D2e0OczmMVmxipeS_cfSEwJSnt-ff8T3cWO7yS5QhOqEt-2EPbU5uGyHoJwbMrO8G 바이두백과] |
2016년 6월 19일 (일) 23:26 기준 최신판
서태후(西太后) | |
---|---|
| |
출생 |
1835.11.29 |
사망 |
1908.11.15 |
생존시기 | 청(淸) |
별칭 |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 서태후황태후(慈禧皇太后) |
가족 | 남편 함풍제, 아들 동치제, 조카 광서제 |
목차
칭호
서태후(西太后)라는 호칭은 사실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다.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황후 뉴고록씨(鈕鈷祿氏)에게는 아들이 없어 서태후의 아들이 동치제에 즉위하였다. 이에 그녀와 함품황제의 황후 뉴고록씨(鈕鈷祿氏)는 황태후로 추대되어, 자희(慈禧)와 자안(慈安)이라는 휘호를 받았고, 세상 사람들은 서태후를 자금성 서쪽에 산다고 하여 서태후(西太后), 자안태후를 자금성 동쪽에 산다고 하여 동태후(東太后)라 불렀다. 이 문서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서태후’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생애
유년 시절[1]
1835년 10월 10일, 베이징의 한 후퉁(胡同)에서 미래의 서태후가 태어났다. 이름 높은 만주족 가문인 엽혁나랍씨(葉赫那拉氏) 출신이지만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는 ‘목련’ 혹은 ‘난초’를 의미하는 ‘란(蘭)’이라는 설과, 단어는 ‘좋은 운수를 의미하는 ‘행(幸)’과 같은 발음인 ‘행(杏)’ 설만 있을 뿐 명확하지 않다. 서태후의 집안은 유복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정부 관리로 종사했다. 만주족이었던 그녀는 전족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남녀유별 사상 때문에 서태후는 만주어를 배우지 못했고, 대신 학식 있는 집안의 딸로서 약간의 한문(漢文)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회화(繪畵), 자수(刺繡) 등 여성에게 필요한 기술을 익혔다. 1849년, 서태후의 아버지 혜징이 몽골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임명됨에 따라 그녀의 가족은 몽골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녀는 평생 동안 시원한 공기와 탁 트인 땅을 열정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궁 시절
1852년 봄, 청 황실의 정기적인 전국 규모 궁녀 간택에서 당시 16세였던 서태후는 황제의 눈에 들어 궁녀로 뽑혔다. 하지만 그녀는 후궁이었고, 아주 낮은 등급에 머물렀다. 황실의 비빈에게는 8단계의 계급 체제가 있었는데, 서태후는 하위 그룹(6~8)인 6급에 속했다. 새 황후는 정(貞)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는데, 그녀는 5급에서 출발하여 넉 달도 안 되어 1급, 즉 황후로 올라섰다. 이 황후가 황후 뉴고록씨(鈕鈷祿氏), 바로 동태후이다. 사실 후궁 시절 서태후는 함풍제의 그렇다 할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서태후가 함풍제의 근심거리에 동참하고 조언을 행했기 때문이다. 청 황실은 오래된 정통에 따라 궁중의 비빈들이 국사에 참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해왔다. 함풍제는 서태후의 조언이 ‘건방지고 교활하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1856년 4월 27일, 서태후는 아들을 낳았고 이후 그녀는 1급으로 승급되어 하급의 후궁 생활을 정리했다.
집권 시절
1861년 함풍제가 죽고 아들 동치제가 황위에 올랐지만 서태후는 정치적 실권이 없었다. 그녀는 먼저 귀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태후라는 칭호를 얻었고,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함풍제의 유언에 따라 8명의 고명대신들로 구성된 섭정단(攝政團)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실질적인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다.
