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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진 초기 사람들은 ‘왕과 말이 천하를 함께 한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왕이란 [[왕도]](王道)와 그의 사촌 [[왕돈]](王敦)으로 대표되는 낭야 왕씨 일족을 말하고, 말은 황실의 사마씨를 말한다. 왕씨가 황실과 더불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왕과 말이 산동성 남부에 해당하는 낭야에서 강남땅으로 건너왔을 때 그 힘은 미미했다. 만일 토착 세력이 연합해서 그들을 배척했다면 동진 정권은 수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왕과 말’은 운이 좋았다. [[진민]] 토벌의 긴장이 아직 남아 있던 강남에 그들이 온 것이다. 강남의 호족들은 그때까지 여러 번 따끔한 맛을 봤기 때문에 처음에는 좀처럼 이 ‘왕과 말’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도의 훌륭한 사전 공작 덕분에 마침내 호족들도 그들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진나라의 황족이었으므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진민에게 붙는 것과 사정이 달랐다.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왕도의 수완도 훌륭했으나 사람들도 멋지게 그 위에 편승했다. | ||
+ | 수년 뒤 낙양이 함락되고 서진이 궤멸하자 강남으로 흘러들어온 '왕과 말'의 권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만일 사마예가 처음부터 황제를 칭했다면 강남 호족도 그들을 경계했을 것이다. 왕도의 작전이 잇따라 들어맞았다. 황제가 천하를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말’쪽에서는 '왕과 말이 천하를 함께 한다'는 상태가 불만이었다. 이에 황제는 왕씨의 힘을 억누르려고 하였다. 차츰 자기주장을 내세우게 된 황제가 왕씨 이외의 측근을 만들어 그들을 중용하였고, 왕씨 일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도록 하였다. 왕도는 무리하지 않는 것을 첫째로 명심한 정치가였기 때문에 빈틈을 찾는 것이 힘들었고, 형주에서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던 왕돈을 표적으로 삼게 되었다. | ||
+ | ===왕도의 정치=== | ||
+ | 호족사회였던 강남 땅에 진나라 황족 사마예가 낭야의 왕씨 사람들 몇몇과 쳐들어 온것은 삼국의 오나라 때부터 존재했던 강남지방의 토착민들에게 큰 혼란을 주었을 것이다. 보통 새롭게 찾아온 사람들은 토착민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차별을 받지만, 이 시대의 새내기들은 중원의 높은 문화를 몸에 익힌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토착민들보다 고도의 지식을 가진 계층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 온 사람들이 토착민을 멸시하는 분위기였다. 동진 왕조는 남쪽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을 고위요직에 앉혔다. 이래서는 동진 건국에 협렵한 토착민 중 일부 호족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도(王道)의 교묘한 정책으로 토착호족 중에도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따라서 불만이 집결되어 큰 세력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왕도(王道)는 후세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정책과 완전히 똑같은 정책을 실행했다.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면서 세운 원칙이 바로 '분할과 통치'였다. 왕도는 강남 호족 세력을 분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강남에는 같은 호족이라 해도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데, 소주와 회계 같은 선진지역의 호족들은 지식과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아 고전을 연구하거나 주(注)를 쓰는 인물들을 배출한 반면, 양선 주씨와 무강심씨 등은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다. 이에 왕도는 차별대우를 써서 양쪽이 결합하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연구했다.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면서 사용했이 던 수법이다. 당시 대만은 겉으로는 각지의 호족, 안으로는 다양한 유협의 우두머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그중 일부를 매우 우대했다. 이 경우 처럼 왕도는 소주와 회계의 선진호족을 우대하고 다른 후진 호족에게는 일부러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선진호족은 당연히 황가의 열렬한 우호세력이 되어주었다. 반정부 감정을 가진 후진 호족과의 합작은 이미 정신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렇게 토착 호족을 조종하는 일에 성공하고, 빈틈을 찾을 수 없었던 왕도는 황제의 꾀에도 넘어가지 못했다. 석빙(石冰)을 토벌하고 진민을 공격함으로써 동진에 큰 공을 세운 주기(周玘)는 자신이 세운 공로에 비해 보답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분한 나머지 건흥 원년(313년)에 화병으로 죽었는데, 그 의 아들 주협(周勰)에게 [[창자]](傖子)들, 즉 북쪽에서 내려온 자들에게 복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주협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하려 했으나, 핵심인 주씨 일족을 한데 모으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주씨 일족의 일부는 동진 정부에서 구품관리법을 운영하는 쪽에 들어가는 등 꽤나 괜찮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진 정부를 좋아하는 쪽이었다. 이를 무기로 왕도는 다양한 세력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너무 과해서 동진의 기반이 흔들려서는 곤란했으므로 적당히 공작해야 했다. 왕도는 그것을 조절하는 솜씨가 실로 천재적이라 할 만큼 뛰어났다. 이처럼 왕도가 없었다면 아마 동진은 중흥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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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참고문헌 == | ||
