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신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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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조 | + | ==마조 신앙개괄== |
− | 마조 신앙은 | + | {{인물정보 |
+ | |이름 = 마조 | ||
+ | |그림 = 마조프로필.jpg | ||
+ | |출생일 = B.C 340 | ||
+ | |출생지 = 복건성 보천시 미주도(福建省莆田市湄洲) | ||
+ | |사망일 = B.C 278(추정년도) | ||
+ | |생존시기 = 남송시대 | ||
+ | |관련 활동 = 무녀 | ||
+ | |주요 작품 = | ||
+ | }} | ||
+ | 마조 신앙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고 있는 [[민간신앙]]의 한 종류로, [[수신(水神)]]이다.(사묘: 중국 민간 신앙의 종교 시설을 통칭하는 말)마조는 오늘까지도 중국 연해 지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 있는 화교들이 가장 숭상하는 신령 중의 하나다. | ||
+ | 해외의 화교들이 마조에게 제사 지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근본인 선조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마조는 본래 해상을 보호하는 신이었으나 후대에 그녀의 역할이 점차 확대될 때에는 상인, 수공업자, 난산을 겪고 있는 여성이나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 모두 마조가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해외의 화교들은 마찬가지로 마조묘를 건설하고 마조 신앙을 받들며 제사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 ||
+ | <ref>http://baike.baidu.com/link?url=ZzhoDgxHKjMvPPr8TbTAcSqpMJJ17Nc07s1mJDasXITVALXbWD-Sz9RKpXsN0mTyB2fPEvXNmxWQBFu2fScXR8cuVdKHjg016bgOTi-PeRi</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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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조의 | + | ===마조의 탄생 설화=== |
− | + | 마조는 송나라 초 복건 지방에서 실존했던 여성으로, 성은 임씨이고 미주서 사람으로 원래는 사람의 화와 복을 예언하던 무녀였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가 살던 고을이었던 미주서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평범한 무녀였던 마조가 신앙으로서 재탄생하게 된 과정에는 아래와 같은 설화가 존재한다. | |
+ | 그녀가 살던 미주서에서 수백 리 떨어진 성돈이라는 마을에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원우 병인년에 돈 위에서 널빤지가 매일 나타났는데 마을 사람들이 매일 가져다 두었으나, 이튿 날이면 항상 그 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어느 날 밤, 백성들에게 “나는 미주 신녀이다. 그 널빤지가 실로 증거가 되니, 마땅히 돈 위에 내가 묵을 수 있도록 하라”고 전하여 성돈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해마다 수해와 한해 뿐 아니라 한해, 해적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신녀에게 빌었는데 그 효과가 매우 영험했다고 한다. 그 후 특히 장삿배는 더욱 더 신녀에 인도에 의지하게 되었다. | ||
− | ==마조에게 부여된 작위== | + | ===마조의 출신성분 변화=== |
+ | 마조에 대해 서술한 최초의 기록이었던 『성돈조묘중건순제묘기(1150)』에는 마조가 ‘성이 임씨이고 미주서 사람’이라는 간단한 사실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송나라 때 『선계지』라는 책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임원’이고 어머니가 왕씨라는 기록이 발견되며, 원나라 때 정단학(程端學 1278-1334)의 『천비묘기』라는 책에는 “흥화 보전 도순군의 막내딸”이라는 구체적 사실이 덧붙여진다. 마조 설화를 수록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명 말에 제작된 『천비현성록』에서는 “보전 임씨의 딸로, 시조는 당나라 때의 임피이며 아버지 임유각은 도순각이라는 관직에 있고 어머니는 왕씨이며 마조는 1남 6녀의 막내딸이다”라는 기록이 발견된다. 즉, 후대에 올수록 구체적인 사실들이 상세히 기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
+ | 또한 마조의 부모가 마조를 낳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지냈고, 부모 가문에 대대로 이어진 선행에 감복한 상제가 마모를 점지해 줄 뿐 아니라, 마조가 태어나는 당일에도 방 안이 상서로운 향기와 빛으로 가득 차는 등 신비한 출생적 요소가 더해진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역사적 사실이 훗날에 발견 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마조가 ‘천비’라는 관직을 부여받고 나라에서 최고의 지위로 격상되는 과정에서 일반 무녀 출신이라는 것은 숨기고 마조의 출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영광스러운 계보가 훗날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 ||
+ | |||
+ | ===마조에게 부여된 작위=== | ||