1873년 동치제가 공식적으로 황위에 오름으로써 서태후는 물러나는 듯 보였으나, 2년만에 동치제가 사망함[2]으로써 다시 권력을 잡는다. 특히 그녀는 후사가 없는 동치제의 후계자를 정할 때 자신이 할머니로 승격되어 제국을 통치할 구실이 없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세 살 난 조카를 입양한 뒤 황제로 삼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그렇다 할 애정을 주지 않았고, 그가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권력을 더 유지하기 위해 그의 결혼을 미루는 등 광서제와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18세가 된 광서제는 친정을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서태후에게 있는 것과 다름없었고, 둘의 관계는 계속해서 나빠졌다. 1898년, 광서제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시행했지만 서태후의 반대로 실패하게 되었고, 서태후는 이 일을 계기로 광서제를 궁중에 유폐한 뒤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근대화의 첫걸음(1861~1869)
서태후는 서구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그녀는 과도하게 외국인을 증오했던 함풍제와는 다르게 나라를 외부 세계에 개방할 용의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녀는 중국인 관리들 사이에서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해관의 총세무사로 북아일랜드 출신 로버트 하트를 임명했다. 하트의 지휘 아래 중국 세관은 노후하고 부패한 조직에서 잘 정비된 근대적 기관으로 탈바꿈하여 중국 경제에 큰 기여했다. 하트 외에도 여러 고용된 외국인들은 당시 청나라 상황에 대해 종종 날카로운 비판과 노골적인 진언을 했는데, 서태후는 그들에게 반감을 품지 않고 오히려 지적과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비록 조상 묘와 관련해서 지하자원 개발에 있어서는 근대화 사업들을 거부했지만, 근대식 군대와 산업 육성에는 노력했다.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외국 장교들을 채용했고 무기 제조법을 가르치기 위해 외국 엔지니어들을 고용했으며, 기술과 장비를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또한 중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동문관(同文館)이 서태후 집권한 직후인 1862년에 설립되었고, 해외에 시찰단도 보냈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1』, pp. 95-116 참조)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다(1875~1889)
이 무렵 이홍장은 중국 개혁파의 영수가 되어 있었고, 공친왕과 더불어 서태후의 근대화 추진 사업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1875년, 곽숭도를 런던 공사로 보냄으로써 더 이상 시찰단이 아닌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보냈고 이후 여러 국가에 공사를 파견함으로써 해외에 있는 중국인 이민자 보호에 힘썼다. 또한 지속적으로 신식 군대 양성에 힘썼으며 1888년에는 서구식 해군 규정을 승인하였다. 한편, 기존에 기피되었던 탄광업 개발이 시작되었고, 전기가 도입되었으며, 은괴를 동전으로 교체하는 조폐사업도 실시되었다. 하지만 철도 사업에 있어서는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는데 이는 전국에 산재하는 무수한 조상들의 뫼 때문이었다. 이처럼 서태후가 통치하는 중국의 산업화는 불도저로 마구 밀어붙여 모든 전통을 파괴하는 그런 식의 산업화가 아니었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1』, pp. 186-201 참조)
1898년의 개혁(1898)
1895년부터 지속되었던 유럽 열강의 침탈에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1898년 서태후의 지시에 따라 광서제가 전하고 옹동화가 작성한 '국가 근본 정책 발표' 칙명이 선포된다. 개혁의 내용을 보자면 먼저, 과거에서 난해한 과목이 전부 폐지 되고 그 자리에 시사 정세와 경제학 시험이 들어섰으며 서양식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가 전국에 설립되었다. 또한 현대식 농업 방식, 서양식 상업, 새로운 출판과 기술혁신 등도 개혁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강유위와의 마찰로 정치적 혼선을 빚게 된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2』, pp. 337-355 참조)
서태후의 개혁, 新政(1902-1908)
의화단사건 이후 서태후는 변화를 맹세한다. 1901년, 그녀는 새로운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칙명을 선포하는데 이 칙명의 본질은 '서양으로부터 배우자'는 것이었다. 이후 1902년 초 북경으로 돌아와 1908년 말 사망할 때 까지 약 7년 동안 서태후는 일련의 개혁을 수행한다. 일련의 개혁 중에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통혼 금지 철폐, 전족 금지를 통한 여성 해방, 과거 제도 폐지, 아편 수입 중단 등 혁신적인 내용이 많았으며, 청나라 사람들은 첫 거리 조명, 첫 수돗물, 첫 전화, 첫 서양식 의과 대학들, 첫 스포츠 대회, 첫 극장, 첫 동물원과 공원, 첫 정부 운영 시험 농장 등 일상생활에서 '처음'에 해당하는 많은 것들을 누렸다. 또한 서태후는 정치 참여의 문도 열었는데, 유구한 중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사람들은 '국민'이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태후가 바랬던 입헌군주제의 도입은 청나라에서 이뤄지지 못했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2』, pp.497-526 참조)
말년
광서제 유폐 이후 그녀는 삶을 마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권력은 쓰러져 가는 청 왕조에서의 권력이었을 뿐, 청은 이미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여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서안으로 몽진을 갔다가 1902년 초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일련의 개혁을 진행한다. 그녀의 개혁에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통혼 금지 철폐, 전족의 철폐, 과거제 폐지, 신식 군대 확충 등이 있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크게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혁명운동 및 입헌운동 고조의 분위기 속에서 청은 결국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1908년, 광서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서태후는 두 살 난 부의(溥儀)를 황제로 지명하고 생을 마감한다.
