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5번째 줄: | 15번째 줄: | ||
== 제나라 == | == 제나라 == | ||
− | 송을 정복하고 제나라를 세운 소도성은 | + | 송을 정복하고 제나라를 세운 소도성은 3년만에 사망하고, 큰 아들 무제가 왕위에 올랐다. 무제는 유송 효무제 이래 심각해진 폐정을 시정하는데 주력했는데, 그를 위해 먼저 조조체납이 심각하게 발생한 원인인 대사의 파견을 중지했다. 또한 유송 말기부터 일어난 호적 위조가 제초 이래 국가 재정의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면서, 그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조 문벌사회에서는 사(士)와 서(庶)의 구별이 엄격했으며, 사류에게는 취관과 요역, 병역이 면제되는 특권이 주어졌다. 호적의 위조는 송 원가 말에 북조를 정벌하기 위한 전쟁, 그리고 북위가 남조를 침략하러 온 전쟁에서 군역에 징발되지 않기 위해 호적에서 사류로 편입하는데서 시작했다. 사류의 확대는 곧 국가 부역 대상의 축소를 뜻하고 국가 재정 수입에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이는 국가 재정면에서나 사회면에서 큰 정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송·제 시기의 부유한 강남 토착민이 그 경제력이나 사회적 역량으로 관리를 매수하여 사류로 편입했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곧 송·제 시기 한문 한인의 경제,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정치적 입장에서 큰 피해를 끼치고 있던 호적위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나라는 엄격한 호적 검사를 시행했지만, 당우지(唐寓之)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호적 검사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또 난의 재발을 두려워하여 흐지부지 되면서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
+ | |||
+ | 송대에 이어 제나라 또한 문벌사회로서, 문벌귀족만이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남조 역대 왕조는 끊임없는 정권의 탈환과 황족 종친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정국이 항상 불안정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활동하는 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쳐 파멸하게되는 위험성이 컸다. 이러한 불안과 위기 속에서 일부 문벌귀족은 정치에 관심을 잃고 무기력한 남조 사대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실제 정무에서는 정치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반면 문벌체제에서 배척되고 소외받은 하급사류와 지방 호족은 귀족제의 폐쇄성을 뚫고 중앙관계 또는 문벌귀족 세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따라서 유송(劉宋) 이후로 황제들은 군주권을 강화하고자 문벌귀족은 명목적으로만 고위직에 취임시키고, 국가의ㅏ 중추적 실권은 한인에게 위임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제무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도 송의 원가의 치를 표방해 문벌귀족을 등용했지만, 사실상 그 실권은 한인에게 있었다. 그러한 현상은 점점 심해져 한인들이 국가의 군정까지도 좌우하게 되는 실정이 다다르게 되었다. |
2016년 5월 11일 (수) 02:24 판
남조의 시작, 송
(1) 송 무제
동진사회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막을 내리자 군인 출신이었던 유유는 무력을 기반으로 자신이 황제가 되어 송을 건국한다. 이렇게 하여 북의 북위와 남의 송이 서로 대치하는 남북조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송 무제 유유는 중앙 재정을 확립하고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먼저 유유는 북쪽에서 남하한 유우민들을 포함하여 모든 주민을 현재 거주하는 지역의 호적에 등록시키는 토단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동진 시대에 호적의 문란과 불공평한 세역의 폐단이 국가 재정과 정치,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로써 왕조의 세수가 증가하고 북쪽에서 온 유우민도 강남의 주민이 되는 결과를 가져와 중앙권력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 시행이 철저하지는 못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유유는 또한 군부의 지배권을 귀족의 손에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황족이나 무인들에게 옮겨, 결과적으로 귀족이 군사 지배권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2) 송 문제, 원가의 치를 이루다.
송무제 유유가 창업 3년만에 죽고, 송 문제 유의융이 집권했다. 송 문제 집권 당시, 문벌 출신들의 귀족이 주요 직에 진출하면서 귀족 우위의 정치적 안정기가 이루어지고, 그 문치의 기풍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원가의 치'라고 부른다. 문제는 귀족 문화를 옹호하고 문벌귀족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실무형 한문 출신의 능리적 인물을 등용하고 황족을 통해 지방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지속했다. 하지만 북위가 강성한 세력을 바탕으로 화북지역의 통일을 이룩하고있을 때, 문제가 북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북벌군은 도처에서 패배하고 오히려 북위의 태무제는 남하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이 때부터 문제가 이룩했던 원가의 정치는 점점 기울어지게 되었다.