그녀는 선화 연간때 묘액을 하사받았고 ‘영혜현위조순영렬비’, ‘기응자제협정선경비’등의 지위를 하사 받았다. 또한 순희 7년(1180)에 묘액을 하사 받았고 소흥 2년(1182)에 순응 부인에 봉했다. 묘액을 하사받고 부인에 봉해진 마조는 소희 원년(1190)에 이르러서는 영혜비에 봉해진다. 또한 원나라 세조 지원 18년(1281)에 천비로 봉해지고, 청나라 강희 23년(1684)에는 천후로 봉해졌다. 즉, 순서대로 ‘무→부인→비’를 거쳐 천비와 천후로 봉해지는 것이다. 무와 부인, 비를 거치는 국가 공인화 과정은 으레 나타났지만, 오로지 마조만이 천비와 천후로 봉해졌다. | 그녀는 선화 연간때 묘액을 하사받았고 ‘영혜현위조순영렬비’, ‘기응자제협정선경비’등의 지위를 하사 받았다. 또한 순희 7년(1180)에 묘액을 하사 받았고 소흥 2년(1182)에 순응 부인에 봉했다. 묘액을 하사받고 부인에 봉해진 마조는 소희 원년(1190)에 이르러서는 영혜비에 봉해진다. 또한 원나라 세조 지원 18년(1281)에 천비로 봉해지고, 청나라 강희 23년(1684)에는 천후로 봉해졌다. 즉, 순서대로 ‘무→부인→비’를 거쳐 천비와 천후로 봉해지는 것이다. 무와 부인, 비를 거치는 국가 공인화 과정은 으레 나타났지만, 오로지 마조만이 천비와 천후로 봉해졌다. | ||
− | ==마조 신앙의 역사== | + | ==시대에 따른 마조 신앙의 국가 공인화 역사== |
+ | |||
+ | {{문화재 | ||
+ | |명칭 = 마조묘 | ||
+ | |한자 = 湄洲妈祖祖庙 | ||
+ | |그림 = 미주_마조묘.jpg | ||
+ | |그림설명 = 마조 신앙의 발원지 미주에 있는 마조묘입니다. | ||
+ | |분류 = 사당 | ||
+ | |소재지 = 미주 | ||
+ | |면적 = 4452㎡ | ||
+ | |개방시간 = 08:00~17:00 | ||
+ | |입장료 = 성수기 25원, 비수기 15원 | ||
+ | |관람시간 = 약 2-3시간 | ||
+ | |추천관람시기 = 3-4월 | ||
+ | }} | ||
===송(宋)대=== | ===송(宋)대=== | ||
− | 마조가 국가에 의해 그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구체적으로 남송(宋)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선화 연간 (송 휘종/흠종. 대략 1119~1125년까지의 시기)에 노윤적이라는 사람이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급사에 갔다가 동해를 지나던 중 거친 풍랑을 만났다. | + | 마조가 국가에 의해 그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구체적으로 남송(宋)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선화 연간 (송 휘종/흠종. 대략 1119~1125년까지의 시기)에 노윤적이라는 사람이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급사에 갔다가 동해를 지나던 중 거친 풍랑을 만났다. 배 8덟척 중, 7척이 모두 파괴되었으나 오직 노윤적이 탄 배에만 한 여신이 돛대에 올라 빙빙 돌며 춤을 추었고, 갑자기 평안을 얻어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공이 이 여신의 정체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묻자, 동료였던 보의랑 이진이 마조 신앙을 받들어 왔기에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노윤적은 항해에서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자, 마조는 ‘순제’라는 묘액을 최초로 하사받는다. |
− | 마조 신앙이 지위를 획득한 것을 단순히 그 영험함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찰해 보아야 한다. | + | |
− | + | 또한 마조 신앙이 지위를 획득한 것을 단순히 그 영험함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찰해 보아야 한다. | |
− | + | 당시 복건 지방에서는 巫風이 다른 지역보다 농후했으며,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으로 민간 신앙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사묘]](祠廟 : 신위나 영정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건축물) 신앙적/사회적 공간으로 부상함에 따라, 중앙 정부는 사묘를 규제하기 위해 정책적인 노력을 실시하고 있었다. 중앙의 권위에 심각한 위해를 조성할 가능성이 있는 사묘들은 봉호와 묘액이라는 제도를 통해 적절한 지위를 하사하고 흡수함으로서 정부의 지역장악력을 높이는 동시에 중앙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묘들을 견제한 것이다.실존했던 평범한 여인에 관한 신성(神性)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할 뿐 아니라 적극적인 후원을 한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송 정부가 수도를 북방 지역인 ‘개봉’에서 당시의 ‘임안’으로 불리었던 항주로 천도한 정황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북방 정권을 포기하고 강남 지역으로 피신한 남송 정부는 동남 연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고자 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마조 신앙의 신조(神助)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해상이나 연해 지역에서 발생한 소란을 진압하거나 무역선을 운행하는 데에 관부 측의 사기를 북돋을 수 있었고, 잠재적인 소요 가능성을 진압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
− | 또한 남송 정부가 수도를 북방 지역인 ‘개봉’에서 당시의 ‘임안’으로 불리었던 항주로 천도한 정황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북방 정권을 포기하고 강남 지역으로 피신한 남송 정부는 동남 연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고자 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마조 신앙의 신조(神助)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해상이나 연해 지역에서 발생한 소란을 진압하거나 무역선을 운행하는 데에 관부 측의 사기를 북돋을 수 있었고, 잠재적인 소요 가능성을 진압하는 계기가 될 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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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대=== | ===원(元)대=== | ||
