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번째 줄: 1번째 줄:
 
[[파일:장건.jpg|200픽셀|섬네일|왼쪽|장건]]  
 
[[파일:장건.jpg|200픽셀|섬네일|왼쪽|장건]]  
  
 +
==개요==
 
장건은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성 성고현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장건은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성 성고현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
한나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장건(張騫)은 어려서부터 한나라를 수시로 공격해오는 흉노를 몰아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후 장건은 월지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공격하려는 무제의 계획에 따라 월지국으로 파견되었다. 흉노의 땅을 지나는 와중에 장건은 흉노의 땅에 10여년 동안 억류되었고 현지 처를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 그 기간 중에도 무제의 명을 잊지 않은 장건은 10년 만에 흉노를 탈출해 월지국에 도착한다. 그러나 월지국의 거절에 장건은 한나라로 다시 돌아왔고, 파견 도중에 얻은 서역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실크로드를 개척할 수 있었다.
  
== 실크로드의 탄생 ==  
+
==생애==
한의 무제는 북방에 3대 부족(동호족·흉노족·월지족) 중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월지를 이용하려 하였다. 이때 월지족과 동맹을 맺기위해 사신으로 간 사람이 장건이다. 이에 장건은 무제의 명에 의해 B.C.139년에 장안을 출발하였다. 즉 장건이 서역으로 간 것은 실크로드 개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월지와의 동맹 때문이었다. 장건은 무리 100명을 이끌고 서역으로 출발했다. 장건은 흉노가 사는 지역을 지나다가 포로가 되어 10여 년 동안 억류되었으나 사신의 부절을 잃지 않았다. 흉노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탈출한 장건은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한 지 수십 일 만에 대원에 이르렀다. 당시 대월지는 이미 이리하 유역에서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한 상태였기에 장건은 강거를 경유해 대월지에 이르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대월지는 중앙아시아에서 “땅이 비옥하고 침략자가 거의 없어 안락한 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흉노에게 복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라고 전해진다. 결국 장건은 끝내 월지의 대답을 듣지 못하고 1년여를 보낸 후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국하는 길에 강족의 땅을 지나다가 또다시 흉노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 1년 남짓 억류되었다. B.C 136년 장건이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왔으며 박망후에 봉해졌다. 고향을 떠난 지 13년만이었다. 장건은 비록 대월지와의 동맹은 실패하였지만, 많은 서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와서 무제에게 여러 가지 건의하였다. 그 중 하나가 흉노를 거치지 않고 사천과 운남을 경유해서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열리게 된 교통로가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다. 비단길은 고대의 비단 무역을 계기로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연계해주는 육해 교통로의 총칭이다. B.C. 119년에 장건은 재차 서역으로 출사했다. 목적은 오손을 하서 옛 땅으로 불러들이고 서역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위함이었다. 장건은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출발했는데, 군사마다 두 마리 말을 주고 소와 양 수만 마리와 수백 만 전의 값어치가 있는 금폐와 비단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장건은 오손에 도착했지만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원정 2년 (기원전 115년) 장건은 오손의 사신 수십 명과 함께 장안에 도착했다. 이후 장건 이 대원, 강거 ,대항 등에 파견한 지절부사들도 자신이 사신으로 갔던 나라 사람들과 함께 장안으로 속속 귀환했다. 이에 실크로드가 크게 열려 서역과 교역이 활발해졌다. 결국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의 활동으로 서역에 대한 지리·민족·풍물 등의 지식이 중국에 전달되었다. 이렇게 장건에 의해서 개통된 실크로드는 외교·군사적인 것뿐만 아니라 서역의 견문에 의하여 중국 서쪽에도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여 중국의 세계관 정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월지로 파견되다===
 +
기원전 139년 한 무제가 흉노 서쪽에 있는 월지라는 나라와 손 잡고 흉노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다. 한 무제는 북방에 3대 부족(동호족·흉노족·월지족) 중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월지를 이용하려 하였다. 흉노가 월지의 왕을 죽이고 월지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흉노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월지와 힘을 합치면 흉노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 무제는 월지에 파견할 사신을 공개적으로 모집하였다.<br>
 +
당시 고향을 떠나 수도 장안으로 와서 황제의 궁궐을 지키는 하급 관리의 벼슬을 맡고 있던 장건은 이 공고에 곧바로 지원했다.
 +
'''지원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제는 지원자들에게 물었다:<br>"월지는 광할한 흉노 땅을 지나 그 서쪽에 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br> 따라서 월지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마치 은하수의 끝을 찾아가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은하수의 끝까지 다녀올 것인지 짐에게 말해보라"<br>침묵을 깨고 장건이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br>"지금까지 은하수의 끝에 도달하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만약 은하수의 끝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기필코 찾아낼 것입니다. 설령 갈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그 길을 만들다가 죽을 것입니다."<br>'''
 +
