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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로 돌아온 손빈은 장군 전기의 빈객(賓客)이 되었다. 당시 제나라 귀족 사이에서는 많은 돈을 걸고 하는 경마 노름이 크게 유행했다. 손빈은 경마에 참여하는 말들이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고, 시합은 삼판양승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손빈은 전기에게 다음 번 시합에서는 반드시 이길 수 있게 해주겠노라 장담했고 전기는 손빈의 말을 믿고는 천 금을 걸고 위왕을 비롯한 공자들과 내기를 했다. 시합이 시작되기에 앞서 손빈은 전기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일러주었다. 먼저 제일 못한 하등 말을 상대의 상등 말과 붙여서 한 판을 져주고, 다음 상등 말을 상대의 중등 말과 붙여 한 판을 만회한 다음 상대의 하등 말과 내 중등 말을 붙이면 필승이라는 것이었다. 전기는 이 방법으로 당연히 시합에서 이겼고 훗날 사람들은 당시 손빈이 제기한 이 방법을 '삼사법'이라 불렀다. | 제나라로 돌아온 손빈은 장군 전기의 빈객(賓客)이 되었다. 당시 제나라 귀족 사이에서는 많은 돈을 걸고 하는 경마 노름이 크게 유행했다. 손빈은 경마에 참여하는 말들이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고, 시합은 삼판양승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손빈은 전기에게 다음 번 시합에서는 반드시 이길 수 있게 해주겠노라 장담했고 전기는 손빈의 말을 믿고는 천 금을 걸고 위왕을 비롯한 공자들과 내기를 했다. 시합이 시작되기에 앞서 손빈은 전기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일러주었다. 먼저 제일 못한 하등 말을 상대의 상등 말과 붙여서 한 판을 져주고, 다음 상등 말을 상대의 중등 말과 붙여 한 판을 만회한 다음 상대의 하등 말과 내 중등 말을 붙이면 필승이라는 것이었다. 전기는 이 방법으로 당연히 시합에서 이겼고 훗날 사람들은 당시 손빈이 제기한 이 방법을 '삼사법'이라 불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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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빈은 절묘한 작전으로 자신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원수에게 당당하게 복수했으며, 자신의 군사 경험을 원숙한 병법으로 정리해냈다. 그의 삶을 반영한 『손빈병법』은 이런 점에서 『손자병법』을 앞지르고 있다. 1972년에 이르러 산둥성에서 죽간(竹簡)으로 된 손빈 병법이 발견되고, 손무가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는 아닌 것이 밝혀지면서 전혀 별개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손빈은 병법에서 위위구조, 감조유적 등 자신의 실전 경험을 종합·분석한 끝에 전쟁의 일반 규칙을 도출해냈고 전쟁의 승부는 민심의 지지 여부에서 판가름난다고 단정한다. 그의 병법이 지금도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손빈은 절묘한 작전으로 자신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원수에게 당당하게 복수했으며, 자신의 군사 경험을 원숙한 병법으로 정리해냈다. 그의 삶을 반영한 『손빈병법』은 이런 점에서 『손자병법』을 앞지르고 있다. 1972년에 이르러 산둥성에서 죽간(竹簡)으로 된 손빈 병법이 발견되고, 손무가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는 아닌 것이 밝혀지면서 전혀 별개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손빈은 병법에서 위위구조, 감조유적 등 자신의 실전 경험을 종합·분석한 끝에 전쟁의 일반 규칙을 도출해냈고 전쟁의 승부는 민심의 지지 여부에서 판가름난다고 단정한다. 그의 병법이 지금도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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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1일 (화) 16:28 기준 최신판
손빈孫臏은 중국 전국시대 중기 탁월한 전공을 세웠던 제나라의 전략가로서, 병가兵家의 대표적 인물 중에 한 명이다. 오왕 부차의 군사(軍師)로 초나라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손무孫武의 5대손으로 알려져 있고 손무와 같이 손자孫子로 불린다. 손무의 군사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군사이론과 실천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을 과시했고 중국 군사사에서 중대한 지위를 차지하는 군사 이론가이자 군사모략가이다. 손빈병법(孫臏兵法)은 손빈이 저작한 병법이다.
생애
아(阿, 현 산둥성 양의현), 견(鄄 현 산둥성 복현)의 경계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에 방연(龐涓)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에게 병법을 배웠는데, 방연은 위나라(魏)에 관직에 올라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다. 당시 제나라와 위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방연은 자신이 손빈만 못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제나라에서 손빈을 기용하면 어떡하나 몹시 꺼려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손빈을 속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위나라로 초빙했다. 손빈이 위나라로 오자 이번에는 혜왕이 뛰어난 손빈을 발탁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되어 음모를 꾸며 손빈을 무릎뼈를 도려내는 형과 얼굴에 먹칠을 하는 형에 당하게 한다. 빈(臏)이란 이름은 형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본명은 알 수 없다. 후에 우연히 방연의 간계를 알게 된 손빈은 정신병자 노릇을 하면서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다시금 묵자의 도움으로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에게 구출되어 사지를 무사히 탈출했다.
