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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옛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였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대부―사―서인’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었다. 춘추 시대는 귀족이 사회적 지배권을 장악하며 세습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세습을 통해 관직을 이어나가는 [[세경제(世卿制)]]였다. 또한 이 시기의 제후국들은 [[성읍 국가]]였으므로 나머지 야(野)에는 주인이 없었으며 제후국 사이에서도 아직 영토 소유의 개념이 없었다. 성 밖의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 역시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영토국가로 접어들며 이들을 자신들의 백성으로 편입시킨다. 군사적으로는, 무기도 열악했고 인구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길어야 3~4일인 소규모 전쟁이나 장수들의 전차전이 주된 전투 형태였다. | 춘추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옛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였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대부―사―서인’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었다. 춘추 시대는 귀족이 사회적 지배권을 장악하며 세습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세습을 통해 관직을 이어나가는 [[세경제(世卿制)]]였다. 또한 이 시기의 제후국들은 [[성읍 국가]]였으므로 나머지 야(野)에는 주인이 없었으며 제후국 사이에서도 아직 영토 소유의 개념이 없었다. 성 밖의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 역시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영토국가로 접어들며 이들을 자신들의 백성으로 편입시킨다. 군사적으로는, 무기도 열악했고 인구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길어야 3~4일인 소규모 전쟁이나 장수들의 전차전이 주된 전투 형태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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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생산력 발전의 원동력은 철기의 발명과 보급이었다. 춘추 중엽에는 풀무의 발명과 더불어 ‘주철’을 제련하는 선진 기술이 출현하였는데, 이는 유럽보다 천년 가량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한, ‘숙이종’의 기록에 춘추 중기의 제나라에는 이미 철광과 제련에 종사하는 관도 (수공업 노예)가 존재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국어>의 <제어>에서는 제(齊)에서 일찍이 철로 된 농기구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산동성 임치에서 발견된 동주시대의 야철 유적지의 묘에서는 춘추 중, 후기의 철제 농기구가 발견되어 춘추시대에 들어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춘추시대의 농업은 [[우경의 확대]]와 철제농기구를 통해 발전하였다. 춘추시대, 우(牛)자와 경(耕)자가 결합되어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며 <국어>의 <진언>에서는 농민들이 제사와 종묘에 사용할 희생을 길렀으며, 이때에 소를 경작에 사용하였다고 나온다. 이를 통해 우경이 확대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우경으로 인하여 황무지가 개간되고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며 농업이 발달하였다. | 춘추시대 생산력 발전의 원동력은 철기의 발명과 보급이었다. 춘추 중엽에는 풀무의 발명과 더불어 ‘주철’을 제련하는 선진 기술이 출현하였는데, 이는 유럽보다 천년 가량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한, ‘숙이종’의 기록에 춘추 중기의 제나라에는 이미 철광과 제련에 종사하는 관도 (수공업 노예)가 존재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국어>의 <제어>에서는 제(齊)에서 일찍이 철로 된 농기구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산동성 임치에서 발견된 동주시대의 야철 유적지의 묘에서는 춘추 중, 후기의 철제 농기구가 발견되어 춘추시대에 들어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춘추시대의 농업은 [[우경의 확대]]와 철제농기구를 통해 발전하였다. 춘추시대, 우(牛)자와 경(耕)자가 결합되어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며 <국어>의 <진언>에서는 농민들이 제사와 종묘에 사용할 희생을 길렀으며, 이때에 소를 경작에 사용하였다고 나온다. 이를 통해 우경이 확대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우경으로 인하여 황무지가 개간되고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며 농업이 발달하였다. | ||