마조는 송대에 ‘순제’라는 묘액을 하사 받은데 이어, 원대에는 ‘천비(天妃)’로 그 위치가 승격되었다. 남송을 멸망시킨 몽골의 원조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마조 신앙을 후원했는데, 이는 원나라의 시대적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 마조는 송대에 ‘순제’라는 묘액을 하사 받은데 이어, 원대에는 ‘천비(天妃)’로 그 위치가 승격되었다. 남송을 멸망시킨 몽골의 원조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마조 신앙을 후원했는데, 이는 원나라의 시대적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 ||
− | + | 원나라의 세조인 쿠빌라이 칸은 강남 지역의 쌀을 수도인 대도로 운송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해안을 따라 쌀을 운반하려 했으나, 양이 너무 많고 위험하다고 느꼈다. 기존 운하는 수세기 동안 방치되어 하천 주변에 집들이 난무했고 하천에는 보리를 가득 심어 운영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원 조정은 내륙의 하천들을 잇는 [[대운하]]를 새로이 건설했다. 운하의 건설과 유지비용이 엄청났지만, 쌀을 대규모로 운송하는 데에는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항주에서 대도에 이르기까지 1760킬로미터의 대운하가 연결되었고, 매년 300만 석이 넘는 조운이 안전하고 신속히 대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대로 해도 조운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았던 원조에게 있어 해운의 안전은 곧 수도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전 시대부터 해운의 보호신으로 대중성을 확보해오던 맞 신앙은 1278년(지원 15년) 천비(天妃)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이를 시작으로 모두 9차례나 책봉을 받는다. 마조 신앙을 공인화 함으로써 조정 역시 간절한 마음으로 그 효험에 기대고자 했을 것이며, 동시에 조정의 능력 밖에 있었던 능력 범위 밖의 일을 마조 신앙에게 맡김으로써,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쿠빌라이가 마조를 천비로 봉할 때 내린 조서의 “바라건대 신이 바닷길을 보호하고, 뱃사람들을 조운을 함에 신에게 의지함을 목숨처럼 여겨, 신의 위엄이 크게 빛나고 영험함이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라는 부분에서 원 조정의 간절함을 알 수 있다. | |
이 이후에도 원나라 때 이루어진 9차례의 봉작 하사의 결과, 마조는 국가적인 해신(海神)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명초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해도를 이용한 조운을 정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하지만 조운 루트를 대운하로 일원화시키고 해금 정책이 강화되면서 정부에서 마조 신앙을 중시해야 할 이유는 사라져 버린 셈이 되었다. | 이 이후에도 원나라 때 이루어진 9차례의 봉작 하사의 결과, 마조는 국가적인 해신(海神)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명초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해도를 이용한 조운을 정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하지만 조운 루트를 대운하로 일원화시키고 해금 정책이 강화되면서 정부에서 마조 신앙을 중시해야 할 이유는 사라져 버린 셈이 되었다. | ||
===명(明)대=== | ===명(明)대=== | ||
− | 태조 집권 초기, 명 정부의 반대 세력이 남쪽에서 해상까지 범위를 넓히며 활동하고 왜구의 소란이 잇따르자 태조는 “나무 한 조각도 바다에 띄우지 말라”라고 명하고, “사사로이 외국인들과 교역을 하는 사람은 엄한 죄로 다스린다”라는 | + | 태조 집권 초기, 명 정부의 반대 세력이 남쪽에서 해상까지 범위를 넓히며 활동하고 왜구의 소란이 잇따르자 태조는 “나무 한 조각도 바다에 띄우지 말라”라고 명하고, “사사로이 외국인들과 교역을 하는 사람은 엄한 죄로 다스린다”라는 [[해금령]]을 내린다. 조정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공무역을 축소하고, 일반인들의 사무역은 아예 금지시켰다. 관부에서도 마조 신앙을 헌창해야 할 이유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해금 정책이 실시되고 마조에 대한 국가 권력의 관심이 저조했던 명대의 마조 신앙은 타격을 받지 않고 이로 인해 더욱 융성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
− | 해금령이 실시되고 조운이 대운하로 일원화된 이후, 마조의 성격은 해신(海神) 뿐만 아니라 하신(河神)의 기능도 수행하게 | + | 해금령이 실시되고 조운이 대운하로 일원화된 이후, 마조의 성격은 해신(海神) 뿐만 아니라 하신(河神)의 기능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금령이 반포되자 내륙의 하도 운성의 안전을 희구하는 수신으로 변용되어 민간 사회에 수용되었다. 대운하를 따라 마조 신앙이 내륙으로 자연스럽게 침투해하여 바다의 해안선 뿐만 아니라 대운하가 지나는 요충지에도 마조 신앙이 곳곳에 존재하게 되었으니, 이를 항주 출신의 낭영(1487~?)이라는 사람은 명초까지만 해도 조운으로 인해 중시되었던 마조 신앙이 “이후부터 바다 선박에 대한 영험이 하나같지 않고, 사방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각기 천비묘(마조의 사묘)를 세우니, 지금 각지에 마조가 존재”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말에서, 마조 신앙이 해금령으로 인해 더욱 번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해금령은 조운과 마조 신앙의 관련성을 높였으며 대운하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유통량의 증가에 따라 번성했다고 볼 수 있다. |
+ | |||
+ | ===청(靑)대=== | ||
+ | 대만의 반청 운동을 정벌하기 위해 강희제가 시랑을 정해장군으로 파견하여 대만을 평정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