평가
일반적으로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녀에 대해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악녀의 화신
“철의 여제 서태후, 권력과 욕망의 화신이 청조를 기울게 하다"
“서태후는 세기의 악녀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인물”
“죽는 날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탐욕의 화신”
“중국 역사의 치욕이 된 여인”
<권력욕이 강한 여인으로 묘사>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황후를 모함하는 일도 잦아졌다. 그러자 함풍제는 난아의 행패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다. - 『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음탕한 여인으로 묘사> •‘난아는 일개 환관인 이연영이 자신을 애무하는데도 가만히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난아는 음탕한 여인이었다. 환관은 비록 남성을 거세당한 남자라고 해도 황궁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다. 난아는 일찍부터 권력을 장악하려면 환관들을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환관들을 장악하는 방법은 뇌물을 주거나 자신의 몸을 맡기는 일이다. - 『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사치스러운 여인으로 묘사> •‘서태후는 사치를 일삼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루에 식사를 네 번씩 했고, 돈으로 환산하면 100만 냥어치였으니 당시 농민들의 1년 식사 값에 맞먹었다. 서태후는 피부를 매끄럽게 만들어준다고 알려진 귀한 진주가루를 십여 년간 복용했고, 비취 구슬[3] 과 진주를 매단 옷이 3천 상자가 넘었으며, 그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었다고 한다. 궁궐에서의 사치도 모자라 자신의 무덤까지 초호화판으로 지어 사후를 대비한 것은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린 청일전쟁 중에는 함대를 만들 돈 은전 3천만 냥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의 복구와 확장에 사용했다.’-『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매정한 여인으로 묘사> • 서태후는 황후 아로특씨(동치제의 정비)를 미워했다. 하루는 동치 황제와 황후 아로특씨가 사석에서 하는 말을 엿들은 서태후가 노기등등하여 불쑥 들어와 한 손으로 황후 아로특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손으로 마구 때렸다. 또한 서태후는 내정에 곤장을 준비하고 대기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동치 황제는 너무 놀라 기절했다. - 『황후삼국지』
뛰어난 여걸
“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
” — 장융
<백성들이 사랑했던 그녀> • ‘서태후의 백성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중략)… 농부들과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녀를 숭배했다. 서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겁을 먹었다. ‘이젠 누가 우리를 돌봐준단 말인가?’ 그들은 울면서 말했다.’ – 펄 벅
<외세에 맞서 싸운 군주> • 남편 함풍제가 외세의 강압 때문에 죽은 것을 지켜보았던 서태후는 反외세만 외칠 뿐 중국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8명의 고명대신을 축출한다. 또한 1860년대와 70년대에 서양식 무기와 전함을 제조할 공장과 조선소를 세우는 등 동치 연간의 양무운동과 자강 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신하들을 잘 다룰 줄 아는 뛰어난 영도자> • 중국 고위 관리들을 유럽으로 보내 서양 문물을 보고 배우게 했으며, 미국인 로버트 하트를 총 세무사로 임명하여 국고를 단단하게 쌓아 올렸다. 황권을 굳건하게 확립했기에 밖에서는 이홍장과 좌종당이, 안에서는 공친왕과 순친왕이 아무리 힘을 축적했어도 그녀에게 순종하고 감사하며 배신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최소한 대내적으로는 청조의 황권을 단단하게 틀어쥘 수 있었다.
