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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가 제2대 국가주석/당군사위원회주석 임명 | 류사오치가 제2대 국가주석/당군사위원회주석 임명 | ||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마오쩌둥과 수시로 갈등) |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마오쩌둥과 수시로 갈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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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년 창사의 주셩중학 졸업 | - 1913년 창사의 주셩중학 졸업 | ||
− | - 1920년 | + | - 1920년 소련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교에서 공부 |
- 1921년 중국공산당 가입 | - 1921년 중국공산당 가입 | ||
− | - 1922년 중국에서 노동운동 | + | - 1922년 중국에서 노동운동, 제1차 전국노동대회의 조직을 지원 |
(제1차 국공합작 붕괴) | (제1차 국공합작 붕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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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푸젠성 당비서 | - 1932년 푸젠성 당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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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주로 농촌 유격전을 통한 혁명활동을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류사오치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운동과 지하운동을 통한 혁명활동을 이끌었다. 류사오치는 대장정에 참가했고, 쭌이 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쩌둥이 지도력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장정후 산시성에 세력을 확보하고 화북지역 당서기를 맡아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에는 공산당 5인 비서중 한명으로 뽑혔다. | 마오쩌둥이 주로 농촌 유격전을 통한 혁명활동을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류사오치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운동과 지하운동을 통한 혁명활동을 이끌었다. 류사오치는 대장정에 참가했고, 쭌이 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쩌둥이 지도력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장정후 산시성에 세력을 확보하고 화북지역 당서기를 맡아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에는 공산당 5인 비서중 한명으로 뽑혔다. | ||
+ | [[마오쩌둥(毛澤東)]]과 류사오치는 정치적, 사회적인 성향은 다름에도 비슷한 시기의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저우언라이와 더불어 중국의 엘리트 제 1세대라 할 수 있다. | ||
+ |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고향친구이자 5년후배였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줄곧 마오쩌둥을 보좌했다. 마오쩌둥의 정치 초반부터 그의 조력자로써 1922년 탄광에서 광부들을 조직하여 성공적인 파업을 유도한 것을 시작으로 대장정까지 정치적 업적을 모두 함께하며 중국인민공화국의 건립에 큰 지지를 하였기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가장 다른 점은 경제적 정책의 측면이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이후 일자리와 산업생산이 무너진 중국 현실에서 류사오치는 경제적 폐해를 회복하는 것이 제1순위의 임무였다. 대표적으로 [[천진(天津)발언]]를 통해 마오쩌둥과는 어떻게 다른 경제적 정책을 품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은 자본가들을 농민들을 착취해가는 부정적인 존재로써 그들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인민들에게 자본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반대로 류사오치는 자본가는 착취해야하는 존재로써 합작과 투쟁을 병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류사오치 자본주의 공업이 중국에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착취유공론(搾取有功論)]]을 전개한다. 자본가들이 가능하다면 공장을 계속 늘려감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봉급을 지급할 수 있고 이것이 국가와 인민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인민공화국의 2인자이면서 당내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마오쩌둥과는 다른 노선 이였지만 그의 톈진발언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톈진발언으로 인해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충성심을 의심하게되고 나중에 그를 실각하게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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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앙정부 부주석을 맡았고, 1956년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58년 마오쩌둥이 펼친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 경제위기 도래/2천만 명이 넘는 기아자, 사망자/ 발생으로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에서 사퇴한다. 이어 국가주석/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오른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충격을 극복하고자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하며 마오를 비판하였다. 또한, 덩샤오핑, 화궈펑과 손잡고 경제정책을 이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에 따라 마오와 수시로 갈등이 생겼다.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앙정부 부주석을 맡았고, 1956년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58년 마오쩌둥이 펼친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 경제위기 도래/2천만 명이 넘는 기아자, 사망자/ 발생으로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에서 사퇴한다. 이어 국가주석/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오른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충격을 극복하고자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하며 마오를 비판하였다. 또한, 덩샤오핑, 화궈펑과 손잡고 경제정책을 이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에 따라 마오와 수시로 갈등이 생겼다. | ||
