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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 | + | 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br> |
+ | 위에 제시한 왕소군의 생애는 ‘한궁추’가 현재 세상에 알려진 왕소군의 이미지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텍스트이므로 ‘한궁추’에 그 바탕이 있다. 하지만 이는 리텔링된 것이고 문학 작품이라는 점에서 허구성이 있다.<br> | ||
+ |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에서 ‘한서’라고 할 수 있다. | ||
+ | 경녕(竟寧) 1년(33년) 선우는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물품]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비단,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하사하였다. 선우가 매우 기뻐하였다. (한서-「흉노전」)<br> | ||
+ | 앞서 말했듯이 정말 간결하다. 텍스트의 주체는 원제, 선우 두 명으로 왕소군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물론, 왕소군 그녀가 흉노로 감으로써 한과 흉노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이것은 그녀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br><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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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뒤의 -『후한서』는 그 양상이 상이하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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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소군은 자가 장으로 남군사람이다 이전 원제의 치세(BC 43-33)에 양가자로 선발되어 액정으로 들여졌다 당시 호한야선우가 내조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궁녀 다섯 명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황제를 보지 | ||
+ | 못하여 슬픔과 원망에 싸여 이에 액정령(직책)에게 흉노로 가고 싶다고 청구하였다. 호 | ||
+ | 한야선우가 큰 연회에 참석하여 연회를 마치고 떠날 즈음 황제는 다섯 여인을 | ||
+ | 불러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왕소군은 풍려한 외모에다가 단장을 하고, 치장을 하니 한 | ||
+ | 궁에서도 빛나게 돋보였고 그녀가 뒤돌아볼 때는 옷이 치렁치렁하게 돌아가는 | ||
+ | 광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움직일 정도였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서 | ||
+ | 크게 놀라서 속으로는 그녀를 궁중에 남겨두고 싶었으나 신뢰를 잃을까 걱정하여 | ||
+ | 마침내 그녀를 흉노에게 주었다. (後漢書-「南匈奴列傳」)<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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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면, 『후한서』에는 왕소군이 주체가 되며, 그녀의 의지로 흉노에 간 것으로 제시된다. 이는 ‘양가자(良家子,’라는 어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양가자’는 ‘청빈한 농민 집안의 자제’라는 뜻으로 왕소군이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역사서인 『후한서』는 평민이라는 지위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여성의 지위는 높아졌으나, 아직도 왕소군이라는 여성이 한과 흉노 사이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여성학적으로 높게 평가될 변화는 아니다. 그리고 따라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서』, 『후한서』 와 같은 문학 작품이 아닌 역사서들이 그 내용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한서』가 후한 시대에 쓰였고, 『후한서』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송(宋)에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 ||
+ | 두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혹은 사(史)관의 개인적 의견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br><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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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은 문학작품에서의 ‘리텔링’이다. 왕소군에 대한 초기의 문학은 『서경잡기([西京雜記])』로 추정된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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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소군은 16세의 나이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원제 때인 BC38년에 전국의 미녀를 선발하여 후궁으로 보충토록 명을 내렸기 때문에 아마 왕소군도 이 시기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궁녀가 많아 황제는 화공의 그림을 통해 궁녀들의 외모를 평가했다. 하지만 왕소군은 가난한 출신으로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고, 그녀의 얼굴은 못나게 그려져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후에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여 한나라의 미녀를 구해 그 비로 삼겠노라고 요구했고, 원제는 그림(그림을 그린 화공은 모연수라는 설이 있다.)에 의거하여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소군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원제는 그녀의 미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며, 행동거지 또한 한아함을 알게 되었다. 원제는 후회스러웠지만 흉노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터라 다른 궁녀로 바꿀 수 없었다. 이에 그 일을 철저히 따져 화공들 모두 기시(죄인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형벌)에 처하고 화공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재산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그녀가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떨어지고,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호한야 선우의 처로서 살았다고 한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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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위의 한서, 후한서와 다른 점은 화공이라는 관료층이 등장하고, 왕소군(평민층)이 보다 주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나라 사회의 계층 간 장벽이 두껍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료층인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평민)은 평민층에게 희열의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유학자인 유흠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직 종의의 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저자인 유흠이 대중성을 위해 『서경잡기([西京雜記])』를 지었다고 추측할 수 없다. | ||
+ | 반대로 이는 당시의 지식인·지배층을 위한 문학으로 보이는데, 흉노에 대한 한의 거부 이데올로기라 볼 수 있다.(이민족은 한나라 이전의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부터 거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왕소군이라는 평민 출신의 여성은 흉노에 대한 거부감을 은연중에 내포하기 위해 나약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또한 유교 프레임에 맞게 뇌물을 받은 관료를 ‘악’으로 지정하며, 그에 대한 명군(원제) 의 처벌을 정당화한다.<br><br> |
2016년 5월 12일 (목) 00:43 판
목차
역사
통치체제
통치사상
황로사상
국가유교
군현제
- 한 고조는 건국 초기 수도인 장안과 그 근기 지방에 대해서는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관동 지역에는 제후를 분봉하는 군현제와 봉건제의 혼합 형태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제후들은 통치 지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관리하였으며 한의 율령에도 예속되지 않았다. 초기 한 왕실이 직접 장악한 군은 서부지역의 15개 군이었고, 관동 지역에 10개의 세습 왕국이 존재하였다.