장건의 패기 넘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한 무제는 장건을 월지로 파견했다. 월지는 흉노의 서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장건이 월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위험한 흉노의 땅을 지나 가야만 했다. 장건과 그의 사신단이 흉노의 땅을 지날때 흉노 기마대에게 붙잡혔고 흉노의 선우가 머무르는 선우정으로 끌려갔다. 군신 선우는 큰 위기에 처했음에도 대범한 장건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를 자신의 신하로 삼고 싶어했다. 장건이 흉노의 신하가 될 것을 거절하자 신우는 서쪽 땅으로 보내어 지내게 하였다. 흉노족과 살다보면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
===흉노의 땅에서 10년만에 탈출하다===
 +
장건이 흉노 땅에서 생활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는 현지 아내를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부절(한나라의 사신을 상징함)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틈틈히 기회를 노렸다. 그들이 흉노에서 지낸지 오래 지나 감시가 소홀해지자 장건과 그의 사신단은 탈출하여 다시 월지국으로 향했다. 흉노를 탈출한 지 수 십 일 만에 드디어 월지가 있다는 곳에 도착하였으나 그 곳은 월지가 아니라 페르가나였다. 평소 한나라와 교류를 하고 싶었던 페르가나 왕은 장건과 비단 교역을 약속하고 이들을 대월지로 안내해 주었다. 장안을 떠난 지 10년만에 대월지에 도착한 장건은 한 무제의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월지는 동맹의 제안을 거절하였다.<자치통감>에 따르면 대월지는 중앙아시아에서
 +
''' “땅이 비옥하고 침략자가 거의 없어 안락한 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흉노에게 복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br>
 +
라고 전해진다.'''<br>
 +
임무에 실패한 장건은 흉노의 눈을 피해 한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월지로 올때는 톈산 산맥의 북쪽 오아시스를 따라 왔지만, 돌아갈때는 남쪽 오아시스를 통과해 흉노의 눈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 다시 흉노 기마병들에게 붙잡혀 군신 선우에게 끌려갔다. 이번에는 죽음을 면치 못 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선우는 또 다시 장건을 죽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아들이 선우 자리에 오르면 옆에서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장건은 이를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받아들였고 흉노의 땅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얼마 후 군신 선우가 죽고 흉노 내부에서는 선우 자리를 두고 분열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 장건은 가족을 데리고 흉노 땅을 탈출했고 한나라의 영토로 돌아왔다. 한 무제의 명을 받아 월지의 사신으로 떠난 지 13년 만이었다.
 +
 +
 +
=== 실크로드의 탄생 ===
 +
한나라로 돌아온 장건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을 무제에게 보고했다. 장건이 지나 온 흉노,페르가나,강거,대월지,박트리아에 대한 것들이었다.  흉노의 위협으로 서역으로 진출하지 못한 한나라에게 서역의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처럼 느껴졌다. 이 정보들을 토대로 한 무제는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흉노를 물리치는 것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한 나라는 흉노를 물리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흉노의 핵심 지역인 하서회랑에 대한 장건의 정보는 전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한 무제는 장건이 전쟁에 세운 공을 인정하여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제후'라는 뜻을 가진 박망후에 임명했다. 장건의 지리적 정보로 인해 한나라는 서역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땅인 하서회랑을 차지할 수 있었다. 흉노의 많은 영토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에는 흉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장건은 서역과 교류해 서쪽 나라에게 지원 요청할 것을 제안했다. 한 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장건을 오손으로 보냈지만,오손의 지원 약속은 받을 수 없었다. 대신 오손의 사신들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후 장건 이 대원, 강거 ,대항 등에 파견한 지절부사들도 자신이 사신으로 갔던 나라 사람들과 함께 장안으로 속속 귀환했다. 이에 실크로드가 크게 열려 서역과 교역이 활발해졌다. 장건은 오손에서 귀국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한나라는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흉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인도와 서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장건이 죽은 지 280년째 되던 해인 기원후 165년, 로마 제국의 사신이 한나라에 도착했다. 마침내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던 두 나라가 서로 교류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 중국은 서쪽 세계로 비단을 보냈고, 로마는 동쪽 세계로 유리를 보냈다. 이것이 바로 장건이 개척한 실크로드이다.그의 활동으로 서역에 대한 지리·민족·풍물 등의 지식이 중국에 전달되었다. 이렇게 장건에 의해서 개통된 실크로드는 외교·군사적인 것뿐만 아니라 서역의 견문에 의하여 중국 서쪽에도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여 중국의 세계관 정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
 +
 +
 +
 +
 +
==평가==
 +
흉노 서쪽의 실크로드 세계는 한나라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던 미지의 세계였다.<br>
 +
장건이 이 미지의 세계를 장건이 최초로 개척한 것이다. 장건이 세상을 떠난 후, 한나라는 서쪽의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교역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과거에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했던 곳을 서로 앞다투어 사신이 되어 서역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서쪽 나라의 사신으로 갈 때마다 '박망후 장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장건이 바로 실크로드의 개척자였고,무제와 외국의 왕들 모두에게 믿음을 주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장건을 '착공인',즉 미지의 세계를 뚫은 인물이라고 흔히 평가한다.
 +
 +
==참고문헌==
 +
사마천,<사기 열전>,김원중 역,민음사,2007<br>
 +
김대호,<장건,실크로드를 개척하다>,아카넷주니어,2012
 