제나라로 돌아온 손빈은 장군 전기의 빈객(賓客)이 되었다. 당시 제나라 귀족 사이에서는 많은 돈을 걸고 하는 경마 노름이 크게 유행했다. 손빈은 경마에 참여하는 말들이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고, 시합은 삼판양승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손빈은 전기에게 다음 번 시합에서는 반드시 이길 수 있게 해주겠노라 장담했고 전기는 손빈의 말을 믿고는 천 금을 걸고 위왕을 비롯한 공자들과 내기를 했다. 시합이 시작되기에 앞서 손빈은 전기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일러주었다. 먼저 제일 못한 하등 말을 상대의 상등 말과 붙여서 한 판을 져주고, 다음 상등 말을 상대의 중등 말과 붙여 한 판을 만회한 다음 상대의 하등 말과 내 중등 말을 붙이면 필승이라는 것이었다. 전기는 이 방법으로 당연히 시합에서 이겼고 훗날 사람들은 당시 손빈이 제기한 이 방법을 '삼사법'이라 불렀다.
이 일을 통해 전기는 손빈이 남다른 지혜를 지닌 인재임을 알게 되었고, 바로 제나라 위왕에게 손빈을 추천했다. 이 무렵 위왕은 중원을 두고 패권을 다투던 때라 인재에 목말라 있던 터라 그는 바로 손빈을 불러 함께 병법을 논의했고 그 후 손빈는 제위왕(齊威王)의 군사(軍師)가 되어 활약하였다.
업적
계릉전투
위나라가 조나라(趙)를 공격하여 조나라의 수도를 포위했을 무렵,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제나라 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손빈과 함께 파견했다. 하지만 손빈은 조나라에 향하려고 하는 전기를 도중에 두어서 위나라 본국을 공격했다. 위나라의 본국에는 약소한 노병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므로, 조나라를 포위하고 있던 위나라의 주력군은 당황해서 포위를 풀었고 서둘러 되돌렸지만, 강행군으로 피로가 쌓여서 제나라군에 공격받아 대패하였다.
마릉전투
13년의 세월이 흘러 위나라가 방연을 장군으로 삼아 한나라(韓)를 공격하면서, 다시 전기가 장군으로, 손빈이 참모가 되어 한나라의 구원에 파견되었다. 제나라군은 계릉전투에서와 같이 위나라의 수도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방연도 이것에 대비하여 본국에도 정예병을 남기고 방어하여 제나라군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한편, 방연이 지휘하던 한나라 공략 부대를 철수하게 하여 제나라군을 양쪽에서 협공하려고 하였고 이것을 안 제나라군은 곧 군을 철수하지만, 방연을 타격하기 위하여 유인책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철수의 경우에는 추격군이 훨씬 우위에 있게 되나, 손빈은 "감조지계(減竈之計)"를 사용하여 오히려 방연이 섣불리 추격하도록 덪을 놓았다. 아궁이의 수를 첫 날에는 10만명이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다음 날에는 그의 절반, 그 다음 날에는 또 그의 절반처럼 계속 아궁이의 수를 줄여나갔고, 결국 방연은 이를 보고 "위나라의 군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사이지만, 제나라의 군사는 겁쟁이다."라고 판단하게 만들었다. 방연은 더욱 힘이 나서 발빠른 기병 위주의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군의 추격을 도모하였다.
한편, 손빈은 그 앞의 도로인 마릉(馬陵)에서 계책을 시행하였다. 주위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방책을 만든 후, 한 그루의 나무만 남겨두었고, 그 나무의 한쪽 껍질을 벗겨낸 후, 거기에 "龐涓死于此樹之下(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라고 적어두었고, 길 양측에 궁수 일만을 매복시켰다. 과연 계산대로, 한 밤중이 되자 이 장소에 방연이 도착하였고, 호기심이 발동한 방연은 글을 읽기 위해 불을 피웠다. 이것이 신호가 되어 복병은 그곳을 향하여 일제히 화살을 발사하여 수많은 위나라 군사들이 순식간에 전사하였다. 스스로가 진 것을 깨달은 방연은 "기어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遂成豎子之名)"라고 탄식한 후 자결하였고, 위나라의 태자 신(太子 申)은 포로가 되었다. 사령관을 잃은 위나라 군은 제나라군에 패배하게 되었다.이 마릉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병가 손빈(兵家孫臏)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졌다고 전해진다.
손빈병법
손빈은 절묘한 작전으로 자신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원수에게 당당하게 복수했으며, 자신의 군사 경험을 원숙한 병법으로 정리해냈다. 그의 삶을 반영한 『손빈병법』은 이런 점에서 『손자병법』을 앞지르고 있다. 1972년에 이르러 산둥성에서 죽간(竹簡)으로 된 손빈 병법이 발견되고, 손무가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는 아닌 것이 밝혀지면서 전혀 별개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손빈은 병법에서 위위구조, 감조유적 등 자신의 실전 경험을 종합·분석한 끝에 전쟁의 일반 규칙을 도출해냈고 전쟁의 승부는 민심의 지지 여부에서 판가름난다고 단정한다. 그의 병법이 지금도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