-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향한 황제의 야욕은 분명했으며, 정국이 안정되자 반란의 혐의를 씌워 이성제후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제후의 자리는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는데, 고조 말기 제후국 장사국 하나만이 유일한 이성 제후로 남아있었다.
- 경제 때 조조는 경제와 함께 삭번책을 추진한다. 삭번책이란 동성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영지 삭감책으로, 이것은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된 제후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오초칠국의 난을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 왕실과 다른 제후국들의 도움으로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그 후 제후왕의 지위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 경제의 뒤를 이은 한 무제는 추은령(推恩令)을 실시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제후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시작하였다. 기존에는 제후가 죽으면 적장자가 그 자리를 계승했는데, 추은령 반포 후 적장자 외의 아들들도 토지를 물려받고 제후가 되었다. 이는 결국 기존 봉건국의 세력이 쪼개어지면서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제후들이 종묘 제사에 바치는 황금의 양이 부족하거나 기준에 미달하면 작위를 거두는 등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켰다. 제후가 기존의 정치 권력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자 漢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갔다.
사회제도
조세수입 확보수단
한 무제는 즉위 후 흉노족에 대해 기존의 화친 노선을 버리고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흉노와의 전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며, 문제와 경제 때 이루어 놓은 막대한 국부가 점차 소진되어갔다. 이에 문제는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각종 정책을 실시하였다. 주요한 정책으로 소금과 철의 전매와 평준균수법이 있다.
소금 전매
인간 생존의 필수품이자 식품보관 및 조미료로 활용되는 소금을 국가에서 판매를 독점하였다. 전국에 36곳의 염관을 설치하고 소금의 생산, 운송, 판매의 각 단계에서 세금을 징수하였다.
철의 전매
한 대에 들어서는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농기구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철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민중들에게 철제농기구는 필수품이었는데, 국가에서는 48곳의 철관을 설치해 철의 생산과 운송, 판매를 독점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평준균수법
재정 확충을 위해 한 무제는 평준법과 균수법을 시행하였다. 평준법은 상품의 가격이 저렴할 때 매입하여 가격이 오르면 내다팔아 그 차익으로 재정을 확충하는 정책이고, 균수법은 각 지방의 산물들을 조세로 징수하고 이를 다른 지방에 판매함으로써 재정을 확충하려한 정책이다.
외교
흉노와의 외교정책
실크로드
사회
문화
왕소군
개요
한나라 원제 때의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중국의 ‘4대 미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원제의 궁녀로 있다가 후에 흉노의 선우였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 처가 된다.
이름은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이며, 훗날 태조 문황제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불리기도 했다.
생애(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한궁추의 내용을 중심으로)
생애 (가장 대중적인 한궁추를 중심으로) 한 원제는 모연수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모집한다. 왕소군이 궁녀로 발탁되었으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내내 냉궁에 있다가 우연히 원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하라고 명한다. 모연수가 흉노에 투항하여 왕소군의 미인도를 선우에게 바치자 선우는 왕소군을 요구하며 화친을 제안한다. 원제는 전쟁을 불사하지만 신하들이 화친을 주장하여, 결국 왕소군은 흉노 땅에 보내진다. 원제와 이별한 왕소군은 원제를 위해 술을 뿌리고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호한야선우는 충절에 감동하여 장례를 치를 후 모연수를 한나라로 보내고, 원제가 끝내 그를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리텔링
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
위에 제시한 왕소군의 생애는 ‘한궁추’가 현재 세상에 알려진 왕소군의 이미지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텍스트이므로 ‘한궁추’에 그 바탕이 있다. 하지만 이는 리텔링된 것이고 문학 작품이라는 점에서 허구성이 있다.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에서 ‘한서’라고 할 수 있다.
