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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해혁명 이후 중앙정부는 독립한 각 성을 통제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각 성의 입장을 반영하는 자체적인 입헌 작업은 실패했다. 때문에 각 성은 스스로 입헌작업을 하고 그 입헌에 성공한 성끼리 연합하여 어지러운 중국의 상황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중앙정부가 중앙집권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여 일으킨 3차례의 내전으로 인해 특히 남방의 군신정권의 이권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북방과 광동의 중앙정부 사이에 낀 군신정권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연성자치를 주장하게 되었다. | + | ===신해혁명 이전, 일성지력(一省之力)=== |
+ | 일성지력이라는 개념은 명말 시기 흔히 현 규모의 범위를 포괄하며 형성된 '향리공간'이 청말에 이르러 성 단위 규모로 확대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민간', '자치' 공간의 영역이 확대되고 확충됨으로써 성 단위에서 왕조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의 기틀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다. 후술되는 연성자치운동은 각 성의 국벌 세력들이 이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성자치운동의 전제가 되는 것은 각 성의 독립이고 각 성이 독립할 수 있게 했던 동력은 다름 아닌 일성지력이었다. 미조구찌 유우조에 따르면, 명말청초에 현급 규모로 존재했던 향리공간이 청말에 이르러는 성급 규모의 향리공간으로 성숙한 것을 보면, 연방공화국의 구상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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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해혁명 이후, 각성의 갈등=== | ||
+ | [http://baike.baidu.com/subview/28947/5245939.htm 신해혁명] 이후 중앙정부는 독립한 각 성을 통제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각 성의 입장을 반영하는 자체적인 입헌 작업은 실패했다. 때문에 각 성은 스스로 입헌작업을 하고 그 입헌에 성공한 성끼리 연합하여 어지러운 중국의 상황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중앙정부가 중앙집권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여 일으킨 3차례의 내전으로 인해 특히 남방의 군신정권의 이권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북방과 광동의 중앙정부 사이에 낀 군신정권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연성자치를 주장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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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지역에서 연성자치운동이 제기 된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장경요가 호남독군으로 있을 때 호남의 토착 군신세력에 대한 수탈을 심하게 해 그들의 이권 침했다. 그리고 3번의 걸친 내란으로 인해 그 사이에 낀 호남의 손실이 매우 컸다. 이로 인해 장경요(북방세력)를 축출하고 호남의 군신정권은 남북간의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담연개(남방세력)가 정권을 잡았으나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폐를 남발하고 세금을 증가시켜 호남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기 때문에 그 역시 축출당한다. 이후 조항척이 정권을 잡고 대대적으로 연성자치운동을 주친하였다. 1921년과 1922년에 걸쳐 남북세력의 지속된 간섭과 전쟁에 영향을 받자 | + | 호남지역에서 연성자치운동이 제기 된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장경요가 호남독군으로 있을 때 호남의 토착 군신세력에 대한 수탈을 심하게 해 그들의 이권 침했다. 그리고 3번의 걸친 내란으로 인해 그 사이에 낀 호남의 손실이 매우 컸다. 이로 인해 장경요(북방세력)를 축출하고 호남의 군신정권은 남북간의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72997&cid=51397&categoryId=51397 담연개](남방세력)가 정권을 잡았으나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폐를 남발하고 세금을 증가시켜 호남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기 때문에 그 역시 축출당한다. 이후 조항척이 정권을 잡고 대대적으로 연성자치운동을 주친하였다. 1921년과 1922년에 걸쳐 남북세력의 지속된 간섭과 전쟁에 영향을 받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26749&cid=51397&categoryId=51397 조항척]은 호남자치 입헌의 요구를 가속화시켰다. 1921년 말, 호남은 성헌법을 공포하였고 조항척이 성장으로 선출되었다.이는 1920~1924년에 제기된 연성자치운동 중 최대성과로 평가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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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서에는 자치를 주장하는 두 개의 파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 + | 섬서에는 자치를 주장하는 두 개의 파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4774&cid=40942&categoryId=33398 단기서]의 임명을 받은 독군 진수번 세력이었는데 그는 자치의 구호를 이용하여 남방세력과 손을 잡고 섬서를 침입한 [https://ko.wikipedia.org/wiki/%EC%A7%81%EA%B3%84_%EA%B5%B0%EB%B2%8C 직예파]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또 다른 세력으로는 섬서의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민군 지도자인 정우임의 세력이었다. 