[[분류:인물]]
 
[[분류:인물]]

2018년 6월 24일 (일) 19:54 판

장건

개요

장건은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성 성고현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나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장건(張騫)은 어려서부터 한나라를 수시로 공격해오는 흉노를 몰아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후 장건은 월지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공격하려는 무제의 계획에 따라 월지국으로 파견되었다. 흉노의 땅을 지나는 와중에 장건은 흉노의 땅에 10여년 동안 억류되었고 현지 처를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 그 기간 중에도 무제의 명을 잊지 않은 장건은 10년 만에 흉노를 탈출해 월지국에 도착한다. 그러나 월지국의 거절에 장건은 한나라로 다시 돌아왔고, 파견 도중에 얻은 서역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실크로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생애

월지로 파견되다

기원전 139년 한 무제가 흉노 서쪽에 있는 월지라는 나라와 손 잡고 흉노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다. 한 무제는 북방에 3대 부족(동호족·흉노족·월지족) 중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월지를 이용하려 하였다. 흉노가 월지의 왕을 죽이고 월지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흉노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월지와 힘을 합치면 흉노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 무제는 월지에 파견할 사신을 공개적으로 모집하였다.
당시 고향을 떠나 수도 장안으로 와서 황제의 궁궐을 지키는 하급 관리의 벼슬을 맡고 있던 장건은 이 공고에 곧바로 지원했다.

지원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제는 지원자들에게 물었다:
"월지는 광할한 흉노 땅을 지나 그 서쪽에 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월지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마치 은하수의 끝을 찾아가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은하수의 끝까지 다녀올 것인지 짐에게 말해보라"
침묵을 깨고 장건이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지금까지 은하수의 끝에 도달하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만약 은하수의 끝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기필코 찾아낼 것입니다. 설령 갈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그 길을 만들다가 죽을 것입니다."

장건의 패기 넘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한 무제는 장건을 월지로 파견했다. 월지는 흉노의 서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장건이 월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위험한 흉노의 땅을 지나 가야만 했다. 장건과 그의 사신단이 흉노의 땅을 지날때 흉노 기마대에게 붙잡혔고 흉노의 선우가 머무르는 선우정으로 끌려갔다. 군신 선우는 큰 위기에 처했음에도 대범한 장건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를 자신의 신하로 삼고 싶어했다. 장건이 흉노의 신하가 될 것을 거절하자 신우는 서쪽 땅으로 보내어 지내게 하였다. 흉노족과 살다보면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흉노의 땅에서 10년만에 탈출하다

