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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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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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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년 4월에 티벳의 수도 라싸에서 중국이 중국에 대항해서 일어난 티벳독립운동을 진압하고 티벳을 중국에 편입시킨 사건이다. 중국 측에서는, 티벳 영주들에 의해 착취당하던 티벳 일반인들을 해방시키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민주개혁'이라고 명명했다. 이 사건으로 티벳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정치적 망명을 떠났고 약 3천여명의 티벳인들이 같이 떠났으며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티벳의 봉건제도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사회주의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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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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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개혁이 있기 전의 티벳은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봉건제 사회였다. 티벳의 고위층들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독점하는 사회였다. 재산 분배를 살펴보면 경작지의 경우 95%정도를 3대 영주가 독점하고 있었다. 3대 영주는 관가, 귀족, 불교사원을 지칭한다. 그 중에서도 불교사원에서 큰 권력을 가진 상층승려는 경작지의 37%를 소유하고 있었다. 티벳 정부가 거둬드린 세금 등의 수입은 50%가 티벳승들의 종교 활동에 사용되었다. 재산 점유율로 볼 때 종교적 고위층들이 경제적으로 독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농노들이 나머지 5%정도의 경작지만을 소유했다. 거기다가 농노들은 영주들로부터 경제적이 착취를 당했다. 농노들은 영주들에게 내차와 외차라고 불리는 토지임대료를 냈다. 내차는 영주의 자경지에서 대가없이 일하는 것이고 외차는 관청에 노동력을 지불하고 실물과 화폐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내는 토지임대료는 농노들의 전체 수입의 73%정도에 다다랐다. 3대 영주들은 고리대금업 사업의 일환으로 농노들에게 고리대를 놓았다. 그 정도는 사원 영주가 가장 심했다. 또한 농노들에게 강매를 강요했다. 이것은 대부분 하급관리들이 인도와 라싸 지역에서 싼 값에 산 물건들을 자신의 관할에 있는 농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 살 것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은 티벳의 봉건적인 사회구조와 고위층들의 착취로 인해 고통받는 농노들을 해방하기 위해 민주개혁을 시행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민주개혁이 일어나게 된 공식적인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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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행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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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년 4월에 중국 정부는 티벳의 독립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고 본격적으로 티벳을 중국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중국정부는 티벳의 지방정부인 ‘달라이라마 행정지구’를 폐지했고 ‘티벳 자치구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티벳 정부의 활동을 대신 수행했다. ‘티벳 자치구 준비위원회’는 티벳을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사회로 만들기 위한 활동에 착수했다. 이 기관에서는 1961년 4월에 기본적인 개혁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1959년 9월에는 회의에서 ‘봉건농노주의 봉건소유제를 폐지하고, 농민의 토지소유제를 실시하는 결의에 관하여’을 발표했다.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봉건농노소유제를 폐지했고 농민과 목축민의 개체소유제를 실시할 것을 알렸다. 1961년 8월에는 티벳 자치구에서 제 1회 인민대표대회를 개최했다. 1961년 9월 1일에는 티벳 자치구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민주개혁 이후에도 중앙 정부에서는 사회주의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정책의 변화에 따라 티벳은 경제, 정치, 문화적 환경에 큰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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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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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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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큰 경제적 변화는 1959년 이전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원의 재산이 중국에 몰수당한 것이다. 티벳의 사원은 경제력의 부재로 권력을 잃었고 승려와 사원의 수가 대폭 감소했다. 사원에 있던 토지들은 대부분 몰수당했다. 민주개혁 이전에 한 사원이 2000묘를 소유했던 반면 1986년에는 쓰촨성 1개의 현이 가지고 있는 토지가 152묘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이 티벳에 대해 시행했던 정책 중 ‘삼반삼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삼반삼수는 반란, 봉건적인 특권, 착취, 정치적 박해, 계급억압을 반대하는 개혁이다. 사원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농도들이 착취에서 벗어나게 했다. 토지개혁 이후에는 ‘농민개체소유제’를 실시해서 농노들이 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농업, 상업 분야에서는 ‘계획적 배급제도’를 실시했다. 식량과 식용유는 일괄구매를 하게하고 정량공급제가 도입됐고, 소 혹은 양모,양고기는 할당구매를 하게 되었으며, 민간용 차, 옷감은 배급표에 의해 공급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을 통해 티벳 사회는 사회주의 경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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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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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정치적 변화는 사원의 권력이 민주개혁 이후로 몰락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쓰촨성의 2개의 현의 사원수와 승려 수의 통계를 들 수 있다. 민주개혁 이전에 쓰촨성의 2개의 현의 사원수는 모두 76개였다. 승려의 수는 현 인구의 57%정도를 차지했다. 그러나 민주개혁 이후 사원수는 6개로 대폭 감소했다. 승려들도 소수만 남았다. 그 원인을 보면 민주개혁 이후에 승려들의 절반 이상이 환속을 했다. 1959년 라싸사건에 시위에 참여한 승려들은 감옥에 들어가고 10%정도는 도주했다. 게다가 호조조에서는 환속하는 승려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승려의 수는 감소했고 사원의 힘은 더 약해졌다. 이것은 사원 중심의 정치 구조가 무너지고 평등 정치의 원리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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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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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개혁은 티벳 사회를 정교분리를 하도록 했고 사회주의적인 경제체제를 수립했다. 중국의 주장은 민주개혁을 하고 나서 95%넘는 티벳인들이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획득했다고 주장한다. 티벳 지역에는 학교가 생겼고 농노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주장과는 달리 소수 티벳인들은 중국에 대한 불만이 계속 제기하고 있다. 1987년에 발생한 대규모 독립운동부터 [[3.14사건]]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불만은 여러 방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순수하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 민주개혁 이전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승려계층들의 권력 회복의지, 민주개혁 이후 사회주의 경제체제 발전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것에 대한 불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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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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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벳 독립운동의 경제적 배경-이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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