+ | 명이 멸망한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반청운동을 전개하던 정성공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정경과 손자 정극랑에 이르기까지 반청 운동이 지속되었다. 1680년에 청나라 군대가 대만을 공격한 이래, 강희제가 1868년에 시랑이라는 사람을 장군에 봉해 대만을 평정하였고, 강희 23년(1684)에 마침내 마조는 천후에 봉해지고, 시랑 장군에 의해 대만 천후궁이 건립되었다. | ||
+ |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마조는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당시 대만 정벌에 참전한 병사의 대부분도 연해 지역 출신으로, 마조 신앙이 번성했던 지역 출신이었다. 즉, 군사들 대부분은 마조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고 바다를 건너거나 수전(水戰)의 과정에서 마조가 군대를 돕는다는 신화가 퍼져 나가게 되었고, 군사들을 통솔하는 입장에 있던 관리자들 역시 마조 신앙을 이용해 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마조 신앙을 내세워 대만 정벌을 진행했다는 것은 ‘마조’의 이름을 걸고 전쟁을 한다는 것으로서 청의 대만 정벌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던 의도도 있었다. | ||
+ | |||
+ | ==현대 중국 대륙의 마조 신앙== | ||
+ | 청조 멸망 후 마조 신앙은 국가가 주도하던 방향에서 벗어나 대중적인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무신론이 확산되고 모든 재산의 국유화(1955~1956)가 이루어지면서 종교는 경제적으로 존립 기반을 잃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조 신앙을 비롯한 [[민간 신앙]] 역시 급속히 쇠락한다. 또한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면서 모든 사묘와 신상이 파괴되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개혁 개방]]이 실시되어 종교 정책도 건국 초기 수준으로 완화되기 시작하였고, 80년대 초부터 마조 신앙을 비롯한 각종 민간 신앙이 부활한다. | ||
+ | 여기서, [[개혁 개방]]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마조 신앙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혁 개방 초기 중국은 외자 유치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화교들의 투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에 대륙인들은 "문화로 다리를 놓아 경제를 활성화시키자(文化塔台,经济唱据)"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대만 사업가들의 투자를 유치하였다. 여기서 "문화"라 함은, 마조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 ||
+ | 정부 역시도 마조 신앙을 환영하는 입장인데, 이는 마조 신앙이 대만의 독립으로 인해 긴장된 양안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떄문이다. | ||
+ | ===마조 신앙과 양안관계 "和平女神"=== | ||
+ | 역사적으로 마조 신앙이 국가 공인화 과정을 거치며 국가 수호신 역할을 했었었다면, 오늘날에는 대륙과 대만이 함께 신봉하는 '평화의 여신(和平女神)'이라는 이름으로 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해협의 평화 여신(海峡和平女神)"은 마조신앙에 대한 매우 객관적이고 타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마조는 여신 이름이고 평화는 주제이며, 양안(两岸)은 합당한 범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조가 양안 관계의 발전 중 평화를 가져다주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바램일 뿐만 아니라, 시대적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다. 대륙의 인민들이 이른 바 '소강사회(小康社会)'를 건설하고 보급하는데에는 평화로운 환경이 필요하며, 대만의 동포 또한 평화를 전제로 한 안정과 발전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양안 교류의 실현이 증명하듯, 마조 문화는 양안 평화(两岸和平)의 이상적인 교량이다. 20년 이래, 우리는 이 교량을 통하여 양안 인민들의 교류를 밀접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 많은 사건 위에서 담론을 형성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조 문화의 교류를 통해 양안 인민들이 동족이며 같은 혈연을 지닌 중화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증진했다는 데에 있다.<ref>http://baike.baidu.com/link?url=1x8neW1C5DfqhwLaHTuRRjrSTyKSIjVmxWDqBDdw1DVYtzNQC9mzOwZg-84PRqeS3NFdY9YBFhEijYswGmeqy_</ref> | ||
+ | 양안 교류는 1949년 국민당 정부의 대만 퇴각 이후 단절되어왔다. 냉전으로 인한 사상적 대립과 문화 혁명 등으로 인하여 계속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초기 80년대 교류는 마조 신앙이 매개가 되었다. 당시 대만 마조 신도들은 당국의 금지령을 무릅쓰고, 일본과 홍콩 등지를 경유하거나 해상 경로를 통해 대륙에 있는 마조 사묘로 참배를 감행하였을 정도라고 한다. | ||
+ | 또한 90년대부터는 대만 신도들의 대륙 마조묘 참배 숫자가 급증했다. 90년대 후반에는 대만 신도들의 사묘 참배 뿐 아니라, 대륙 마조의 대만 방문이 허용되었다. 대륙 미주마조는 1997년 1월 대만 신도들의 요청으로 102일 동안 대만 전역을 순례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에는 대만 내의 34개의 사묘가 참가하였고, 이 활동에 참가한 신도 수는 약 천만 명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최근 가장 주목되고 있는 사실은 마조 사묘 참배를 위한 '종교 직항'이 개설되어 대만의 팽호오 대륙의 천주를 있는 해상 직항이 있다고 한다. | ||