경녕(竟寧) 1년(33년) 선우는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물품]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비단,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하사하였다. 선우가 매우 기뻐하였다. (한서-「흉노전」)
앞서 말했듯이 정말 간결하다. 텍스트의 주체는 원제, 선우 두 명으로 왕소군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물론, 왕소군 그녀가 흉노로 감으로써 한과 흉노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이것은 그녀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뒤의 -『후한서』는 그 양상이 상이하다.
왕소군은 자가 장으로 남군사람이다 이전 원제의 치세(BC 43-33)에 양가자로 선발되어 액정으로 들여졌다 당시 호한야선우가 내조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궁녀 다섯 명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황제를 보지 못하여 슬픔과 원망에 싸여 이에 액정령(직책)에게 흉노로 가고 싶다고 청구하였다. 호 한야선우가 큰 연회에 참석하여 연회를 마치고 떠날 즈음 황제는 다섯 여인을
불러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왕소군은 풍려한 외모에다가 단장을 하고, 치장을 하니 한
궁에서도 빛나게 돋보였고 그녀가 뒤돌아볼 때는 옷이 치렁치렁하게 돌아가는
광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움직일 정도였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서
크게 놀라서 속으로는 그녀를 궁중에 남겨두고 싶었으나 신뢰를 잃을까 걱정하여
마침내 그녀를 흉노에게 주었다. (後漢書-「南匈奴列傳」)
반면, 『후한서』에는 왕소군이 주체가 되며, 그녀의 의지로 흉노에 간 것으로 제시된다. 이는 ‘양가자(良家子,’라는 어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양가자’는 ‘청빈한 농민 집안의 자제’라는 뜻으로 왕소군이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역사서인 『후한서』는 평민이라는 지위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여성의 지위는 높아졌으나, 아직도 왕소군이라는 여성이 한과 흉노 사이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여성학적으로 높게 평가될 변화는 아니다. 그리고 따라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서』, 『후한서』 와 같은 문학 작품이 아닌 역사서들이 그 내용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한서』가 후한 시대에 쓰였고, 『후한서』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송(宋)에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혹은 사(史)관의 개인적 의견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음은 문학작품에서의 ‘리텔링’이다. 왕소군에 대한 초기의 문학은 『서경잡기([西京雜記])』로 추정된다.
왕소군은 16세의 나이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원제 때인 BC38년에 전국의 미녀를 선발하여 후궁으로 보충토록 명을 내렸기 때문에 아마 왕소군도 이 시기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궁녀가 많아 황제는 화공의 그림을 통해 궁녀들의 외모를 평가했다. 하지만 왕소군은 가난한 출신으로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고, 그녀의 얼굴은 못나게 그려져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후에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여 한나라의 미녀를 구해 그 비로 삼겠노라고 요구했고, 원제는 그림(그림을 그린 화공은 모연수라는 설이 있다.)에 의거하여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소군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원제는 그녀의 미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며, 행동거지 또한 한아함을 알게 되었다. 원제는 후회스러웠지만 흉노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터라 다른 궁녀로 바꿀 수 없었다. 이에 그 일을 철저히 따져 화공들 모두 기시(죄인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형벌)에 처하고 화공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재산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그녀가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떨어지고,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호한야 선우의 처로서 살았다고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위의 한서, 후한서와 다른 점은 화공이라는 관료층이 등장하고, 왕소군(평민층)이 보다 주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나라 사회의 계층 간 장벽이 두껍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료층인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평민)은 평민층에게 희열의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유학자인 유흠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직 종의의 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저자인 유흠이 대중성을 위해 『서경잡기([西京雜記])』를 지었다고 추측할 수 없다. 반대로 이는 당시의 지식인·지배층을 위한 문학으로 보이는데, 흉노에 대한 한의 거부 이데올로기라 볼 수 있다.(이민족은 한나라 이전의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부터 거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왕소군이라는 평민 출신의 여성은 흉노에 대한 거부감을 은연중에 내포하기 위해 나약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또한 유교 프레임에 맞게 뇌물을 받은 관료를 ‘악’으로 지정하며, 그에 대한 명군(원제) 의 처벌을 정당화한다.