'서태후는 청을 근대로 이끌었다. 그녀의 지도력 아래 청은 실제로 모든 근대국가의 특성을 얻기 시작했다. …(중략)… 과거제도가 폐기 되고, 서양식 학교와 대학이 자리 잡았다. 또한 그녀는 전족을 금지시킴으로써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도 싸웠다. …(중략)…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서태후는 폭군이 아니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약40년 동안, 정당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책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서태후의 정적 살해는 수십 명도 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들 중 대다수가 그녀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맞대응으로 살해된 것이었다. 서태후는 천성적으로 잔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임종 때에도, 그녀는 내전과 만주족 학살을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했다. 그녀는 제국을 희생하는 것으로 만주족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했다. …(중략)… 신기원을 이룬 성취, 정치적인 성실, 개인적인 용기라는 측면에서 서태후는 비교되기 힘든 기준을 세웠다. 그녀는 노쇠, 가난, 야만, 절대 권력을 대체하기 위해 근대화 사업을 도입했고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인도적인 처우, 편견 없는 개방성 그리고 자유를 선보였다. 거기다 서태후는 양심적이었다. 서태후는 비록 일부 흠결이 있기는 했지만 이 놀라운 정치적 수완의 여성 지도자를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2』(위의 세 항목 포함)
'자희태후는 중국역사에서 장기 집권으로 손꼽는 여성으로 정치 수완이 노련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황족과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 권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능했으며,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함으로써 청조는 그녀의 능력으로 몇 십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자희가 권력을 잡은 시기에는 청 조정의 중앙집권 및 중국 주권이 대내외적으로 각종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청 제국의 권위를 수호하고 본인 권력의 입장에서 시행한 각종 조치들이 비록 성공했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평하자면 대부분은 합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희가 이홍장, 장지동 등 한족 권신을 중용하고 양무운동을 시행한 것은 중국 근대화 공업 발전의 시작이다. 양무운동 성과의 지지하에 청 조정은 내부 반란 세력을 진압할 수 있었고, 제국 체제하에 중국을 상대적으로 안정된 국면을 맞게 하였다. 사실 자희의 개혁 수단은 매우 뛰어나다. 백일유신(무술변법을 가리킴)의 개혁 속도는 지나치게 빨라서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경자년(1900년)에 매우 큰 재앙(8개 연합국의 베이징 점령)을 겪은 후 자희황태후는 시국이 더 이상 군주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것을 의식하였고, 이에 청 조정이 새로운 정책(신정)을 펼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경자년 후 신정은 많은 방면에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 굵직한 것만 꼽자면: 관제개정, 입헌준비, 과거제 폐지, 여성전족금지, 여학교 및 신학교 창설 등이 있다'[4]. - 『慈禧-正面评价,百度百科』일부 생략
기타
외모
서태후는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기품 있는 자태를 갖고 있었다. 키는 150센티미터를 조금 넘었지만 항상 꼿꼿하게 앉아서 우아한 몸동작을 했고, 특히 피부가 아주 좋았으며, 부드러운 두 손은 노년에 이를 때까지 윤택함을 유지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다가도 느닷없이 위엄을 내뿜는 눈빛을 번쩍거렸는데, 그 유명한 원세개(袁世凱)마저도 그녀의 눈빛을 보면 진땀이 나고 불안했다고 한다.
일상
· 미신을 믿고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만주족의 샤머니즘을 맹신했다.‘천우신조’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고 마음이 복잡할 때면 손에 상주문을 들고 반나절을 정좌했다.
· 아름다움을 매우 중시해 손수 고안해서 화장품을 만들기도 하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일정 시간대에 화장대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지저분한 모습을 싫어하여 머리를 빗어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고, 항상 뜨거운 물로 손 관리를 하여 매끄러움을 유지했다.