+ | 이처럼 마조는 양안의 공식 교류 이전의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80년대 말 유네스코로부터 '평화의 여신'이라는 표창을 받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마조는 양안이 함께 믿는 신이라는 점에서 확대되어 양안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상징하는 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
+ | |||
+ | ===상업화=== | ||
+ | [[파일:妈祖面.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마조면]][[파일:妈祖电视剧.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2012년 CCTV에서 방영된 마조 신앙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입니다.]] 개혁 개방 초기에는 마조 신앙을 복원하공 이를 통해 해외 화교들 및 대만 거주 중국인들의 자본을 유치하려 했다면, 최근에는 마조 신앙 자체를 문화 상품으로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TV 드라마 <마조>는 마조의 일생을 그리는 드라마이다. 또한 마조의 사묘 참배를 하는 관광 상품이 개발중이기도 하고, 마조 신앙의 본원지라고 할 수 있는 복건 포전 지방을 마조 관광단지로 조성하고 사묘 참배와 주변 지역 관광 지역을 결합시킨 여행 상품을 내놓았으며, '마조'를 이용한 각종 캐릭터 상품 및 마조 국수가 출시되기도 하였다. 중국 고대에서 시작된 민간 신앙이었던 마조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향유하는 '문화'로서 그 입지가 받아들여지는 추세이다. | ||
+ | |||
+ | ==마조 신앙의 성격== | ||
+ | ===대중성=== | ||
+ | 마조신앙은 본래 민간에서 출발하여 국가신앙으로 발전했으며, 민간에서부터 조정 관리, 황실까지 폭넓은 계층을 아우르며 수용되었다. 또한 처음 시작은 복건성의 포전현이었으나 곧 중국 전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 화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앙이다. | ||
+ |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신은 주로 여성에 의해 숭배되었다. 또한 출산과 자녀 양육 등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능이 한정되었던 반면, 마조는 남녀 대중에게 모두 신봉되었다. 또한 해신, 하신, 그리고 전쟁신으로서 그 역할이 '여성'이라는 당시의 한계에 구속받지 않았다. 당시 민간 에서도, 국가에 의해서도 최고 권위를 인정받았던 여신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발자취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화로서 현대 사회에서도 그 능력과 역할을 인정받으며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 ||
− | === | + | ==참고 문헌== |
− | + | * 서승화, 중국의 마조신앙(媽祖信仰)연구 -마조 신앙의 사상적, 지역적 발전과정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2006 | |
− | + | * 이유진, 마조 신앙의 국가 공인화 과정과 그 의미, 중국어문학논집 제70호 (2011년 10월) pp.461-480 | |
+ | * 조영헌, 대운하와 중국 상인, 민음사, 2011. | ||
+ | * 이화승, 상인 이야기-인이와 실리를 좇아 천하를 밟은 중국 상인사, 행성B잎새, 2014. |
2016년 6월 23일 (목) 20:15 기준 최신판
목차
마조 신앙개괄
마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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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
B.C 340 복건성 보천시 미주도(福建省莆田市湄洲) |
사망 |
B.C 278(추정년도) |
생존시기 | 남송시대 |
관련 활동 | 무녀 |
마조 신앙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고 있는 민간신앙의 한 종류로, 수신(水神)이다.(사묘: 중국 민간 신앙의 종교 시설을 통칭하는 말)마조는 오늘까지도 중국 연해 지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 있는 화교들이 가장 숭상하는 신령 중의 하나다. 해외의 화교들이 마조에게 제사 지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근본인 선조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마조는 본래 해상을 보호하는 신이었으나 후대에 그녀의 역할이 점차 확대될 때에는 상인, 수공업자, 난산을 겪고 있는 여성이나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 모두 마조가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해외의 화교들은 마찬가지로 마조묘를 건설하고 마조 신앙을 받들며 제사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1]
마조의 탄생 설화
마조는 송나라 초 복건 지방에서 실존했던 여성으로, 성은 임씨이고 미주서 사람으로 원래는 사람의 화와 복을 예언하던 무녀였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가 살던 고을이었던 미주서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평범한 무녀였던 마조가 신앙으로서 재탄생하게 된 과정에는 아래와 같은 설화가 존재한다. 그녀가 살던 미주서에서 수백 리 떨어진 성돈이라는 마을에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원우 병인년에 돈 위에서 널빤지가 매일 나타났는데 마을 사람들이 매일 가져다 두었으나, 이튿 날이면 항상 그 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어느 날 밤, 백성들에게 “나는 미주 신녀이다. 그 널빤지가 실로 증거가 되니, 마땅히 돈 위에 내가 묵을 수 있도록 하라”고 전하여 성돈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해마다 수해와 한해 뿐 아니라 한해, 해적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신녀에게 빌었는데 그 효과가 매우 영험했다고 한다. 그 후 특히 장삿배는 더욱 더 신녀에 인도에 의지하게 되었다.
