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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 9년 (기원전 238년) | 시황 9년 (기원전 238년) | ||
− | + | 장신후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들통이 나자 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도용하여 옹현의 군사, 진왕의 호위군사, 관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및 가신들을 동원해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하는 난을 일으켰다. 왕이 이를 알고 상국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군대를 내어 노애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니 함양(咸陽)에서 싸워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공을 세운 모두에게 작위를 주고, 싸움에 가담한 환관들에게도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 |
− | 장신후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들통이 나자 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도용하여 옹현의 군사, 진왕의 호위군사, 관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및 가신들을 동원해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하는 난을 일으켰다. 왕이 이를 알고 상국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군대를 내어 노애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니 함양(咸陽)에서 싸워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공을 세운 모두에게 작위를 주고, 싸움에 가담한 환관들에게도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
2017년 6월 17일 (토) 18:33 판
진(秦)나라에서 상국(相國)을 지냈다.
성씨는 미(羋), 본관은 웅(熊)이다. 본래는 초나라의 공자이자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부추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중국의 역사학자 리카이위옌은 《진시황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진의 상국에 대한 기록과 진시대의 동과 유물에 적힌 명문에 따르면 이름이 웅계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창평군의 출생
웅원이 진나라에서 볼모로 있을 때 진나라 정권의 실세는 선태후를 중심으로 한 초나라계 외척세력이었다. 당시 약 54세이던 진소왕에게 자녀가 많았던 만큼 웅원이 맞아들인 부인은 진소왕의 공주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창평군이다. 창평군은 빠르면 진소왕 35년, 초경양왕 27년(기원전 272년), 늦어도 다음 해인 기원전 271년에 출생했다.
진시황과 창평군의 관계도.JPG
창평군의 생애
진장양왕 원년, 초고열왕 14년(기원전 249년)에 23살의 창평군은 화양부인의 조카이자 장양왕 자이의 사촌동생이라는 간판을 걸고 정계 전면에 등장했다. 26세에 영정이 즉위하자 보정대신이 됐으며, 34세에는 어사대부로서 노애의 난을 진압하고 영정이 안정적으로 친정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했다.
시황 9년 (기원전 238년) 장신후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들통이 나자 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도용하여 옹현의 군사, 진왕의 호위군사, 관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및 가신들을 동원해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하는 난을 일으켰다. 왕이 이를 알고 상국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군대를 내어 노애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니 함양(咸陽)에서 싸워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공을 세운 모두에게 작위를 주고, 싸움에 가담한 환관들에게도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