− | 이와 같이, 철제보급과 우경 확대를 통한 생산력의 대폭 성장으로 인하여 집단노동 생산방식이 분산적, 단독적인 ‘1가1호’의 소농경제로 변화하였다. 이 후, 제후와 경대부들의 사전이 대량 출현하였고 공전을 그들의 사전으로 만들려는 침탈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것이 | + | 이와 같이, 철제보급과 우경 확대를 통한 생산력의 대폭 성장으로 인하여 집단노동 생산방식이 분산적, 단독적인 ‘1가1호’의 소농경제로 변화하였다. 이 후, 제후와 경대부들의 사전이 대량 출현하였고 공전을 그들의 사전으로 만들려는 침탈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것이 [[정전제]]가 파괴되고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또한, 정전제의 기초 위에서 건립된 노예제 농업 생산도 평민과 노예의 반항 투쟁이 일어나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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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시대의 문화 === | === 춘추시대의 문화 === |
2016년 6월 27일 (월) 11:55 기준 최신판
춘추시대의 사회
춘추시대의 정치•경제
춘추와 전국시대 사이의 정확히 한 기점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막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경제사적 의미에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분 지어 설명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춘추로부터 전국으로까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회, 경제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춘추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옛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였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대부―사―서인’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었다. 춘추 시대는 귀족이 사회적 지배권을 장악하며 세습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세습을 통해 관직을 이어나가는 세경제(世卿制)였다. 또한 이 시기의 제후국들은 성읍 국가였으므로 나머지 야(野)에는 주인이 없었으며 제후국 사이에서도 아직 영토 소유의 개념이 없었다. 성 밖의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 역시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영토국가로 접어들며 이들을 자신들의 백성으로 편입시킨다. 군사적으로는, 무기도 열악했고 인구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길어야 3~4일인 소규모 전쟁이나 장수들의 전차전이 주된 전투 형태였다.
춘추시대 생산력 발전의 원동력은 철기의 발명과 보급이었다. 춘추 중엽에는 풀무의 발명과 더불어 ‘주철’을 제련하는 선진 기술이 출현하였는데, 이는 유럽보다 천년 가량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한, ‘숙이종’의 기록에 춘추 중기의 제나라에는 이미 철광과 제련에 종사하는 관도 (수공업 노예)가 존재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국어>의 <제어>에서는 제(齊)에서 일찍이 철로 된 농기구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산동성 임치에서 발견된 동주시대의 야철 유적지의 묘에서는 춘추 중, 후기의 철제 농기구가 발견되어 춘추시대에 들어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춘추시대의 농업은 우경의 확대와 철제농기구를 통해 발전하였다. 춘추시대, 우(牛)자와 경(耕)자가 결합되어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며 <국어>의 <진언>에서는 농민들이 제사와 종묘에 사용할 희생을 길렀으며, 이때에 소를 경작에 사용하였다고 나온다. 이를 통해 우경이 확대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우경으로 인하여 황무지가 개간되고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며 농업이 발달하였다.
이와 같이, 철제보급과 우경 확대를 통한 생산력의 대폭 성장으로 인하여 집단노동 생산방식이 분산적, 단독적인 ‘1가1호’의 소농경제로 변화하였다. 이 후, 제후와 경대부들의 사전이 대량 출현하였고 공전을 그들의 사전으로 만들려는 침탈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것이 정전제가 파괴되고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또한, 정전제의 기초 위에서 건립된 노예제 농업 생산도 평민과 노예의 반항 투쟁이 일어나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춘추시대의 문화
주 왕실이 무너지면서 왕실 관학을 담당하던 관료들이 민간으로 분산되어 지식인 계층을 형성했다. 이 계층은 평민의 신분으로 활동을 하거나 학파의 출현을 주도했다. 이 춘추시대를 기점으로 중국의 사상과 학문이 꽃을 피게 되었다. 이 시기의 문화는 공자의 사상으로 대표된다
공자의 사상
공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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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의 학설
인이 무엇이냐는 안연의 물음에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당시 세력을 지키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혼란이 반복되었는데 공자는 이것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인”을 또한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를 처리하는 도덕원칙으로 삼아 "인”이란 곧 "사람을 사랑함”이라고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