마조의 출신성분 변화
마조에 대해 서술한 최초의 기록이었던 『성돈조묘중건순제묘기(1150)』에는 마조가 ‘성이 임씨이고 미주서 사람’이라는 간단한 사실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송나라 때 『선계지』라는 책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임원’이고 어머니가 왕씨라는 기록이 발견되며, 원나라 때 정단학(程端學 1278-1334)의 『천비묘기』라는 책에는 “흥화 보전 도순군의 막내딸”이라는 구체적 사실이 덧붙여진다. 마조 설화를 수록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명 말에 제작된 『천비현성록』에서는 “보전 임씨의 딸로, 시조는 당나라 때의 임피이며 아버지 임유각은 도순각이라는 관직에 있고 어머니는 왕씨이며 마조는 1남 6녀의 막내딸이다”라는 기록이 발견된다. 즉, 후대에 올수록 구체적인 사실들이 상세히 기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마조의 부모가 마조를 낳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지냈고, 부모 가문에 대대로 이어진 선행에 감복한 상제가 마모를 점지해 줄 뿐 아니라, 마조가 태어나는 당일에도 방 안이 상서로운 향기와 빛으로 가득 차는 등 신비한 출생적 요소가 더해진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역사적 사실이 훗날에 발견 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마조가 ‘천비’라는 관직을 부여받고 나라에서 최고의 지위로 격상되는 과정에서 일반 무녀 출신이라는 것은 숨기고 마조의 출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영광스러운 계보가 훗날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마조에게 부여된 작위
그녀는 선화 연간때 묘액을 하사받았고 ‘영혜현위조순영렬비’, ‘기응자제협정선경비’등의 지위를 하사 받았다. 또한 순희 7년(1180)에 묘액을 하사 받았고 소흥 2년(1182)에 순응 부인에 봉했다. 묘액을 하사받고 부인에 봉해진 마조는 소희 원년(1190)에 이르러서는 영혜비에 봉해진다. 또한 원나라 세조 지원 18년(1281)에 천비로 봉해지고, 청나라 강희 23년(1684)에는 천후로 봉해졌다. 즉, 순서대로 ‘무→부인→비’를 거쳐 천비와 천후로 봉해지는 것이다. 무와 부인, 비를 거치는 국가 공인화 과정은 으레 나타났지만, 오로지 마조만이 천비와 천후로 봉해졌다.
시대에 따른 마조 신앙의 국가 공인화 역사
마조묘 湄洲妈祖祖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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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 신앙의 발원지 미주에 있는 마조묘입니다. | |
분류 | 사당 |
면적 | 4452㎡ |
소재지 | 미주 |
개방시간 | 08:00~17:00 |
관람시간 | 약 2-3시간 |
추천관람시기 | 3-4월 |
입장료 | 성수기 25원, 비수기 15원 |
송(宋)대
마조가 국가에 의해 그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구체적으로 남송(宋)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선화 연간 (송 휘종/흠종. 대략 1119~1125년까지의 시기)에 노윤적이라는 사람이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급사에 갔다가 동해를 지나던 중 거친 풍랑을 만났다. 배 8덟척 중, 7척이 모두 파괴되었으나 오직 노윤적이 탄 배에만 한 여신이 돛대에 올라 빙빙 돌며 춤을 추었고, 갑자기 평안을 얻어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공이 이 여신의 정체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묻자, 동료였던 보의랑 이진이 마조 신앙을 받들어 왔기에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노윤적은 항해에서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자, 마조는 ‘순제’라는 묘액을 최초로 하사받는다.
또한 마조 신앙이 지위를 획득한 것을 단순히 그 영험함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찰해 보아야 한다. 당시 복건 지방에서는 巫風이 다른 지역보다 농후했으며,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으로 민간 신앙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사묘(祠廟 : 신위나 영정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건축물) 신앙적/사회적 공간으로 부상함에 따라, 중앙 정부는 사묘를 규제하기 위해 정책적인 노력을 실시하고 있었다. 중앙의 권위에 심각한 위해를 조성할 가능성이 있는 사묘들은 봉호와 묘액이라는 제도를 통해 적절한 지위를 하사하고 흡수함으로서 정부의 지역장악력을 높이는 동시에 중앙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묘들을 견제한 것이다.실존했던 평범한 여인에 관한 신성(神性)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할 뿐 아니라 적극적인 후원을 한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송 정부가 수도를 북방 지역인 ‘개봉’에서 당시의 ‘임안’으로 불리었던 항주로 천도한 정황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북방 정권을 포기하고 강남 지역으로 피신한 남송 정부는 동남 연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고자 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마조 신앙의 신조(神助)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해상이나 연해 지역에서 발생한 소란을 진압하거나 무역선을 운행하는 데에 관부 측의 사기를 북돋을 수 있었고, 잠재적인 소요 가능성을 진압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원(元)대
마조는 송대에 ‘순제’라는 묘액을 하사 받은데 이어, 원대에는 ‘천비(天妃)’로 그 위치가 승격되었다. 남송을 멸망시킨 몽골의 원조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마조 신앙을 후원했는데, 이는 원나라의 시대적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원나라의 세조인 쿠빌라이 칸은 강남 지역의 쌀을 수도인 대도로 운송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해안을 따라 쌀을 운반하려 했으나, 양이 너무 많고 위험하다고 느꼈다. 기존 운하는 수세기 동안 방치되어 하천 주변에 집들이 난무했고 하천에는 보리를 가득 심어 운영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원 조정은 내륙의 하천들을 잇는 대운하를 새로이 건설했다. 운하의 건설과 유지비용이 엄청났지만, 쌀을 대규모로 운송하는 데에는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항주에서 대도에 이르기까지 1760킬로미터의 대운하가 연결되었고, 매년 300만 석이 넘는 조운이 안전하고 신속히 대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대로 해도 조운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았던 원조에게 있어 해운의 안전은 곧 수도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전 시대부터 해운의 보호신으로 대중성을 확보해오던 맞 신앙은 1278년(지원 15년) 천비(天妃)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이를 시작으로 모두 9차례나 책봉을 받는다. 마조 신앙을 공인화 함으로써 조정 역시 간절한 마음으로 그 효험에 기대고자 했을 것이며, 동시에 조정의 능력 밖에 있었던 능력 범위 밖의 일을 마조 신앙에게 맡김으로써,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쿠빌라이가 마조를 천비로 봉할 때 내린 조서의 “바라건대 신이 바닷길을 보호하고, 뱃사람들을 조운을 함에 신에게 의지함을 목숨처럼 여겨, 신의 위엄이 크게 빛나고 영험함이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라는 부분에서 원 조정의 간절함을 알 수 있다. 이 이후에도 원나라 때 이루어진 9차례의 봉작 하사의 결과, 마조는 국가적인 해신(海神)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명초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해도를 이용한 조운을 정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하지만 조운 루트를 대운하로 일원화시키고 해금 정책이 강화되면서 정부에서 마조 신앙을 중시해야 할 이유는 사라져 버린 셈이 되었다.