+ |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 임명된 가장 큰 이유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실패로 인한 은퇴라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의 완전한 불신으로 비효율적인 경제적 정책을 회복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류사오치는 중국 사회에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재도입하기위한 새로운 종합적 사업을 시작한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기치 아래 수만 간부들이 농민으로 부터 직접 노동을 배우고 농민의 대중노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재배치 되었다. 류사오치의 아내 또한 농촌에서 5개월간 머문 것으로 기록된다. 이러한 농민의 삶을 경함하면서 부패에 대한 당의 경고를 전하고 엄격한 교화의 필요석을 촉구한다. 또한 전국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함으로써 마오쩌둥 이념의 생산체제가 과장되었음을 지적한다. 마오쩌둥은 당이 취약해진 모슴을 보인다면 공개적인 토론과 비판을 통해 교화되어야하고 그 과정에 있어서 대중도 참여해야한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반면 류사오치는 공산당 비리의 시정은 당 내부의 문제이니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위신을 지키기위해서는 당원 스스로 처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점 마오쩌둥과는 경제적 노선뿐만아니라 정치적 노선에서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류사오치와 더불어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 또한 계속적인 혁명과 투쟁을 통한 통치라는 마오쩌둥의 인식에 점점 동의하지 않았다. 대약진 운동, 소련과의 갈등, 미국과의 적대, 사회주의 교육운동등 공산당 지도부의 분열은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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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류사오치는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주자파(친자본주의)의 우두머리라는 비판을 받고 1966년 당 부주석에서 물러난다. | 마오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류사오치는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주자파(친자본주의)의 우두머리라는 비판을 받고 1966년 당 부주석에서 물러난다. | ||
1968년에는 당에서 제명당하고, 베이징에서 가택연금상태에 처한다.이해 7월 18일에는 홍위병이 자택을 습격하여 폭행과 폭언을 당한다. 이후 카이펑으로 옮겨져 당뇨/폐렴등의 지병으로 1969년 11월 12일 사망하였다. | 1968년에는 당에서 제명당하고, 베이징에서 가택연금상태에 처한다.이해 7월 18일에는 홍위병이 자택을 습격하여 폭행과 폭언을 당한다. 이후 카이펑으로 옮겨져 당뇨/폐렴등의 지병으로 1969년 11월 12일 사망하였다. | ||
+ | 류사오치는 마오쩌둥과의 계속된 대립 속에서 문화혁명이 발발하자 마오쩌둥이 복권하고 류사오치는 실각하게 된다.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되는 것은 군사령관으로 활동한 린뱌오의 계획과 실행 덕분이다. 류사오치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정에서 지주들과 자본가들의 재산 몰수를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고 조정하자고 주장했다. 경영을 잘하는 자본가들을 관리의 주체로 이용하고 공사합영의 조정형식을 갖추려한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류사오치의 점진적인 혁명, 실용주의 우선, 기업가와 엘리트 존중, 부정부패의 처리 등에 있어서 마오쩌둥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었기에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반(反) 마오쩌둥의 수령’, ‘중국의 흐루시초프’로 격렬한 비판을 받는다. 사회주의 사회의 적으로 지명된 류사오치는 축출되었고 가족까지 비판과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1969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정식으로 당에서 제명됨과 동시에 모든 공직이 박탈된다. 그 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겨진 후 26일 후에 감옥에서 생을 비참하게 마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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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ig>'''사후복권'''</big>== | ||
+ |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80년 류사오치의 명예 또한 회복되었고, 모든 당직도 사후 복권되었다. 이후 마오와 류사오치 모두를 존경하는 덩샤오핑에 의해 1981년 제 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5중전회의 폐막성명을 통하여 무죄로 인정되어 류사오치의 사후복권이 전격 선언되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4인의 “건국의 아버지”로 중국 지페에 실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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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도서'''== | ||
− | + | 1) 김명호 저, 『중국인 이야기1』,한길사. 1976년.<br> | |
− | + | 2) 주장환 저, 중국의 엘리트-마오쩌둥에서 제5세대 지도자들까지, 살림출판사, 2008년<br> | |
+ | 3) 손재현, 류사오치 : 마오쩌둥과 비교되는 점진적인 혁명주의자, Vol.29 No.- [2011], 경북사학회, 2011년, pp.165-175 |
2016년 12월 27일 (화) 02:47 판
목차
류사오치(刘少奇, Liú Shàoqí, 유소기)
출생 : 1898년 11월 24일 사망 : 1969년 11월 12일
출신지 : 허난성
-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 중국공산당 지도자
정치적 업적
- 대장정 시기
1932 : 전국총공회 위원장, 중국공산당 푸졘성 위원회 서기 역임
1934.10 : 중국 공농 홍군 제8군단·제5군단 당 중앙 대표, 제3군단 정치부 주임을 역임
1935.11 : 전국총공회 시베이 집행국 위원장 역임
1936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베이방국 서기 역임
- 중국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시기
1949 - 1954 : 중국정부의 임시부수반 역임.
