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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 외척 가운데 왕봉(王鳳), 왕음(王音), 왕상(王祥), 왕근(王根)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왕근이 죽음에 임박하여 그 조카인 왕망을 추천하여 대신하게 하였다. 왕망은 검소하면서도 유학을 좋아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겸손하였기 때문에 존경과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는 애제가 즉위하면서 부태후와 의견이 맞지 않아 신도로 돌아갔다. 애제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부·정씨 두 태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태황태후 왕씨가 다시 궁정의 주인이 되어 평제가 즉위하였다. 이 때 왕망은 태부가 되어 안한공(安漢公)이라 불리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왕제는 평제 재위 때에 유가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선정을 베풀어 신임을 받았지만, 그는 야심을 키워 평제를 독살하고 어린 아들 영(嬰)을 즉위시킨 다음, 스스로 정사를 대행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가황제라 칭하고 관료와 백성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서기 8년에 왕망은 가황제에서 천명을 받아 진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다. 이로써 전한은 214년 만에 멸망하였다. | 왕씨 외척 가운데 왕봉(王鳳), 왕음(王音), 왕상(王祥), 왕근(王根)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왕근이 죽음에 임박하여 그 조카인 왕망을 추천하여 대신하게 하였다. 왕망은 검소하면서도 유학을 좋아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겸손하였기 때문에 존경과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는 애제가 즉위하면서 부태후와 의견이 맞지 않아 신도로 돌아갔다. 애제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부·정씨 두 태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태황태후 왕씨가 다시 궁정의 주인이 되어 평제가 즉위하였다. 이 때 왕망은 태부가 되어 안한공(安漢公)이라 불리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왕제는 평제 재위 때에 유가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선정을 베풀어 신임을 받았지만, 그는 야심을 키워 평제를 독살하고 어린 아들 영(嬰)을 즉위시킨 다음, 스스로 정사를 대행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가황제라 칭하고 관료와 백성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서기 8년에 왕망은 가황제에서 천명을 받아 진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다. 이로써 전한은 214년 만에 멸망하였다. | ||
2016년 5월 11일 (수) 22:14 판
목차
역사
신(新)
왕망의 등장과 신의 설립
왕씨 외척 가운데 왕봉(王鳳), 왕음(王音), 왕상(王祥), 왕근(王根)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왕근이 죽음에 임박하여 그 조카인 왕망을 추천하여 대신하게 하였다. 왕망은 검소하면서도 유학을 좋아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겸손하였기 때문에 존경과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는 애제가 즉위하면서 부태후와 의견이 맞지 않아 신도로 돌아갔다. 애제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부·정씨 두 태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태황태후 왕씨가 다시 궁정의 주인이 되어 평제가 즉위하였다. 이 때 왕망은 태부가 되어 안한공(安漢公)이라 불리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왕제는 평제 재위 때에 유가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선정을 베풀어 신임을 받았지만, 그는 야심을 키워 평제를 독살하고 어린 아들 영(嬰)을 즉위시킨 다음, 스스로 정사를 대행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가황제라 칭하고 관료와 백성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서기 8년에 왕망은 가황제에서 천명을 받아 진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다. 이로써 전한은 214년 만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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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
개요
한나라 원제 때의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중국의 ‘4대 미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원제의 궁녀로 있다가 후에 흉노의 선우였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 처가 된다.
이름은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이며, 훗날 태조 문황제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불리기도 했다.
생애(서경잡기를 중심으로)
왕소군은 양가자(良家子, 청빈한 농민 집안의 자제) 출신으로 16세의 나이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원제 때인 BC38년에 전국의 미녀를 선발하여 후궁으로 보충토록 명을 내렸기 때문에 아마 왕소군도 이 시기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궁녀가 많아 황제는 화공의 그림을 통해 궁녀들의 외모를 평가했다. 하지만 왕소군은 가난한 출신으로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고, 그녀의 얼굴은 못나게 그려져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후에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여 한나라의 미녀를 구해 그 비로 삼겠노라고 요구했고, 원제는 그림에 의거하여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소군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원제는 그녀의 미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며, 행동거지 또한 한아함을 알게 되었다. 원제는 후회스러웠지만 흉노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터라 다른 궁녀로 바꿀 수 없었다. 이에 그 일을 철저히 따져 화공들 모두 기시(죄인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형벌)에 처하고 화공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재산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그녀가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떨어지고,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호한야 선우의 처로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리텔링
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