명(明)대
태조 집권 초기, 명 정부의 반대 세력이 남쪽에서 해상까지 범위를 넓히며 활동하고 왜구의 소란이 잇따르자 태조는 “나무 한 조각도 바다에 띄우지 말라”라고 명하고, “사사로이 외국인들과 교역을 하는 사람은 엄한 죄로 다스린다”라는 해금령을 내린다. 조정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공무역을 축소하고, 일반인들의 사무역은 아예 금지시켰다. 관부에서도 마조 신앙을 헌창해야 할 이유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해금 정책이 실시되고 마조에 대한 국가 권력의 관심이 저조했던 명대의 마조 신앙은 타격을 받지 않고 이로 인해 더욱 융성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해금령이 실시되고 조운이 대운하로 일원화된 이후, 마조의 성격은 해신(海神) 뿐만 아니라 하신(河神)의 기능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금령이 반포되자 내륙의 하도 운성의 안전을 희구하는 수신으로 변용되어 민간 사회에 수용되었다. 대운하를 따라 마조 신앙이 내륙으로 자연스럽게 침투해하여 바다의 해안선 뿐만 아니라 대운하가 지나는 요충지에도 마조 신앙이 곳곳에 존재하게 되었으니, 이를 항주 출신의 낭영(1487~?)이라는 사람은 명초까지만 해도 조운으로 인해 중시되었던 마조 신앙이 “이후부터 바다 선박에 대한 영험이 하나같지 않고, 사방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각기 천비묘(마조의 사묘)를 세우니, 지금 각지에 마조가 존재”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말에서, 마조 신앙이 해금령으로 인해 더욱 번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해금령은 조운과 마조 신앙의 관련성을 높였으며 대운하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유통량의 증가에 따라 번성했다고 볼 수 있다.
청(靑)대
대만의 반청 운동을 정벌하기 위해 강희제가 시랑을 정해장군으로 파견하여 대만을 평정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이 멸망한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반청운동을 전개하던 정성공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정경과 손자 정극랑에 이르기까지 반청 운동이 지속되었다. 1680년에 청나라 군대가 대만을 공격한 이래, 강희제가 1868년에 시랑이라는 사람을 장군에 봉해 대만을 평정하였고, 강희 23년(1684)에 마침내 마조는 천후에 봉해지고, 시랑 장군에 의해 대만 천후궁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마조는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당시 대만 정벌에 참전한 병사의 대부분도 연해 지역 출신으로, 마조 신앙이 번성했던 지역 출신이었다. 즉, 군사들 대부분은 마조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고 바다를 건너거나 수전(水戰)의 과정에서 마조가 군대를 돕는다는 신화가 퍼져 나가게 되었고, 군사들을 통솔하는 입장에 있던 관리자들 역시 마조 신앙을 이용해 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마조 신앙을 내세워 대만 정벌을 진행했다는 것은 ‘마조’의 이름을 걸고 전쟁을 한다는 것으로서 청의 대만 정벌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던 의도도 있었다.
현대 중국 대륙의 마조 신앙
청조 멸망 후 마조 신앙은 국가가 주도하던 방향에서 벗어나 대중적인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무신론이 확산되고 모든 재산의 국유화(1955~1956)가 이루어지면서 종교는 경제적으로 존립 기반을 잃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조 신앙을 비롯한 민간 신앙 역시 급속히 쇠락한다. 또한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면서 모든 사묘와 신상이 파괴되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개혁 개방이 실시되어 종교 정책도 건국 초기 수준으로 완화되기 시작하였고, 80년대 초부터 마조 신앙을 비롯한 각종 민간 신앙이 부활한다. 여기서, 개혁 개방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마조 신앙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혁 개방 초기 중국은 외자 유치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화교들의 투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에 대륙인들은 "문화로 다리를 놓아 경제를 활성화시키자(文化塔台,经济唱据)"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대만 사업가들의 투자를 유치하였다. 여기서 "문화"라 함은, 마조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정부 역시도 마조 신앙을 환영하는 입장인데, 이는 마조 신앙이 대만의 독립으로 인해 긴장된 양안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떄문이다.