+ | *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3>>, 진순신, 살림 출판사, 2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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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유혜영, 서해문집,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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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정증보판 新中國史>>, 존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 까치, 2005 | ||
[[분류:중국의 역사]] | [[분류:중국의 역사]] |
2016년 6월 21일 (화) 23:50 기준 최신판
동진을 건국한 낭야왕 사마예(317)
팔왕의 난이 한창이던 혜제 영흥(永興) 원년(304)에 당시 황태제(皇太弟)로 있던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은 동안왕(東安王) 사마요(司馬繇)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회의에서 그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동안왕의 조카였던 29세의 젊은 좌장군(左將軍)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는 자신도 위험에 처할까 매우 불안했다. 당시 낭야왕은 혜제를 따라 업(鄴)에 있었다. 낭야왕의 측근이던 참군(參軍) 왕도(王道)도 낭야왕에게 귀국하라고 권했다. 왕도(王道)는 낭야 지방의 이름난 호족 왕씨의 일족으로 낭야왕보다 아홉살 많았다. 왕도(王道)의 설득으로 낭야왕은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업(鄴)을 탈출해 낙양에서 어머니를 만나 함께 산동의 낭야로 돌아갔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을 치르면서 진(晉)나라의 황족은 거의 다 죽었다. 동쪽의 낭야로 돌아가 다시 서주(徐州), 양주(揚州)의 군사를 감독하고 왕도(王道)의 의견에 따라 건업(建業, 낙양)을 본거지로 정한 낭야왕만 건재했다. 낙양과 장안이 함락되자 낭야왕 사마예는 주위로부터 제위에 오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서진이 멸망한 후 포로가 된 민제 사마업(司馬鄴)이 평양으로 끌려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겨우 ‘진왕(晉王)’이라 칭하는 것만 승낙했다. 민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진왕 사마예는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라 연호를 태흥(太興)이라 고치고 남경의 땅을 건강(建康)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왕과 말이 천하를 함께 한다
동진 초기 사람들은 ‘왕과 말이 천하를 함께 한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왕이란 왕도(王道)와 그의 사촌 왕돈(王敦)으로 대표되는 낭야 왕씨 일족을 말하고, 말은 황실의 사마씨를 말한다. 왕씨가 황실과 더불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왕과 말이 산동성 남부에 해당하는 낭야에서 강남땅으로 건너왔을 때 그 힘은 미미했다. 만일 토착 세력이 연합해서 그들을 배척했다면 동진 정권은 수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왕과 말’은 운이 좋았다. 진민 토벌의 긴장이 아직 남아 있던 강남에 그들이 온 것이다. 강남의 호족들은 그때까지 여러 번 따끔한 맛을 봤기 때문에 처음에는 좀처럼 이 ‘왕과 말’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도의 훌륭한 사전 공작 덕분에 마침내 호족들도 그들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진나라의 황족이었으므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진민에게 붙는 것과 사정이 달랐다.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왕도의 수완도 훌륭했으나 사람들도 멋지게 그 위에 편승했다. 수년 뒤 낙양이 함락되고 서진이 궤멸하자 강남으로 흘러들어온 '왕과 말'의 권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만일 사마예가 처음부터 황제를 칭했다면 강남 호족도 그들을 경계했을 것이다. 왕도의 작전이 잇따라 들어맞았다. 황제가 천하를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말’쪽에서는 '왕과 말이 천하를 함께 한다'는 상태가 불만이었다. 이에 황제는 왕씨의 힘을 억누르려고 하였다. 차츰 자기주장을 내세우게 된 황제가 왕씨 이외의 측근을 만들어 그들을 중용하였고, 왕씨 일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도록 하였다. 왕도는 무리하지 않는 것을 첫째로 명심한 정치가였기 때문에 빈틈을 찾는 것이 힘들었고, 형주에서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던 왕돈을 표적으로 삼게 되었다.