1949.10 : 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
1954 - 1959 : 중화인민공화국 제1대 전인대 상무위원장/중화인민공화국 국가부주석 역임.
1954.9 : 제 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에 선출
1956.9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상무위원으로 선출
1959 - 1969 :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국가주석 역임. (※ 1959년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 실패로 물러나자, 류사오치가 제2대 국가주석/당군사위원회주석 임명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마오쩌둥과 수시로 갈등)
- 문화대혁명 시기
1966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직에서 사퇴.
1968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실각, 당에서 제명.
일생
- 허난성 카이펑 출생
- 1913년 창사의 주셩중학 졸업
- 1920년 소련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교에서 공부
- 1921년 중국공산당 가입
- 1922년 중국에서 노동운동, 제1차 전국노동대회의 조직을 지원
(제1차 국공합작 붕괴)
- 후베이성과 상하이 당조직 수반
- 1927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2년 푸젠성 당비서
마오와 류사오치
마오쩌둥이 주로 농촌 유격전을 통한 혁명활동을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류사오치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운동과 지하운동을 통한 혁명활동을 이끌었다. 류사오치는 대장정에 참가했고, 쭌이 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쩌둥이 지도력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장정후 산시성에 세력을 확보하고 화북지역 당서기를 맡아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에는 공산당 5인 비서중 한명으로 뽑혔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류사오치는 정치적, 사회적인 성향은 다름에도 비슷한 시기의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저우언라이와 더불어 중국의 엘리트 제 1세대라 할 수 있다.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고향친구이자 5년후배였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줄곧 마오쩌둥을 보좌했다. 마오쩌둥의 정치 초반부터 그의 조력자로써 1922년 탄광에서 광부들을 조직하여 성공적인 파업을 유도한 것을 시작으로 대장정까지 정치적 업적을 모두 함께하며 중국인민공화국의 건립에 큰 지지를 하였기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가장 다른 점은 경제적 정책의 측면이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이후 일자리와 산업생산이 무너진 중국 현실에서 류사오치는 경제적 폐해를 회복하는 것이 제1순위의 임무였다. 대표적으로 천진(天津)발언를 통해 마오쩌둥과는 어떻게 다른 경제적 정책을 품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은 자본가들을 농민들을 착취해가는 부정적인 존재로써 그들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인민들에게 자본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반대로 류사오치는 자본가는 착취해야하는 존재로써 합작과 투쟁을 병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류사오치 자본주의 공업이 중국에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착취유공론(搾取有功論)을 전개한다. 자본가들이 가능하다면 공장을 계속 늘려감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봉급을 지급할 수 있고 이것이 국가와 인민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인민공화국의 2인자이면서 당내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마오쩌둥과는 다른 노선 이였지만 그의 톈진발언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톈진발언으로 인해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충성심을 의심하게되고 나중에 그를 실각하게 한다.
