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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1927년 9월 송경령은 모스크바에서 ‘중국 목전의 형세’, ‘부녀와 혁명’,’청년과 혁명’등을 발표하면서 쑨원의 ‘3대정책’을 강조했다. 1928년 독일에서 국제반제대동맹(国际反帝大同盟)을 설립한 뒤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마침내 1932년 12월 18일 상하이에서 채원배, [[루쉰]], 양행보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을 조직하고 송경령은 주석에 취임한다. | <br> 1927년 9월 송경령은 모스크바에서 ‘중국 목전의 형세’, ‘부녀와 혁명’,’청년과 혁명’등을 발표하면서 쑨원의 ‘3대정책’을 강조했다. 1928년 독일에서 국제반제대동맹(国际反帝大同盟)을 설립한 뒤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마침내 1932년 12월 18일 상하이에서 채원배, [[루쉰]], 양행보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을 조직하고 송경령은 주석에 취임한다. | ||
<br> 1936년 12월 [[서안사변]]이 일어났을 때, 송경령은 내전정지, 항일행동을 조건으로 [[장제스]]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제2 차 [[국공합작]]으로 [[통일항일전선]]이 선포되었다. 1938년 송경령은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保卫中国同盟)’을 설립했으며 항일구국활동을 위해 활동했다. 1939년 3월 8일 홍콩 국제 여성의 날, 중국의 해방뿐 아니라 전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유격대전사들에게 의약품과 생필품에 대한 원조를 호소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면서 여성들도 참가하여 권리를 쟁취할 것을 말했다. | <br> 1936년 12월 [[서안사변]]이 일어났을 때, 송경령은 내전정지, 항일행동을 조건으로 [[장제스]]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제2 차 [[국공합작]]으로 [[통일항일전선]]이 선포되었다. 1938년 송경령은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保卫中国同盟)’을 설립했으며 항일구국활동을 위해 활동했다. 1939년 3월 8일 홍콩 국제 여성의 날, 중국의 해방뿐 아니라 전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유격대전사들에게 의약품과 생필품에 대한 원조를 호소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면서 여성들도 참가하여 권리를 쟁취할 것을 말했다. | ||
+ | <br> 1946년, 항일전쟁 승리 후, 보위중국동맹을 [[중국복리기금회]](中国福利基金会)로 명칭을 바꾼 뒤,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위생과 문화교육, 사회복지 기금 사업에 주력했다. 송경령이 국민당의 심장부인 총칭에 있었을 당시 [[국민당]]은 내전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각종 물자를 모아 공산당을 지원했다. |
2018년 6월 21일 (목) 13: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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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령 (쑹칭링) (간체: 宋庆龄, 정체: 宋慶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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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1.27 청나라 장쑤성(江苏省) 상하이(上海) |
사망 |
1981.5.29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
민족 | 한족(汉族) |
별칭 | 인민을 사랑한 여인 |
관련 활동 | 1959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
개요
중국의 혁명가, 정치인. 1930년대 중국의 인권보장 및 국민당 일당독재 비판에 힘썼으며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창설에 노력하였다. 이로 얻은 별명이 '중국의 잔다르크', '인민을 사랑한 여인'이다.
생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송경령은 1893년 1월 27일, 감리교 목사 출신의 무역업자인 아버지 찰리 쑹, 쑹자수의 3남 3녀 중 차녀로 상하이에서 태어난다.
청나라 광둥 성 광저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녀는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1907년 15살에 동생 송미령과 미국 유학을 떠났고, 1913년 미국 조지아 웨슬리언 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가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1914년 쑨원의 비서로서 쑨원의 연설문이나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는데 노력했다. 비서로 일하며 중국 혁명에 대해 같이 노력하던 중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비록 그의 아버지인 찰리 쑹은 쑨원과 친구 사이로 결혼을 반대음에도, 쑹칭링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15년 10월 25일 쑨원과 결혼하였다.
1922년 6월 16일 새벽, 진형명은 손문의 북벌과 혁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송경령은 같이 탈출하기를 제안하는 손문에게 "중국을 위해 나는 없어도 되지만 손문 당신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손문을 혼자 탈출하게 했다.
이후, 송칭링은 쑨원과 상해에서 공산당원 이대조등 공산당 대표와 레닌파 특사와 수차례 교류하며 수차례 국공합작에 대해 상의했다. 1924년 1월 20일, 몇몇의 공산단원이 참가한 제1 회 전국대표대회가 광저우에서 열렸다. 쑨원이 제정한 “联俄、联共、扶助农工(러시아와의 연맹, 공산당과의 연맹, 그리고 농민과 공업자를 지원)”라는 삼대 정책이 통과되었으며, 이로서 제1 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었다.
1925년 3월 12일 손중산이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서거하기 전, 송경령은 그의 병상을 밤낮없이 지켰다. 손중산 서거 후, 송경령은 계속해서 손중산의 삼대정책을 지켜가고자 했으며, 손중산의 혁명원칙을 지키지 않는 새력과 부단히 투쟁하며, 공산당과 긴밀히 연합하여 북벌을 진행했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1927년 상반기, 국민당 내 우파세력은 쑨원의 혁명원칙을 배반하고 3대정책에 반대하며, 그 해 4월 12일 공산당원과 애국진보인사를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에 송경령은 매우 분개하며 결연히《为抗议违反孙中山革命原则和政策的声明(손중산의 혁명원칙과 정책에 반하는 세력에게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이런 국민당에 결별과 잠정적 은퇴를 선언하였다.
1927년 9월 송경령은 모스크바에서 ‘중국 목전의 형세’, ‘부녀와 혁명’,’청년과 혁명’등을 발표하면서 쑨원의 ‘3대정책’을 강조했다. 1928년 독일에서 국제반제대동맹(国际反帝大同盟)을 설립한 뒤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마침내 1932년 12월 18일 상하이에서 채원배, 루쉰, 양행보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을 조직하고 송경령은 주석에 취임한다.
1936년 12월 서안사변이 일어났을 때, 송경령은 내전정지, 항일행동을 조건으로 장제스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제2 차 국공합작으로 통일항일전선이 선포되었다. 1938년 송경령은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保卫中国同盟)’을 설립했으며 항일구국활동을 위해 활동했다. 1939년 3월 8일 홍콩 국제 여성의 날, 중국의 해방뿐 아니라 전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유격대전사들에게 의약품과 생필품에 대한 원조를 호소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면서 여성들도 참가하여 권리를 쟁취할 것을 말했다.
1946년, 항일전쟁 승리 후, 보위중국동맹을 중국복리기금회(中国福利基金会)로 명칭을 바꾼 뒤,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위생과 문화교육, 사회복지 기금 사업에 주력했다. 송경령이 국민당의 심장부인 총칭에 있었을 당시 국민당은 내전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각종 물자를 모아 공산당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