그도 자치를 주장하였으나 그의 진정한 목적은 섬서에 들어와 있는 성외 세력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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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 | *진지양(陳志讓), 『군신정권』, 박준수 옮김, 고려원, 1993 |
+ | *溝口雄三, 성근제(번역자), "신해혁명신론", 『中國現代文學』, 2011, Vol.59 : 345-374 | ||
+ | *바이두, 聯省自治, http://baike.baidu.com/view/100300.htm | ||
+ | *바이두, 辛亥革命, http://baike.baidu.com/subview/28947/5245939.htm | ||
+ | *네이버, 담연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72997&cid=51397&categoryId=51397 | ||
+ | *네이버, 조항척,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26749&cid=51397&categoryId=51397 | ||
+ | *네이버, 단기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4774&cid=40942&categoryId=33398 | ||
+ | *위키백과, 직예파, https://ko.wikipedia.org/wiki/%EC%A7%81%EA%B3%84_%EA%B5%B0%EB%B2%8C | ||
+ | *구글, 원악전쟁, https://books.google.co.kr/books?id=bMnACgAAQBAJ&pg=PT67&lpg=PT67&dq=%EC%9B%90%EC%95%85%EC%A0%84%EC%9F%81&source=bl&ots=80Ku-hX3Le&sig=JteO4gdVZivEdHMQYiIOZbFsCAs&hl=ko&sa=X&ved=0ahUKEwiCrJOzkL7NAhWEHZQKHbcvBAcQ6AEIGjAA#v=onepage&q=%EC%9B%90%EC%95%85%EC%A0%84%EC%9F%81&f=fals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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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3일 (목) 22:45 기준 최신판
연성자치
목차
연성자치(聯省自治)의 개념
각성자치(各省自治)
“한 성의 일은 그 성 스스로가 처리한다.”라는 정치적인 목표를 나타낸 것으로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각 성의 군사지도자 즉, 군신정권이 그 성을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향에서부터 현, 구, 성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민주정치를 실현하고 헌법에 의해 행정요원을 선출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1920~1924년에 <자치>라는 개념이 많이 주장되었는데 전자의 의미로 주장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연성자치(聯省自治)
위의 두 가지 방법 중 어떤 방식으로든 각 성에서의 자치를 이룩한 이후에 자치를 이룩한 성들이 연합하여 모든 내전을 종식시키고 중국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의미이다. 절차를 살펴보면, 먼저, 각성에서 토론방식에 의해 각 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 헌법을 제정하여 성의 통일을 달성한 이후에 통일된 각 성끼리 다시 토론을 거치고 입헌방식으로 전국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내용이다.
연성자치운동의 배경
신해혁명 이전, 일성지력(一省之力)
일성지력이라는 개념은 명말 시기 흔히 현 규모의 범위를 포괄하며 형성된 '향리공간'이 청말에 이르러 성 단위 규모로 확대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민간', '자치' 공간의 영역이 확대되고 확충됨으로써 성 단위에서 왕조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의 기틀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다. 후술되는 연성자치운동은 각 성의 국벌 세력들이 이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성자치운동의 전제가 되는 것은 각 성의 독립이고 각 성이 독립할 수 있게 했던 동력은 다름 아닌 일성지력이었다. 미조구찌 유우조에 따르면, 명말청초에 현급 규모로 존재했던 향리공간이 청말에 이르러는 성급 규모의 향리공간으로 성숙한 것을 보면, 연방공화국의 구상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신해혁명 이후, 각성의 갈등
신해혁명 이후 중앙정부는 독립한 각 성을 통제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각 성의 입장을 반영하는 자체적인 입헌 작업은 실패했다. 때문에 각 성은 스스로 입헌작업을 하고 그 입헌에 성공한 성끼리 연합하여 어지러운 중국의 상황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중앙정부가 중앙집권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여 일으킨 3차례의 내전으로 인해 특히 남방의 군신정권의 이권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북방과 광동의 중앙정부 사이에 낀 군신정권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연성자치를 주장하게 되었다.