류사오치 국가주석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앙정부 부주석을 맡았고, 1956년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58년 마오쩌둥이 펼친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 경제위기 도래/2천만 명이 넘는 기아자, 사망자/ 발생으로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에서 사퇴한다. 이어 국가주석/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오른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충격을 극복하고자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하며 마오를 비판하였다. 또한, 덩샤오핑, 화궈펑과 손잡고 경제정책을 이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에 따라 마오와 수시로 갈등이 생겼다.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 임명된 가장 큰 이유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실패로 인한 은퇴라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의 완전한 불신으로 비효율적인 경제적 정책을 회복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류사오치는 중국 사회에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재도입하기위한 새로운 종합적 사업을 시작한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기치 아래 수만 간부들이 농민으로 부터 직접 노동을 배우고 농민의 대중노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재배치 되었다. 류사오치의 아내 또한 농촌에서 5개월간 머문 것으로 기록된다. 이러한 농민의 삶을 경함하면서 부패에 대한 당의 경고를 전하고 엄격한 교화의 필요석을 촉구한다. 또한 전국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함으로써 마오쩌둥 이념의 생산체제가 과장되었음을 지적한다. 마오쩌둥은 당이 취약해진 모슴을 보인다면 공개적인 토론과 비판을 통해 교화되어야하고 그 과정에 있어서 대중도 참여해야한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반면 류사오치는 공산당 비리의 시정은 당 내부의 문제이니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위신을 지키기위해서는 당원 스스로 처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점 마오쩌둥과는 경제적 노선뿐만아니라 정치적 노선에서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류사오치와 더불어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 또한 계속적인 혁명과 투쟁을 통한 통치라는 마오쩌둥의 인식에 점점 동의하지 않았다. 대약진 운동, 소련과의 갈등, 미국과의 적대, 사회주의 교육운동등 공산당 지도부의 분열은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류사오치 실각
마오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류사오치는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주자파(친자본주의)의 우두머리라는 비판을 받고 1966년 당 부주석에서 물러난다. 1968년에는 당에서 제명당하고, 베이징에서 가택연금상태에 처한다.이해 7월 18일에는 홍위병이 자택을 습격하여 폭행과 폭언을 당한다. 이후 카이펑으로 옮겨져 당뇨/폐렴등의 지병으로 1969년 11월 12일 사망하였다.
류사오치는 마오쩌둥과의 계속된 대립 속에서 문화혁명이 발발하자 마오쩌둥이 복권하고 류사오치는 실각하게 된다.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되는 것은 군사령관으로 활동한 린뱌오의 계획과 실행 덕분이다. 류사오치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정에서 지주들과 자본가들의 재산 몰수를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고 조정하자고 주장했다. 경영을 잘하는 자본가들을 관리의 주체로 이용하고 공사합영의 조정형식을 갖추려한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류사오치의 점진적인 혁명, 실용주의 우선, 기업가와 엘리트 존중, 부정부패의 처리 등에 있어서 마오쩌둥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었기에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반(反) 마오쩌둥의 수령’, ‘중국의 흐루시초프’로 격렬한 비판을 받는다. 사회주의 사회의 적으로 지명된 류사오치는 축출되었고 가족까지 비판과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1969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정식으로 당에서 제명됨과 동시에 모든 공직이 박탈된다. 그 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겨진 후 26일 후에 감옥에서 생을 비참하게 마감한다.
사후복권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80년 류사오치의 명예 또한 회복되었고, 모든 당직도 사후 복권되었다. 이후 마오와 류사오치 모두를 존경하는 덩샤오핑에 의해 1981년 제 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5중전회의 폐막성명을 통하여 무죄로 인정되어 류사오치의 사후복권이 전격 선언되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4인의 “건국의 아버지”로 중국 지페에 실렸다.
참고도서
1) 김명호 저, 『중국인 이야기1』,한길사. 1976년.
2) 주장환 저, 중국의 엘리트-마오쩌둥에서 제5세대 지도자들까지, 살림출판사, 2008년
3) 손재현, 류사오치 : 마오쩌둥과 비교되는 점진적인 혁명주의자, Vol.29 No.- [2011], 경북사학회, 2011년, pp.165-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