(3) 송의 쇠퇴
송 문제가 북벌의 실패 등으로 힘을 잃고 황태자 유소의 의해 살해되자, 유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문제의 셋째 아들 유준인 효문제가 즉위한다. 효문제는 황제 중심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급진적인 중앙집권 정책을 펼쳤다. 또한 재고라는 황제의 사적 금고를 만들어 특별과세를 하고 지방 장관의 헌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지방 장관들은 그 아래에 있는 농민들을 수탈하면서 백성들은 조세 이외의 부담이 심각해졌고, 생활이 피폐해졌으며 나아가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였다. 효문제에 이어 효무제가 즉위하여 사적 재정을 확보하면서 직접적으로 국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한 백성들에 대한 횡포는 사회의 반발을 일으켰다.
송 시대는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로, 한문 서민 출신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문벌귀족은 고위 고관을 차지하면서 정작 정치 실무에는 무관심했으며 황제권한 또한 제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문 한인 출신 관료들은 남조 문벌 체제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했으며 이 체제를 타파하기를 염원했다. 이 때 효무제의 셋째 아들인 유자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문벌귀족사회를 타파하려는 지방 호족들과 한인들이 참여했고, 이 반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반란은 명제 유욱에 의해 평정되었고, 그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효무제의 아들들을 모조리 살해했으며, 그 이후에도 수많은 귀족들과 정권을 잡은 황제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펼치면서 마지막 황제인 순제 때, 제나라의 소도성에 의해 송은 망하게 된다.
제나라
송을 정복하고 제나라를 세운 소도성은 3년만에 사망하고, 큰 아들 무제가 왕위에 올랐다. 무제는 유송 효무제 이래 심각해진 폐정을 시정하는데 주력했는데, 그를 위해 먼저 조조체납이 심각하게 발생한 원인인 대사의 파견을 중지했다. 또한 유송 말기부터 일어난 호적 위조가 제초 이래 국가 재정의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면서, 그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조 문벌사회에서는 사(士)와 서(庶)의 구별이 엄격했으며, 사류에게는 취관과 요역, 병역이 면제되는 특권이 주어졌다. 호적의 위조는 송 원가 말에 북조를 정벌하기 위한 전쟁, 그리고 북위가 남조를 침략하러 온 전쟁에서 군역에 징발되지 않기 위해 호적에서 사류로 편입하는데서 시작했다. 사류의 확대는 곧 국가 부역 대상의 축소를 뜻하고 국가 재정 수입에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이는 국가 재정면에서나 사회면에서 큰 정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송·제 시기의 부유한 강남 토착민이 그 경제력이나 사회적 역량으로 관리를 매수하여 사류로 편입했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곧 송·제 시기 한문 한인의 경제,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정치적 입장에서 큰 피해를 끼치고 있던 호적위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나라는 엄격한 호적 검사를 시행했지만, 당우지(唐寓之)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호적 검사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또 난의 재발을 두려워하여 흐지부지 되면서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송대에 이어 제나라 또한 문벌사회로서, 문벌귀족만이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남조 역대 왕조는 끊임없는 정권의 탈환과 황족 종친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정국이 항상 불안정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활동하는 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쳐 파멸하게되는 위험성이 컸다. 이러한 불안과 위기 속에서 일부 문벌귀족은 정치에 관심을 잃고 무기력한 남조 사대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실제 정무에서는 정치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반면 문벌체제에서 배척되고 소외받은 하급사류와 지방 호족은 귀족제의 폐쇄성을 뚫고 중앙관계 또는 문벌귀족 세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따라서 유송(劉宋) 이후로 황제들은 군주권을 강화하고자 문벌귀족은 명목적으로만 고위직에 취임시키고, 국가의ㅏ 중추적 실권은 한인에게 위임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제무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도 송의 원가의 치를 표방해 문벌귀족을 등용했지만, 사실상 그 실권은 한인에게 있었다. 그러한 현상은 점점 심해져 한인들이 국가의 군정까지도 좌우하게 되는 실정이 다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