연성자치운동이 제기된 지역(10성)
- 남북간 전쟁에서 사이에 낀 4성 : 호남, 섬서, 사천, 호북
- 남북간 전쟁의 영향을 받은 3성 : 광동, 광서, 복건
- 서남고원에 위치하여 북방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2성 : 운남, 귀주
- 안직전쟁 이후 안휘파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남방세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성 : 절강
주요지역의 연성자치운동의 전개
호남
호남지역에서 연성자치운동이 제기 된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장경요가 호남독군으로 있을 때 호남의 토착 군신세력에 대한 수탈을 심하게 해 그들의 이권 침했다. 그리고 3번의 걸친 내란으로 인해 그 사이에 낀 호남의 손실이 매우 컸다. 이로 인해 장경요(북방세력)를 축출하고 호남의 군신정권은 남북간의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담연개(남방세력)가 정권을 잡았으나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폐를 남발하고 세금을 증가시켜 호남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기 때문에 그 역시 축출당한다. 이후 조항척이 정권을 잡고 대대적으로 연성자치운동을 주친하였다. 1921년과 1922년에 걸쳐 남북세력의 지속된 간섭과 전쟁에 영향을 받자 조항척은 호남자치 입헌의 요구를 가속화시켰다. 1921년 말, 호남은 성헌법을 공포하였고 조항척이 성장으로 선출되었다.이는 1920~1924년에 제기된 연성자치운동 중 최대성과로 평가되기도 한다.
섬서
섬서에는 자치를 주장하는 두 개의 파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단기서의 임명을 받은 독군 진수번 세력이었는데 그는 자치의 구호를 이용하여 남방세력과 손을 잡고 섬서를 침입한 직예파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또 다른 세력으로는 섬서의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민군 지도자인 정우임의 세력이었다. 그도 자치를 주장하였으나 그의 진정한 목적은 섬서에 들어와 있는 성외 세력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사천
사천성의 자치사상은 호국전쟁과 운남군, 귀주군이 사천에 들어왔을 때 시작되었다. 북방세력의 지지를 받은 류존후가 북경정부에 진수사의 임명을 요청하고 총사령 겸 성장으로 추대되어 합법적으로 군신지배를 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대의 사천연성자치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북경에서 발표된 사천자치운동 선언 “우리 사천은 남북쌍방이 다투는 사이에 기어 있어서 당국자가 때로 중앙의 명을 받고 때로는 호법에 부화뇌동하여 혹은 남, 혹은 북으로 배회하여 일정하지 못하였다. 한번 잘못되고 두 번 잘못되면 백성이 견딜 수가 없다. 생각건대 지금 자치를 힘써 도모하면 이에 의해 전단(戰端)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남방세력을 대표하는 웅극무와 남방에 가까웠던 류상이었다. 그 외 다른 군인들은 태도가 불분명하였지만 사천동부의 군인은 자치에 대하여 비교적 열심이었다. 사천의 지식인과 국민당원도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호북
호북 서부 이외의 지역에서는 자치에 대한 요구가 약했다. 이는 호북 성내 북방의 군사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호북 남북부에는 안휘파에 승리한 오패부의 군대가 집중되어 있었고 성내에도 손전방의 군대와 호남에서 철수한 장경요의 패잔병이 있었다.성의 정권을 장악한 왕점원은 자신의 세력유지에만 급급하여 오패부의 세력이 호북에 미치는 것을 특히 신경쓰고 있었다. 이에 그는 장작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한편, 호북, 사천, 운남, 귀주, 호남, 강서의 6성자치동맹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일어난 무창, 의창 등지에서의 병란은 호북의 내정을 불안하게 하였고 이는 오패부에게 호북은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호남과 사천에는 큰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갈등이 배경이 되어 원악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원악전쟁을 통해 본 호남과 사천
호남과 사천 전쟁개입