왕도의 정치
호족사회였던 강남 땅에 진나라 황족 사마예가 낭야의 왕씨 사람들 몇몇과 쳐들어 온것은 삼국의 오나라 때부터 존재했던 강남지방의 토착민들에게 큰 혼란을 주었을 것이다. 보통 새롭게 찾아온 사람들은 토착민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차별을 받지만, 이 시대의 새내기들은 중원의 높은 문화를 몸에 익힌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토착민들보다 고도의 지식을 가진 계층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 온 사람들이 토착민을 멸시하는 분위기였다. 동진 왕조는 남쪽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을 고위요직에 앉혔다. 이래서는 동진 건국에 협렵한 토착민 중 일부 호족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도(王道)의 교묘한 정책으로 토착호족 중에도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따라서 불만이 집결되어 큰 세력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왕도(王道)는 후세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정책과 완전히 똑같은 정책을 실행했다.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면서 세운 원칙이 바로 '분할과 통치'였다. 왕도는 강남 호족 세력을 분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강남에는 같은 호족이라 해도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데, 소주와 회계 같은 선진지역의 호족들은 지식과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아 고전을 연구하거나 주(注)를 쓰는 인물들을 배출한 반면, 양선 주씨와 무강심씨 등은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다. 이에 왕도는 차별대우를 써서 양쪽이 결합하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연구했다.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면서 사용했이 던 수법이다. 당시 대만은 겉으로는 각지의 호족, 안으로는 다양한 유협의 우두머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그중 일부를 매우 우대했다. 이 경우 처럼 왕도는 소주와 회계의 선진호족을 우대하고 다른 후진 호족에게는 일부러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선진호족은 당연히 황가의 열렬한 우호세력이 되어주었다. 반정부 감정을 가진 후진 호족과의 합작은 이미 정신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렇게 토착 호족을 조종하는 일에 성공하고, 빈틈을 찾을 수 없었던 왕도는 황제의 꾀에도 넘어가지 못했다. 석빙(石冰)을 토벌하고 진민을 공격함으로써 동진에 큰 공을 세운 주기(周玘)는 자신이 세운 공로에 비해 보답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분한 나머지 건흥 원년(313년)에 화병으로 죽었는데, 그 의 아들 주협(周勰)에게 창자(傖子)들, 즉 북쪽에서 내려온 자들에게 복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주협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하려 했으나, 핵심인 주씨 일족을 한데 모으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주씨 일족의 일부는 동진 정부에서 구품관리법을 운영하는 쪽에 들어가는 등 꽤나 괜찮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진 정부를 좋아하는 쪽이었다. 이를 무기로 왕도는 다양한 세력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너무 과해서 동진의 기반이 흔들려서는 곤란했으므로 적당히 공작해야 했다. 왕도는 그것을 조절하는 솜씨가 실로 천재적이라 할 만큼 뛰어났다. 이처럼 왕도가 없었다면 아마 동진은 중흥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3>>, 진순신, 살림 출판사, 2011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유혜영, 서해문집, 2004
- <<수정증보판 新中國史>>, 존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 까치,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