장건이 흉노 땅에서 생활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는 현지 아내를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부절(한나라의 사신을 상징함)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틈틈히 기회를 노렸다. 그들이 흉노에서 지낸지 오래 지나 감시가 소홀해지자 장건과 그의 사신단은 탈출하여 다시 월지국으로 향했다. 흉노를 탈출한 지 수 십 일 만에 드디어 월지가 있다는 곳에 도착하였으나 그 곳은 월지가 아니라 페르가나였다. 평소 한나라와 교류를 하고 싶었던 페르가나 왕은 장건과 비단 교역을 약속하고 이들을 대월지로 안내해 주었다. 장안을 떠난 지 10년만에 대월지에 도착한 장건은 한 무제의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월지는 동맹의 제안을 거절하였다.<자치통감>에 따르면 대월지는 중앙아시아에서 “땅이 비옥하고 침략자가 거의 없어 안락한 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흉노에게 복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라고 전해진다.
임무에 실패한 장건은 흉노의 눈을 피해 한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월지로 올때는 톈산 산맥의 북쪽 오아시스를 따라 왔지만, 돌아갈때는 남쪽 오아시스를 통과해 흉노의 눈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 다시 흉노 기마병들에게 붙잡혀 군신 선우에게 끌려갔다. 이번에는 죽음을 면치 못 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선우는 또 다시 장건을 죽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아들이 선우 자리에 오르면 옆에서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장건은 이를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받아들였고 흉노의 땅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얼마 후 군신 선우가 죽고 흉노 내부에서는 선우 자리를 두고 분열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 장건은 가족을 데리고 흉노 땅을 탈출했고 한나라의 영토로 돌아왔다. 한 무제의 명을 받아 월지의 사신으로 떠난 지 13년 만이었다.


실크로드의 탄생

한나라로 돌아온 장건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을 무제에게 보고했다. 장건이 지나 온 흉노,페르가나,강거,대월지,박트리아에 대한 것들이었다. 흉노의 위협으로 서역으로 진출하지 못한 한나라에게 서역의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처럼 느껴졌다. 이 정보들을 토대로 한 무제는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흉노를 물리치는 것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한 나라는 흉노를 물리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흉노의 핵심 지역인 하서회랑에 대한 장건의 정보는 전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한 무제는 장건이 전쟁에 세운 공을 인정하여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제후'라는 뜻을 가진 박망후에 임명했다. 장건의 지리적 정보로 인해 한나라는 서역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땅인 하서회랑을 차지할 수 있었다. 흉노의 많은 영토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에는 흉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장건은 서역과 교류해 서쪽 나라에게 지원 요청할 것을 제안했다. 한 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장건을 오손으로 보냈지만,오손의 지원 약속은 받을 수 없었다. 대신 오손의 사신들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후 장건 이 대원, 강거 ,대항 등에 파견한 지절부사들도 자신이 사신으로 갔던 나라 사람들과 함께 장안으로 속속 귀환했다. 이에 실크로드가 크게 열려 서역과 교역이 활발해졌다. 장건은 오손에서 귀국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한나라는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흉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인도와 서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장건이 죽은 지 280년째 되던 해인 기원후 165년, 로마 제국의 사신이 한나라에 도착했다. 마침내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던 두 나라가 서로 교류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 중국은 서쪽 세계로 비단을 보냈고, 로마는 동쪽 세계로 유리를 보냈다. 이것이 바로 장건이 개척한 실크로드이다.그의 활동으로 서역에 대한 지리·민족·풍물 등의 지식이 중국에 전달되었다. 이렇게 장건에 의해서 개통된 실크로드는 외교·군사적인 것뿐만 아니라 서역의 견문에 의하여 중국 서쪽에도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여 중국의 세계관 정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평가

흉노 서쪽의 실크로드 세계는 한나라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던 미지의 세계였다.
장건이 이 미지의 세계를 장건이 최초로 개척한 것이다. 장건이 세상을 떠난 후, 한나라는 서쪽의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교역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과거에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했던 곳을 서로 앞다투어 사신이 되어 서역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서쪽 나라의 사신으로 갈 때마다 '박망후 장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장건이 바로 실크로드의 개척자였고,무제와 외국의 왕들 모두에게 믿음을 주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장건을 '착공인',즉 미지의 세계를 뚫은 인물이라고 흔히 평가한다.

참고문헌

사마천,<사기 열전>,김원중 역,민음사,2007
김대호,<장건,실크로드를 개척하다>,아카넷주니어,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