이들은 자치운동이 남북간의 전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두성은 원악전쟁을 일으켜 남북간의 전쟁에 개입하였다. 명분은 다른 성의 자치운동을 돕는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한 성의 일은 그 성 스스로가 처리한다.”라는 자치의 본래적 의미와는 반대로 나아간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표면상의 이유 외에 사천과 호남의 군대가 호북서부로 가야만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호남의 목적
담연개와 조항척의 전쟁이후 성내에 군대가 너무 많았고 방구를 나눠 각 방구에서 징세를 함으로써 성의 재정상황이 좋지 않았다. 조항척은 군대를 줄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그에게 속하지 않은 부대를 호북으로 파견해서 출로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속하지 않은 군대는 조항척의 신정권에 큰 위협이 됨은 물론 호남 서부의 운남 귀주산 아편세 수입에 대해서도 큰 위협이 되었다. 호남서부는 운남 귀주의 아편이 장사, 항커우, 상하이로 운반되는 루트였는데 1920년부터 1934년 까지 이들은 이 루트의 아편세를 탈취해갔다. 따라서 조항척이 이들을 연성자치의 명목으로 내보낸다면 아편세를 장악 할 수도 있고 오패부의 호북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도 있었다.
사천의 목적
사천의 주요 수출품인 동유, 약재, 돼지털은 한커우를 통해 반출 되어왔고 주요 수입품인 양포, 양사, 석유 등 또한 한커우(호북성의 한 도시)를 통해 들어왔다. 또한 사천은 매우 중요한 아편의 생산지였는데 이 또한 한커우로 운반되었다. 이렇게 한커우에 모인 물자들로 인한 세수는 매년 2천만원에 달하였는데 이것이 오패부에 장악된다면 사천에는 큰 위협이 되는 일이었다. 또한 사천염의 판로가 문제가 되었다. 사천염이 한창 성행할 때는 1400재(載)에 이르렀지만, 1918~1919년에 사천염대신 하북염과 회염을 대신 사용하는 곳이 많아지면서 판로의 손실이 600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오패부가 호북성을 장악하게 된다면 사천염의 판로가 심각하게 손실될 것은 명확했기 때문에 사천은 원악 전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연성자치운동의 한계
각성자치단계에서 연성자치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0~1924년에 구체적인 방법을 제기한 사람도 없었고, 각성자치를 달성한 이후에 연성자치단계까지 나아가기 전까지의 과도기적 단계에 중국의 전국적인 행정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사람도 없었다. 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난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연성자치가 아닌 각성자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치를 주장했던 이유는 각성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호남과 사천이 원악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자치를 주장했던 이유는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진지양(陳志讓), 『군신정권』, 박준수 옮김, 고려원, 1993
- 溝口雄三, 성근제(번역자), "신해혁명신론", 『中國現代文學』, 2011, Vol.59 : 345-374
- 바이두, 聯省自治, http://baike.baidu.com/view/100300.htm
- 바이두, 辛亥革命, http://baike.baidu.com/subview/28947/5245939.htm
- 네이버, 담연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72997&cid=51397&categoryId=51397
- 네이버, 조항척,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26749&cid=51397&categoryId=51397
- 네이버, 단기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4774&cid=40942&categoryId=33398
- 위키백과, 직예파, https://ko.wikipedia.org/wiki/%EC%A7%81%EA%B3%84_%EA%B5%B0%EB%B2%8C
- 구글, 원악전쟁, https://books.google.co.kr/books?id=bMnACgAAQBAJ&pg=PT67&lpg=PT67&dq=%EC%9B%90%EC%95%85%EC%A0%84%EC%9F%81&source=bl&ots=80Ku-hX3Le&sig=JteO4gdVZivEdHMQYiIOZbFsCAs&hl=ko&sa=X&ved=0ahUKEwiCrJOzkL7NAhWEHZQKHbcvBAcQ6AEIGjAA#v=onepage&q=%EC%9B%90%EC%95%85%EC%A0%84%EC%9F%81&f=fal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