마조 신앙과 양안관계 "和平女神"
역사적으로 마조 신앙이 국가 공인화 과정을 거치며 국가 수호신 역할을 했었었다면, 오늘날에는 대륙과 대만이 함께 신봉하는 '평화의 여신(和平女神)'이라는 이름으로 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해협의 평화 여신(海峡和平女神)"은 마조신앙에 대한 매우 객관적이고 타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마조는 여신 이름이고 평화는 주제이며, 양안(两岸)은 합당한 범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조가 양안 관계의 발전 중 평화를 가져다주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바램일 뿐만 아니라, 시대적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다. 대륙의 인민들이 이른 바 '소강사회(小康社会)'를 건설하고 보급하는데에는 평화로운 환경이 필요하며, 대만의 동포 또한 평화를 전제로 한 안정과 발전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양안 교류의 실현이 증명하듯, 마조 문화는 양안 평화(两岸和平)의 이상적인 교량이다. 20년 이래, 우리는 이 교량을 통하여 양안 인민들의 교류를 밀접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 많은 사건 위에서 담론을 형성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조 문화의 교류를 통해 양안 인민들이 동족이며 같은 혈연을 지닌 중화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증진했다는 데에 있다.[2] 양안 교류는 1949년 국민당 정부의 대만 퇴각 이후 단절되어왔다. 냉전으로 인한 사상적 대립과 문화 혁명 등으로 인하여 계속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초기 80년대 교류는 마조 신앙이 매개가 되었다. 당시 대만 마조 신도들은 당국의 금지령을 무릅쓰고, 일본과 홍콩 등지를 경유하거나 해상 경로를 통해 대륙에 있는 마조 사묘로 참배를 감행하였을 정도라고 한다. 또한 90년대부터는 대만 신도들의 대륙 마조묘 참배 숫자가 급증했다. 90년대 후반에는 대만 신도들의 사묘 참배 뿐 아니라, 대륙 마조의 대만 방문이 허용되었다. 대륙 미주마조는 1997년 1월 대만 신도들의 요청으로 102일 동안 대만 전역을 순례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에는 대만 내의 34개의 사묘가 참가하였고, 이 활동에 참가한 신도 수는 약 천만 명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최근 가장 주목되고 있는 사실은 마조 사묘 참배를 위한 '종교 직항'이 개설되어 대만의 팽호오 대륙의 천주를 있는 해상 직항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마조는 양안의 공식 교류 이전의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80년대 말 유네스코로부터 '평화의 여신'이라는 표창을 받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마조는 양안이 함께 믿는 신이라는 점에서 확대되어 양안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상징하는 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상업화
개혁 개방 초기에는 마조 신앙을 복원하공 이를 통해 해외 화교들 및 대만 거주 중국인들의 자본을 유치하려 했다면, 최근에는 마조 신앙 자체를 문화 상품으로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TV 드라마 <마조>는 마조의 일생을 그리는 드라마이다. 또한 마조의 사묘 참배를 하는 관광 상품이 개발중이기도 하고, 마조 신앙의 본원지라고 할 수 있는 복건 포전 지방을 마조 관광단지로 조성하고 사묘 참배와 주변 지역 관광 지역을 결합시킨 여행 상품을 내놓았으며, '마조'를 이용한 각종 캐릭터 상품 및 마조 국수가 출시되기도 하였다. 중국 고대에서 시작된 민간 신앙이었던 마조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향유하는 '문화'로서 그 입지가 받아들여지는 추세이다.
마조 신앙의 성격
대중성
마조신앙은 본래 민간에서 출발하여 국가신앙으로 발전했으며, 민간에서부터 조정 관리, 황실까지 폭넓은 계층을 아우르며 수용되었다. 또한 처음 시작은 복건성의 포전현이었으나 곧 중국 전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 화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앙이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신은 주로 여성에 의해 숭배되었다. 또한 출산과 자녀 양육 등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능이 한정되었던 반면, 마조는 남녀 대중에게 모두 신봉되었다. 또한 해신, 하신, 그리고 전쟁신으로서 그 역할이 '여성'이라는 당시의 한계에 구속받지 않았다. 당시 민간 에서도, 국가에 의해서도 최고 권위를 인정받았던 여신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발자취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화로서 현대 사회에서도 그 능력과 역할을 인정받으며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참고 문헌
- 서승화, 중국의 마조신앙(媽祖信仰)연구 -마조 신앙의 사상적, 지역적 발전과정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2006
- 이유진, 마조 신앙의 국가 공인화 과정과 그 의미, 중국어문학논집 제70호 (2011년 10월) pp.461-480
- 조영헌, 대운하와 중국 상인, 민음사, 2011.
- 이화승, 상인 이야기-인이와 실리를 좇아 천하를 밟은 중국 상인사, 행성B잎새,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