· 서태후의 식사 때는 매번 120가지 넘는 요리가 올라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같은 음식을 세 숟가락 이상 뜨지 않았고, 다음 날에도 절대 먹지 않아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사실 이런 습관은 서태후의 개인적인 식습관이라기 보다는 음독의 해를 입지 않도록 선대부터 내려온 일종의 궁중 규범이었다고 한다.
· 담배 피우는 것을 즐겼고 특히 물 담배를 좋아했다.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는 우유였고 차에도 섞어 마셨다.
능묘 도굴 사건
1928년, 제멋대로인 군인들이 부장한 보석들을 약탈하기 위해 그녀의 능묘로 침입했다. 장교와 병사들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벽에 구멍을 내고 들어간 뒤 서태후의 관을 총검과 쇠막대기로 강제 개봉했다. 서태후 주변의 보석들을 강탈한 뒤에도 그들은 그녀의 옷을 찢고 치아를 뽑아내는 등 숨겨진 보물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녀의 유해는 노출된 채로 방치되었다.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는 이런 불경스러운 소식을 들은 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훗날 부의는 서태후의 입안에 있던 진주가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의 신발 장식이 되었다는 널리 퍼진 풍문을 듣고서 지독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때문에 부의가 일본의 만주국 설립에 강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자료
1) 장융 저, 이종인 옮김,『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1,2』, 책과함께, 2015
2) 진이•선이링 저, 룽얼 구술,『서태후와 궁녀들』, 글항아리, 2012
3) 刘奇 저,『眞實的慈禧』, 中国社会出版社, 2011
4) 편집부 저,『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황매희, 2010
5) 윤성원 저,『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시그마북스, 2015
6) 김석준 저,『중국을 움직인 13인의 여인들』, 내외신서, 2013
7) 이수광 저,『세상을 뒤바꾼 책사들의 이야기』, 일송북, 2002
각주
- ↑ 서태후의 출생에 대해선 기록된 사실이 간략하여 이설이 분분하다. 류치의 고증에 의하면, 서태후는 본래 산서성의 한 가난한 한족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이름은 “왕소겸(王小謙)”이었다고 한다. 4세 때 송씨에게 양녀로 팔려갔고, 다시 12세 때 혜징에게 시녀로 팔려가 훗날 혜징의 딸의 신분으로 궁녀에 선발되었다고 한다.
- ↑ 동치제의 죽음에는 서태후의 독살, 매독, 천연두 등 여러 설이 있다.
- ↑ 서태후는 온갖 휘황찬란한 보석 중에서도 특히 비취에 대한 사랑은 거의 열병 수준이었다. 식탁이나 식기도 비취로 만든 것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손톱 끝에는 75밀리미터 길이의 비취 장식을 달았고, 화장 전에는 비취 막대기로 얼굴을 마사지했다. 서태후에게는 최상급 다이아몬드도 비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양 특사가 바친 최상급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돌려보낸 적도 있는 반면, 아주 작더라도 비취를 상납하는 사람에게는 기뻐하며 큰 선물을 안겨 보냈다.
- ↑ '慈禧太后是中国历史中,少数长期当政的女性,政治手腕堪称干练,尤其擅长操弄亲贵朝臣之间的权力平衡,以维系自身的绝对权威,清朝因为她的能力而续命数十年。慈禧当权时期,清廷的中央集权以及中国主权面临来自内部及外国的种种威胁,她从捍卫清帝国权威及其本身权力的立场出发,所作之举措收效虽不尽成功,但放在历史脉络下做持平之论,多数允称合理。… 慈禧重用李鸿章、张之洞等汉族重臣,开办洋务运动,是中国发展近代化工业的开始。在洋务自强运动成果的支持下,清廷得以弭平内部反叛势力,在帝国体制下维系中国相对稳定的局面。慈禧的改革手段其实非常高明,百日维新改革速度过快,根本只是一场闹剧,不可能成功。在庚子年一场大祸之后,慈禧皇太后意识到时局已不容她坚持帝制传统,乃容许清廷推展多种新政措施。庚子后新政牵涉多端,其中荦荦大者包括:官制改定、准备立宪、废科举制度、禁止妇女缠足、兴办女学、新学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